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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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군 시절
해방 후
1. 개요
2. 생애
3. 광복 이후


1. 개요


金學奎 (1900~1967)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본관은 안동(安東).#

2. 생애


1900년 평안남도 평원군 서해면 사산리#에서 김기섭(金基燮)의 아들로 태어났다. 10살의 어린 나이에 만주로 건너가, 만주 통화현 이밀에서 개간을 하면서 지내다 신흥학교가 신흥무관학교로 개편되자 입학했다. 신흥무관학교 졸업 후 조선의용대에서 활동하였다. 그러나 일본 제국의 탄압으로 독립군 활동이 어려워지면서, 만주 봉천 신민현의 학교에서 신학문을 익힌 뒤 동명중학교에서 잠시 교편을 잡기도 했다.
1929년, 양세봉 등이 조직한 조선혁명군에 들어가서 양세봉의 참모장으로 활동했다. 1935년 남경 통일회의에 참석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계하게 된다.
이후 조선혁명당 등을 거쳐 1940년 광복군이 결성되자, 광복군 제3지대장에 임명되었다. 미국 OSS와 연계하여 국내진공작전을 추진했지만, 1945년 8.15 광복이 이뤄지면서 성사되지 못했다.

3. 광복 이후


광복 후 중국 내 동포들의 국내 귀환을 추진해서 동포들의 귀국에 일조했고, 1948년이 되어서 10살에 떠났던 조국에 겨우 돌아올 수 있었다. 귀국 직전까지 광복군 평진지대(平津支隊)[1]의 지대장을 역임했다. 일본군, 만주군에 소속되어 있던 한인 병력을 대거 받아들여, 해방된 조국에서 창설될 군대의 기반을 닦을 심산이었지만... 일체의 정치 단체를 인정하지 않던 미군정에 의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자격이 아닌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게 되어 물거품이 되었다.[2] 귀국 이후 한국독립당의 조직부장을 맡았다.
1949년, 서북청년단 단원 홍종만의 소개로 안두희를 한국독립당에 가입시키고 김구에게 소개시켜 준다. 덕분에 안두희는 별다른 의심을 받지 않고 김구에게 접근할 수 있었다. 김구 암살 직후 열린 홍종만은 김학규가 군내에 한독당의 비밀당원을 늘리기 위해 안두희를 가입시켰다고 증언했다. 이 때문에 김학규는 김구의 살인교사범으로 몰려 군법회의에서 징역 15년형을 선고 받았다. 그러나 4.19혁명이 일어난 직후인 1960년 5월, 허정 과도 정부는 김학규를 석방해주었다. 이후 1960년 한국 독립당을 재건하여 최고 대표위원을 지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훈하였다. 1967년 별세했다.

[1] 북평(北平)과 천진(天津) 일대에 주둔하여, 지역명을 합성한 부대명. 당시 중화민국의 수도는 난징이었으므로, 베이징은 북경이 아닌 북평으로 불렸다.[2]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정부로 인정한 나라는 없었다. 임시정부를 지원해주던 중화민국마저 '한국 독립당 정부'라는 명칭으로 부르며, 일개 정당의 정권으로 취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