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윤

 

金令尹 / 金令胤
? ~ 684년
1. 개요
2. 생애


1. 개요


신라의 무장. 김흠순의 손자이자 반굴의 아들로 김유신의 조카 손자이자, 외손자이자 김서현만명부인의 증손자

2. 생애


경주시 사량부 출신. 금관가야계 명문가 출신에 임전무퇴의 상징이 된 아버지의 명성 때문에 자신도 평소부터 명예절개를 자부했다고 한다.
신문왕 때인 684년, 금마저(익산)에서 일어난, 일종의 신라 내 고구려 유민 자치 지역이었던 보덕국(報德國)[1]의 고구려 유민들의 반란을 토벌하는 데 참전했는데, 이 싸움에서 신문왕이 고구려 유민들을 모아 만든 부대인 황금 서당의 보기감으로 참전했고 그가 출진할 때 사람들에게 "내가 이번의 출정으로서 가족이나 친구들로 하여금 오명을 듣지 않게 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보덕국의 고구려 유민들의 저항이 매우 완강했고 진영도 단단해서 다른 장수들은 궁지에 몰린 적은 쫓는 법이 아니며, 고구려 유민들이 지치기를 기다리고 일단 물러날 것을 합의했으나 김영윤은 "장수는 전투에 임해 용맹해야 하고 진격만이 있을 뿐 후퇴가 있을 수 없다"고 말하며 다른 부대가 다 철수할 때 자기 휘하의 부대만 이끌고 고구려 유민들과 싸우다가 끝내 전사했다. 아버지 반굴의 죽음, 외삼촌인(당숙이기도 하다) 김원술이 직접적인 패전 책임이 없었는데도 그저 살아 돌아왔다는 이유만으로 가문에서 쫒겨난 것을 생각해보면 그에게는 전사 외의 다른 선택지는 없었으리라.
그의 전사 소식을 들은 신문왕은 "역시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며 반굴과 김영윤의 의열을 기렸다고 한다.
[1] 신라가 세운 괴뢰 국가이나, 옛 고구려의 관직 체계를 사용하는 등 어느 정도 자치는 이루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