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환(1889)

 

[image]
성명
김세환(金世煥)
생몰
1889년 11월 18일 ~ 1945년 9월 26일
출생지
경기도 화성유수부 남부면 남수동
(현재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남수동)
사망지
경기도 수원군
매장지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추서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
2. 생애
2.1. 초년기
2.3. 민족계몽운동
2.4. 말년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2.1. 초년기


김세환은 1889년 11월 18일 경기도 화성유수부 남부면 남수동(현 수원시 팔달구 남수동)에서 부친 김동우(金東宇)와 모친 절강 편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10대 때 수원종로교회에 출석해 착실한 개신교 신자로서 활동했고, 곧 교회 평신도 지도자인 권사(勸士)가 되었다. 그는 술과 담배를 전혀 하지 않을 정도로 절제력이 뛰어났다고 하며, 신도들에게 깊은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이후 1906년 서울에서 설립된 한성외국어학교(漢城外國語學校)에 진학하였고, 졸업 후에는 일본 도쿄로 유학가서 주오대학에 진학했다. 1909년 귀국 후에는 수원상업강습소(현재 수원중고등학교)에서 직조감독관으로 일하면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소장 및 소감을 겸임했다.
1913년 삼일여학교 교장 루라 A. 밀러 감리회 여선교사의 요청을 수락하고 삼일여학교(현재 매향여자정보고등학교)에 교사 겸 학감으로 부임했다. 1917년과 18년 교사 증축을 주도적으로 진행하는 등 학교 발전을 위해 크게 활동했을 뿐 아니라 순회 전도 활동으로 자주 자리를 비운 밀러 교장을 대신하여 학교 살림을 실질적으로 도맡아 관리하였다. 밀러 교장은 김세환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수원여학교는 우리의 자랑입니다. 학교는 우리의 유능한 학감 선생 지휘 하에 꾸준한 발전을 보이고 있습니다. 내가 한국을 떠날 때 학교 부지는 텅 비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돌아와 보니 아름다운 나무 그늘로 덮여 있었습니다. 많은 나무와 꽃들을 옮겨다 심었고, 새로 산책로도 냈습니다. 우리 교사 김씨는 학교 건물 벽에 도르라진 한국 지도를 조각해 붙임으로 방문객들의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그는 또 학교 앞 쪽에 흐르는 개울 위로 다리를 놓아 장마철에도 학생들이 건널 수 있도록 해 놓았습니다.

김세환은 학교에 꽃과 나무를 심어 학교 정원을 꾸미고, 학교 건물 벽에는 한반도의 지도를 조각하여 붙이곤 했다. 그리고 장마철이 되면 범람하는 학교 앞 개울로 인해 등교조자 못하는 학생들을 위해 나뒹굴고 있는 수원 남문(팔달문) 문짝을 옮겨다 다리를 놓기도 했으며, 양잠 실습장을 만들어 학생들의 생활 여건을 개선시키는데 도움을 주었다. 동아일보 1927년 1월 17일자 기사는 이런 그의 활약상을 보도했다.

현재 미라씨가 교장으로 취임하며 따라 김세환 선생께서 학감으로 취임하야 부단한 노력과 있는 성의를 다하야 내용 충실과 실력 향성에 오로지 힘쓴 결과 교운은 날노 융성하야 (후략)


2.2. 3.1 운동


그러던 1919년 2월, 김세환은 미 감리회 전도사로서 서울 YMCA 학생부 간사를 맡아 학생들을 지도하던 박희도와 만났다. 당시 그는 삼일여학교의 교사 충원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박희도를 찾아갔다. 그러다가 박희도가 독립운동을 준비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박희도는 김세환에게 "지금 민족자결주의가 제창되고 있으므로 조선독립을 할 때이다."라고 전했고, 김세환은 이에 동의했다. 이후 그는 독립만세운동 계획을 전해들은 뒤 참여하기로 결단하고 2월 18일 서울로 올라가 박희도를 찾아가서 독립운동을 상의했다.
1919년 2월 21일 이갑성의 집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한 그는 수원과 충청 일대의 운동을 준비하는 순회위원 책임을 맡았다. 그는 지방에 다니며 동지를 모집했다. 충남 해미읍 감리교회에서 열리는 사경회를 인도하러 온 김병제 목사에게 독립만세시위 계획을 설명하고 동지로 서명해 줄 것을 부탁하여 승낙을 받았다. 수원으로 돌아와 선생은 남양교회의 동석기 목사를 만나 운동계획을 설명하니 이미 박희도로부터 그 계획을 들었다고 하면서 승낙하였다.
다음날에는 이천교회 이강백 목사, 오산교회 김광식 목사, 수원종로교회 임응순 전도사 등으로부터 승낙을 받았다. 이들을 포함하여 40여 명의 동조자를 확보한 선생은 민족대표 서명식에 참여하기 위해 서울에 도착했으나, 이미 독립선언서 기명이 다 끝난 상태였기 때문에 가지고 있던 동지들의 명단을 소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서울 탑골공원에 도착한 그는 시위에 참가해 종로에서 무교동을 거쳐 경성일사 앞까지 3.1 운동을 수행했다.
또한 김세환은 자신의 학생이었던 김노적을 수원면 만세시위 인원 동원 책임자로 임명했다. 김노적은 청년 동지들을 모아 독립만세시위 계획을 설명하고, 수원에서 서울과 같이 3월 1일 정오에 삼일학교 교정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만세시위를 전개하려고 계획하였다. 그런데 경찰이 미리 감지했다는 정보가 있자, 이 날 거사는 3월 1일 저녁 횃불시위로 대체되었다. 그날 저녁, 수원 화홍문 방화수류정 부근에 수백명이 모여 횃불 시위를 벌였다. 이후 화성 동쪽의 봉수대에 횃불이 올린 걸 신호로 팔달산 서장대를 비롯한 20여 곳의 성곽에서 일제히 봉화가 타올랐다. 이 때 남문 밖 객주집에 묶고 있던 시골 상인도 여기에 합세했다. 이후 이들을 통해 만세시위의 열기가 각 지역으로 전파되었다.
그러나 김세환은 여기에 참가하지 못했다. 그는 서울에서의 시위에 참가한 뒤 일제의 삼엄한 검속으로 인해 당분간 수원으로 내려갈 수 없었다. 그러다가 1919년 3월 13일 숙소에서 체포된 그는 재판에 회부되었다. 검사가 "금후에도 독립운동을 계속할 것인가?"라고 묻자, 그는 "그렇다."고 답했다. 이후 1920년 10월 30일 경성지방복심법원에서 구류 360일 만에 송진우, 현상윤, 김도태 등과 함께 ‘증거불충분’ 이유로 수감된 지 만 1년 만에 무죄를 선고받고 석방되었다.

2.3. 민족계몽운동


출옥 후 일제의 감시 때문에 삼일여학교 교사에서 사임해야 했던 그는 수원읍내에 곡물상, 목재상 등을 운영했다. 또한 기독교문화운동 차원에서 추진된 조선기독교창문사(朝鮮基督敎彰文社) 설립에 참여했다. 김세환을 비롯한 구성원들은 강연단을 조직하고 전국을 돌며 순수 한국인 자본으로 설립된 문서선교 기관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주식을 모집하기도 하였다. 그는 창문사의 초기 사업 확장을 위해 각 지방 출장을 다니며 창문사의 취지를 설명하였다. 예컨대, 1921년 10월 12일 여주 창리예배당에서 일반신자들에게 창문사의 취지를 설명하고 그 다음날 충북지방으로 향하기도 하였다.
1923년 1월, 김세환은 수원엡윗청년회의 총간사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1월 13일 수원종로교회에서 개최된 수원엡윗청년회 정기총회에서 최상훈과 함께 총간사에 선출되었다. 1922년 10월 5일 선생은 소년운동 일환으로 조직된 조선소년군(朝鮮少年軍)이 수원을 방문하자 이를 환영하는 행사를 대대적으로 주도하였다. 조선소년군은 순수보이스카우트 정신 아래 조철호가 ‘조선소년군은 조선 사람의 조선군’을 내세워 조직한 민족주의 성향의 소년단체였다. 조선소년단 18명이 1923년 4월2일 인천을 거쳐 수원에 도착하자, 수원종로교회에서 선생의 사회로 500여명의 관중이 참석하는 연예회가 개최되었다. 그 자리에서 동정금이 자발적으로 기부되기도 했다.
또한 1923년 8월에 고국을 방문한 하와이 조선인기독학원 학생들에 대한 대대적인 환영행사를 주도하였다. 수원지역 유지들을 중심으로 환영준비위원회가 조직되었는데, 김세환·지공숙·엄주철·윤용희를 상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8월 16일 ‘하와이 학생단’에 대해 김세환을 비롯한 수원지역의 유지들은 식사와 관광, 친선야구경기, 환영공연 등을 개최하여 즉석에서 후원금까지 거둘 정도로 진심으로 동포애 및 민족애를 과시하였다.
한편 그는 1920년대 초부터 추진되던 민립대학설립운동에서 수원지역을 대표하여 참여하였다. 이 운동은 일제의 지배에 맞서 민족의식과 독립정신을 심어주며 식민지교육정책에 대항하며 ‘한국인에 의한 한국인의 대학 설립’을 위해 추진되었다. 1923년 3월 29일에 서울 YMCA 회관에서 1,170명의 발기인 가운데 462명이 참석한 가운데 민립대학기성회 발기총회를 개최하였다. 이 때 김세환은 이규재, 박기영, 임면수, 윤용희 등과 함께 수원 지역을 대표하는 발기인으로 참가하였다.
1928년 8월 19일에 개최된 신간회 수원지부 임시대회에서, 김세환은 지회장에 선임되었다. 그해 12월 16일에 개최된 제3회 정기대회에서 또다시 지회장에 선출되었고, 1930년 4월 25일 임시대회에서는 감사위원에 선출되었다. 또한 박선태·김병호 등과 함께 1929년 8월 30일 수원공회당에서 수원체육회를 주도적으로 창립하여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수원체육회는 운동경기를 직접 진행할 수 있는 부서로 축구부, 야구부, 정구부, 육상경기부, 빙상경기부 등을 두었다. 9월 안에 수원시민대운동회를 개최할 것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고, 그 방법을 이사회와 간사회에 일임하였다. 수원체육회는 해마다 수원시민대회운동회를 개최하였고, 수원지역 모든 체육의 지도기관으로 많은 공적을 남기고 각종 체육 사업을 진행하였다. 1935년 10월 15일에는 남창리에 현대식 양옥 형태로 체육회 회관을 성공적으로 건립하기도 하였다.

2.4. 말년


신간회가 해소된 후, 김세환은 1939년경 수원 자산가인 최상희의 협조를 구해 폐교 직전의 삼일학교를 인수하게 했고, 1941년에는 홍사훈을 설득해 수원상업학교를 설립하게 하고 자신이 교사를 맡았다. 이후 그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그는 1945년 9월 26일 병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김세환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그의 유해는 1968년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