김관주

 


'''김관주'''
金觀柱

'''본관'''
경주 김씨
'''출생'''
1743년
한성부
'''사망'''
1806년 9월 2일 (향년 80세)
충청도 청주시#역사
'''자'''
경일(景日)
'''호'''
수암(遂菴), 한수재(寒水齋)
'''시호'''
문익(文翼)
'''가족관계'''
아버지 김한록, 아들 김노정
'''붕당'''
(남당, 청명당)
'''붕당'''
우의정
1. 개요
2. 생애
3. 가족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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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조 말년부터 순조 초기까지 청명당, 벽파의 일원으로써 국정을 이끌어갔다.

2. 생애


김운경의 손자, 김한록의 아들로 김한구는 그의 5촌 숙부이고, 정순왕후 김씨와 김귀주는 그의 6촌 사이다. 영조 41년인 1765년 문과 급제했다.
여러 벼슬 중 요직인 사간원 정언(正言), 홍문관 교리도 지냈다. 노론의 중진으로써 1772년 홍문관 수찬 재직 중 친시파 성향을 가진 홍봉한을 탄핵하였으나, 이미 영조는 김귀주 등이 추천한 인사와 측근들은 갈아엎는 등, 홍봉한의 반격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상소의 세가지 포인트는 질 낮은 삼을 왕에게 쓴 것, 왕의 다리 병 투병 중 송다 사용 거부, 당시 동궁으로 불린 정조를 협박했다는 것이였다. 결국, 대세를 뒤엎지 못하고 갑산에 유배되었다.
정조 17년인 1793년 현 예천군인 용궁 현감(龍宮 縣監)으로 복직했다. 지방을 돌고 중앙에서도 한직을 전전하다 순조 즉위 후 벽파의 득세가 시작되며 중추부첨지사를 거쳐 예조 판서로 승진했다. 시파 김조순의 딸과 순조의 혼인에 반대하기도 했다. 이조판서, 양주목사에서 1802년 우의정에 임명됐다. 1803년 수렴청정을 거두려고 하자, 좌의정 이시수와 반대하다 탄핵을 받고 파직당했다.
복권은 되었지만, 1804년 정순왕후가 다시 수렴을 치려 할 때 이시수가 간곡히 반대해 찬성할 수 없었다. 정순왕후의 사후 1805년 시파가 집권하면서 국혼 방해를 이유로 또 탄핵을 받고 경흥으로 유배가고 있었으나, 귀양길에 이원군에서 병사하였다. 사후에는 복권되었다.

3. 가족관계


  • 조부 : 김운경(金運慶)
    • 부 : 김한록(金漢祿)
    • 부인 : 기계 유씨(杞溪 兪氏)
      • 장남 : 김노정(金魯鼎) [1]
      • 며느리 : 이규진(李奎鎭)의 딸

[1] 김상주(金象柱)의 양자로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