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렴청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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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위치는 실제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대왕대비가 중앙에 위치한 시기는 명종 대이고, 왕은 서쪽에 있었다. 왕이 중앙에 있던 시기는 「수렴청정절목」이 제정된 순조 대이고, 대왕대비는 동쪽에 위치했다.
垂簾聽政
군주가 너무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아직 정치를 하기 어렵다고 판단되는 경우 태황태후와 같은 왕실의 최고 어른이 대신 신하들과 정치를 하는 일종의 섭정제도이다.
수렴청정이라 하여 대비가 정치 전면에 나선 것이 아니라 특정 날짜에 동행하며 조언하거나 반문하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섭정과의 차이점은 그 명분이다. 섭정은 어린 왕의 어머니로서 아들을 대신하여 정치하며 보호한다는 명목인데 반해 수렴청정은 선대 왕의 왕비로서 함께 국가를 운영했던 공을 인정받아 어린 왕의 정치를 돕는 것이다.혹은 명분으로 차이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주체로 보기도 한다. (엄밀히 말해 수렴을 치지 않고 대비가 청정하는 것도 포함시켜 수렴청정이라 합쳐 말하기도 하지만.)
게다가 수렴청정은 조선 정치에서 관련 조항 아래에 공적인 제도로서 작동하여, 공적으로 권위있는 왕실의 최고 어른(주로 대왕대비)이 국정을 분담하는 형식이었다. 모후가 사적인 관계로 아들을 보호하는 비상(非常)적인 섭정과 크게 차이가 난다. 그래서 수렴청정은 실제로 왕과 혈통으로 연관이 되어 있지 않아도 공적인 제도로서 작동했지만, 섭정은 왕이 태후의 친자식이 아니면 관료들이 이를 인정하지 않거나 관료의 동의가 필수적인 조건이었다.[1]
수렴청정은 왕실 최고 어른이 권위를 내세워 수렴을 쳐서 하는 것이라면, 섭정은 유교의 범위에 해당되지 않아 남녀유별의 영향을 받지 않는 범위에서 여성의 정치 주도 혹은 왕의 친척 중 가장 유력한 자 또는 신하 중에서 왕을 대신해 정치를 하는 것이다.
공식 명칭만 없었을 뿐이지 수렴청정 형태의 정치체제는 고대부터 동서양 여러 문화권에서 존재했다. 군주가 어린 나이에 즉위하는 경우는 고대에도 무수히 많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고대 이집트의 투트모세 3세와 아시리아의 아다드 니라리 3세가 어린 나이에 즉위하자 각각 하트셉수트, 세미라미스가 우리가 아는 수렴청정 비스므리하게 어린 군주를 대신하여 국정을 이끌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수렴청정을 먼저 한 여인은 한고제 유방의 부인인 여후다. 한나라 때 쓰던 명칭은 임조칭제(臨朝稱制)로 조회에 임석하고 황제의 명령과 같이 황태후의 명령을 '제(制)'라고 칭한다는 의미다.
그리고 왕대비의 섭정이 시작될 때를 수렴청정, 끝날 때를 철렴환정이라고 한다.
수렴청정은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군주가 나이가 어리거나 여러 이유로 정상적인 통치가 불가능 할 때, 왕의 어머니 등 직계 존속의 여성이 대리로 통치를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 여성 대리인은 '''군주의 뒤에서 발을 내리고'''(垂簾[수렴]) 신하들의 의견을 듣고 그에 대한 하교를 내렸고(聽政[청정])) 수렴청정도 여기서 이름을 따왔다. 다만 실제로 발을 내리고 뒤에서 하교하는 것은 중대한 사안일 경우에 한하였고, 대부분의 사안은 신하들이 나서서 왕과 논의해 결정하거나 대비전과 정전(正殿)을 오가며 하인이나 문서를 통해 정치를 했다.[2]
수렴청정은 일반적으로 왕이 스스로 정치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고 판단하면 왕이 직접 통치하도록 하고 거두는 것이 보통이었다. 다만 수렴청정을 그만두는 기준이 딱히 정해졌던 것은 아니라, 세조의 비 정희왕후 윤씨가 성종이 20세가 되자 수렴청정을 거두면서, '''왕이 성인이 되면 수렴청정을 그만둔다'''는 선례로 남게 되었다.[3] '''정희왕후가 첫 스타트를 잘 끊으면서,''' 이후 다른 대비들도 오랫동안 수렴청정을 하지 못했다.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 윤씨도 명종이 20세가 되자 수렴청정을 거두었다.물론 정사나 야사를 보면 죽을 때까지 권력을 놓기는 싫었지만 공식적으로 명종이 성인이 된 후에 직접적으로 태클을 걸지는 않았다.오히려 명종이 윤원형의 권력을 야금야금 축소시키는 것을 방관하기만 했었다.
문제는 조선 19세기 세도정치에 들어서면서 수렴청정의 의미가 변질되어 대비의 친척들이 권력을 휘어잡는 꼴이 되고 말았다는 거다. '''정확하게는 대비의 뜻과는 달리 주변 사람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해먹었다는 것'''. 순조 때 정순왕후가 그나마 공정하게 했지만 막판 순조가 성인이 됐는데도 수렴청정을 다시 하려 했던 시도 때문에 평가가 깎였고 순원왕후는 의도는 좋았지만 결과만 보면 세도 정치를 심화시켰다.신정왕후 조씨는 명목상 고종 대 최고어른이었지만 사실상 흥선대원군이 주도적으로 정무를 처리했다.
한국 역사에서는 왕비의 지위를 중시해서 현재 군주의 생모라 해도 후궁에게는 후에 왕비가 되지 않는 한 수렴청정을 할 자격을 주지 않았다. 수렴의 경우 보통 왕실의 최고 어른에게 주었다.[4] 또한 조선에서는 수렴청정의 조건, 기준, 절차, 격식 등을 공적 제도로 엄격히 규제하였고, 순조 대에는 「수렴청정절목」으로 수렴청정의 제도를 완비하였다. 그래서 이전 시대 또는 동시대 타국가와 달리 조선의 수렴청정은 엄격한 공적인 정치제도 하에서 운영되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우리나라 기록에서의 수렴청정에 대한 첫 기록은 고구려 태조왕이 7세에 즉위하자 부여태후가 수렴청정 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최초의 기록이며, 그 외에도 신라 진흥왕이 7세[5] 에 즉위하여 지소태후가 섭정하였다는 기록이 있다.[6] 중세인 고려시대에는 드라마로 유명해진 천추태후가 아들 목종(고려) 대신 섭정으로서 전권을 휘둘렀다.
조선시대에는 성종(정희왕후), 명종(문정왕후), 선조(인순왕후), 순조(정순왕후), 헌종(순원왕후), 철종(순원왕후), 고종(신정왕후 조씨) '''총 7명의 왕이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수렴청정을 받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참고로 단종은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지만, 이때 어머니(현덕왕후 권씨)와 할머니(소헌왕후 심씨) 모두 예전에 사망했기 때문에 '''수렴청정을 해줄 어머니도 할머니도 없었다.''' 단종은 실질적으로 서조모인 혜빈 양씨가 양육했지만, 그녀는 어디까지나 후궁이었기 때문에 섭정 자격이 없었다. 이 때문에 세종대왕과 문종의 명을 받은 고명대신들이 사실상 섭정을 했다.
단종의 말로가 비참했다는 점에서 단종이 즉위한 뒤에 새로 왕비를 맞아들였거나, 할머니 소헌왕후나 어머니 현덕왕후가 살아 있었으면 수렴청정을 할 어른이 있었기에 단종의 비극은 없었을 것이란 주장도 있다. 만약 소헌왕후 심씨가 대왕대비로서 수렴청정을 했다면, 세조는 어머니에게 매우 극진했기 때문에 스스로 왕이 되려고 하진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설령 극진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어머니가 섭정하고 있는 상황에서 단종에게 칼을 겨누는 건 곧 자기 엄마에게 겨누는 것과 같아져서 수양대군=불효자로 낙인찍힐 수 있는데,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 불효자 딱지는 아주 치명타이다. 건국과정에서의 기여분, 쿠데타의 전후사정 참작 등의 명분이 세조보다 더 있으면 있었지 덜하지는 않았던 태종이 아버지인 태조에게 용서를 구한 것도 불효자 딱지를 떼기 위해서였다.[7]
단종의 예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후로 조선의 왕들은 정비가 자기보다 먼저 죽으면 자기 나이가 많든 적든, 정식 후계가 있든 없든, 후궁이 몇 명이든 '''무조건 재혼해서 계비를 맞아들였다.''' 선조는 51세 때 19세의 인목왕후와 재혼했고, 인조가 44세 때 15세의 장렬왕후와 재혼했고, 영조가 66세 때 15세의 정순왕후 김씨와 재혼한 게 대표적인 예다.
세종대왕과 문종처럼 정실 왕비가 죽은 후에도 후계가 있다는 이유로 재혼하지 않았다가 왕실에 수렴청정을 할 여자 어른이 없어지는 상황을 막으려는 노력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것은 국모이자 내명부의 수장 자리를 장기간 비워서는 안된다는 현실적 이유가 있었으므로, 반드시 이러한 이유에서라고는 볼 수 없다.
수렴청정으로 가장 큰 권세를 휘두른 사람은 '''문정왕후'''였고,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도 정국을 이끈 여걸이다.[8] 세조의 아내 '''정희왕후'''도 이런 여걸에 넣기도 하는데,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엔 사실 성종의 어머니인 '''소혜왕후'''의 영향이 컸다는 말이 있다.[9] 순원왕후나 '''신정왕후 조씨'''도 수렴청정기에 정국에 상당한 영향력을 끼쳤다고 평가받는다.[10] 다만 인순왕후는 그냥 선조의 후견인 수준이었고 수렴의 기간도 7개월로 짧았다.
수렴청정은 대개 왕이 15세 될 때까지 했다.[11]
수렴청정을 한 역대 태황태후들은 다음과 같다.
정희왕후 - 예종(?)[12] , 성종 7년
문정왕후 - 명종 8년
인순왕후 - 선조 7개월
정순왕후 - 순조 5년
순원왕후 - 헌종 7년, 철종 2년
신정왕후 조씨 - 고종 3년
숙종의 경우에는 불과 14세에 즉위해서 어머니 명성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할 법했지만, 워낙 강성인 그는 수렴청정도 거부하고 바로 친정에 들어갔다.[13] 최고령 수렴으론 19세의 예종은 실질적으로 수렴을 안한 것이니 19세의 철종이 2년간 순원왕후의 수렴을 받은 것이 최고령 수렴이라 하겠다. 다만 이는 철종은 나이는 많아도 왕으로서의 아무런 교육을 받지 못한, 평민과 다름이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일이다.
가장 오래 수렴을 한 대비는 2차례에 걸쳐 근 10년간 수렴한 순원왕후다.[14] 신정왕후 조씨는 야사의 영향으로 흥선대원군에 놀아난 허수아비 정도로 평가되었으나, 실록을 보면 조정에 여전히 목소리를 내는 기록이 많이 보이고 대원군의 개혁에도 적극 참여했다[15] . 인순왕후는 16세의 선조를 위해 그야말로 형식적으로 잠깐 수렴을 쳤다.[16] 정순왕후는 2차 수렴을 시도하려 했다가 이시수의 논리적 반대에 밀려 그만둔 바가 있다.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조선의 왕비와 후궁을 주제로 학술 세미나를 한 적이 있는데 수렴청정도 다뤘다. 링크
대표적으로 카트린느 드 메디시스와 프랑스의 이사벨라[17] 가 있다. 다만 군주가 어릴 경우 대부분 태후(대비)가 수렴청정을 한 한국, 중국과는 달리 서양에서는 군주의 모후가 아니라도 힘 좀 있고 권력욕 있는 왕가의 종친이나 귀족이 섭정이 되는 경우도 많았다. 서양의 경우 외국 왕실에서 왕비를 맞아들이는 경우가 많았기에, 군주의 외가인 외국의 영향력이 강해지는 것을 경계했기 때문.
중국에서 수렴청정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한나라의 '''여후'''와 청나라의 '''서태후'''다.원래 수렴청정 자체가 '''중국의 제도'''다.
중국의 경우 상대적으로 조선보다는 적서 차별을 덜 엄격하게 했기 때문인지, 선황의 '''후궁이라도''' 자신의 아들이 황제에 오르면 태후가 되어 황후로서의 시호를 받고 '''수렴청정을 할 자격이 주어진다.''' 정실 황후 출신의 태후가 살아 있다면 원칙적으로 후궁 출신의 태후는 그보다 수렴청정을 할 권한이 약하지만, 자격이 아주 없었던 건 아니라는 이야기다. 서태후가 바로 이런 유형이었다. 서태후는 본래 함풍제의 후궁이었고, 함풍제의 정실 황후는 효정현황후였다. 그러나 함풍제가 죽은 뒤 승계한 동치제는 바로 서태후의 친아들이어서 효정현황후와의 공동 섭정이 가능하였던 것. 이후 광서제와 서태후가 죽고 겨우 3세에 즉위한 선통제는 융유태후와 생부 감국섭정왕 재풍의 공동 섭정을 받았다. 다시 말해서 '''수렴 제도는 중국 봉건 황조 붕괴 직전까지 이어졌다는 뜻.'''
수렴청정이 황권 약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은만큼, 이를 방지하려는 황제들도 있었다. 한무제는 본인이 어린 시절 할머니 태황태후 두씨와 어머니 황태후 왕씨의 그늘 밑에서 살았던 트라우마 때문에 임종 때에 황태자 유불릉의 생모인 구익부인에게 죽음을 내린다. 그리고 이후 북위 시대에는 태자의 생모에게 죽음을 내리는 자귀모사(子貴母死)제도로 아예 자리잡아버렸다. 하지만 이러한 제도에도 빈틈이 있었는데, 죽임을 당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태자의 생모였기 때문에 문성제의 황후였던 풍씨는 태자의 어머니가 죽임을 당한 뒤, 태자의 양모가 되어주는 방식으로 죽음도 피하고, 양모의 자격으로 수렴청정을 하기도 하였다.
고대 일본에서 여성이 최고 집권자가 되는 일은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기에 대부분이 차기 유력황족에게 권력을 넘겨주기 위한 목적으로 임시로 맡는 역할로 천황이 되는 경우가 잦았다. 그래서인지 여성 천황이 '''가까운 친척에게''' 실권을 주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스이코 덴노 치세 때의 쇼토쿠 태자가 대표적인 사례다. 이와 별개로, 헤이안 시대 때 인세이라는 독특한 섭정 체제가 만들어졌다. 막부 등장 이후에도 여성 천황이 한번 등장했지만 실질적으로 인세이 등장 시기에 사문화되었다고 보는 편이 옳다. 막부의 경우 차기 쇼군의 나이가 어리거나 할 경우에는 가신이나 다이묘 중 유력한 인사가 섭정을 시행했다.
하지만, 막부 등장 이후 유명무실해진 황실과는 달리, 쇼군가에서는 수렴청정이 공공연히 이루어졌다. 이는 가마쿠라 막부 의 호조 마사코로부터 시작되어, 에도 막부 시대에는 쇼군의 생모와 그녀가 주도하는 오오쿠가 실권을 잡아 막부를 좌지우지하는 일이 자주 일어났고, 후기로 갈수록 수준미달의 쇼군들이 이어지면서 아예 말기에는 오오쿠가 나라를 다스리다시피한 일이 많았다.
이 위치는 실제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대왕대비가 중앙에 위치한 시기는 명종 대이고, 왕은 서쪽에 있었다. 왕이 중앙에 있던 시기는 「수렴청정절목」이 제정된 순조 대이고, 대왕대비는 동쪽에 위치했다.
垂簾聽政
1. 개요
군주가 너무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아직 정치를 하기 어렵다고 판단되는 경우 태황태후와 같은 왕실의 최고 어른이 대신 신하들과 정치를 하는 일종의 섭정제도이다.
수렴청정이라 하여 대비가 정치 전면에 나선 것이 아니라 특정 날짜에 동행하며 조언하거나 반문하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섭정과의 차이점은 그 명분이다. 섭정은 어린 왕의 어머니로서 아들을 대신하여 정치하며 보호한다는 명목인데 반해 수렴청정은 선대 왕의 왕비로서 함께 국가를 운영했던 공을 인정받아 어린 왕의 정치를 돕는 것이다.혹은 명분으로 차이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주체로 보기도 한다. (엄밀히 말해 수렴을 치지 않고 대비가 청정하는 것도 포함시켜 수렴청정이라 합쳐 말하기도 하지만.)
게다가 수렴청정은 조선 정치에서 관련 조항 아래에 공적인 제도로서 작동하여, 공적으로 권위있는 왕실의 최고 어른(주로 대왕대비)이 국정을 분담하는 형식이었다. 모후가 사적인 관계로 아들을 보호하는 비상(非常)적인 섭정과 크게 차이가 난다. 그래서 수렴청정은 실제로 왕과 혈통으로 연관이 되어 있지 않아도 공적인 제도로서 작동했지만, 섭정은 왕이 태후의 친자식이 아니면 관료들이 이를 인정하지 않거나 관료의 동의가 필수적인 조건이었다.[1]
수렴청정은 왕실 최고 어른이 권위를 내세워 수렴을 쳐서 하는 것이라면, 섭정은 유교의 범위에 해당되지 않아 남녀유별의 영향을 받지 않는 범위에서 여성의 정치 주도 혹은 왕의 친척 중 가장 유력한 자 또는 신하 중에서 왕을 대신해 정치를 하는 것이다.
공식 명칭만 없었을 뿐이지 수렴청정 형태의 정치체제는 고대부터 동서양 여러 문화권에서 존재했다. 군주가 어린 나이에 즉위하는 경우는 고대에도 무수히 많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고대 이집트의 투트모세 3세와 아시리아의 아다드 니라리 3세가 어린 나이에 즉위하자 각각 하트셉수트, 세미라미스가 우리가 아는 수렴청정 비스므리하게 어린 군주를 대신하여 국정을 이끌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수렴청정을 먼저 한 여인은 한고제 유방의 부인인 여후다. 한나라 때 쓰던 명칭은 임조칭제(臨朝稱制)로 조회에 임석하고 황제의 명령과 같이 황태후의 명령을 '제(制)'라고 칭한다는 의미다.
그리고 왕대비의 섭정이 시작될 때를 수렴청정, 끝날 때를 철렴환정이라고 한다.
2. 상세
수렴청정은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군주가 나이가 어리거나 여러 이유로 정상적인 통치가 불가능 할 때, 왕의 어머니 등 직계 존속의 여성이 대리로 통치를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 여성 대리인은 '''군주의 뒤에서 발을 내리고'''(垂簾[수렴]) 신하들의 의견을 듣고 그에 대한 하교를 내렸고(聽政[청정])) 수렴청정도 여기서 이름을 따왔다. 다만 실제로 발을 내리고 뒤에서 하교하는 것은 중대한 사안일 경우에 한하였고, 대부분의 사안은 신하들이 나서서 왕과 논의해 결정하거나 대비전과 정전(正殿)을 오가며 하인이나 문서를 통해 정치를 했다.[2]
수렴청정은 일반적으로 왕이 스스로 정치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고 판단하면 왕이 직접 통치하도록 하고 거두는 것이 보통이었다. 다만 수렴청정을 그만두는 기준이 딱히 정해졌던 것은 아니라, 세조의 비 정희왕후 윤씨가 성종이 20세가 되자 수렴청정을 거두면서, '''왕이 성인이 되면 수렴청정을 그만둔다'''는 선례로 남게 되었다.[3] '''정희왕후가 첫 스타트를 잘 끊으면서,''' 이후 다른 대비들도 오랫동안 수렴청정을 하지 못했다.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 윤씨도 명종이 20세가 되자 수렴청정을 거두었다.물론 정사나 야사를 보면 죽을 때까지 권력을 놓기는 싫었지만 공식적으로 명종이 성인이 된 후에 직접적으로 태클을 걸지는 않았다.오히려 명종이 윤원형의 권력을 야금야금 축소시키는 것을 방관하기만 했었다.
문제는 조선 19세기 세도정치에 들어서면서 수렴청정의 의미가 변질되어 대비의 친척들이 권력을 휘어잡는 꼴이 되고 말았다는 거다. '''정확하게는 대비의 뜻과는 달리 주변 사람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해먹었다는 것'''. 순조 때 정순왕후가 그나마 공정하게 했지만 막판 순조가 성인이 됐는데도 수렴청정을 다시 하려 했던 시도 때문에 평가가 깎였고 순원왕후는 의도는 좋았지만 결과만 보면 세도 정치를 심화시켰다.신정왕후 조씨는 명목상 고종 대 최고어른이었지만 사실상 흥선대원군이 주도적으로 정무를 처리했다.
3. 사례
3.1. 한국사
한국 역사에서는 왕비의 지위를 중시해서 현재 군주의 생모라 해도 후궁에게는 후에 왕비가 되지 않는 한 수렴청정을 할 자격을 주지 않았다. 수렴의 경우 보통 왕실의 최고 어른에게 주었다.[4] 또한 조선에서는 수렴청정의 조건, 기준, 절차, 격식 등을 공적 제도로 엄격히 규제하였고, 순조 대에는 「수렴청정절목」으로 수렴청정의 제도를 완비하였다. 그래서 이전 시대 또는 동시대 타국가와 달리 조선의 수렴청정은 엄격한 공적인 정치제도 하에서 운영되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우리나라 기록에서의 수렴청정에 대한 첫 기록은 고구려 태조왕이 7세에 즉위하자 부여태후가 수렴청정 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최초의 기록이며, 그 외에도 신라 진흥왕이 7세[5] 에 즉위하여 지소태후가 섭정하였다는 기록이 있다.[6] 중세인 고려시대에는 드라마로 유명해진 천추태후가 아들 목종(고려) 대신 섭정으로서 전권을 휘둘렀다.
조선시대에는 성종(정희왕후), 명종(문정왕후), 선조(인순왕후), 순조(정순왕후), 헌종(순원왕후), 철종(순원왕후), 고종(신정왕후 조씨) '''총 7명의 왕이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수렴청정을 받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참고로 단종은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지만, 이때 어머니(현덕왕후 권씨)와 할머니(소헌왕후 심씨) 모두 예전에 사망했기 때문에 '''수렴청정을 해줄 어머니도 할머니도 없었다.''' 단종은 실질적으로 서조모인 혜빈 양씨가 양육했지만, 그녀는 어디까지나 후궁이었기 때문에 섭정 자격이 없었다. 이 때문에 세종대왕과 문종의 명을 받은 고명대신들이 사실상 섭정을 했다.
단종의 말로가 비참했다는 점에서 단종이 즉위한 뒤에 새로 왕비를 맞아들였거나, 할머니 소헌왕후나 어머니 현덕왕후가 살아 있었으면 수렴청정을 할 어른이 있었기에 단종의 비극은 없었을 것이란 주장도 있다. 만약 소헌왕후 심씨가 대왕대비로서 수렴청정을 했다면, 세조는 어머니에게 매우 극진했기 때문에 스스로 왕이 되려고 하진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설령 극진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어머니가 섭정하고 있는 상황에서 단종에게 칼을 겨누는 건 곧 자기 엄마에게 겨누는 것과 같아져서 수양대군=불효자로 낙인찍힐 수 있는데,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 불효자 딱지는 아주 치명타이다. 건국과정에서의 기여분, 쿠데타의 전후사정 참작 등의 명분이 세조보다 더 있으면 있었지 덜하지는 않았던 태종이 아버지인 태조에게 용서를 구한 것도 불효자 딱지를 떼기 위해서였다.[7]
단종의 예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후로 조선의 왕들은 정비가 자기보다 먼저 죽으면 자기 나이가 많든 적든, 정식 후계가 있든 없든, 후궁이 몇 명이든 '''무조건 재혼해서 계비를 맞아들였다.''' 선조는 51세 때 19세의 인목왕후와 재혼했고, 인조가 44세 때 15세의 장렬왕후와 재혼했고, 영조가 66세 때 15세의 정순왕후 김씨와 재혼한 게 대표적인 예다.
세종대왕과 문종처럼 정실 왕비가 죽은 후에도 후계가 있다는 이유로 재혼하지 않았다가 왕실에 수렴청정을 할 여자 어른이 없어지는 상황을 막으려는 노력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것은 국모이자 내명부의 수장 자리를 장기간 비워서는 안된다는 현실적 이유가 있었으므로, 반드시 이러한 이유에서라고는 볼 수 없다.
수렴청정으로 가장 큰 권세를 휘두른 사람은 '''문정왕후'''였고,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도 정국을 이끈 여걸이다.[8] 세조의 아내 '''정희왕후'''도 이런 여걸에 넣기도 하는데,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엔 사실 성종의 어머니인 '''소혜왕후'''의 영향이 컸다는 말이 있다.[9] 순원왕후나 '''신정왕후 조씨'''도 수렴청정기에 정국에 상당한 영향력을 끼쳤다고 평가받는다.[10] 다만 인순왕후는 그냥 선조의 후견인 수준이었고 수렴의 기간도 7개월로 짧았다.
수렴청정은 대개 왕이 15세 될 때까지 했다.[11]
수렴청정을 한 역대 태황태후들은 다음과 같다.
정희왕후 - 예종(?)[12] , 성종 7년
문정왕후 - 명종 8년
인순왕후 - 선조 7개월
정순왕후 - 순조 5년
순원왕후 - 헌종 7년, 철종 2년
신정왕후 조씨 - 고종 3년
숙종의 경우에는 불과 14세에 즉위해서 어머니 명성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할 법했지만, 워낙 강성인 그는 수렴청정도 거부하고 바로 친정에 들어갔다.[13] 최고령 수렴으론 19세의 예종은 실질적으로 수렴을 안한 것이니 19세의 철종이 2년간 순원왕후의 수렴을 받은 것이 최고령 수렴이라 하겠다. 다만 이는 철종은 나이는 많아도 왕으로서의 아무런 교육을 받지 못한, 평민과 다름이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일이다.
가장 오래 수렴을 한 대비는 2차례에 걸쳐 근 10년간 수렴한 순원왕후다.[14] 신정왕후 조씨는 야사의 영향으로 흥선대원군에 놀아난 허수아비 정도로 평가되었으나, 실록을 보면 조정에 여전히 목소리를 내는 기록이 많이 보이고 대원군의 개혁에도 적극 참여했다[15] . 인순왕후는 16세의 선조를 위해 그야말로 형식적으로 잠깐 수렴을 쳤다.[16] 정순왕후는 2차 수렴을 시도하려 했다가 이시수의 논리적 반대에 밀려 그만둔 바가 있다.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조선의 왕비와 후궁을 주제로 학술 세미나를 한 적이 있는데 수렴청정도 다뤘다. 링크
3.2. 서양
대표적으로 카트린느 드 메디시스와 프랑스의 이사벨라[17] 가 있다. 다만 군주가 어릴 경우 대부분 태후(대비)가 수렴청정을 한 한국, 중국과는 달리 서양에서는 군주의 모후가 아니라도 힘 좀 있고 권력욕 있는 왕가의 종친이나 귀족이 섭정이 되는 경우도 많았다. 서양의 경우 외국 왕실에서 왕비를 맞아들이는 경우가 많았기에, 군주의 외가인 외국의 영향력이 강해지는 것을 경계했기 때문.
3.3. 중국
중국에서 수렴청정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한나라의 '''여후'''와 청나라의 '''서태후'''다.원래 수렴청정 자체가 '''중국의 제도'''다.
중국의 경우 상대적으로 조선보다는 적서 차별을 덜 엄격하게 했기 때문인지, 선황의 '''후궁이라도''' 자신의 아들이 황제에 오르면 태후가 되어 황후로서의 시호를 받고 '''수렴청정을 할 자격이 주어진다.''' 정실 황후 출신의 태후가 살아 있다면 원칙적으로 후궁 출신의 태후는 그보다 수렴청정을 할 권한이 약하지만, 자격이 아주 없었던 건 아니라는 이야기다. 서태후가 바로 이런 유형이었다. 서태후는 본래 함풍제의 후궁이었고, 함풍제의 정실 황후는 효정현황후였다. 그러나 함풍제가 죽은 뒤 승계한 동치제는 바로 서태후의 친아들이어서 효정현황후와의 공동 섭정이 가능하였던 것. 이후 광서제와 서태후가 죽고 겨우 3세에 즉위한 선통제는 융유태후와 생부 감국섭정왕 재풍의 공동 섭정을 받았다. 다시 말해서 '''수렴 제도는 중국 봉건 황조 붕괴 직전까지 이어졌다는 뜻.'''
수렴청정이 황권 약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은만큼, 이를 방지하려는 황제들도 있었다. 한무제는 본인이 어린 시절 할머니 태황태후 두씨와 어머니 황태후 왕씨의 그늘 밑에서 살았던 트라우마 때문에 임종 때에 황태자 유불릉의 생모인 구익부인에게 죽음을 내린다. 그리고 이후 북위 시대에는 태자의 생모에게 죽음을 내리는 자귀모사(子貴母死)제도로 아예 자리잡아버렸다. 하지만 이러한 제도에도 빈틈이 있었는데, 죽임을 당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태자의 생모였기 때문에 문성제의 황후였던 풍씨는 태자의 어머니가 죽임을 당한 뒤, 태자의 양모가 되어주는 방식으로 죽음도 피하고, 양모의 자격으로 수렴청정을 하기도 하였다.
3.4. 일본
고대 일본에서 여성이 최고 집권자가 되는 일은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기에 대부분이 차기 유력황족에게 권력을 넘겨주기 위한 목적으로 임시로 맡는 역할로 천황이 되는 경우가 잦았다. 그래서인지 여성 천황이 '''가까운 친척에게''' 실권을 주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스이코 덴노 치세 때의 쇼토쿠 태자가 대표적인 사례다. 이와 별개로, 헤이안 시대 때 인세이라는 독특한 섭정 체제가 만들어졌다. 막부 등장 이후에도 여성 천황이 한번 등장했지만 실질적으로 인세이 등장 시기에 사문화되었다고 보는 편이 옳다. 막부의 경우 차기 쇼군의 나이가 어리거나 할 경우에는 가신이나 다이묘 중 유력한 인사가 섭정을 시행했다.
하지만, 막부 등장 이후 유명무실해진 황실과는 달리, 쇼군가에서는 수렴청정이 공공연히 이루어졌다. 이는 가마쿠라 막부 의 호조 마사코로부터 시작되어, 에도 막부 시대에는 쇼군의 생모와 그녀가 주도하는 오오쿠가 실권을 잡아 막부를 좌지우지하는 일이 자주 일어났고, 후기로 갈수록 수준미달의 쇼군들이 이어지면서 아예 말기에는 오오쿠가 나라를 다스리다시피한 일이 많았다.
4. 관련 문서
[1] 이런 점은 조선의 정치제도가 전 시대와 비교하여 얼마나 공적인 제도 안에서 안정적으로 운영되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조선 안에서 정치제도가 가장 파행적으로 운영되었던 세도 정치 시기조차 왕실의 공적인 권위 휘하에서 작동되었는데, 이는 왕이 미약해서 권세가가 왕을 시해하거나 마음대로 바꾼 이전의 왕조와 결이 달랐다.[2] 발을 내린 이유에 대해서는 동아시아의 유교 사상에서 '''남녀유별'''을 지키기 위함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정확한 이유는 불분명하다.[3] 거기다 정희왕후 윤씨는 친척들이 자신 덕분에 부당한 이득을 볼 것을 경계해, 공과 사를 철저히 했다. 자신의 친척이자 손자며느리 정현왕후(성종의 셋째 왕비) 윤씨의 친정아버지 윤호를 감옥에 넣을 정도.[4] 이에 따라 조선 순조는 생모인 수빈 박씨가 아닌 영조의 계비인 양증조할머니(!!) 대왕대비 김씨의 수렴청정을 받았다.[5] 삼국유사에서는 15세.[6] 하지만 태조왕의 경우 중국에서의 최초 수렴청정 사례인 측천무후의 사례보다 6세기나 일러 후대에 윤색되었거나 가필된 기록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노태돈의 고구려사 연구 참고.[7] 사실 둘 다 사망했다고 쳐도 세종이나 문종이 아내를 또 들였다면 그래도 나았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전자의 경우 세조에게는 새엄마가 생기는데 새엄마도 엄마이므로 똑같이 대해야 했고(후궁 자격이라면 물론 좀 더 만만했다. 혜빈 양씨도 세조에게 죽었으니. 물론 여기서도 "서모도 엄만데 왜 죽이삼?" 이란 태클은 날아올 수 있지만.) 후자의 경우 적어도 섭정기간 중에는 안전하다고 할 수 있다.일단 선왕의 왕비(=대비)란 정통성이 있으니 야심 많은 세조로서도 건드리기 힘들었다. 다만 이 경우엔 섭정을 빨리 끝내라고 압박은 할 수 있다.[8] 스스로 여주(女主), 여군(女君)이라 칭해도 아무로 뭐라 안 할 정도였다.[9] 그게 아니라 하더라도 대게는 원상들의 자문에 의존했다.[10] 그래도 사실 순원왕후는 친정에 의존했고 신정왕후는 흥선대원군의 협조로 많이 임했다.[11] 권력의 화신이라 일컬어지는 정순왕후조차도, 왕이 15세가 되니까 물러났으며 다만 성종이나 명종같이 갑작스레 왕이 된 경우는 20세까지 받았다.[12] 사실상 수렴으로 쳐주지도 않는다.[13] 그래도 숙종 6년까지는 외척+종친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14] 문정왕후가 20년이나 영향력을 행세했지만 그중에 8년만 수렴기간이다.[15] 사실 흥선대원군은 신정왕후 조씨가 수렴을 거두고 물러난 이후에도 계속 섭정을 하려고 했는데, 이건 사실 법적 제도적 근거가 없는 행동이었다. 법적으로는 고종이 친정을 하고 있는데, 실질적으로는 대원군이 생부라는 이유로 국정에 개입하는 비정상적 상황이었던 것. 더구나 이걸 5년 이상 하면서 결국 고종과 대립을 거쳐서 축출되게 된다.[16] 7개월인데, 사실은 선조가 16세인 만큼 선조가 20세가 되는 선조 4년까지는 해도 되었다. 아무래도 문정왕후를 의식해서인 듯.[17] 프랑스의 왕비가 아니라 영국의 왕비이다. 프랑스는 출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