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진(독립운동가)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2. 생애
김광진은 1897년 7월 15일 평안북도 의주군 광평면 청수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의주군 광평면에서 발발한 3.1 운동에 참가했으며, 그해 4월 오동진 외 수 명의 동지들과 함께 남만주로 망명하여 청년단 조직에 진력하였다. 1920년 7월 청년단연합회의 광제청년단장(廣濟靑年團長) 오동진 및 이영운(李英雲)·한산(韓山) 등의 지령에 의하여 9월 18일에 한국을 방문하는 미국 의원단에게 한국인들의 독립의지를 보여주기 위해 국내 중요 도시·일제기관의 폭파 및 요인 암살을 목적으로 동지 임용일(林龍日)과 같이 폭탄을 휴대하고 평안북도 선천에 돌아와 거사에 대한 준비 공작을 수행했다. 그러나 일본 경찰이 이 정보를 사전에 탐지하고 삼엄한 경계 태세를 취하고 있기 때문에 계획은 실패하였다.
1925년 6월 봉천성 관전현 안자구에 근거지를 둔 정의부(正義府) 군사부 별동대원 이진무·홍학순(洪學淳)·김인옥(金仁玉)·김학규·이창만(李昌萬)·오동락(吳東洛) 등 6명과 같이 국내의 일제기관 파괴와 밀정을 암살하기 위하여 다시 만주 본영을 출발, 압록강을 건너 7월 3일 평안북도 철산군 차련관 뒷산에 당도하였다. 이때 마침 산중에서 목탄을 굽는 천도교 신자를 만나게 되어 그는 자기의 정체를 밝히고 평민으로 변장하기 위하여 한복과 짚세기를 마련해 줄 것을 간청하였다. 그와 동지들은 군복을 한복으로 갈아입은 후 7월 4일 차련관 장터로 내려갔다. 중국인 음식점에 들어가서 식사를 하면서 차련관에 있는 일경 주재소를 습격할 계획을 협의하였다. 7월 6일 그와 이진무 등 동지들은 주재소에 당도하여 일경 4명을 사살하고 도피하였다.
1931년 만주 사변 후에는 일제 경찰의 눈을 피하기 위하여 이름을 광해(廣海)로 개명하고 천진·상하이 등지를 전전하며 망명 생활을 계속하다가 1945년 조국이 광복되자 1949년 10월에 귀국하였다. 그 후 서울에서 조용히 지내다 1964년 6월 20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김광진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그리고 1964년 그의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