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역사

 



1. 개요
2. 연혁
2.6.1. 서울특별시 출범과 1949년 추가 확장
2.6.1.1. 6.25 이후 부평·영등포으로의 수도 이전 논의
2.6.2. 1963년 대확장
2.6.2.1. 1960년대 서울 대확장의 가상역사
2.6.3. 1973년 구파발(진관동) 편입과 인접지역의 서울 편입 주장
2.6.4. 1980년 이후
3. 명칭의 유래
3.1. '서울'이라는 명칭과 '특별시'
3.2. 명칭 개정 시도
3.3. 명칭 개정에 반대하는 의견
3.4. 명칭 개정에 찬성하는 의견
4. 관련 문서
5. 관련 사이트


1. 개요



서울은 현 대한민국의 수도이고 이전에는 백제, 조선의 500여년 수도였으며 250여년 정도 고려의 부수도였다.[1] 또한 고구려의 3경이었을 가능성도 존재하고[2] 신라시대에도 한산주의 중심지라 지금으로 치면 도청소재지 쯤 되는 위상은 가졌었다. 또한 삼국시대 내내 서울을 포함한 한강 유역은 격쟁지이자 최고의 군사적 요충지였다. 따라서 서울은 다섯 왕조의 유산이 모두 남아있는 한반도의 대표적인 고도이다.

2. 연혁



2.1. 삼국시대


마침내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嶽)에 올라가 살 만한 곳을 찾아보았다. 비류가 바닷가에 살고자 하니 열 신하가 간하였다.

"이 강의 남쪽 땅은 북으로 한수(漢水)를 두르고, 동으로 높은 산에 의지하며, 남으로 옥토를 바라보고, 서로는 대해가 막고 있으니 그 천험지리(天險地利)는 쉬이 얻지 못할 형세입니다. 이곳에 도읍을 짓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비류는 듣지 않고 그 백성을 나누어서 미추홀(彌鄒忽)로 돌아가 살았다. 온조는 하남의 위례성(慰禮城)에 도읍을 정하고, 열 신하의 보좌를 받아 국호를 십제(十濟)라 하였다. ─ 삼국사기

고대부터 한강의 잦은 범람으로 땅이 비옥한 땅이었다. 수도로서의 최초 기록은 백제온조왕이 세운 위례성이다. 다만 현대의 서울시계 기준으로는 같은 서울이라지만 이건 서울시가 1963년에 광주군 땅을 편입하면서 들어온 것이지, 위례성은 한강 이남에 있어서 적어도 이후 조선의 수도가 되는 강북의 한양과는 완전히 다른 도시나 마찬가지였으며, 주지하다시피 백제의 기록이 별로 잘 남아 있지 않기는 하지만 풍납토성, 몽촌토성, 석촌동 고분군의 위치로 보았을 때 서울시계 내임은 거의 확실하다. 이때 이미 강남에 도읍을 정했다고 해놓고 13년에 소서노가 죽자 다시 강남에다가 도읍을 정한다. 이 때문에 온조왕 원년의 위례성을 하북위례성, 13년의 위례성을 하남위례성이라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지만 (다만, 하북위례성의 위치는 여전히 오리무중이긴 하나 서울의 강북 지역으로 보는 견해가 다수이다. 이 경우 하북위례성의 강역과 한성부의 강역은 서로 겹쳤을 가능성은 존재한다. 허나 풍납토성과 같은 확실한 유적이 발굴되지 않는 한 위치를 영영 확실히 알 수도 없을 뿐더러 하북위례성은 하남위례성에 비해 역사도 굉장히 짧고 백제 이후 아예 잊혀졌기 때문에 물리적으로 같은 위치라 하더라도 도시의 연속성은 없긴 하다.) 원년의 위례성도 '일단은' 기록상으로 하남에 있었다. 삼국유사에서는 원년의 위례성은 사천(蛇川)으로 지금의 천안시 직산읍이며, 13년의 도읍은 한산(漢山)으로 지금의 경기광주(지금은 분리됐지만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강남구, 송파구, 강동구, 성남시, 하남시 등이 모두 광주 산하에 있었다.)라고 하는데 위례성 직산설은 이미 고고학적으로 부정되는 상황[3]이고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사성(蛇城)의 존재로 비추어 원년의 위례성도 역시 한강 이남의 멀지 않은 곳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여하튼 이 시기의 위례성은 오늘날의 서울특별시 송파구 일대로 추정되었으며, 이후 풍납토성몽촌토성이 발굴되면서 확실시된 상황.[4]
후대로 오면서 지금의 강남-강북과는 반대로, 그 주위 북서방으로 영역이 확장되자 백제의 도심지인 강남은 한산(漢山), 부도심인 강북은 북한산(北漢山)으로 나뉘어 불리게 되었다. 중간에 근초고왕이 한강을 건너 북한산으로 천도하기도 했지만 26년 뒤 광개토왕이 백제를 개발살내고 아신왕의 항복을 받을 때 아리수를 건넌 것으로 보아 얼마 가지 못하고 진사왕이 찬탈하고 찬탈당하는 와중에 다시 강남으로 돌아온 듯 하다. 즉 고구려의 침공을 대비하여 한강을 북쪽의 천연 방어선으로 선정했던 것. 실제로 이 작전은 주효하여 고구려의 광개토대왕도 한강 이북까지만 진출할 수 있었고 강남으로의 진출은 저지되었다. (다만 이 당시 광개토대왕은 북쪽으로의 진출에 더 집중하고 있었던 탓도 있다. 이 당시 광개토대왕의 목적은 북쪽으로의 안전한 진출을 위하여 후방의 위협이 될 수 있는 백제와 신라 등을 손봐주는 선에서 끝내려는 목적이 강하였다. 즉 적극적으로 백제와 신라를 정복하려 하진 않았다는 것. 실제로 백제와 신라가 고구려에 맞서는 나제연합을 맺은 것도 광개토대왕 시절이 아닌 남진 정책을 추구한 장수왕 시대에서였다)
그러다가 장수왕대의 남진 전쟁에서 백제가 박살나서 개로왕이 전사하고 위례성을 빼앗기자 문주왕이 급하게 웅진(공주)으로 천도한 5세기 이래로도 지금의 서울 지역은 강남의 한산군(漢山郡)과 강북의 북한산군(北漢山郡)으로 고스란히 남았다. 단, 지금의 강서구-양천구 일대는 제차파의(조선시대 양천군), 구로구 서부는 주부토(지금의 부평, 부천), 금천구-관악구-영등포구(+광명시) 일대는 잉벌노(조선시대 시흥), 서초구-동작구(+과천시, 안양시, 군포시) 일대는 동사힐(지금의 과천) 소속으로 이어졌다. 이들이 서울에 편입되는 것은 후술하겠지만 현대에 들어와서의 일이다. 이러한 강남-강북 구도는 삼국시대가 끝나서도 강남의 한주(漢州)와 강북의 한양군(漢陽郡)으로 정리되었다.
백제는 자국의 건국 지점이라는 점에서 강한 상징성을 지니고 있는데다가 중국으로 향하는 안정적인 항구였던 이 곳의 수복을 지속적으로 노려왔으며, 결국 성왕대에 나제동맹을 맺고 있던 신라의 진흥왕과 함께 고구려의 양원왕 시기에 협공하여 일시적으로 영토 수복에 성공하고 하류는 자신이, 상류는 신라에게 분양하였다. 하지만 백제 귀족들이 왕권 강화를 방해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백제가 한강 유역을 포기하자 중국으로 향하는 안정적인 항구였던 이곳을 노리던 진흥왕은 결국 하류까지 손에 넣게 된다. 백제와 고구려간의 육로도 자연스럽게 끊어버린 것은 덤. 결국 신라에 대해 불만을 품은 백제는 고구려와 적대관계를 청산해서 연합을 하고, 반대로 신라는 한강을 통해 중국과 교류하면서 당나라와 연합을 하게 된다.

2.2. 남북국시대


북한산주는 통일신라9주 5소경한주(한산주) 소속이 되었다. 지금의 종로구를 중심으로 한 강북 지역은 신라 초기 북한산주(北漢山州)였다가 신라 경덕왕 때인 757년 전국 지명 한화정책에 따라 한양군(漢陽郡)으로 바꾼다. 이 한양이라는 명칭은 조선시대까지 관습적으로 자주 사용되었고 현대에도 한양대학교 등의 이름으로 남아있다.
한강 이남은 대략 반으로 나눠 동쪽은 지금의 광주시인 한주 소속, 서쪽은 지금의 과천시인 율진군 소속이었다.
고구려를 계승한다던 발해의 특성상 바로 그 고구려를 멸망시켰으니 신라와는 당연히 사이가 좋을 턱이 없었다. 물론 신라도 고구려 부흥 운동에 보탠건 있긴 한데 그게 고구려 좋으라고 한건 아니고 나당전쟁에서 당을 견제할 목적으로 손 안대고 코 풀 심산으로 고구려 유민들에게 대신 좀 싸워달라는 뜻에서 지원해준거라..., 딱히 신라와 친한 관계는 아니었던 북방의 발해와 접한 국경선 전방 지역이었기 때문에 신라의 지방군인 10정을 9주 중 다른 8개 주에는 1정씩 배치했으나 한주에는 특별히 2정 배치했다. 김헌창의 난의 후속타로 아들 김범문이 북한산 아래에서 도적들을 모아 반란을 일으켰으나 도독 총명에게 잡혀 죽었다.
후삼국시대에는 호족 함규의 영역이었는데 궁예를 거쳐 왕건에 복속됐고 함씨들의 조상이 됐다.

2.3. 고려



강남은 광주(廣州), 강북은 양주(楊州)로 나뉘었다. 한편 문종 때에는 신라의 5소경과 마찬가지로 풍수지리설에 입각하여 수도 개경을 보완하는 목적으로 성종 때 동경으로 지정되는 금성, 태조 때 서경으로 지정되는 평양과 더불어 강북 지역이 문종 때 남경(南京)으로 지정되어 양주와 대등해졌다. 이 때, 양주의 중심지는 현 광진구 일대였다.
남경은 풍수지리적으로 길지로 인정받아 문종숙종 연간에 천도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칭송받을 때는 '''오덕구(五德丘)'''라고까지 불렸다고 한다. 이 오덕구란 중앙에 북악산(면악산), 북에 감악산, 남에 관악산, 동에 아차산(남행산), 서에 북악산(철마산?)이 오행에 걸맞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당시 남경의 범위는 오늘날로 치면 서쪽으로는 연세대 뒤의 안산, 동쪽으로는 동대문 일대의 낙산, 남쪽으로는 신용산, 이촌 일대까지였다고 한다. 충선왕 대에 다시 한양(漢陽)으로 개칭되었으며, 이후 한양이나 한성(漢城)이라고 불리웠다.
고려 말에는 더욱 천도하자는 분위기가 강해졌는데, 이유는 왜구의 준동으로 인해 수도 개경이 위협받는 상황이 계속 벌어지는 것과 예성강의 퇴적 현상으로 개경의 수운 활용이 난감해지게 된 것으로 보고 있다.[5] 공민왕은 남경에 궁을 증축하려 했으며, 우왕공양왕 때에는 서경처럼 분사를 두려고 했으며 비록 대신들의 반대 여론때문에 얼마 안가 개경으로 환도하기는 했으나 일시적으로 천도를 단행하기도 해 ''' 짧게나마 고려 왕조의 수도이기도 하였다!''' 서울이 백제와 조선의 수도라는 점은 널리들 아는 반면 고려의 수도인 시기도 있었다는 사실은 아는 이는 거의 없다. 일단 우왕과 공양왕 대의 두 기간을 합쳐도 1년이 채 안되기 때문인 점이 크고 또 서울에 산재한 백제와 조선의 왕릉이나 왕성 유적과 달리 고려의 왕릉이나 왕성 유적이 단 하나도 서울에 없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따라서 서울은 한국사에서 백제, '''고려''', 조선, 대한민국의 4국가의 수도였던 유일한 도시이다.
하지만 이렇게 강북이 잘 나가기 시작하는 동안 강남은 여전히 광주의 깡촌(...) 신세로 남았고, 이 곳이 다시 역사의 전면에 부상하려면 1980년대까지 천 년이 더 남아있었다.


2.4. 조선 ~ 대한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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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조선왕조 링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조선 건국 이후 한동안은 여전히 개경을 수도로 삼았으나 1394년(태조 3) 10월 25일(양력 11월 18일) 태조 이성계의 명으로 천도하였고 이 시기에 정도전에 의해 경복궁이 건설된다. 그러나 1차 왕자의 난 이후 정종은 형제들간의 피를 본 한성이 찜짐했는지 1399년(정종 1) 3월 7일(양력 4월 13일) 다시 개성으로 수도를 옮겼다. 그러나 태종 대인 1405년(태종 5) 10월 11일(양력 11월 2일)에 다시 서울로 옮겨왔고 이후 근 600년의 세월 동안 한반도의 중심지이자 최대도시 역할을 거침없이 수행해 왔다.
한양으로 천도할 당시에 수도 후보지로 꼽힌 곳이 무악(서울 신촌), 부평, 계룡(계룡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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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김정호가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수선전도. 서로는 불광천과 홍제천, 동으로는 중랑천, 남으로는 한강, 북으로는 북한산에 이르는 지역을 자세히 나타낸다. 이로써 조선 후기 한양의 영역이 어느 만큼이었는지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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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서울의 영역은 지금에 비해 좁은 것으로, 오늘날의 '''종로구, 중구,용산구, 동대문구, 성북구, 서대문구, 강북구 일부(우이천 이남), 마포구 일부, 성동구 일부, 은평구 일부''' 일대까지 포함되지만, 보통 사대문안만을 진짜 서울로 치는데, 아주 틀린 얘기는 아니지만 인근 10리 이내 지역도 서울이었다는 것을 명심하자. 하지만 사실상 주택과 상점이 들어선 '''시가지'''인 사대문 안과 근교 농어촌 분위기라서 단순 행정구역상만 한성인 성저십리 지역은 환경상 구분된다. 당시 조선에서는 서울(한양)의 범위를 표시하는 뜻으로 금표를 경계에 여러 개 설치했는데 대략 한강(용산포구)-마포-불광동-북한산-우이천-미아리-중랑천을 잇는다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성저십리''' 참조. 이 역시 산이나 강 등의 자연지물을 천연 방어시설로 활용하던 전술의 일환이였다.
한편 조선이 건국하면서 태조 대에 양주의 중심지는 현 광진구 일대에서 양주시 고읍동으로 이전되었다. 여담으로 조선왕조가 남경을 새도읍으로 삼으면서 그쪽 토박이들을 한성부 성저십리나 양주군으로 쫓아냈다는 얘기도 있다(...).
조선 후기를 기준으로 노원구, 도봉구, 중랑구, 광진구 일대 및 송파구 잠실/신천 일대, 강북구 일부(우이천 이북) 및 은평구 진관동(당시 소속했던 신혈면이 양주에서 고양으로 넘어간 것은 1906년)과 불광동 독바위역 주변은 '''경기도 양주목''', 서초구 일부분, 강남구, 송파구(잠실/신천일대 제외)[6], 강동구는 '''경기도 광주부''', 마포구 일부(상암동 등)와 은평구 남부의 불광천 이서 지역은 '''경기도 고양군''', 영등포구(여의도, 양화일대 제외), 구로구 동부(신도림동 등), 금천구(당시 금천/시흥현 현내면 지역으로 금천/시흥의 중심지였다.), 동작구 일부(신대방동, 대방동, 상도동), 관악구 상당부분(남현동 제외)은 '''경기도 금천현'''(후에 시흥군), 동작구 일부(노량진, 사당동, 동작동, 흑석동), 서초구 대부분, 관악구 남현동은 '''경기도 과천현'''(후에 시흥군에 편입), 강서구 대부분과 양천구 일대, 영등포구 양화지구는 '''경기도 양천현'''(후에 김포군에 편입), 구로구 서부(고척동, 개봉동, 온수동 등)와 강서부 일부는 '''경기도 부평도호부'''(후에 부천군으로 개편)에 속했었다.
한양(서울)의 진산(鎭山)은 북한산(삼각산)이었다.
갑오개혁으로 인한 1895년 행정구역 대개편으로 양주군 고양주면 일부(대표적으로 오늘날의 중곡동 등 광진구 일부지역)가 한성부 두모방에, 고양군 하도면 일부(현재의 수색역 부근)가 한성부 연희방에 각각 편입되었고, 성내 5부(部 : 동부, 서부, 남부, 북부, 중부)를 5서(署 : 동서, 서서, 남서, 북서, 중서)로 개편하엿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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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당시 서울 및 근교지역을 간략히 나타낸 지도. 이 지도에는 옛 강남구 포이동(현 서초구 양재2동 및 강남구 개포4동의 각 일부) 쪽에 광주군-과천군 간 경계 오류가 있다. 현 서초구 양재동-강남구 개포동 간 경계선(논현로)에서 그대로 유추한 듯 한데, 원래는 강남대로 선형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 얼추 맞는다.
한성부 청사는 지금의 KT광화문지사 건물터에 있었는데, 일제강점기를 거쳐 건물이 아예 '''소실'''되어 버렸다.
17세기 실학자인 유형원이 한성부 행정구역 추가 확장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그가 제안한 한성부 추가 편입 지역으로 지금의 영등포구, 동작구 북부, 서초구 북부, 강남구 압구정, 송파구 잠실, 도봉구, 노원구, 중랑구, 광진구, 구리시, 의정부시, 고양시 덕양구 일대 등이었다.[7]

2.5. 일제강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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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8월 9일에 만들어진 경성부 휘장. 이 휘장은 도성 주의에 경계선을 두르듯 원을 그렸다. 선에서 튀어나온 모양은 도성 주변이 산에 둘러싸였음을 뜻한다. 그 안에 경성부의 '京(경)'자를 넣었다. 이러한 전체적인 모양은 1996년 이전의 서울시 휘장에 까지 반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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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에 개정되어 해방 이전까지 통용된 경성부 휘장. 도성에 경계를 두어 둘러 막은 것이 발전하는 경성부의 모습을 상징하기에 부족하고 미술적인 효과도 떨어진다하여 개정하였었다. 전체적으로는 경성부의 '京(경)'자를 도안화한 것으로 위에 있는 山(산)은 북한산을, 아래의 山은 남산을 뜻하며 가운데의 작은 원은 경성부의 시가지를 의미한다. 여담이지만 영등포역영중로4~6길 사이 보도에 '''2018년''' 현재도 콘크리트 맨홀에 저 휘장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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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2019년''' 기준으로 서울역사박물관 앞 짧은 횡단보도에 있는 맨홀에도 이 휘장이 새겨져 있다.
공식 명칭 '''한성부(漢城府)'''(1895년 행정구역 대개편 때는 한성부 산하의 한성군으로 변경되었다가 1년만에 도로 원상복구.)로서 오늘날의 서울특별시처럼 경기도에 소속된 도시가 아닌 독립된 도시였던 서울은 1910년 한일 강제병합과 함께 '''경성부(京城府)'''로 개칭되어 경기도의 한 도시로 격하되었다. '경성'이란 표현은 고려, 조선 시대에도 쓰였다. 다만 이 경우는 고유 지명이 아닌, 한 나라의 임금이 거하는 '수도(서울)'라는 의미로 쓰였던 것. 여하간 '서울'이란 이름도 이 경성의 직역 또는 그 연장선에 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분명한 것은, '경성(게이조)'이란 이름이 일본이 만든 신조어는 아니라는 점. 당대 명백한 성곽도시였던 서울의 모습이 '京+城'의 명칭을 당연시하게 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후 1911년, 5서(署)가 다시 5부(部)로 개편되고, 성저십리 지역의 각 방(坊)은 면(面)으로 개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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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당시 경성부. 1911년과 1914년 사이에 은평면 일부(현재의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효자동 일대)가 고양군 신도면으로 편입되었다.[8]
1914년 일제는 대대적인 행정구역 개편을 단행하여, '''옛 한성부 성저십리 대부분을 경기도 고양군에 편입'''시키고, 옛 도성 안쪽(흔히 말하는 '사대문 안')부터 용산, 신용산의 일본인 거류지까지의 지역만을 경성부의 영역으로 '''축소'''시켰다. 참고로 '사대문 안'은 아니었지만 경성부 관할로 남게된 곳은 동대문 바로 바깥 동네였던 숭인동과 창신동, 서대문과 서소문 바로 바깥 동네였던 현저동과 무악동, 천연동, 만리동 등, 그리고 마포나루가 있던 마포동과 도화동 등이 있었다.
'''1914년 3월 1일 고양군에 편입된 경성부 8면 (옛 한성부 성저십리 10방) 지역'''
구 행정구역
신 행정구역
비고
경기도 경성부 용산면(龍山面), 서강면(西江面) 및 연희면 여의도계
고양군 용강면(龍江面)
용산의 '용'과 서강의 '강'을 따와 명명. 현 서울시 마포구 서강, 공덕 일대 및 여의도, 밤섬
경기도 경성부 한지면(漢芝面), 인창면 일부(왕십리 일대), 두모면 일부(성동구 대부분, 중구 신당동 일대)
고양군 한지면(漢芝面)
옛 한강방(漢江坊)의 '한'과 둔지방(屯芝坊)의 '지'에서 따와 명명. 현 서울시 용산구 동부, 중구 일부, 성동구 대부분
경기도 경성부 숭신면(崇信面), 인창면(仁昌面) 각 대부분
고양군 숭인면(崇仁面)
숭신의 '숭'과 인창의 '인'을 따와 명명. 현 서울시 성북구, 강북구, 동대문구 일대
경기도 경성부 연희면(延𥛶面, 여의도계 제외)
고양군 연희면(延𥛶面)
현 서울 서대문구 대부분 지역
경기도 경성부 은평면(현재의 북한동과 효자동 제외. 해당 지역은 고양군 신도면에 편입되었다.)
고양군 은평면
옛 연은방(延恩坊)의 '은'과 상평방(常平坊)의 '평'에서 따와 명명. 현 서울시 은평구 대부분, 서대문구 일부, 종로구 구기동과 부암동 등
경기도 경성부 두모면 일부(현 서울시 광진구 일부), 양주군 고양주면 잔여 지역
고양군 뚝도면
뚝섬에서 따와 명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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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당시 상황. (1917년에 신설된 영등포면이 포함되었다.)
경성부가 성벽을 벗어나 동서로 크게 확장된 것은 병참기지화와 민족성 말살을 획책할 목적으로 한 1936년 조선총독부의 '대경성계획(大京城計劃)'에 인한 것이었다. 이로써 경성은, 북쪽은 정릉천, 동쪽은 중랑천, 서쪽은 홍제천, 남쪽은 안양천과 대방천(상도천)의 자연경계로 확장을 결정 지었고, 인구 60만을 돌파하였다. 1943년 최초로 구제(區制)가 실시되어 '''중구'''(당시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하였기 때문에, 전통적인 서울의 중심지였던 종로구 대신 이 지역을 '중구'로 명명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종로구''', '''용산구''', '''서대문구''', '''동대문구''', '''성동구''', '''영등포구'''의 7개 구가 설치되었고, 1944년에는 '''마포구'''가 서대문구, 용산구 각 일부에서 분리되어 신설되었다.(8구)같은 해에 종로구 성북정이 동대문구에 편입되였다.
1936년에 경성부가 확장될 당시에 시흥군 영등포읍에서는 일본인들이 편입을 반대하였으나 반영되지 않았다(...). 당시 일본인 유지들은 경성부 편입이 아닌 '''영등포부''' 승격을 주장했다. 영등포 지역 일본인들의 주장이 반영되지 않은 이유는 인천권의 경성부 추가 편입을 염두에 둔, '대경성계획'의 일환으로 영등포 지역의 경성부 편입을 추진하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1920년대에도 영등포의 경성부 편입이 고려되기는 했지만 경성부 편입은 시기상조라는 주장이 강했었고 1925년 한강 대홍수 사태로 사실상 편입 계획이 무산된 적이 있다. 그런데 1930년대 초반에 들어서면서 경성부 확장 초안에 노량진과 흑석동이 포함되었다가 갑자기 영등포도 경성부 편입 대상 지역에 포함되었다. 만약에 일본인들들 의견대로 경성부 편입대신 영등포부 승격이 이루어졌다면, 지금의 서울 서남부와 광명시 일대는 지금의 인천광역시마냥 서울특별시와 접하는 희대의 광역시급 서울 근교 위성도시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자세한 내용은 영등포구/역사 참조.
1936년(쇼와 11년) 조선총독부 경기도 고시 제32호(굵은 글씨 처리된 곳은 경성부에 재편입된 옛 한성부 지역)
'''구 행정구역'''
'''신 행정구역'''
경성부
정동, 서계동, 중림동, 합동, 미근동, 평동, 송월동, 교남동, 냉천동, 천연동, 옥천동, 관동(官洞), 교북동, 홍파동, 행촌동, 현저동, 누상동, 누하동, 옥인동, 신교동, 청운동, 궁정동, 효자동, 창성동, 통동(通洞), 통의동, 체부동, 필운동, 사직동, 내자동, 적선동, 도령동(都染洞, 도렴동), 수창동(俞昌洞), 당주동, 서린동, 청진동, 수송동, 중학동, 간동(諫洞), 송현동, 소격동, 화동, 팔판동, 삼청동, 가회동, 제동, 안국동, 경운동, 관훈동, 견지동, 공평동, 관철동, 인사동, 낙원동, 돈의동, 익선동, 운니동, 계동, 원동(苑洞), 와룡동, 권농동, 수은동(授銀洞), 봉익동, 훈정동, 관수동, 장사동, 예지동, 인의동, 원남동, 연지동, 효제동, 연건동, 숭사동(崇四洞), 숭삼동(崇三洞), 숭이동(崇二洞), 숭일동(崇一洞), 혜화동, 동숭동, 이화동, 충신동, 이촌동, 도화동, 마포동, 창신동, 숭인동
경성부
정동정, 서계정, 중림정, 합정, 미근정, 평동정, 송월정, 교남정, 냉천정, 천연정, 옥천정, 관동정(官洞町), 교북정, 홍파정, 행촌정, 현저정, 누상정, 누하정, 옥인정, 신교정, 청운정, 궁정정, 효자정, 창성정, 통인정, 통의정, 체부정, 필운정, 사직정, 내자정, 적선정, 도령정(都染洞, 도렴정), 내수정, 당주정, 서린정, 청진정, 수송정, 중학정, 사간정, 송현정, 소격정, 화동정, 팔판정, 삼청정, 가회정, 제동정, 안국정, 경운정, 관훈정, 견지정, 공평정, 관철정, 인사정, 낙원정, 돈의정, 익선정, 운니정, 계동정, 원서정, 와룡정, 권농정, 수은정(授銀町), 봉익정, 훈정정, 관수정, 장사정, 예지정, 인의정, 원남정, 연지정, 효제정, 연건정, 명륜정사정목, 명륜정삼정목, 명륜정이정목, 명륜정일정목, 혜화정, 동숭정, 이화정, 충신정, 이촌정, 도화정, 마포정, 창신정, 숭인정
고양군 '''용강면'''
아현리, 신공덕리, 공덕리, 염리, 사정리, 동막상리(東幕上里), 동막하리(東幕下里), 신수철리(新水鐵里), 구수철리(舊水鐵里), 현석리, 신정리, 가중리, 창전리, 상수익리(上水溢里), 하수익리(下水溢里), 여률리(汝栗里), 당인리
아현정, 신공덕정, 공덕정, 염리정, 사정정, 용강정, 대흥정, 신수정, 구수정, 현석정, 신정정, 가중정, 창전정, 상수일정(上水溢町), 하수일정(下水溢町), 여의도정, 당인정
고양군 '''연희면'''
대현리, 노고산리, 창천리, 동세교리(東細橋里), 연희리(남가좌리 중 홍제원천 좌안 지역을 포함), 신촌리, 봉원리, 아현북리(兒峴北里), 서세교리(西細橋里), 합정리, 망원리
대현정, 노고산정, 창천정, 동교정, 연희정, 신촌정, 봉원정, 북아현정, 서교정, 합정정, 망원정
고양군 '''은평면'''
홍제내리(夕濟內里, 홍제외리(夕濟外里) 중 홍제원천(夕濟院川) 좌안 지역을 포함), 홍지리, 신영리, 부암리
홍제정, 홍지정, 신영정, 부암정
고양군 '''숭인면'''
성북리, 돈암리(정릉리 일부 포함), 신설리, 용두리, 안암리, 종암리, 제기리, 청량리, 회기리, 이문리, 휘경리, 전농리, 답십리
성북정, 돈암정, 신설정, 용두정, 안암정, 종암정, 제기정, 청량리정, 회기정, 이문정, 휘경정, 전농정, 답십리정
고양군 '''한지면'''
이태원리, 둔지리(屯芝里), 한강리(漢江里), 보광리, 주성리, 동빙고리, 서빙고리, 사근리, 마장리, 행당리, 신촌리, 수철리(水鐵里), 하왕십리, 상왕십리, 신당리, 두모리(斗豆里)
이태원정, 둔지정/한강통(현 용산동4가·6가), 한남정, 보광정, 주성정, 동빙고정, 서빙고정, 사근정, 마장정, 행당정, 응봉정, 금호정, 하왕십리정, 상왕십리정, 신당정, 옥수정
시흥군 영등포읍
영등포리, 당산리, 양평리(안양천 좌안 지역을 제외)
영등포정, 당산정, 양평정
시흥군 북면
동작리, 흑석리, 본동리, 노량진리, 번대방리(番大方里, 상도리천(上道里川; 대방천) 우안 지역), 신길리, 도림리(상도리천 우안 지역)
동작정, 흑석정, 본동정, 노량진정, 번대방정, 신길정, 도림정(현 도림동, 문래동)
시흥군 동면
상도리
상도정
김포군 양동면
양화리와 염창리(각기 안양천 우안 지역), 목동리(안양천 우안 지역)
양화정, 양평정
(변동 없음)태평통 일정목, 태평통 이정목, 서소문정, 남대문통 사정목, 남대문통 오정목, 오나리마치(어성정), 요시노초 니초메(길야정 이정목), 요시노초 잇초메(길야정 1정목), 후루이치초(고시정), 봉래정 사정목,
봉래정 삼정목, 봉래정 이정목, 봉래정 일정목, 이즈미마치(화천정), 의주통 이정목, 다케조에마치 산초메(죽첨정 삼정목), 다케조에마치 니초메(죽첨정 이정목), 의주통 일정목, 다케조에마치 잇초메(죽첨정 일정목), 서대문정 이정목, 서대문정 일정목, 광화문통, 종로 일정목, 종로 이정목, 종로 삼정목, 종로 사정목, 종로 오정목, 종로 육정목, 방산정, 후나하시초(주교정), 하야시마치(임정), 가사이마치(입정정), 수표정, 나가하시초(장교정), 수하정, 삼각정, 남대문통 일정목, 자야마치(다옥정), 무교정, 고가네마치 잇초메(황금정 일정목), 고가네마치 니초메(황금정 이정목), 고가네마치 산초메(황금정 삼정목), 고가네마치 욘초메(황금정 사정목), 고가네마치 고초메(황금정 오정목), 고가네마치 롯초메(황금정 육정목), 고가네마치 나나초메(황금정 칠정목), 광희정 이정목, 광희정 일정목, 하쓰네마치(초음정), 하나조노마치(화원정), 사쿠라이초 니초메(앵정정 이정목), 사쿠라이초 잇초메(앵정정 일정목), 와카구사마치(약초정), 영락정 이정목, 영락정 일정목, 명치정 이정목, 명치정 일정목, 남대문통 이정목, 하세가와마치(장곡천정), 남대문통 삼정목, 혼마치 잇초메(본정 일정목), 혼마치 니초메(본정 이정목), 혼마치 산초메(본정 삼정목), 혼마치 욘초메(본정 사정목), 혼마치 고초메(본정 오정목), 나미키마치(병목정), 동사헌정, 서사헌정, 신정, 야마토마치 산초메(대화정 삼정목), 야마토마치 니초메(대화정 이정목), 야마토마치 잇초메(대화정 일정목), 히노데마치(일지출정), 왜성대정, 고토부키(수)정, 남산정 삼정목, 남산정 이정목, 남산정 일정목, 아사히마치 산초메(욱정 삼정목), 아사히마치 니초메(욱정 이정목), 아사히마치 잇초메(욱정 일정목), 기타요네쿠라(북미창)정, 미나미요네쿠라(남미창)정, 미사카 도리(삼판통), 오카자키초(강기정), 한강통, 아오바초 잇초메(청엽정 일정목), 아오바초 니초메(청엽정2정목), 아오바초 산초메(청엽정 삼정목), 미야코마치(경정), 사카에마치(영정), 모토마치 잇초메(원정 일정목), 모토마치 니초메(원정 이정목), 모토마치 산초메(원정 삼정목), 모토마치 욘초메(원정 사정목), 이와네초(암근정), 야마테마치(산수정), 시미즈(청수)정, 야요이마치(미생정), 오시마초(대도정), 니시키마치(금정)
* 고양군 연희면과 시흥군 북면의 잔여 지역은 각각 고양군 은평면과 시흥군 동면에 편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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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경성부의 행정구역 확장 당시 상황.
경성부 내의 회색 점선과 괄호는 1943년 설치된 7개 구(區). 1944년 신설된 마포구는 표현되어있지 않다.
1939년에 일제는 ''''경인(京仁) 일체화''''의 목적으로(병참기지화의 목적이 짙었음) 당시 시흥군 동면(현 서울 금천구, 구로구 동부, 영등포구 대림동, 동작구 신대방동, 관악구 대부분), 서면(현 경기 광명시 일부(지금의 광명시 광명동, 철산동, 하안동 일대 및 소하동 북부), 부천군 소사면/부내면/오정면(현 경기 부천시, 서울 구로구 서부, 인천 부평구, 계양구 남부), 계양면(현 인천 계양구 북부), 서곶면(현 인천 서구), , 김포군 양서면/양동면(현 서울 강서구, 양천구), 일대를 경성부에 편입시키는 방안(이른바 제2차 대경성계획)을 검토한 적이 있었다. 만일 이러한 경성부 추가 대확장이 단행되었다면 지금의 부평, 부천, 양천 일대는 드넓은 평지를 기반으로 강남급의 어마어마한 번화가로 개발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 大擴張(대확장)되는京城府域(경성부역) 이러한 과감한 시역 확장 떡밥은 1970년에도 되풀이된다. 아무튼 경성부 추가 확장이 무산됨에 따라 경성부 추가 편입 검토지역 중 현재의 부평구 및 계양구 남부, 서구 지역은 1940년 인천부 편입에 따라 경인시가지계획지구와 별개인, 인천부 시가지계획구역(현재의 인천광역시 도시계획구역)으로 편입되었고, 기타 지역은 경인시가지계획지구로 잡혀 경인선을 따라 공업, 주거지역으로의 개발이 계획되었다. (추가 참고 논문 : 염복규. (2007.2). 1930-40년대 인천지역의 행정구역 확장과 시가지계획의 전개. 인천학연구, 6, 83-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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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대 이전 경성부는 북촌의 조선인 거주지와 남촌+용산의 일본인 거주지의 이중 도시적 모습을 띄었다. 경성부의 일본인 거주지로는 남촌과 용산을 꼽을 수 있었다. 남촌은 남산 북면의 구릉으로써 1883년 이후 일본인 상인들의 영향력이 미쳐서 일본인 거주지가 되었다. 이후 일본인들은 청일전쟁 승리 이후 조선에서 패권을 잡으면서 남대문 방면으로 영향력을 확대하였고, 러일전쟁 시기에 이르면 남촌을 장악하였다. 용산은 크게 구용산과 신용산으로 나눌 수 있는데, 그 대부분이 한강변 모래톱이었던 곳이었다. 일본인들은 이 지대를 간척하여 자신들의 거주지로 삼았고, 일본군이 용산에 주둔하여 철도교통의 중심지가 되었다. 식민 행정부 당국은 기반 인프라 건설에 있어서 일본인 거주지에 대한 노골적인 특혜를 부여하였다. 이후 1920년대 중반 일제에 의해 남대문통의 북촌으로 조선총독부나 조선신사가 건설되면서 기존 북촌의 동(洞) 행정체계, 남촌의 정(町) 행정체계로 이원화되었던 경성의 행정구역이 결국 정(町)으로 일원화된다. 이는 1925년 있었던 대홍수로 용산 등 한강변의 일본인 거주지가 큰 피해를 입었던 경험도 영향을 끼친것으로 보인다. 이 와중에 조선총독부 건축으로 인해 경복궁이 매우 심하게 훼손되었다. 이후 중일전쟁 개전 이후 조선의 병참기지화가 가속화되면서 일본의 조선을 더욱 가혹하게 지배했고, 경성부도 마찬가지였다.
행정구역 개편에 인해 꼬여 버린 지번을 정리할 목적으로 한강통( 둔지정, 이촌정 중 옛 둔지면 사초리 지역)을 한강통 일정목~삼정목, 용산정 일정목~육정목, 연병정 등으로 분할했으며, 도림정으로부터 사옥정을 분리하여 신설하였다.

2.6.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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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서울과 현대의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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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이후 현재(1995년)까지 서울특별시 행정구역 변천도 참고로 1911년 경성부의 영역은 영등포와 잠실 부분을 빼면 1949년 서울시의 영역과 매우 비슷하다. (과거 경기도 소재 서울시 도시계획구역 - 이들 지역은 한때 서울특별시 행정구역으로의 정식 편입이 고려된 적이 있다. 이들 도시계획구역은 1982년(광명시 북부), 1986년(부천시 오정), 1990년(과천시), 1995년(고양시 신도, 남양주시 별내, 구리시 갈매)에 차례대로 해제되었다. - 포함)
유감스럽게도, 서울특별시의 경계 변천사를 다룬 지도들 간에 상당한 오류나 차이가 있다(...). 예를 들면, 서울시에서 발간한 역사 관련 서적에 실린 지도에서는 1973년 진관동 서울 편입 내용이 누락되었다든지, 바로 위에 게시된 1914년 이후 현재(1995년)까지 서울특별시 행정구역 변천도에는1936년 상도천 및 반포동 쪽과 1949년 잠실쪽의 경계 오류가 있다든지. 몇몇 중고교 지리부도에서는 구한말 한성부의 경계로 1914년에 축소된 경성부의 경계를 써먹는다는지(...). 심지어 서울시에서 발간한 자료, 도서에서 조차도 관련 오류가 왕왕보일 정도. 그 자료를 참고하는 위키러는 이점을 유의해두시길 바란다.
1947년 모습으로 추정되는 서울특별시 지도

2.6.1. 서울특별시 출범과 1949년 추가 확장


해방 이후 1946년 미 군정청에 의해서 도와 동급의 "'''서울특별자유시'''"가 되었고, 동시에 일본식 동명을 정리하였다. 영문으로는 'Seoul Independent City'였으나 한국인 직원이 '독립시'는 이상하다고 하여 번역과정에서 특별자유시로 번역한 것이다. 그리고 1948년 광복절, 정부수립기념국민축하식 행사와 함께 대한민국의 수도가 되었다. 서울특별자유시 승격 이전에는 광복 이후 서울은 잠시 동안 '''경기도 서울시'''였다.
'''구행정구역'''
'''신행정구역'''
중구
태평통1정목, 태평통2정목, 남대문통1정목, 남대문통2정목, 남대문통3정목, 남대문통4정목, 남대문통5정목, 어성정(御成町), 길야정(吉野町)1정목, 길야정2정목, 고시정(古市町), 봉래정1정목, 봉래정2정목, 방산정, 주교정, 임정(林町), 입정정, 수표정, 장교정, 삼각정, 다옥정(茶屋町), 무교정, 황금정(黃金町)1정목, 황금정2정목, 황금정3정목, 황금정4정목, 황금정5정목, 황금정6정목, 황금정7정목, 광희정1정목, 광희정2정목, 초음정(初音町), 화원정(花園町), 앵정정(櫻井町)1정목, 앵정정2정목, 약초정(若草町), 영락정(永樂町)1정목, 영락정2정목, 명치정(明治町)1정목, 명치정2정목, 장곡천정(長谷川町), 본정(本町)1정목, 본정2정목, 본정3정목, 본정4정목, 본정5정목, 병목정(並木町), 동사헌정, 서사헌정, 신정(新町), 대화정(大和町)1정목, 대화정2정목, 대화정3정목, 일지출정(日之出町), 왜성대정(倭城臺町), 수정(壽町), 남산정1정목, 남산정2정목, 남산정3정목, 욱정(旭町)1정목, 욱정2정목, 욱정3정목, 남미창정(南米倉町), 북미창정(北米倉町)
중구
태평로1가, 태평로2가, 남대문로1가, 남대문로2가, 남대문로3가, 남대문로4가, 남대문로5가, 양동(陽洞), 도동(桃洞)1가, 도동2가, 동자동, 봉래동1가, 봉래동2가, 방산공, 주교동, 산림동, 입정동, 수표동, 장교동, 수하동, 삼각동, 다동, 무교동, 을지로1가, 을지로2가, 을지로3가, 을지로4가, 을지로5가, 을지로6가, 을지로7가, 광희동1가, 광희동2가, 오장동, 화원동, 인현동1가, 인현동2가, 초동, 저동1가, 저동2가, 명동1가, 명동2가, 소공동, 충무로1가, 충무로2가, 충무로3가, 충무로4가, 충무로5가, 쌍림동, 장충동1가, 장충동2가, 묵정동, 필동1가, 필동2가, 필동3가, 남학동, 예장동, 주자동, 남산동1가, 남산동2가, 남산동3가, 회현동1가, 회현동2가, 회현동3가, 남창동, 북창동
종로구
누상정, 누하정, 옥인정, 신교정, 청운정, 궁정정, 효자정, 창성정, 통인정, 통의정, 체부정, 필운정, 사직정, 적선정, 도렴정, 내수정, 당주정, 서대문정(西大門町)1정목, 서대문정2정목, 광화문통(光化門通), 서린정, 종로1정목, 종로2정목, 종로3정목, 종로4정목, 종로5정목, 종로6정목, 청진정, 수송정, 중학정, 사간정, 송현정, 소각정, 화동정, 팔판정, 삼청정, 가회정, 재동정, 안국정, 경운정, 관훈정, 견지정, 공평정, 관철정, 인사정, 낙원정, 돈의정, 익선정, 운니정, 계동정, 원서정, 와룡정, 권농정, 수은정(授銀町), 봉익정, 훈정정, 관수정, 장사정, 예지정, 인의정, 원남정, 연지정, 효제정, 연건정, 명륜정1정목, 명륜정2정목, 명륜정3정목, 명륜정4정목, 혜화정, 동숭정, 이화정, 충신정
종로구
누상동, 누하동, 옥인동, 신교동, 청운동, 궁정동, 효자동, 창성동, 통인동, 통의동, 체부동, 필운동, 사직동, 내자동, 적선동, 도렴동, 내수동, 당주동, 신문로1가, 신문로2가, 세종로, 서린동, 종로1가, 종로2가, 종로3가, 종로4가, 종로5가, 종로6가, 청진동, 수송동, 중학동, 사간동, 송현동, 소각동, 화동, 팔판동, 삼청동, 가회동, 재동, 안국동, 경운동, 관훈동, 견지동, 공평동, 관철동, 인사동, 낙원동, 돈의동, 익선동, 운니동, 계동, 원서동, 와룡동, 권농동, 묘동, 봉익동, 훈정동, 관수동, 장사동, 예지동, 인의동, 원남동, 연지동, 효제동, 연건동, 명륜동1가, 명륜동2가, 명륜동3가, 명륜동4가, 혜화동, 동숭동, 이화동, 충신동
동대문구
돈암정, 창신정, 숭인정, 신설정, 용두정, 안암정, 제기정, 청량리정, 회기정, 이문정, 휘경정, 종암정, 답십리정, 성북정
동대문구
돈암동, 창신동, 숭인동, 신설동, 용두동, 안암동, 제기동, 청량리동, 회기동, 이문동, 휘경동, 종암동, 답십리동, 성북동
성동구
사근정, 마장정, 행당정, 응봉정, 금호정, 하왕십리정, 상왕십리정, 신당정, 옥수정
성동구
사근동, 마장동, 행당동, 응봉동, 금호동, 하왕십리동, 상왕십리동, 신당동, 옥수동
서대문구
정동정, 서소문정, 봉래정3정목, 봉래정4정목, 화천정(和泉町), 의주통1정목, 의주통2정목, 중림정, 합동정, 죽첨정(竹添町)1정목, 죽첨정2정목, 죽첨정3정목, 대현정, 노고산정, 창천정, 연희정, 신촌정, 봉원정, 북아현정, 평동정, 송월정, 교남정, 냉천정, 천연정, 옥천정, 관동정(官洞町), 교북정, 홍파정, 행촌정, 현저정, 홍제정, 홍지정, 신영정, 부암정
서대문구
정동, 서소문동, 만리동1가, 만리동2가, 순화동, 의주로1가, 의주로2가, 중림동, 합동, 충정로1가, 충정로2가, 충정로3가, 대현동, 노고산동, 창천동, 연희동, 신촌동, 봉원동, 북아현동, 평동, 송월동, 교남동, 냉천동, 천연동, 영천동, 교북동, 홍파동, 행촌동, 현저동, 홍제동, 홍지동, 신영동, 부암동
용산구
서계정, 삼판정(), 강기정(岡岐町), 연병정(練兵町), 한강통1정목, 한강통2정목, 한강통3정목, 용산정1정목, 용산정2정목, 용산정3정목, 용산정4정목, 용산정5정목, 용산정6정목, 이태원정, 한남정, 보광정, 주성정, 동빙고정, 서빙고정, 이촌정, 청엽정(青葉町)1정목, 청엽정2정목, 청엽정3정목, 경정(京町), 영정(英町), 원정(元町)1정목, 원정2정목, 원정3정목, 원정4정목, 암근정(岩根町), 산수정(山手町), 청수정, 미생정(彌生町), 대도정(大嶋町), 금정(錦町)
용산구
서계동, 후암동, 갈월동, 남영동, 한강로1가, 한강로2가, 한강로3가, 용산동1가, 용산동2가, 용산동3가, 용산동4가, 용산동5가, 용산동6가, 이태원동, 한남동, 보광동, 주성동, 동빙고동, 서빙고동, 이촌동, 청파동1가, 청파동2가, 청파동3가,문배동, 신계동, 원효로1가, 원효로2가, 원효로3가, 원효로4가, 청암동, 산천동, 신창동, 도원동, 용문동, 효창동
마포구
아현정, 공덕정, 신공덕정, 도화정, 마포정, 토정정, 용강정, 염리정, 대흥정, 신수정, 구수정, 현석정, 신정정, 하중정, 창전정, 동교정, 서교정, 상수일정(上水溢町), 하수일정(下水溢町), 당인정, 합정정, 망원정, 율도정(栗嶋町)
마포구
아현동, 공덕동, 신공덕동, 도화동, 마포동, 토정동, 용강동, 염리동, 대흥동, 신수동, 구수동, 현석동, 신정동, 하중동, 창전동, 동교동, 서교동, 상수동, 하수동, 당인동, 합정동, 망원동, 율도동(栗嶋洞)
영등포구
여의도정, 동작정, 흑석정, 본동정, 노량진정, 상도정, 번대방정(番大方町), 신길정, 도림정, 영등포정, 당산정, 양평정, 양화정, 사옥정(絲屋町)
영등포구
여의도동, 동작동, 흑석동, 본동, 노량진동, 상도동, 대방동, 신길동, 도림동, 영등포동, 당산동, 양평동, 양화동, 사옥동(絲屋洞)
1949년에 광복절에 서울특별시로 명칭이 확정되고 경기도 고양군(現 경기도 고양시) 뚝도면, 숭인면, 은평면과 시흥군 동면 도림리, 구로리, 번대방리 등(현재의 구로구 구로동, 신도림동, 영등포구 대림동, 동작구 신대방동 일대)을 편입하여 시역(市域)을 확장하였다. 이 때 동대문구에서 성북구가 신설되었다(9구). 동시, 신설동 일부로 보문동(보문사로부터 유래되었다.)을, 돈암동으로부터 삼선동을 분리하여 설치하였다. 1949년 확장은 강북쪽은 1914년에 일제에 의해 고양군으로 넘어간 성저십리[9]를 도로 서울시로 되찾아오는 것이라는 의미와 영등포쪽은 1936년에 시흥군 동면으로 되었던, 경성부로 편입되지 못한 시흥군 북면 잔여지역을 정리하는 차원이라는 의미가 있었다고 보면 될 것이다.
사실 월곡동, 미아동, 정릉동 일대의 주민들의 서울 편입 추진 운동이 있기도 했다. 해당 지역에는 일제 말기에 경성부 추가 편입이 고려된 지역이었다고 한다.[10]
'''1949년 8월 15일 서울특별시 행정 편입지역'''
(굵은 글씨 처리된 곳은 서울시에 재편입된 옛 한성부 지역)
*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 현 은평구 대부분, 종로구 구기동, 평창동, 서대문구 서부(홍은동, 북가좌동, 남가좌동), 마포구 서부(상암동, 성산동 등)
*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현 성북구 북부(정릉동, 길음동, 석관동, 장위동, 월곡동), 강북구 전역
* 경기도 고양군 뚝도면 : 현 광진구, 송파구 잠실 일대, 성동구 중 중랑천 이동지역(성수동 등), 중랑구 면목동, 동대문구 장안동
* 경기도 시흥군 동면 일부 : 현 영등포구 대림동, 구로구 구로동, 신도림동, 동작구 신대방동. 도림리와 번대방리(대방동)가 1936년과 1949년에 나뉘어서 편입되었기 때문에, 1949년에 편입된 지역에 '신'자가 붙게 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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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서울특별시 행정구역 확장 당시 상황. 이 시기에 편입된 동네는 '동'이 아닌 '리'로 편입되었으며 (예: 경기도 시흥군 동면 도림리 →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신도림'''리'''), 1950년 3월 15일에 동으로 전환되었다.
개칭된 경우
* 서대문구 은평출장소 홍제외리 → 서대문구 은평출장소 홍은동
* 성동구 둑도출장소 서둑도리 → 성동구 둑도출장소 성수동일가
* 성동구 둑도출장소 동둑도리 → 성동구 둑도출장소 성수동이가
* 영등포구 번대방리 → 영등포구 신대방동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경 인민군이 전면 남침을 개시하면서 6.25 전쟁이 발발했다. 전쟁 초기에는 미아리, 창동 일대에서 방어전이 치열했는데 당시 그곳이 서울시의 경계였기 때문이다. 당시 서울시 최북단은 우이동, 최남단은 구로동과 신도림동, 대림동이었다. (현재는 최북단은 도봉동, 최남단은 내곡동)
1950년 6.25 전쟁 때는 북한군의 점령으로 대전부산에게 수도 지위를 이임하기도 했다. 부산에 더부살이했을 적에는 부산으로 피난온 서울시민들의 행정지원을 위한 기구인 '''서울특별시 부산출장소'''가 설치되기도 했었다. 그리고 휴전 후인 1953년에 수도 지위를 되찾게 되었다. 1958년부터 1961년까지 청계천 복개공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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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의 모습
사실 지금도 서울특별시기(旗)가 있다. 다만 저 시기와 다르게 색상에 변화를 준 건 아니고, 하얀 깃발에 1996년에 제정된 현 서울시 휘장을 박아놓은 수준이지만.

2.6.1.1. 6.25 이후 부평·영등포으로의 수도 이전 논의

서울 수복 이후에는 강북이 군사적으로 전방지역에 있다는 문제와 전쟁으로 파괴된 서울 구도심을 복구하는 대신에 아예 한강이남의 새로운 땅에 신시가지를 조성하는 게 도시계획상으로 낫다는 의견이 대두되었기 때문에 기존의 서울 사대문안 지역은 역사적 상징으로 남겨두고 아예 수도를 지금의 부평(구 부평도호부 지역 중 1940년 인천으로 편입된 곳.), 부천(지금의 시흥시 북부인 소래읍 포함.), 영등포(지금의 영등포구, 구로구 동부, 동작구 서부 일대. 다만 이 지역은 이미 행정상 6.25 이전에 서울특별시로 편입된 상태였다. 그러나 당시의 영등포는 행정구역은 서울 소속이었으나, 당시만 해도 독자적인 지역정체성이 남아있었다.), 시흥(지금의 금천구, 관악구, 광명시 일대. 1963년 서울 대확장 이전에는 '시흥'이라고 하면 보통 지금의 금천구 일대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았다.) 일대로 옮기자는 논의가 나온 적이 있었다.
해당 블로그글 당시 기사 영등포와 부평은 한강이라는 거대한 자연장벽의 남쪽에 있어서 강북지역보다 수도 방위에 유리한 구조인데다가 '''영등포와 부평에 걸친 넓은 평야지대인 부평평야''' 는 신시가지 후보로서 매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과거 북쪽 왕조를 막으려고 강남에 자리를 잡은 백제의 전술의 재림이라 할 수 있다)
계획된 신도시의 예상 행정구역은 서쪽으로는 지금의 부평구, 동쪽으로는 지금의 금천구, 관악구 일대로 잡혔다. 만일 이 계획이 실행되었다면 전쟁 이전에 이미 서울에 편입된 지금의 영등포구, 구로구 동부, 동작구를 비롯하여 지금의 관악구, 금천구(안양 석수동 포함), '''광명시'''(안양 박달동 포함), 강서구, 양천구, '''부천시, 부평구, 계양구, 시흥시 북부''' 일대가 신수도의 행정구역에 편입되었을 것이다. 대신에 지금의 도봉구, 노원구, 강남3구, 강동구 일대는 그저 경기도로 남았을 듯 그리고 수도 서울에 둘러싸인 인천(...) 다시 말해 한때 일제가 경성부 추가 편입 대상으로 검토했던 지역들이 새로운 수도에 편입 될 수 있었던 상황.[11]
수도 서울을 북한한테 털렸던 기억이 너무나 생생했던 시대 상황 때문인지 이러한 계획에 서울특별시는 가시적인 반발대신에 새로운 수도 후보지 입지 조사에 협조하는 등의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당시 한국이 경제적으로 빈곤국이었던 한계(단순한 저개발국이 아니라, 전쟁으로 만신창이가 된 상태였다. 식량 원조로 버텨내기에도 빠듯한 상황에 거창한 도시계획 따위는 꿈도 꿀 수 없었다는 얘기다.) 때문에 이 계획이 무산되고 말았다.

2.6.2. 1963년 대확장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서울특별시는 국무총리 직속이 되었으며, 서울특별시장국무회의에 참석할 수 있게 되었다. 1963년에 서울특별시 면적의 '''대대적인 확장'''이 이루어져 오늘날 서울시 모양새의 기반이 되고 있다. 당시 정부가 서울시 편입 대상지를 물색하기 위해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지리학과에 지역 조사를 위탁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대규모로 확장하고 나서도 뭔가 아쉬웠던지 1963년 9월 17일에 서울 편입을 염두에 두고 경기도 일부 지역도 서울시 도시계획에 포함시켰다.[12](건설부 고시 제547호 원문) 참고로 1963년 서울시 신규 편입지들이 서울시 도시계획구역에 편입된 것은 1963년 8월 28일이다.건설부 고시 제524호 원문
사실 1963년 서울 대확장에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서울 대확장 계획에 대해 박경원 내무부 장관과 박창원 경기도지사가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으나 당시 윤태일 서울특별시장이 군사정권의 실세였다는 버프로 내무부 장관과 도지사와의 기싸움에서 승리하여 대확장을 단행했다는 설이 있다. 강남 개발을 담당했던 모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이 때 서울 대확장이 단행 안 되었다면 강남 개발이 지지부진 했을 거라고... 그리고 시흥군 동면(지금의 금천구, 관악구)은 원래 서울시 편입 대상지가 아니었는데, 도시계획상 서울 편입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기되어 서울 편입 대상지에 포함되었다고 한다.
도시공학을 전공한 박사가 출연한 모 팟캐스트에 따르면 1960년대 서울 대확장 추진 초기에 당국에서 눈독을 들인 곳이 경인선 지역(부천, 광명북부, 부평, 인천 방면)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그 방침이 바뀌어서 부천군 소사읍이 반토막난 채로 동부지역이 서울로 편입되는 데 그쳤다는 야사가 있었다고...
이 때 경기도 김포군, 부천군, 시흥군, 광주군, 양주군 일대를 영등포구나 성동구, 성북구로 각각 편입하였는데 그 중 편입된 '''광주군 일대와 시흥군 신동면은 바로 오늘날의 강남 지역으로 성장하였다'''. 60년대 사이 인구가 250만에서 550만으로 두 배 이상 증가하면서 확장이 불가피해졌다. 이와 같은 인구증가 추세를 당국이 의식한 듯이 당시 시골이었던 강남, 강서, 노원 등지 또한 서울로 편입시킨 것으로 보인다.
'''1963년 1월 1일 서울특별시 행정 편입지역 및 경계 조정'''
'''구 법정구역'''
'''신 법정구역'''
'''비고'''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 상봉리, 중하리, 묵동리, 망우리, 신내리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망우출장소 상봉동, 중화동, 묵동, 망우동, 신내동, 면목동
중랑구(면목동 제외) 1914년 구지면과 망우리면이 구리면으로 통합되기 이전, '망우리면'의 영역에 해당된다. 현재의 구리시는 '구지면'만 해당되는 셈. 중하리 주민들의 요구로 인하여 중화동으로 개칭.
서울특별시 성동구 면목동
현 중랑구 면목동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창동리, 월계리, 공덕리, 하계리, 중계리, 상계리, 도봉리, 방학리, 쌍문리
서울특별시 성북구 노해출장소 창동, 월계동, 공릉동, 하계동, 중계동, 상계동, 도봉동, 방학동, 쌍문동
도봉구, 노원구 전역. 중복 지명을 피하기 위하여 공덕리를 공릉동으로 개칭.
경기도 시흥군 동면 시흥리, 독산리, 가리봉리, 신림리, 봉천리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관악출장소 시흥동, 독산동, 가리봉동, 신림동, 봉천동
금천구 전역, 관악구 봉천동과 신림동, 구로구 가리봉동. 시흥군 동면 중 유일하게 편입되지 않고 남은 안양리는 안양읍으로 편입되어 '신안양리(新安養里)'가 되었다가, 안양시 승격과 함께 석수동이 되었다.
경기도 시흥군 신동면 양재리, 원지리, 우면리, 사당리, 방배리, 서초리, 반포리, 잠실리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신동출장소 양재동, 원지동, 우면동, 사당동, 방배동, 서초동, 반포동, 잠원동
서초구 대부분, 동작구 사당동, 관악구 남현동. 중복 지명을 피하기 위하여 잠실리와 신원리를 잠원동과 원지동으로 각각 개칭.
경기도 부천군 소사읍 오류리, 고척리, 개봉리, 궁리, 천왕리, 항리, 온수리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오류출장소 오류동, 고척동, 개봉동, 궁동, 천왕동, 항동, 온수동
구로구 안양천 이서지역(고척동, 오류동, 개봉동, 온수동 등)으로 1914년 부군면 통폐합 이전에는 부평군 수탄면과 옥산면 항동에 해당되는 지역이다.
경기도 부천군 오정면 오곡리, 오쇠리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양서출장소 내발산동, 외발산동, 공항동, 과해동, 방화동, 개화동, 오곡동, 오쇠동
강서구, 양천구 전역. 1914년 부군면 통폐합 이전에는 오곡동, 오쇠동을 제외하고는 전부 양천군이었다. 김포국제공항김포시가 아닌 이곳에 있는 이유가 이것 때문이다.
경기도 김포군 양서면 내발산리, 외발산리, 송정리, 과해리, 방화리, 개화리
경기도 김포군 양동면 가양리, 마곡리, 염촌리, 등촌리, 목동리, 신당리, 신정리, 화곡리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양동출장소 가양동, 마곡동, 염촌동, 등촌동, 목동, 신월동, 신정동, 화곡동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역삼리, 양재리, 포이리, 반포리, 논현리, 신사리, 학리, 압구정리, 청담리, 삼성리, 대치리, 염곡리, 내곡리, 신원리
서울특별시 성동구 언주출장소 역삼동, 도곡동, 포이동, 개포동, 논현동, 신사동, 학동, 압구정동, 청담동, 삼성동, 대치동, 염곡동, 내곡동, 신원동
강남구(수서동, 세곡동, 율현동, 일원동, 자곡동 제외), 서초구 내곡동, 염곡동, 신원동
경기도 광주군 대왕면 일원리, 수서리, 자곡리, 율현리, 세곡리
서울특별시 성동구 송파출장소 송파동, 석촌동, 삼전동, 가락동, 문정동, 장지동, 거여동, 마천동, 이동, 방이동, 오금동, 일원동, 수서동, 자곡동, 율현동, 세곡동
현 강남구 수서동, 세곡동, 율현동, 일원동, 자곡동. 대왕면의 남은 지역은 이후 이 지역이 성남시로 승격됨과 동시에 편입되었다.
경기도 광주군 중대면 송파리, 석촌리, 삼전리, 가락리, 문정리, 장지리, 거여리, 마천리, 이리, 방이리, 오금리
잠실을 제외한 송파구 전역
경기도 광주군 구천면 명일리, 하일리, 고덕리, 상일리, 길리, 둔촌리, 성내리, 풍납리, 곡교리, 암사리
서울특별시 성동구 천호출장소 명일동, 하일동, 고덕동, 상일동, 길동, 둔촌동, 성내동, 풍납동, 천호동, 암사동
강동구 전역 및 송파구 풍납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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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서울특별시의 행정구역 확장 당시 상황.
김포군, 부천군, 시흥군을 편입해온 영등포구, 광주군을 편입해온 성동구, 양주군을 편입해온 성북구가 엄청나게 넓어졌다. 특히 '''성동구'''는 1975년까지 '''한강 남북에 모두 걸쳐있던''' 유일한 구였고, '''영등포구'''는 1970년 인구조사 당시 '''1,182,759명'''으로 최다치를 찍은 구였다. 당시의 영등포구는 '''약 60년 전'''의 인구가 '''현재 경기도 제 1도시인 수원'''에 맞먹는 구였고, 이는 '''현재까지도 필적할 만한 자치구가 없는''' 수치이다.

2.6.2.1. 1960년대 서울 대확장의 가상역사

'''만일 남북분단이 이루어지지 않았더라면'''(혹은 대동강까지 휴전선이 치고올라가는 등 북진통일이 부분적이라도 성공했더라면) 1960년대의 서울 대확장은 지금과 많이 다른 형태로 이루어졌을 여지가 있었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강남의 서울 편입과 강남, 과천의 개발은 남북분단에 따른 안보적 고려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고, 이미 일제강점기에 한강 건너편의 영등포가 독자 승격 대신 경성부(서울)로 강제 편입된 역사가 있으며, 북쪽으로 서울 시역이 대폭 확장되기에는 지형적인 한계(특히 지금의 서울 동북부 권역)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강남은 철도 계획이 없었을 정도의 저지대 늪지대였던데다가 언덕도 많아서 도시개발하기에는 큰 매력이 있던 곳도 아니었다.
위와 같은 가상역사 하에서 항구가 없는 서울의 근본적인 약점을 해결하기 위하여 항구가 있는 인천과의 연계가 도시계획에서 강하게 추구되었을 것이며, 아예 경인선 지역의 대대적인 서울 편입이 추진되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하필 한강 건너편의 영등포가 경성 근교의 공업 위성도시가 아닌, 경성부의 일부로 강제로 편입된 것도 추후의 경인통합을 염두에 둔 대경성계획에 의한 것이었다. 해방 후 여의도 개발의 당초 목표도 이러한 맥락과 연관되어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경인통합 참조.

2.6.3. 1973년 구파발(진관동) 편입과 인접지역의 서울 편입 주장


1973년에는 경기도 고양군 신도면 일부가 서대문구로 편입되어 현재의 서울특별시 경계선이 바로 이 때에 완성되었고(1995년의 안양천, 창릉천 과 2015년의 위례신도시쪽 경계 미세조정을 제외하면), 성북구에서 '''도봉구'''가, 영등포구에서 '''관악구'''가 분리 신설되었다.(11구) 이와 함께 영등포구 중 신동출장소 지역(방배동을 제외한 오늘날의 서초구 지역)을 성동구로 넘겨주었다.
'''1973년 7월 1일 서울특별시 행정 편입지역 및 경계조정'''
* 경기도 고양군 신도면 진관내리, 진관외리, 구파발리 (현 서울시 은평구 진관동)
* 경기도 시흥군 서면 광명리 (현 광명시 광명동) -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개봉동 (현 구로구 개봉동) 간 경계조정
해당 법률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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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신도면 구파발(진관동) 일대 편입 및 도봉구·관악구 분구 당시 상황. 편의상 영등포-관악간 경계는 1975년 이후의 것을 사용했다.
1975년에는 한강정비사업으로 정리된 한강을 경계로 하여 성동구에서 '''강남구'''가 분리 신설되었다.(12구) 이와 함께 각 구(區) 간에 행정구역 조정이 있었다. 아래 표에 언급되지 않은 동네인 안암동-제기동 등에서도 자잘한 경계조정이 이루어졌다. 언급한 동네 간 경계가 직선화 된 것은 그 시기로 보면 된다.
'''1975년 서울특별시 각 구(區) 간 행정구역 조정'''
* 서대문구 구기동, 평창동, 신영동, 홍지동, 부암동, 무악동, 교남동 및 동대문구 숭인동, 창신동(동대문이 있는 동네이다.) : 종로구에 편입. 이로서 동대문이 동대문구에서 종로구 영역 내로 편입되게 되었다. 현재 동대문구에 동대문이 없는 이유가 이 때의 조정 때문.
* 서대문구 정동(덕수궁이 있는 동네이다. 즉, 이때까지만 해도 서울시청 바로 코앞까지가 서대문구 관할이었다.), 서소문동, 순화동, 의주로, 충정로1가(충정로2~3가는 서대문구로 남았다.), 중림동, 만리동 및 성동구 신당동 : 중구에 편입
* 서대문구 상암동, 중동, 성산동, 연희동 일부 : 마포구에 편입, 연희동 일부는 '연'희동의 '남'쪽이라 하여 새로 이름지었던 연남동으로 신설
* 중구 동자동 : 용산구에 편입
* 동대문구 보문동, 도봉구 미아동 일부 : 성북구에 편입, 미아동 일부는 길음동-미아동(혹은 미아리)이라 하면 흔히 그 유명한 '텍사스촌'을 떠올리는데, 사실은 바로 이 길음동에 있다.-으로 신설
* 동대문구 용두동, 답십리동 각 일부 : 성동구에 편입하여 '용'두와 '답'십리에서 한 글자씩 따왔다는 용답동 신설
* 성동구 중곡동, 능동, 군자동 각 일부 : 동대문구에 편입하여 장안동 신설
* 영등포구 독산동 일부 : 관악구 신림동에 편입. 현 조원동(행정동)의 서쪽 절반(구로디지털단지역 인근)에 해당된다.
* 관악구 대방동, 신대방동 일부 : 영등포구 신길동에 편입. 원래 현 신길6동의 대부분은 신대방동, 신길7동의 대부분은 대방동이었다가(당시 대방동과 신대방동의 경계는 현재는 복개되어 대방천로가 된 대방천이었다), 대방로(현 여의대방로)를 기준으로 경계를 조정하면서 신길동으로 편입된 것이다. 이 때문에, 해당 지역에는 현 주소로는 신길동이지만 이름에 '대방'이 들어간 시설이 여전히 꽤 남아있다(대방역, 대방초등학교, 대방동아파트, 천주교 대방동성당 등).
1977년 영등포구에서 안양천을 경계로 하여 '''강서구'''가 분리 신설되었다.(13구) 1979년에는 강남구에서 탄천을 경계로 하여 '''강동구'''가, 서대문구에서 은평출장소 관할지역으로 하여 '''은평구'''가 각각 분리·신설되었다.(15구)
1970년대를 거치며 인구는 550만에서 830만으로 인구가 급증하였으며 '''세계 10대 대도시'''라는 타이틀을 달았다.
1970년 당시 양택식 서울특별시장이 박정희에게 서울시 추가 확장을 건의하였는데, 당시 건의안에 포함되었던 편입대상 지역은(굵은 글씨는 서울시 도시계획구역이 아니었던 곳) 당시 시흥군 서면(현 광명시), 과천면(현 과천시), '''안양읍'''(현 안양시)과 '''광주군 서부면, 중부면, 대왕면'''(현 성남시 일부, 하남시 일부, 광주시 일부), 부천군 오정면(현 부천시 오정구), 고양군 신도면, '''원당읍, 지도면'''(현 고양시 덕양구)이었다. 기사 특히 시흥군 서면 광명출장소(현 광명시 철산동, 광명동)는 서울 개봉단지와 구로공단 계획과 맞물려 서울편입이 추진되었지만 결국 배제당한, 1981년 광명시 승격의 역사가 있다. 여담으로 1980년대 초반에 서울올림픽 요트 경기장 건설문제와 관련되어 당시 남양주군 구리읍 토평리(현 구리시 토평동)의 서울편입이 검토된 적 있었다. 기사 하지만 1973년 이후 '동' 단위 이상의 서울시 확장이 이루어진 적은 2015년 현재까지 없다.
1963년 서울시의 대대적인 확장과 함께 주변 경기도 일부 지역이 서울특별시 도시계획 구역에 편입되었다.도시계획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기 참조. 장기적으로는 서울시 행정구역 편입을 염두에 둔 지역이었으나 1973년 진관동 편입을 빼고는 끝내 서울시에 편입되지 못하였다. 서울 집중 문제 해소가 가장 큰 이유였고, 편입 예정지에 대한 부동산 투기 문제도 있었다.[13]
정부가 이들 지역의 서울 편입을 배제했을 정도로 서울 인구 분산에 집착했던 진짜 계기는 월남 패망으로 안보적 위협을 느낀 박정희 정권이 강북 인구의 강남 분산 정책에서 서울 인구 분산 정책으로 선회했다는 뒷말도 있다(...).
1980년대 이후 차례대로 서울시 도시계획 구역에서 해제되었고 1995년에 잔여 지역이 본격 해제될 당시에는 광명시 철산동 일부 월경지(현재의 광명롯데물류센터 자리와 1995년에 서울 가산동으로 편입된 철산3동 월경지)를 제외하고는 모두 해제되었다. 고양 신도지구, 광명, 과천 일대의 전화번호가 경기도의 031이 아닌 서울의 02인 것도 그 시절의 흔적인 셈.
1963년에 대대적으로 확장해놓고도 당시에 행정편입되지 않은 주변 경기도 일부 지역을 서울시 도시계획 구역에 포함시키고 아까 서술한 대로 1970년에 서울시장이 박정희에게 직접 추가확장을 건의한 것을 보면, 서울시가 1963년 대확장에도 성이 차지 않아 추가 확장할 생각은 조금이라도 있었던 모양.
'''서울특별시 도시계획 지구 편입지 (경기도 소재)'''
굵은 글씨는 1963년 도시계획 편입, 나머지는 1970년 도시계획 편입.
* '''경기도 시흥군 서면 철산리, 광명리, 하안리''' (현 광명시 철산동, 광명동, 하안동)
* '''경기도 시흥군 과천면''' (현 과천시 전역)
* '''경기도 고양군 신도면''' (현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고양시 덕양구 삼송동, 지축동, 화전동, 덕은동 등, 이른바 '신도지구') : 현 진관동 지역(당시 신도면 진관내리, 진관외리, 구파발리)만이 1973년에 서울시에 행정편입.
* 경기도 남양주군 구리읍 갈매리 일부, 별내면 일부 (현 구리시 갈매동, 남양주시 별내동 일부) : 이쪽은 다른 곳과 다르게 1970년 5월경에 서울시 도시계획 구역에 편입되었다. 육군사관학교 부지 확장과 관련하여 도시계획 구역으로 편입.
* '''경기도 부천군 오정면 고강리, 원종리, 작리''' (현 부천시 고강동, 원종동, 작동) : 작동에서 발원해 원종동, 오정동, 대장동을 거쳐 굴포천으로 흘러나가는 베리내(대부분은 복개되어 '성오로(구 베리내로)'라는 이름의 도로가 됨)가 서울 도시계획구역과 소사(부천) 도시계획구역의 경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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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한 것은 관련 자료 사이트를 참고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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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도시계획 구역 변천 지도
광명지구는 1982년에, 오정지구는 1986년에, 과천지구는 1991년에, 고양신도지구와 갈매지구는 1995년에 도시계획에서 해제되었다.
아래는 해당지역에서 서울시 도시계획 하에 조성된 것들 목록이다.
  • 과천지구 : 서울대공원, 렛츠런파크 서울,
  • 광명지구 : 광명동 한진아파트, 철산동의 재건축 아파트단지의 전신에 해당되는 옛 주공아파트단지, 하안동 서울시립근로청소년복지관 및 미혼근로여성 임대주택단지(원래는 지금의 철산동, 하안동 일대에 구로공단 근로자를 위한 대규모 아파트 단지 조성이 예정되어있었으나 당시 시흥군 서면 북부지역의 서울 편입이 무산되면서 지금과 같이 소규모 단지로 축소된 것) .
  • 신도지구 : 서울시립승화원(화장장), 난지물재생센터(분뇨/하수처리장), 지축차량사업소
여담으로 서울근교 위성도시들 중 서울 편입주장이 잦은 동네는 '''광명''', 과천, 구리이다. 이들 도시는 다른 위성도시(안양, 성남, 부천, 의정부 등)과 다르게 생활권 자체가 서울시에 거의 종속되어있기 때문. 역사적, 문화적으로도 다른 위성도시들의 경우보다 더 서울시에 가깝다. 특히 광명, 과천, 구리는 저런 이야기 때문에 인근 경기도 도시와의 통합을 완강히 거부하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지금 현재 상황에서는 이들 도시가 서울시로 편입되는 것은 현실적으로는 상당히 힘들 듯하다. 부천, 성남, 안양 등지는 서울 편입주장이 저 도시들보다 덜하지만 광명 등지가 서울시로 편입될 경우 이에 편승할 가능성은 있다. 해당 지역의 서울 편입 주장에 대해서는 행정구역 개편/경기권의 해당 단락 참조.
1978년에는 서울시내 일부 변두리의 서울통화권 편입이 완료되었고, 1980년에는 고양군 신도면 전역, 원당면 신원리, 시흥군 서면 전역, 광주군 서부면 전역의 서울통화권 편입이 완료되었다.

2.6.4. 1980년 이후


1980년 관악구에서 '''동작구'''를 분리하고, 이와 동시에 방배동과 동작동 일부(현 반포본동)를 강남구로 이관했다.[14] 이때 사당동 중 남부순환로 이남 지역은 관악구에 잔류하여 남현동이 되었다. 그리고 영등포구에서 '''구로구'''가 분리 신설되었다. 이 때 신도림동 중 도림천 동쪽 지역은 영등포구에 잔류하여 대림동이 되었다.(17구)
1984년까지만 해도 서울 강남지역은 군사적 의미에서는 온전히 '서울'은 아니었는데, 수도경비사령부(현 수방사) 위수지역이 서울 강북지역뿐이었고, 강남지역은 경기도(전방 6군단 지역 제외)[15]와 인천을 관할하던 제6군관구사령부(현 수도군단) 위수지역에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1984년에 수도경비사령부가 수도방위사령부로 확대 개편되면서 위수지역이 서울시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1988년 1월 1일 강서구에서 '''양천구''', 강남구에서 '''서초구''', 도봉구에서 '''노원구''', 동대문구에서 '''중랑구''', 강동구에서 '''송파구'''가 분리되었다(22구).[16][17]
1988년에는 서울 인구가 1000만명을 돌파했고, 1992년에는 1090여만명으로 역대 최대치를 기록하였다.
1995년 성동구, 도봉구, 구로구에서 동일로, 우이천, 남부순환로를 경계로 하여 각각 광진구, 강북구, 금천구가 신설되고, '''광명시 철산동 일부가 금천구에 편입된 것을 끝으로 더 이상의 확장은 없었다.''' 이 때, 성수동 중 동일로 동부 지역은 노유동이 되었고, 가리봉동 중 남부순환로 이남 지역은 금천구 가산동이 되었다. 이 중 노유동은 이후 2008년 8월 자양동에 흡수되었다.
1992년 1097만까지 증가한 인구는 1기 신도시의 분양으로 경기도와 인천으로 인구가 분산되고 서울 자체의 출산율도 떨어짐에 따라 감소하기 시작했으며 2000년대 중반 뉴타운 건설로 다시 인구가 증가할 때도 있었지만 2010년대 중반부터 다시 감소세로 돌아서서 2019년 기준으로 972만까지 줄었다. (물론 여전히 많지만) 관할 구의 개수는 여전히 25개다.
'''1995년 3월 1일 서울특별시 행정 편입지역 (경계조정 차원)'''
자잘한 경계조정차원에서 소규모의 추가 편입이 이루어진 것. 참고로 지금도 일부 지도는 1995년 경계 조정 이전의 경계를 쓰는 경우가 간혹 보인다..
* '''경기도 광명시 철산동 일부''' (현 서울시 금천구 가산동 일부) : 지금의 한진택배 물류센터, 국민일보 인쇄공장 등 철산교 서울방향 인근. 구로쪽에 유수지 일부와 당시에는 정비소나 공장이었던 지금의 롯데물류센터 자리는 서울에 편입되지 못했다. 엄밀히 말하면 안양천 쪽은 경계조정이라기 보다는 철산3동 월경지가 서울시에 편입된 것에 가깝다.
* 경기도 광명시 하안동, 소하동 일부 (현 서울시 금천구 독산동, 시흥동 일부) : 안양천 둔치내부의 구불한 경계를 조정한 것. 다만 그 문제의 독산동(12단지옆 근린공원, 안천중, 안천초, 독산한신 등)은 서울로 계속 남게되었다.
* 경기도 광명시 광명동 일부 (현 서울시 구로구 개봉동, 천왕동 일부) : 1973년 목감천쪽 경계조정 당시에 정리되지 못한 일부 경계를 조정한 것. 너무나 자잘하게 꼬여서 그런지 1995년 경계 조정때는 안양천쪽과 다르게 주민들의 별다른 반대가 없었다.
* 경기도 고양시 지축동 일부 (현 서울시 은평구 진관동 일부) : 이쪽은 안양천변, 목감변 주변과 달리 1:1 교환이다.
1995년 경계구역 조정 법률 원문
그러나 광명시 쪽 경계 문제는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다. 안양천, 행정구역 개편/수도권/서울개편론/광명시 서울 편입 항목 참조.
1995년 행정구역 대개편을 앞두고 서울특별시 분할안이 검토된 적이 있었다. 서울특별시를 서울시(강북), 영등포시, 강남시 이런 식으로 쪼개자는 것. 물론 서울쪽의 반발이 뻔히 나왔고 당시 김영삼 대통령이 "서울 분할은 없다"고 일축하는 바람에 이 떡밥이 쏙 들어가버렸다. 노무현 정부때 이와 비슷한 떡밥이 거론된 적이 있었다. 당시 서울시 행정구역 개편 떡밥 및 현재까지 이루어지는 서울시 행정구역 개편 문제에 대해서는 '''서울특별시/행정구역 개편 문제''' 참조.
2008년에는 몇몇 법정동이 통합되었다. 노유동, 포이동, 모진동 등이 이때 사라졌다.
그리고 2015년 12월 7일, 위례신도시와 관련한 행정구역 경계 조정이 실시되었다. 이로써, 1995년 안양천변 경계조정 이후 20년만에 서울시 경계가 소폭 변경되었다. 관련기사
'''2015년 12월 7일 서울특별시 행정 편입지역 (경계조정 차원)'''
자잘한 경계조정 차원에서 서울특별시 송파구 거여동과 장지동의 각 일부와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창곡동·복정동 , 하남시 학암동 각 일부와의 1:1 교환 형식으로 소규모의 추가 편입이 이루어진 것.
*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창곡동·복정동 일부
* 경기도 하남시 학암동 일부
하지만 이미 문제가 해결된 위례신도시쪽(위례신도시 항목에도 나와있듯이, 위례신도시는 이곳에 있던 여러 군부대(일명 남성대)를 이전하고 남은 땅에 만든 신도시이다. 그러기 때문에 개발될 때까지 오랫동안 아무런 논의가 없었던 것.)을 제외한 몇몇 서울시계 지역에서 아직도 경계 문제를 둘러싼 지자체간 갈등은 진행 중.
1992년의 절정을 끝으로, 1993년부터 서울 인구가 점차 줄어들더니 2003년에 경기도 인구에 역전당했고, 2016년 5월에 1000만명의 선이 28년만에 깨졌다.
2008년에는 일부 법정동의 통폐합(포이동, 노유동 등)이 이루어졌고, 광명시와의 도시계획구역 경계조정(행정구역 경계와 일치화) 역시 이루어졌다.
일제강점기 관동 대지진으로 일본의 수도 도쿄가 폐허가 되자 수도 천도 논의가 있었는데, 그 중엔 서울 혹은 용인 모현읍 외대캠퍼스 부지 일대도 포함되어 있었다. 대지진 이후로도 수도 천도 논의가 진지하게 이루어진 적도 있었으며, 일제의 본토 사찰단이 서울 및 용인이 일제의 수도로 적합한지 여러가지 시찰을 행한 적도 있었다. 만약 실현되었다면 '''식민지에 수도를 둔 국가'''가 되었을 것이다. 만약 이 상태로 광복이 되었다면...
항공사진의 변천을 보고 싶다면 여기로 들어가면 된다. 허나 인천시와 다르게 서울시는 전산시스템의 문제 때문인지 항공사진 조회 절차가 복잡하다(...). 1972년(정확히는 1971년 말부터)부터 지금까지 찍은 사진들을 볼 수 있다.

3. 명칭의 유래



3.1. '서울'이라는 명칭과 '특별시'


한성, 경성과 같은 한문지명은 공식 명칭으로만 사용되었을 뿐 조선 시대에 이미 백성들이 일상에서 서울을 칭하는 이름은 '서울'이었다. 1896년 발행된 최초의 순한글 신문인 독립신문이 발행지를 “'''조선 서울'''”로 적어 (대한제국 수립 이후 “대한 서울” 또는 “대한 황성”이라고 기재해) 발행했으며, 해당 신문의 영문판 역시 발행지를 “'''SEOUL, KOREA'''”로 기재하였다. 아울러 1899년 서울에서 최초로 개통된 전차 역시 태극 마크와 함께 “ELECTRIC DE SEOUL”이라는 현판을 달고 달렸다.
일제 강점기 한성부가 경기도 경성부로 개칭된 후에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1920년 4월 1일자 동아일보 창간호를 보면 창간호부터 신문의 영문 타이틀을 보면 THE DONG-A DAILY, SEOUL, 즉 경성의 일본식 표현인 'KEIJO'가 아니라 'SEOUL'로 표기하고 있고 동 창간호에서 '서울호텔'이라는 등의 '서울'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뿐만아니라 1920년 4월 2일자 제2호의 영문기사에서도 Seoul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해방 후 미 군정은 1년이 지나도록 서울의 명칭에 관해서는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고 일제가 지은 '경성부'라는 이름을 공식적으로 사용했다. 그런데 일본인들이 떠나가고 한국인만 남게 된 경성부 직원들이 자체적으로 왕이 살던 도읍을 뜻했던 '서울'이라는 우리말을 써서 '서울'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는 했으나 그냥 자기들끼리 그랬던 것이고 공식적인 것은 아니었다. 공식적으로 서울이라는 이름이 최초로 사용된 때는 미 군정청이 1946년 8월 15일 발표한 '서울시 헌장' 이고 '서울특별시'란 이름이 법적 효력을 갖게 된 것은 미 군정청이 1946년 9월18일 '서울특별시의 설치'라는 군정법률 제106호를 공포하고, 그해 9월 28일 법이 발효되면서부터다.
서울시가 '특별시'가 된 이유는 미 군정이 서울을 경기도에서 분리시킨 뒤 지방자치제를 시행하려고 하면서 미국 각지에서 시행되고 있던 '독립시(Independent City)'(미국은 워싱턴 D.C. 같은 예외를 제외하면 뉴욕이나 시카고처럼 아무리 큰 도시라고 해도 카운티(county)와 주(state)가 따라붙는다. 우리로 치면 부산광역시라고 해도 경상남도 부산 카운티 부산시... 이런 식이 되는 셈. 그런데 간혹 시(city) 가운데 어떠한 카운티에도 속해 있지 않은 경우가 있는데 이런 시가 바로 독립시이다. ) 제도를 참고했는데 (그러나 독립시라고 해도 결국에는 주에 소속되어 있기 때문에, 수도로서의 개념을 제대로 살리려면 워싱턴 D.C.처럼 서울특별구역(District of Seoul)이라는 개념을 만드는 것이 더 정확했다고 여겨진다. 존 하지도 그렇고 당시 미군정이 뭐 아마추어였지만.) 원래 영문으로 작성됐던 군정법령을 직역하면 `서울독립시(Seoul Independent City)'가 돼 어색했기 때문에 결국 '서울특별시'로 번역한 것이다. 사실 한자 뜻만 보면 아주 틀린 소리는 아니다. 特(달리하다), 別(나누다). 원문에는 분명히 경기도에서 서울을 분리한다라는 의미를 사용하였다. 결국 번역하는 과정에서 특별이란 말을 적은 것. 지방행정학계에서는 희대의 오역으로 취급한다. 덕분에 일부 지방출신이 수도권-지방간 격차문제를 지적할 때 "'''왜 서울특별시만 '특별'하냐?'''"는 지적의 빌미를 남겨두게 되었다(...).

3.2. 명칭 개정 시도


다만 그 당시 일상에서 민중이 사용했던 ‘서울’은 지명으로서의 서울이라기보다는 수도를 의미하는 보통명사로서의 서울에 더 가깝다. 그러므로 ‘서울’은 당시 공식 명칭이었던 한성, 경성 등과도 별 탈 없이 공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미군정기에 경성 대신 보통명사였던 ‘서울’을 지명으로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서울’은 본래의 의미를 점차 잃어버리게 된다. 이런 이유로 한국전쟁이 중단되고 난 1950년대 중반에 들어 개칭 논란이 일어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았다. 사람들이 보기에 영 껄끄러웠던 작명이었기 때문.
이승만 대통령은 1955년 ‘수도명칭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대통령 담화문에서 ‘서울이란 말이 수도를 지칭하는 보통명사이지 땅이름을 지칭하는 고유명사가 아니며 외국인들이 발음하기 어려워서 어떻게 발음해야 되냐고 늘 문제가 되고 있으니 민간에서 도성의 좋은 이름을 만들어 주길 바라며 만일 다른 이름을 찾을 수 없으면 한양으로 고치겠다.’고 발표하며 새이름을 공모하였다.
이에 대부분의 학계 인사들은 찬성했는데, 대표적으로 한글학자로 널리 알려진 외솔 최현배 선생이 있다. 외솔 최현배는 1955년 조선일보에 기고한 글에서 나라의 머리가 되는, 정부의 모든 기관의 중심이 있는 곳을 뜻하는 서울이라는 순우리말 단어를 잃어버리고 땅이름으로 사용하는 것은 고유한 칭호 하나 없다는 것으로서 우리의 수치라면서 바꾸자고 주장했다. 한 마디로, 병원병원이나 대학대학교 같은 단어가 고유명사로 쓰인다고 상상해보면 최현배 선생의 기분을 체험할 수 있을 것 같다. 최현배 선생은 서울의 대체이름으로서 순한글이름인 한벌(큰 벌판)과 삼벌(삼각산의 벌판)을 제안했다. 그 외에 찬성한 당시 지식인들로 최남선(한양 주장), 이병도(한성 주장), 국어학자 김윤경(한벌 주장) 등이 있다. 역사학자들은 한자어 이름을, 국어학자들은 순우리말 이름을 밀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대통령의 담화 이후 서울특별시에서는 수도명칭조사연구위원회를 구성해 여론조사를 실시했는데, 1위는 우남(이승만의 호),[18] 2위는 한양, 3위는 한경, 4위는 한성이었다. 하지만 이 대통령은 ‘우남’이라는 이름은 원치 않는다는 입장을 밝혔고, 직접 내세웠던 이름은 '한도(韓都)'였다.[출처] 그러나 여론조사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 결국 흐지부지되어 서울이라는 이름은 지금까지 그대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오늘날에는 ‘서울’이 서울특별시를 가리키는 고유명사로 거의 굳어져 논란이 사그러들었지만, 2005년에 서울특별시에서 서울의 중국어표기를 ‘수이(首爾, 서우얼)’로 변경하기로 결정했을 때 여기에서 불똥이 튀어서 서울의 명칭의 정당성 논란이 다시 한 번 불거진 적이 있다. 당시 성균관대학교 이대근 명예교수는 ‘서울은 首爾가 될 수 없다’는 칼럼에서 "‘서울’은 처음부터 잘못 붙여진 이름"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카자흐스탄에도 유사한 사례가 있다. 수도 이름인 아스타나는 카자흐어로 수도를 가리키는 단어인 아스타나를 그대로 쓴 말이었다. 2019년에 독재자인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의 퇴임을 기념하며 도시명이 누르술탄으로 변경되었다.

3.3. 명칭 개정에 반대하는 의견


서울의 명칭을 변경하자는 주장에 대해 반박하는 논리 3가지를 소개해보면, 다음과 같다. 대표적인 잘못된 논리 1개, 타당한 논리 2개 순으로 소개한다.
한성(漢城)이나 한양(漢陽)이라는 옛 이름은 과거 중국 한족(漢族) 왕조의 속국임을 자처했던 지명이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있다. 이는 전혀 타당하지 않다. 오히려 한(漢)이야말로 도시 서울을 상징하는 한자이다. 왜냐하면 한(漢)이 서울의 한강(漢江)을 뜻하기 때문인데, 북한산(北漢山), 남한산성(南漢山城), 한양(漢陽), 한성(漢城) 다 한강과 관련되어 지어진 명칭이다. 그만큼 이 지역에서 한강의 의미는 아주 오래전부터 각별했었다. 한강은 백제에서 불렀던 한수(漢水)에서부터 이어져온 이름인데, 한수(漢水)는 순우리말 ‘큰물’을 음차한 것에 불과하다. 중국의 민족 한족(漢族)과는 상관이 없다. 그럼 왜 한강의 한은 韓이 아니라 漢인가? 간단하다. 漢이 물과 관련된 한자이기 때문이다. 종종 한족(漢族)을 의식하여 한강을 漢江에서 韓江으로 바꾸자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런 주장은 가볍게 무시해버리자. 한족과 한강 사이에 있지도 않은 관계를 만들어내서 논란만 키우는 꼴이다.
타당한 첫 번째 주장으로서, 보통명사를 고유명사화해서 사용하는 예는 세계 어느 나라에나 흔히 있는 언어관습이기 때문에 명칭을 개정할 필요는 전혀 없다는 주장이 있다. 이는 합리적 주장이다. 다만, 이렇게 ‘서울’을 고유명사화해버리면, ‘미야코(みやこ)를 교토(京都)에서 도쿄(東京)로 옮겼다.’와 같은 문장을 우리식으로 바꿀 때 상당히 이상해진다. ‘서울을 서울에서 부산으로 옮겼다.’고 말해야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유명사화를 하더라도 표준 한국어에(알다시피 표준 한국어는 한자어와 일부 표준으로 인정된 외래어를 포함한다.) '서울'을 대체할 수 있는 다른 보통명사가 있으므로 큰 문제가 없다. 애초에 반세기가 넘게 지난 21세기 현재로써는 "서울"이란 단어 자체도 보통명사의 기능이 거의 퇴색한 상태이다. 즉, 위 문장을 우리식대로 바꾼다면 '수도를 서울에서 부산으로 옮겼다' 내지는 '서울에서 부산으로 천도했다' 라고 쓰는 게 일반적이지, 굳이 '수도' 대신에 '서울'을 보통명사의 용법으로 쓰는 경우는 21세기 현재로써는 극히 드물다. 1950~1970년대정도까지만 해도 나름 의미가 있고 용례가 있었지만, 2010년대 현재는 70~80대 이상 노년층을 제외하면 사실상 고어사어 취급. 또한, 굳이 '서울'을 위 용례같은 경우에서 보통명사로 사용하고 싶은 경우, 몇가지 수식어를 덧붙여 '서울(수도)의 기능을 서울특별시에서 부산특별시로 옮겼다' 라고 우회적으로 보통명사 용법으로 사용되었음을 표현할 수도 있다. 애초에 언어 자체는 역사성이 있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회 구성원의 합의에 따라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것이고, 하다못해 해당 보통명사를 대체할 다른 동의어가 없어서 말을 지어내야 하는 상황도 아니므로, 오히려 위와 같이 번역의 어색함과 보통명사의 필요성을 문제로 제기하는 것이 억지에 가깝다. 애초에 '서울'의 보통명사로의 용법은 사실상 쇠퇴되어 사장되었기 때문. 거의 고어(옛말) 취급이다. 요즘엔 '서울'을 보통명사처럼 쓰고 싶은 경우에는 거의 대부분 99.999% 서울 '''수준의''' XX시 내지는 서울 '''격의''' XX시, 서울과 '''동급인''' XX시, 혹은 우리나라의 서울에 '''해당하는''' XX시 형태로 '서울'이란 단어 자체는 고유명사 취급하되, 대신 비교의 수식어를 덧붙여 수도의 의미를 강조하는 형태로 쓰기 때문.
두 번째로 서울이라는 이름은 이미 국내외적으로 정착됐기 때문에 바꾸기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주장이다. 이 역시 타당한 주장이다. 이미 한 번 굳어진 서울이라는 이름을 한성이나 한양으로 억지로 바꾸게 된다면, 당장 서울 전역에 설치된 I·SEOUL·U 부터 다 갈아엎어야하며, 이 외에도 국내에 있는 수많은 '서울' 표기들을 싹 다 뒤짚어 엎어야 한다. 모든 교과서도 싹 다 수정하고, 관광 홍보물도 싹 다 수정하고, 여러 공/사기업의 전산망에 등록된 지명도 엎어야 하는 등 바꿀게 한두개가 아니다. 게다가 우리만 바꾼다고 되는것도 아니고 세계 각국에게 공문을 새로 보내서 서울이 다른 이름으로 바뀌었음을 설명하는데 한세월 걸린다. 당장 세계 각국에 서울 관광을 목적으로 돌리고 있는 각종 홍보물들을 싹 다 폐기하고 새로 제작해야 하는, 의식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굉장한 비용이 들텐데, 명칭 변경이 과연 그만한 비용을 들일 가치가 있는 것인지는 국민들의 충분한 공감을 얻어야 할 것이다.

3.4. 명칭 개정에 찬성하는 의견


서울이 고유명사처럼 자리잡기도 하였고, '서울'은 본래 보통명사라는 문제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는 '''순우리말 보통명사를 한자로 음차하여 보통명사 지위를 무력화시키면 그만이다.''' 가령 서울(西亐)[19]이나 서울(西𠃗), 차자표기인 서울(徐菀)같은 식으로 바꾸면 해소된다는 것이다.
이런 식이면 '서울'이라는 명칭을 그대로 유지할 수도 있고 반박 문단에서 우려하는 영문 표기도 유지시킬 수 있다. 보통명사만 무력화시키는 방안은 충분히 갈구될 수 있는 문젠데 다소 비관적이기만 한 문제 제기를 제시하여 해결 불능 상태로 만드는 건 다소 거짓 딜레마와도 같다. 실제로 행정 개편자들이 본회의 때 저러한 명칭 문제 갖고 한 치 앞을 못 보지는 않을 것이다.

4. 관련 문서



5. 관련 사이트



[1] 서열은 3~4위였다. 위로는 개경서경이 있었으며 동경보다 처음에는 낮았으나 여몽항쟁기 이후 남경의 지위는 동경보다 확실히 우위에 서게 된다.[2] 한성이 재령군이라는 견해가 통설이지만 한성이 서울에서 재령으로 옮겨왔을 가능성 또한 부인할 수 없다.[3] 오히려 천안 직산이 백제의 위례성이 아니라 백제 이전에 마한의 맹주였던 목지국으로 비정되고 있다.[4] 이는 삼국사기에서 백제 위례성이 남성과 북성으로 이루어져있다는 기록과 합치된다.[5] 다만 예성강은 원래부터 은근히 개경과 거리가 있어서 개경이 수도 치고는 수운에 불리한 입지였다.[6] 1914년에 잠실/신천 일대가 고양군 편입. 여기에 대해 부연한다면 당시의 한강은 지금의 잠실 인근에서 마치 여의도 부근처럼 중간에 섬을 두고 위/아래로 흘렀다. 위로 흐른 개울은 지금의 한강이고 아래로 흐른 개울은 지금의 석촌호수 부근이다. 그런데 1914년 당시에는 위쪽보다 아래쪽이 더 넓어서 아래쪽 경계를 강북/강남 경계로 보았고 그 결과 지금의 잠실지역(석촌호수 북쪽)이 고양군으로 편입된 것이다. 이후 물길의 변화로 위쪽 강이 더 넓어졌고 결국 1970년대 잠실지구 개발 당시 아래쪽 강은 아예 매립해서 강(개울)으로의 역할이 소멸되고 그 흔적으로 석촌호수 정도를 볼 수 있다.[7] 논문 출처: 楊普景. (1994). 서울의 공간확대와 시민의 삶. 서울학연구, (1), 48-77.[8] 1911년 즈음에 발행된 '경성부전도'에 따르면 두모면 지역 중에 구한말에 성저십리로 신규 편입된 지역(광진구 서부 지역)은 양주군 고양주면과 통합하여 뚝도면으로 개편되었고, 문제의 은평면 일부가 고양군 신도면으로 이관되고, 난지도가 경성부 행정구역에 슬그머니 포함되는 내용이 담겨있다. 그리고 우이동, 장위동, 수색동(지금의 은평차량기지 자리)쪽에 미세한 경계조정이 이루어졌다.[9] 단, 신도면 북한리, 효자리 지역은 재편입되지 못하였다. 그래도 이곳은 지역번호로 경기도 번호인 031이 아닌, 서울 번호인 02를 쓰고, 후술한 대로 1995년까지는 이곳을 포함한 신도면 일대가 서울특별시 도시계획구역에 속했다.[10] 출처 : 김만희의 서울대 행정학 석사 논문 <대도시 자치구 분구(分區)에 관한 실증 분석 : 서울시 자치구 분구를 중심으로> (2006)[11] 이들 지역을 서울특별시와 별개의 행정구역으로 만들기보다는, 서울특별시에 편입시키고 경무대, 서울시청 등의 주요 관공서를 신수도 지역으로 이전하고 기존의 강북지역은 이름만 서울특별시 행정구역으로 남기는 식으로 했을 가능성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12] 신규편입지가 서울시 행정구역 편입과 동시에 서울시 도시계획구역에 편입된 것은 아니다. 행정구역은 내무부(현 안전행정부), 도시계획구역은 건설부(현 국토교통부) 소관이기 때문.[13] 2014년 해양수산부 장관 인선때 이주영 장관후보자가 1970년대 말에 지금의 광명시 지역의 땅을 사둔 전력때문에 투기 논란이 있었다. 해당 후보자가 광명시(당시 시흥군 서면) 땅을 사두었을 시절에는 당국이 광명리, 철산리의 서울 편입 여부를 두고 갈팡질팡했었고 부동산 업계에서는 해당 지역의 서울 편입설이 나돌았었다.[14] 실제로 이 일대는 강남구로 넘어간 후에도 1998년 학군 조정때 까지는 8학군이 아닌 9학군에 속했었다.[15] 1.21사태제6군관구사령관 김재규 소장이 서부전선을 제대로 방어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탈탈 털린 것도 이와 관련.[16] 이 때 도봉동과 창동은 노원구로 , 도곡동은 서초구로 보냈으나, 1년 만에(1989년) 각각 도봉구와 강남구로 환원되었다.[17] 1980년대 주택가가 형성되었던 목동 지역의 대문들에는 '''서울특별시 강서구 목동'''이라는 패찰이 붙어 있는 곳이 2015년 현재, 아직도 많다. 그 패찰들은 모두 80년대부터 붙여진 아주 오랜 유물인 것. 이 패찰은 새마을운동중앙협의회에서 1978년에 제정되어 1988년까지 제작되었으며 초기에는 우편번호(OOO-OO형식의 5자리) 표기 없이 주소만 표기되었으나 1983년부터는 우편번호도 같이 표기하였다. 그 외에도 공릉동 지역의 대문들에도 목동과 마찬가지로 '''서울특별시 도봉구 공릉동'''이라는 패찰이 있는 집도 있다.[18] 이상할 것도 없는 것이 일단 적어도 이 시기까지 이승만은 국가의 창립자로 칭송을 받던 시기이다보니 민중들이 단순히 창립자의 이름(정확히는 호)을 수도의 이름으로 하길 원하는건 자연스러운 행위였다. 실제로 미국도 수도를 국부인 조지 워싱턴에서 딴 워싱턴 D.C.로 지었다. 물론 후일 이승만의 평가의 역전을 고려해보면 우남이 되지 않은건 천만다행이였다고 할 수 있다. 옳고 그름을 떠나,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논쟁을 불러일으켰을 것이 자명하기 때문.[출처] 이 대통령은 동 담화에서 지난 번 "서울시와 각부에서 협의해서 민간에서 투표를 받아본 결과 보통사람들은 '우남'이라고 해서 작정했다고 하는데 이는 원치 않는바"라고 하여 '한도'가 좋을 것이라고 의견을 말하였다. (동아일보 1957.1.20.)[19] 공교롭게도 '서쪽 땅'이라는 직역이 된다. 실제 서울이 한반도 지리상 딱 서쪽에 자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