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봉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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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3. 영조 시절
4. 말년과 최후
5. 사후
6. 가계도
7. 홍봉한이 등장한 작품
7.1. 드라마
7.2. 영화


1. 개요


홍봉한(洪鳳漢, 1713년 ~ 1778년)은 혜경궁 홍씨의 친정 아버지, 영조의 바깥 사돈, 사도세자의 장인 어른, 정조의 외할아버지이다. 노론의 척신이며 권신. 후에 시파(時波)로 이어지는 북당(北黨)의 영수이다.

2. 배경


선조의 6대손이자, 정명공주와 영안위 홍주원의 5세손이며, 수재 홍현보의 아들로, 좌의정 홍인한의 형이자, 정조의 외조부이다. 홍국영 일가 역시 그의 친족으로 8촌 형인 홍창한의 손자였다.

3. 영조 시절


음서로 참봉에 등용되어 세자익위사 세마로 있을 때인 1743년 딸이 세자빈으로 뽑혔다. 1744년 문과에 급제. 사관이 되었다.[1] 이후 여러 벼슬을 거쳐 1745년 종이품으로 특진 광주 부윤이 되었다. 그가 갑자기 과거 급제 직후 종이품으로 승진하여 양사의 비판이 있었으나 왕이 특별히 무마시켰다. 이후 영조 연간의 최강의 실력자로 부상한다.
광주 부윤을 비롯하여 어영 대장으로 오랫동안 활동하였으며, 예조 참판으로 연접 도감 제조를 지낸 후 1752년에는 동지경연사 1753년에는 비변사당상으로 임진절목을 편찬하는데 참여하였다. 1754년 비국당상이 되어 청인들이 애양책문 밖에서 거주하며 개간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1755년 구관당상·평안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고 이어 좌참찬에 승진하였으며, 1759년 세손사가 되었다.
1761년 사위 사도세자평양 원유 사건으로 노론계 정승 이천보, 이후, 민백상 등이 자살한 뒤 일약 승진, 우의정에 발탁되었다. 1761년 우의정이 되고, 이어 좌의정을 거쳐 판돈녕부사로 전임되었다가 1761년 영의정에 이르렀다. 세자에 대한 사건으로 파직되었다가 다시 좌의정이 되어 경외민의 이동법을 만들어 함부로 행동함을 금하였으며, 여러 가지 폐습과 관리의 협잡 등을 시정하는 한편 당습의 제거·군사의 보충·독봉의 폐해를 개혁하였다
사도세자 문제에 있어서 반대파들에게 사도세자의 비행을 은폐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에 대해 한중록에서 혜경궁 홍씨는 충절의 결과이자 사도세자를 영조의 진노로부터 보호하고자 어쩔 수 없이 의리와 실리의 우선 순위를 뒤바꾼 결과라고 변호한다. 물론 자기 아버지이니만큼 본인 주관을 담아 옹호한 측면이 없지는 않겠지만 최소한 사도세자를 보호하는 데 가장 앞장 선 인물 중 하나라는 점은 확실하다. 특히 사도세자가 홍봉한에게 자신의 정신 질환에 대해 토로하며 이에 대한 약을 구하는 내용의 편지를 보낸 적이 있어서 사도세자 역시 홍봉한에게 의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편지는 오늘날에도 남아 있다. 하지만 사도세자와 관련된 왕실 내 분열이 본인조차 수습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자 홍봉한은 결국 사돈인 영조와 함께 사도세자를 제거하는데 앞장섰다.
그해 윤 5월는 사위인 사도세자가 뒤주 안에 갇혀 굶어 죽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사도세자의 처형에 반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일물'[2]을 바치는 등[3] 사형 집행에 적극 동참했고[4][5] 이후 반홍봉한파인 한유가 그것을 비판했다가 영조의 심기를 건드려서 처형된다. 그는 형식상 영의정 겸 세자 사부로서 세자의 스승이라는 직책을 겸직하고 있었기에 사직서를 내고 보름 동안 나가 있다가 다시 영의정으로 복직했다.
1768년 다시 영의정이 되어 울릉도의 사적을 널리 조사하여 책을 만들어 일본인들의 점유를 미리 막게 하였으며, 1771년 영중추부사가 되어 청주의 한유의 망국동 망정승 탄핵을 받고 사직했다 한편 사도세자의 서자인 은언군은신군을 물질적으로 후원하다가 영조의 의심을 받기도 했다. 이는 은언군과 은신군의 유배로 종결되었다. 다시 봉조하에 이르러 은신군, 은언군의 사건으로 삭직되었다.
집권 말엽에는 경주 김씨와 화해를 주선했지만, 경주 김씨들은 망국동 망정승 상소 등을 이용하면서 그를 맹렬히 탄핵했고 이에 유화책을 접고 각각 삼왕손과 세손을 등에 업고 치열한 접전을 벌였지만 나중에 영조에게 들키면서 경주 김씨들과 사이좋게 실각한다.[6]

4. 말년과 최후


경주 김씨와의 권력 투쟁 때문에 영조의 눈밖에 나서 실각한 후에는 그의 동생 홍인한화완옹주의 양자 정후겸이 조정의 실세가 된다. 흔히 홍봉한, 홍인한의 사이가 나빴다고 설명이 되지만 홍봉한은 홍인한을 살리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고 의견충돌도 보이지 않는다. 어쨌거나 그의 동생 홍인한이 실세가 되면서 홍봉한의 존재감은 많이 약해졌다.
정조는 외조부인 그에게 은전을 베풀어 아들 홍낙임을 친국의 형식을 빌어 석방하고 1776년에 홍봉한을 또다시 봉조하에 제수한다. 그러나 영조 사후 정조가 즉위하자 홍봉한의 동생 홍인한은 정조의 대리청정을 방해한 죄로 유배 당하고, 이내 정조의 최측근인 홍국영을 해치고 역모에 가까운 죄를 저지른 죄로 사사된다. 재기를 노리기 위해 홍봉한을 죽이고 싶어 안달난 김귀주와 김관주는 홍봉한도 홍인한의 형이고 둘이 한통 속이니 연좌의 율로 홍봉한도 처벌해달라고 요구한다. 게다가 김귀주는 자신의 아버지 김한구가 살아생전의 영조가 건강이 좋지 않자 비싼 나삼을 써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홍봉한은 나삼은 나오지 않고 비싸서 안된다며 거절했고, 그러면 송다를 진상하라고 하자 홍봉한은 금주령 기간이라 그것도 안된다며 거절했다는 사실을 밝힌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김귀주는 홍봉한은 선왕을 우롱한 죄인이라는 논리를 주장하며 그를 탄핵했지만, 오히려 정조는 "봉조하(홍봉한)가 나를 시해하려고 군사를 일으켜 궁궐로 침입하고 날 비방하거나 독살하고 저주를 걸었는가? 김귀주는 왜 내 외조부를 건드려 내 생모의 마음을 아프게 하냐"라는 논지의 말을 하며 김귀주를 유배보냈고 홍봉한을 위로하면서 은전을 하사했다. 어떤 역사만화책에서는 외손자 정조가 홍봉한을 임오화변의 주역으로 탄핵하여 유배를 보냈다고 하는데 실록에서 그런 기록은 없다.
정조 입장에서는 자신의 외할아버지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비참한 최후를 방관한 게 맘에 안들었을 수도 있겠지만, 사실 당시의 임오화변이라는 역대급 막장 사태에서 세자빈의 부친인 홍봉한조차도 자기 사위인 사도세자를 구할 수 없었다. 따지고 보면 자신의 딸인 혜경궁과 외손자 정조만이라도 그 위험한 상황에서 구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사도세자의 죽음을 방관했다는 게 더 알맞았고, 사도세자의 아버지인 영조는 아예 단단히 마음먹었는지 신하들의 반대도 무시하며 작정하고 세자를 죽이려 했다. 최고결정권자인 국왕 영조부터가 사도세자를 죽이려고 마음 먹었는데, 만약 그때 홍봉한이 섣불리 사도세자를 옹호하거나 구하려 했다면 사사된 현빈 조씨의 오빠인 조재호처럼 될 수 있었다. 애초에 조재호의 사사에 앞장선 사람이 바로 홍봉한이였다.
만약 소론의 핵심인물인 조재호가 사도세자를 구하는데 성공하여 나중에 사도세자가 보위에 오르면, 나주 괘서 사건으로 입지가 좁아지다 못해 역당으로 낙인찍힌 소론은 사도세자를 구한 공으로 재기할 위험이 있었다. 그렇게 되면 노론의 수장인 홍봉한의 입지도 좁아지기 때문에 조재호 제거에 앞장섰던 것이다. 이러한 골육상쟁의 간접적인 피해자인 정조도 외조부의 행동에 대해 어느정도 정상참작을 했는지, 홍봉한의 친족이나 혈육에 대해선 모질게 굴지 못했다. 특히 홍인한을 사사하라는 대간의 요청에도 정조는 자신의 친모인 혜경궁에게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해 물어보며 외조부의 형제에 대한 처분을 망설였다. 이에 혜경궁은 본인의 숙부라도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게 당연지사라고 하였고 정조는 어머니의 뜻을 받아들여 홍인한을 사사시킨다. 이것마저도 정조가 친모를 옹호하기 위해 좀 과장해서 한 말이었는지, 혜경궁은 한중록에서 이 사실을 부인했다.
결국 동생 홍인한의 죽음을 목격한 다음 1778년에 한성부에서 사망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66세였다.

5. 사후


그때 정조가 부원군의 장례에 준하여 장사케 하고, 3년 동안 녹봉을 지급하게 하였으며, 1784년 시호를 내리고 제사하였으며, 1843년 체천 않는 은전을 베풀었다. 고종황제사도세자가 왕으로 추존되고 혜경궁 홍씨도 왕비로 추상되면서 영풍 부원군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익정이다.

6. 가계도


  • 아버지: 홍현보
  • 친어머니: 임씨
  • 양어머니: 성주 이씨
    • 이복 누이: 풍산 홍씨
    • 이복 동생: 홍인한(1722년 ~ 1776년)
    • 이복 동생: 홍준한
    • 이복 동생: 홍용한
  • 아내: 한산부부인 이씨
    • 차녀: 혜경궁 홍씨(1735년 ~ 1815년)
    • 사위: 사도세자(1735년 ~ 1762년)
      • 외손자: 제22대 정조(1752년 ~ 1800년)
      • 외손자 며느리: 효의왕후 김씨(1753년 ~ 1821년)
      • 외손자 며느리: 의빈 성씨(1753년 ~ 1786년)[7]
        • 외증손자: 문효세자(1782년 ~ 1786년)
        • 외증손녀: 옹주(1784년 ~ 1784년)
        • 외증손주: (1786년 복중 사망)
      • 외손자 며느리: 수빈 박씨(1770년 ~ 1822년)
        • 외증손자: 제23대 순조(1790년 ~ 1834년)
        • 외증손녀: 숙선옹주(1793년 ~ 1836년)

7. 홍봉한이 등장한 작품


홍봉한은 노론의 영수였지만 훗날 시파로 분류되며 동생인 홍인한과는 다르게 정조 등극 후 숙청되지 않고 노년을 맞이했기에 사도세자나 정조를 주인공으로 한 영상 매체에서 악역으로 묘사되는 홍인한과 다르게 부정적인 묘사가 적다. 대부분 혜경궁과 더불어 사도세자를 걱정하거나 세손인 정조를 보호하는 역할. 예외적으로 이덕일의 노론 사관이 깊게 베인 정조암살미스터리에서는 홍봉한이 노론의 영수로 사도세자 모해 및 사사를 주도한 것으로 나온다.[8]

7.1. 드라마



7.2. 영화



[1] 급제한 시기를 보면 알겠지만 적당히 배려를 했을 것이다[2] 一物. 뒤주를 의미한다. 당시에는 영 좋지 않은 일을 에둘러서 표현하는 관습이 있었는데, '일물'은 임오화변과 관계 깊은 물건인 뒤주를 필터링한 표현으로 쓰였다.[3] 이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한중록의 기록이나 정조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정작 '일물'이 들어올 때 홍봉한 본인은 입궐도 안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조 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그 자리에 이미 와 있었다고 하니 정면 충돌.[4] 하지만 사위 사도세자가 이미 사돈인 영조의 눈밖에 난 이상, 변호해봤자 소용도 없을 뿐더러 여차하면 세손까지 위험해질 것을 걱정해 이렇게라도 행동했다는 주장이 많다. 사실 때를 보면 이미 영조는 '''죽은 정성왕후의 영혼이 세자의 역모를 경고했다'''는 말 같지도 않은 명분을 내세우면서까지 처벌을 강행하는 등, 이미 사도세자를 살릴 마음 자체가 없었다. 게다가 세자의 광증이 너무 심각해져 사도세자를 죽여서라도 세손을 보전해야 한다는 데에서는 의견을 같이 하였다.[5] 사실 사도세자의 입지가 불안해지면 세자의 장인이라는 배경으로 권력을 얻은 홍봉한 입장에선 전혀 좋을것이 없다. 사도세자 역시 아버지의 학대로 정신병까지 얻는 등, 불우한 성장 배경이 있을지언정 '''궁중 내에서 살인, 강간을 저지르는 등 심각한 범죄행각이 드러난 상황이었다.''' 오히려 사태가 그 지경이 될 때까지 영조에게 사도세자의 비행을 함구해줬다고 보는것이 옳다. 즉, 혜경궁의 언급대로 홍봉한은 사도세자에 대해서 할만큼 했던 것.[6] 정확히 말하자면 경주 김씨가 더 타격을 받았다. 김귀주는 삭탈되고 김관주는 아예 갑산에 유배되었는데 홍봉한은 세가 꺾인거 외에 별 타격이 없었다. 다만 그의 힘이 약해진건 사실, 그 빈자리를 홍인한 - 정후겸 연합이 어부지리로 주어먹었다.[7] 의빈 성씨의 아버지 성윤우는 홍봉한의 청지기였다. 그 인연으로 의빈 성씨는 혜경궁과 함께 궁녀로 입궁하였고 혜경궁이 양녀처럼 길렀다.[8] 이 때문에 이 작품에서는 정조 등극 후 숙청을 두려워하여 한성부에서 살지 못하고 과천에서 사망하며 정조의 문상도 받지 못하고 박대받는 것으로 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