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신

 




'''신라의 상대등(上大等)'''
금강

'''김유신'''

김군관
'''신라 추존 국왕'''
'''興武王 | 흥무왕'''

두 번째 사진이 김유신의 표준 영정[1]
'''시호'''
'''흥무대왕(興武大王)'''[2]
'''작위'''
'''평양군 개국공(平壤郡 開國公)'''[3]
'''골품'''
진골(眞骨)[4]
'''본관'''
김해 김씨(金海 金氏)[5]
''''''
유신(庾信)
'''왕후'''
지소부인(智炤夫人)
'''아들'''
김삼광, 김원술, 김원정,
김장이, 김원망, 김군승[6]
'''부친'''
김서현(金舒玄)
'''모후'''
만명부인(萬明夫人)
'''형제'''
김흠순, 김보희, 문명왕후
'''묘지'''
금산원(金山原)
'''생몰년'''
595년(진평왕 건복 12년)
~ 673년(문무왕 13년) 7월 1일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 상
1. 소개
2. 역임 관작
3. 생애
3.1. 출생
3.2. 진평왕 시기
3.5. 태종 무열왕 김춘추 시기
3.6. 문무왕 김법민 시기
4. 삼국유사를 비롯한 기타 일화
4.1. 사후 전설
5. 가계
5.1. 김유신장군묘
6. 평가
6.1. 고려, 조선시대의 평가
6.2. 근현대의 평가
6.3. 현대의 평가
6.3.1. 기록
6.3.2. 명장
6.3.3.1. 긍정론
6.3.3.2. 부정론
6.3.4. 민족주의적 관점
6.3.5. 정사와 야사의 혼재
6.3.6. 신라라는 국가에 대한 반발
7. 부록: 본기에 기록된 김유신 활동 시기의 삼국간 전투
8. 각종 매체에서의 김유신
9. 참고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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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신라 중기 무장. 진평왕부터 문무왕까지 80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살며 5명의 신라 왕을 섬겼다. 옛 금관국의 마지막 임금인 구형왕 김구해의 직계 후손이며 골품은 진골이었다.
성골 왕통의 단절로 인한 극도의 정치 불안정 속에서 약화된 신라군을 이끌고 재앙에 가까웠던 백제의 대침공을 몇 번이나 막아내는가 하면 꾸준히 일어났던 서라벌 귀족들의 반란을 연거푸 진압하는 등 망국의 단계에 돌입한 신라를 지켜내는데 큰 기여를 했고 무엇보다 삼한일통의 대업을 이룬 영웅으로 한국사에서 왕자이기는커녕 경주 김씨조차 아님에도 사후 당대에 대왕으로 추존된 유일한 인물이기도 하다.[7]
김유신이 활동한 시기의 신라는 진흥왕전성기가 끝나고 반복되는 실정, 외교적 고립, 신라 내부의 반대 세력으로 국가적 위기에 처해 있었는데 그런 신라를 존속시킨[8] 핵심 인물로 넓게 보면 향후 수천년 한국사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 중 한 명. 장수의 이미지가 강해서 묻히기는 하지만 정치가로서의 영향력도 제법 높았던 인물이다.

2. 역임 관작


<colbgcolor=#b9062f> '''삼국사기 신라본기 및 김유신 열전에 기록된 역임 관작'''
'''관등'''
소판(蘇判)
서열 3위 관등.
이찬(伊飡)
서열 2위 관등.
대각간(大角干)
서열 1위관등인 각간에다가 대 자까지 붙힌 최고위 관등.
태대각간(太大角干)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선 태대서발한(太大舒發翰)을 받았다 한다. 사실상 김유신만을 위한 최최고위 관등.
'''직위'''
압량주 군주(押梁州 軍主)
삼국사기 선덕여왕 본기엔 '압량주 도독'이라 되어있다. 도독과 군주는 같은 직위로 압량주의 군대를 총괄했다.
대장군(大將軍) / 상장군(上將軍)
삼국사기 선덕여왕 본기엔 대장군, 김유신 열전에는 상장군을 받았다고 한다.
상주 장군(上州 將軍)
상주의 군대를 총괄했다.
상주 행군대총관(上州 行軍大摠管)
상주 지역의 군대를 총괄하는 동시에 모든 총관의 수장이 되었다.
대당 대총관(大幢 大摠管)
신라의 군대편제인 9당의 총지휘관. 부지휘관은 김인문이었다.
상대등(上大等)
신하로서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지위. 귀족의 대표이자 국왕의 최측근이었다.
<colbgcolor=#b9062f> '''김유신 열전에 기록된 당 관작(?)'''
'''직위'''
봉상정경(奉常正卿)
밑 작위와 겸함. 열전엔 당고종이 봉했다고 하는데 사실일 가능성은 적을 것으로 보인다. 김유신 열전의 원본은 후손들이 과장한 행장록이기 때문.
'''작위'''
평양군 개국공(平壤郡 開國公)
위 직위와 겸함. 봉지인 평양군은 고구려의 수도인 그 평양인 것으로 보인다.

3. 생애


김유신의 행적에 대한 대부분의 기록은 고려 중기 김부식이 주도해 편찬한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데 삼국사기 안에서도 나라의 역사를 기록하는 본기, 김유신 개인의 생애를 서술하는 열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왕을 중심으로 한 시대를 다루는 본기는 비교적 객관적으로 기록됐다는 평가를 받지만 김유신이란 개인을 글의 주인공으로서 서술하는 열전의 경우 현손 김장청이 쓴 김유신 행록(行錄) 10권 내용에서 터무니없는 내용은 빼고[9] 3권으로 요약한 것으로 김부식이 과장을 거르고 줄인 내용이라고 쓰고 있음에도 본판이 행록이라 여전히 과장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같은 삼국사기 안에서도 백제본기, 신라본기와 교차검증을 해 봐도 안 들어맞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라 하는데 원래 본기에 적을 수 없는 열전 또는 본기에 적기에는 분량이 너무 신하 위주일 때는 당연히 열전에만 적는 것이다. 삼국사기 열전의 김유신전에서 전공 부분을 모두 왜곡으로 볼만한 증거는 아직 없다. 다만 김유신 열전 기록 가운데 주로 초반부의 삼국유사 신이편 찍고 여동생 시집보내는 부분 같은 것은 열전에 쓸 내용이 맞지만 김유신의 행동으로 특히 문제가 되는 부분은 국가간의 전쟁 기록이라는 점이다. 국가의 전쟁 기록이 개인에게만 걸려 있다고 본편에 안 쓰고 열전에만 쓰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문제가 있다. 실제로 김유신 열전의 전쟁 기록을 제외하고 당시 상황을 보면 대충 맞아 돌아가는데 김유신 열전의 전쟁 기록을 다 넣으면 당시 정황이 정반대로 해석된다. 이 때문에 본편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열전에만 기록된 부분을 그대로 믿기에는 문제가 있으며 따라서 김유신을 제대로 파악하고 평가하려면 반드시 유관 사료를 철저하게 비판적으로 점검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런 차이가 생긴 것은 열전의 원전이었을 현손 김장청이 쓴 김유신 행록이 쓰인 배경을 이해해야 한다. 열전에 김유신의 후손 김암(金巖)이 일본에 779년 갔다온 사실이 기술되어 있으므로 김유신행록의 저술 시점은 8세기 말을 상한으로 하며 흥덕왕 10년(835)에 김유신을 흥무대왕으로 추증한 개인적으로는 매우 중요한 사실이 정작 열전에는 실리지 않은 것으로 보아 두 시점 사이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10] 혜공왕 대인 770년에 일어난 김융(金融)의 모반 사건 이후 김유신 후손 가문은 큰 타격을 받아 신라 정계에서 점차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으며 가문의 위상을 회복시키기 위해 나라의 영웅으로 잘 알려져 있던 조상 김유신의 능력과 역할을 의도적으로 과시하기 위해 많은 전쟁 가운데 승리한 사실만을 가려서 서술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황산벌 전투에서 김유신을 고전시킨 백제 장군 계백과의 싸움이 신라본기에는 보이는 반면 김유신 열전에는 실리지 않은 것도 그러한 사정을 반영한다. 광개토대왕업적을 아들인 장수왕이 찬양하기 위해 작성한 광개토대왕릉비와 비슷한 양상을 띤다.[11]
이런 삼국사기 열전 기록의 객관적이지 못한 관점을 주 근거로 김유신의 생애 전반에 대해서도 패전을 숨기고 작은 승리의 과장으로 점철되었다고 비판적으로 바라보려는 시각도 존재하는데 대표적으로 일제강점기의 민족사학자 단재 신채호가 있었다. 그러나 김유신이 생존했던 당대에 이미 중국과 일본 등 신라 바깥까지 김유신의 명성은 당대 동아시아 세계에 걸쳐 널리 알려져 있었고[12] 김유신의 적이기도 했던 이들의 이러한 반응은 신라에 사는 후손의 과장으로만 만들어질 수만은 없다. 수많은 전쟁을 치루면서 패전한 사실이 당연히 있었을법한데도 이를 전혀 열전에서 찾을 수 없는 것은 열전이 지닌 사료상의 명백한 한계이며 고려 중기라는 시대적 상황에 맞춰 유교적 시각으로 재정리되기까지 했으니 이런 점들을 고려하고 사료 비판은 철저하게 짚고 넘어가야 하지만 열전이 비록 객관적이지 못한 부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비슷한 목적으로 작성된 광개토대왕릉비 비문에서 찬양을 걷어내고 역사적 사실을 추출할 수 있듯이 후손의 과장이 들어갔다고 해도 무작정 덮어놓고 무가치한 사료라고 폄훼하고 단정할 수는 없으며 본기나 기타 기록으로 충분히 교차 검증과 설명이 가능한 공적은 가려낼 필요가 있다.
2019년 중국에서 최근에 공개된 금석문 사료인 '풍사훈묘지명(馮師訓墓誌銘)'의 내용에 따르면 당나라가 백제 정벌군 편성 직전인 659년부터 이미 소정방에게 당나라 내부에서 '계림도대총관' 직위까지 수여했음이 밝혀지면서 당나라는 이 때부터 백제와 함께 신라까지 기습할 준비를 해왔음을 증명하는 당대의 자료가 나타났다. 기존 문헌 중에는 오직 김유신 열전과 삼국유사에만 존재하던[13] 당나라의 은밀한 신라 침공 계획, 김유신의 간파, 침공 대비 기사와도 일맥상통함이 밝혀졌다.[14] 열전의 이 부분은 후손들이 김유신을 신격화하기 위해 나당전쟁예언한 것처럼 첨삭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받던 대표적인 부분이었다. 이 발견은 최근 김유신 열전의 신뢰성을 의심하는 유행이 일던 추세와 반대로 김유신 열전의 정확성이 검증된 사례가 되었다. 김유신 열전을 무비판적으로 신뢰하는 것도 무리가 있지만 반대로 김유신 열전에만 실린 내용이거나 신라본기 및 기타 사료와 충돌하는 기사일 경우 열전이라고 무조건적으로 부정하는 것도 합리적인 시각은 아닌 것이다.
날짜는 전부 음력이다.

3.1. 출생


법흥왕 19년인 532년에 신라에 항복하여 진골로 편입된 금관국(금관가야) 구형왕의 증손자로, 조부는 김무력[15], 아버지는 김서현, 어머니는 진흥왕의 동생 숙흘종의 딸 만명부인이다. 만명부인은 중매도 서지 않고 김서현과 선을 넘었다가[16] 열전에 따르면 서현이 만노군(현 충북 진천군) 태수로 떠날 때가 되어서야 아버지인 숙흘종에게 들켜서 별채에 갇히고 말았다. 이때 문에 벼락이 쳐서 사람들이 정신을 못 차릴 때 몰래 빠져나와 김서현과 함께 만노군으로 도주했다고 한다. 이후 부부 둘 다 태몽을 꾸었고, 만명이 20달을 품은 끝에 김유신이 태어났다.[17]
김유신 열전에서 만명부인은 황금 갑주로 완전무장한 소년이 구름을 타고 내려와 품에 안기는 꿈을 꾸었다고 하며, 삼국유사에서는 이후 태어난 아기의 등에 북두칠성을 의미하는 7개의 점이 있어 칠요(七曜)의 정기를 품었다고 여겼다 한다. 김유신의 이름은 아래와 같은 이유로 지었다고 한다.

내가 경진(庚辰)일 밤 길몽을 꾸어 이 아이를 얻었으니 마땅히 이로써 이름을 지어야 하오. 그렇지만 <예기(禮記)>에 따르면 날짜로써 이름을 짓지는 않는다[18]

고 하던데, '경(庚)' 자는 '유(庾)' 자와 서로 비슷하며 '진(辰)'과 '신(信)'은 소리가 서로 가깝고 옛 현인 중에 유신(庾信, 512~580)[19]이라는 이름도 있으니 어찌 그렇게 이름 짓지 않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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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제41권 열전 제1 김유신 상}}}
김유신의 이름을 짓는 과정에 대한 기록을 보면 그의 가문은 조부 김무력, 아버지 김서현 시절 일찍부터 유학을 중시하고 유교적 왕도정치를 추구하는 성향이었다고 보기도 한다. 금관국 계통 3대의 이름을 보면 전원 음과 훈을 모두 감안한 한문식 이름인데, 당시 다른 대부분의 신라 귀족들의 이름은 한자를 단지 음차해 순수하게 신라 고유어식 이름을 짓거나[20] 불교적 이름을 짓던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 이런 면에서는 진지왕 이후 왕위에서 멀어진 김춘추 집안 역시 가족 이름을 한문식으로 지은 것과도 통하는 면이 있다.

3.2. 진평왕 시기


태어난 뒤 유년기 시절 어느 즈음에 왕경으로 온 것으로 추정된다. 609년(15세)에 정식으로 화랑이 되었고 그를 따르는 낭도 무리를 용화향도(龍華香徒)라고 칭했다. 이 용화(龍華)는 불교 미륵 신앙에서 미래의 이상세계를 불러올 미륵불이 용화수(龍華樹) 나무 아래에 내려온다는 데서 따 온 것이며, 화랑단의 이름을 용화향도로 지은 것을 어린 시절의 김유신이 현실의 부조리를 개혁하고 이상사회를 지향하고자 생각했다고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611년(17세) 중악[21] 석굴에서 목욕재계하고 하늘에 비니 난승(難勝)이라는 노인이 찾아왔고 김유신이 간청해 비법을 전수받았다.
612년(18세) 열박산(咽薄山)에서 천관(天官)에게 비니 보검에 신이 내렸다.[22] 또한 삼국유사에 따르면 이 때 검술을 익혀, 화랑의 지도자격 지위로 추정되는 국선에 임명되었다고 한다. 삼국유사에는 고구려 스파이 백석이 김유신이 이끄는 화랑도 무리에 낭도로 잠입했다가 3명의 여신의 도움으로 이를 간파하는 설화적 일화를 남기고 있는데, 10대 후반~20대 시기 의 행적에 뚜렷한 기록이 많지 않지만 화랑으로 수련하면서 활발히 활동했던 것을 유추해 볼 수 있다.
629년(35세) 8월 대장군 용춘, 아버지 김서현과 함께 낭비성 전투에 참전했는데[23] 고구려군의 역습을 받아 아군의 형세가 불리해지자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내가 듣건대, '옷깃을 바루면 갑옷이 바르게 되고 벼리를 당기면 그물이 펴진다'[24]

고 하니 내가 그 벼리와 옷깃이 되겠다!"[25]

본인이 직접 나서서 세 번 적진을 들어갔다 나오며 적장을 베거나 깃대를 뽑아오는 전공을 세웠다. 이에 사기가 오른 신라군이 낭비성을 공격했고 성은 결국 항복했다. 고구려 본기에서도 김유신에게 성이 함락되었다고 기록되어있다. 엄연히 군대를 지휘하는 귀족 자제의 신분인 그가 솔선수범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굉장히 위험한 역할을 도맡아 병사들에게 동기부여를 잔뜩 넣어준 것인데 훗날 김유신의 지시로 비령자(丕寧子), 반굴, 관창 등이 비슷한 작전을 앞장서 수행해 목숨을 잃고 그 대가로 지지부진하던 정세에 지친 병사의 사기를 끌어올린 것으로 봐서는, 젊을 적 자신의 경험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추정된다.
보면 알겠지만 김유신 열전에는 화랑이던 18세 때 이후 낭비성 전투에 참전하는 35세 때까지의 일대기가 전해져오는 기록이 거의 없는 편이다.[26] 특히 김유신은 비록 비주류에 속하는 가야 계통의 귀족이었다고 해도 엄연히 진흥왕의 동생인 김숙흘종의 외손자라서 엄연히 신라 왕가와 가까운 인척에 해당하는 인물임에도 낭비성 전투 때까지는 뚜렷한 행적이나 군공이 기록에 보이질 않는다. 당시로써는 늦은 나이인 30대 중반에 '데뷔전'을 치렀다는 이야기인데 위에 상술되었듯 삼국유사에 남은 각종 설화가 김유신의 이 공백기 기록을 메꿔준다고 볼 수도 있지만 이 역시 속단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즉 의외로 김유신도 나름대로 후대의 강감찬이나 권율처럼 대기만성형 인물이었다고 볼 여지도 있는 셈.

3.3. 선덕여왕 시기


642년(48세) 7월 백제 의자왕이 친정하여 미후를 비롯한 신라 서쪽 40여 성을 함락시키더니 8월 장군 윤충이 1만을 이끌고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대야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이 과정에서 김춘추의 사위인 대야성주 김품석과 딸 고타소 부부가 목숨을 잃었는데 이 사실을 듣고 분노한 김춘추는 딸의 원수를 갚기를 원해 고구려에 원병을 요청하는 사신을 자처했다.[27] 그러나 고구려는 김춘추를 붙잡아 가뒀고 그의 구원 요청으로 대장군 김유신이 1만의 군사를 이끌고 북진해 신라군의 움직임을 감지한 보장왕이 김춘추를 풀어주면서 사태는 일단락된다. 고구려 본기에는 구체적인 기록은 없이 신라의 사신이 원군을 청했다는 기록만 있는데 이 때의 상황에 대해 열전에서 김유신은 김춘추가 60일이 지나도 고구려에서 돌아오지 못한다면 이미 해를 입은 것이니 원수를 갚을 것이라 맹세했고 이후 기간이 지나도 김춘추가 돌아오지 않자 3천의 병사를 준비하고 기일을 잡았다는 것으로 행적에 상세한 차이가 있다.
김춘추가 돌아온 뒤 김유신은 압량주(押梁州)[28]군주(軍主)가 되었다. 백제의 동진 방어선 대야성을 잃었으므로 압량주와 김유신이 방어선의 중심 역할을 하게 된다. 압량주는 위치상 경주와 가까운 지역으로 근기(近畿) 지방(신라의 수도권)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김유신은 對백제 전선 사령관이자 수도권 방위사령관에 해당한다.[29]
644년(50세) 9월 대장군이 되어[30] 백제의 7개 성을 공격해 점령했다. 이 때 점령한 성은 가혜성(加兮城), 성열성(省熱城), 동화성(同火城) 등인데 지금의 고령군, 의령군, 구미시 일대로 비정되고 있다.[31] 2년 전 빼앗긴 대야성 인접 지역들을 일부 탈환하면서 급한 불을 끈 것이다.
645년(51세) 정월에 복귀했지만 왕을 알현하거나 가족을 만나기 전에 백제의 대군이 공격해왔고 다시 전선으로 나가 백제군을 물리치고 수급 2천을 베는 전공을 세웠다. 3월에 복귀하여 왕은 알현했지만 가족은 만나지 못했는데 백제군이 다시 공격해왔다. 김유신은 이번에도 집 근처까지 갔다가 다시 전선으로 이동했는데 열전에서는 우리 집의 우물 물맛이 예전과 그대로라는 유명한 일화가 나온다. 이후 전황이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한 언급은 없는데 열전에서는 김유신의 부대가 접근하자 백제군이 물러갔다고 적고 있다. 5월 신라는 당나라의 원군 요청으로 병사 3만을 북진시켰고 백제는 이틈에 7개 성을 재점령한다. 백제 본기에는 직후 김유신이 재침공했다고 적혀 있다.
647년(53세) 정월 대신(大臣) 상대등 비담과 염종 등이 여자[32]정치를 잘 할 수 없다는 이유로 반란을 일으켰다.(비담의 난) 반란군은 경주 인근 명활성에 주둔하고 김유신이 주도하는 근왕군은 월성에 주둔한 상태로 10일간 공방전을 벌였는데 그러다 큰 하나가 월성에 떨어지자 비담은 "내가 듣기로 떨어지는 별 아래에는 반드시 피 흘림이 있다 했다. 이는 틀림없이 여주가 패할 징조다!"면서 병졸들의 사기를 크게 끌어올렸다. 이에 선덕여왕이 몹시 두려워하자 김유신이 나서서

길함과 흉함은 정해진 게 아니라 오로지 사람이 부르는 것입니다[33]

. 옛날에 주왕붉은 새가 있었음에도 망했고 노나라기린을 얻었음에도 쇠하였는데, 고종[34]장끼가 우는데도 흥했고 정공(들)이 싸웠지만 창성하였습니다. 그러니 덕이 요사함에 이김을 알 수 있습니다. 별의 변괴라는 건 두려워 할 것이 아니니, 청컨대 왕께서는 걱정하지 마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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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제41권 열전 제1 김유신 상}}}
라고 말하며 진정시키고는 불 붙은 허수아비에 달아 날려 별이 다시 떠오른 것처럼 연출하고 떨어진 별이 다시 하늘로 떴다는 소문을 퍼뜨려 반란군의 사기를 떨어뜨렸다. 이후 장졸들을 독려하여 몰아치니 비담 등이 패하여 달아났으며 추격하여 비담을 참수하고 그 9족을 멸했다. 한편 본기에는 비담 등이 반역을 일으켰으나 실패했으며 연루되어 죽은 자가 30명이라는 내용뿐이고 상기의 구체적인 전황은 김유신 열전의 기록이다.

3.4. 진덕여왕 시기


647년(53세) 정월 8일, 아직 비담의 난이 진행 중에 선덕여왕이 승하하였으므로 진덕여왕이 즉위하고 비담의 난에 대한 사후처리가 있었다. 10월에 백제 장군 의직이 보기(步騎) 3천으로 무산(茂山), 감물(甘勿), 동잠(桐岑) 3 성을 공격해, 김유신이 보기 1만으로[35] 구원했지만 오히려 위기에 빠졌다. 이때 김유신이 휘하의 비령자(丕寧子)라는 인물에게 지시, 비령자는 불리한 전황에서 앞장서 분전했고, 비령자의 아들 거진(擧眞), 가노(家奴) 합절(合節)과 함께 싸우다 전사했다. 귀족 지휘관의 솔선수범에 용기를 얻은 신라 군사들이 앞다투어 진격해 수급 3천을 취했다. 백제본기에서는 백제군이 다 죽고 의직 혼자 겨우 살아돌아왔다고 적고 있다. 열전에서는[36] 비령자의 분전을 김유신이 명령했기 때문인 것으로 적어 놨다. 또한 합절이라는 인물은 열전에만 기록이 있다.
648년(54세) 3월 백제 장군 의직이 서부전선을 침범해 요거(腰車) 등 10개 성을 빼앗아갔다. 압독주(押督州)[37] 도독(都督) 김유신이 군을 세 갈레로 나누어 협격하자 백제군이 패주했다. 백제본기에서는 4월에 옥문곡(玉門谷)에서 김유신에게 패했다고 적고 있다. 여기까지는 본기 기록.
압량주 군주(押粱州軍主) 유신이 백제와 결전을 치룰만하다 판단해 대량성(大梁城, 대야성의 다른 표기)에서 백제군과 전투를 치뤘다. 대야성은 이미 백제에 빼앗긴 상태였으므로 신라에서 먼저 백제를 침공한 것이다. 그러나 백제가 미리 정보를 입수해 방비하고 있던 차였고, 신라군은 이기지 못해 도망치는 체 하며 후퇴해 백제군을 옥문곡까지 끌어들여서 복병으로 물리쳐 1천 명을 포로로 잡거나 죽이고, 장수 8명을 포로로 만들었는데 이 장수들을 앞서 대야성 전투에서 백제가 챙겨간 김품석, 고타소 부부의 유골과 교환했다. 기세를 몰아 악성(嶽城) 등 12개 성을 함락시키면서 적병 2만명의 수급을 베고, 9천을 포로로 잡는 전과를 올렸다. 그 공로로 이찬(伊飡), 상주행군대총관(上州行軍大摠管)에 임명되었다. 다시 진례(進禮) 등 9개 성을 공격하여 9천을 목베고, 6백을 사로 잡았다. 이상이 열전 기록이다.
649년(55세) 8월 백제 장군 은상이 정병 7천을 지휘하여 석토(石吐) 등 7개 성을 점령하였다.[38] 대장군 김유신을 위시한 장수들이 맞서싸웠지만 열흘이 지나도록 어쩌지 못했다. 이에 김유신은 도살성(道薩城) 밑에 진을 세우고 진중에 원군이 온다는 거짓정보를 흘렸다. 은상의 첩자가 이를 은상에게 전했고 은상이 머뭇거리는 사이에 들이쳐 장사 백명을 사로잡거나 죽이고 군졸 8980명을 베고 군마 만필과 수만은 병기를 노획했다. 확실히 대승이었는지 다음해 6월 당에 보낸 사신을 통해 승전 보고까지 올렸다. 물론 여기서 메인은 치당태평송을 지어 올리는 거였지만... 열전에서는 이것도 1년 전의 일로 기록하고 있으며 여기에 회군 중 백제의 좌평(佐平) 정복(正福)이 1천명을 데리고 투항했는데 김유신이 대인배(?) 같이 모두 자유롭게 풀어주었다는 대단히 쓸데없는 사족을 달아놨다.

3.5. 태종 무열왕 김춘추 시기


654년(60세), 마지막 성골 혈통인 진덕여왕이 사망. 열전에 따르면 이찬(伊飡) 알천과 논의하여 진골 출신의 김춘추를 왕으로 추대했다. 본기에서는 원래 알천이 신하들에게 섭정으로 추천받았으나 알천이 자신이 나이가 많음을 이유로 춘추에게 양보한 것으로 나온다. 이 당시 알천은 삼국유사의 화백회의 기록을 토대로 김춘추, 김유신 세력과 권력의 경쟁관계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기록 그대로 이미 나이가 많(고 건강이 좋지는 않)아 양보했을 수도 있고[39][40], 혹은 섭정으로 추대된 것은 형식적인 절차일 뿐 이미 권력구도상 차기 왕으로 김춘추가 오를 것은 거의 내정되어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 춘추는 알천의 양보를 유교적 선양 의식처럼 세 번 겸양하다가 마지못해 왕위에 올랐다.[41]
655년(61세) 정월 고구려, 백제, 말갈의 연합군이 신라의 북부 전선을 공격해 33개 성을 점령하였다. 백제 본기 기록으로는 8월에 30여 성이라 하는데 고구려 본기 기록이 신라와 같고 신라가 당에 구원을 요청하자 당이 고구려를 친 것을 보면 고구려 주도의 침공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0월 무열왕의 딸이자 자신의 조카딸인 지조(智照)와 혼인했다.
열전에서는 도비천성을 함락한 김유신의 전공이 나오는데 이것이 의미가 큰 것이 '''안그래도 부여 턱밑까지 신라군이 있는 상황에서 몇 십키로 더 전진했고 그야말로 고개 하나 넘으면 황산벌이고 그 벌 끝자락이 부여이다.''' 이 무렵 김유신이 백제의 좌평 임자의 종으로 끌려갔다가 탈출한 급찬 관등의 신라인 조미압(租未押)을 통해, 임자와 접촉해 백제의 정보를 빼냈다고 한다.
660년(66세) 정월 상대등 금강(金剛)이 사망하여 김유신이 그 후임으로 귀족회의의 의장 상대등에 임명되었다. 가야계 비주류 귀족으로 시작한 김유신이 귀족권력의 정점에 오른 것이다.
3월에 소정방이 수군과 육군 도합 13만을 이끌고 서해를 횡단해 백제 공략을 시작했다. 소정방은 7월 10일 까지 신라군과 당군이 합류하여 함께 사비성을 치기를 원했고 무열왕은 김유신 등에게 5만 군사를 주어 호응했다. 이에 황산벌에서 백제 장군 계백결사대 5천이[42] 험지를 선점하고 세 곳에 군영을 설치한채 신라군을 요격했다. 김유신의 신라군은 군을 세 갈래로 나누어 네 번 싸웠지만 승리하지 못했고 병졸들의 힘만 소진했다. 장군 흠순이 아들 반굴을 보냈지만 장렬히 전사했다. 이번엔 장군 김품일이 아들 관창을 보냈고 이번에도 사로잡혔다.[43] 계백은 어린 관창을 살려보냈지만 관창은 다시 돌격해왔고 결국 그 목을 말안장에 메어 돌려 보냈다. 김품일이 어린 아들의 장렬한 죽음을 자랑스러워하자 신라군이 비분강개하였다. 결국 중과부적으로 계백은 전사하고 좌평 충상(忠常), 상영(常永) 등 20명이 포로가 되었다. 백제 본기에는 계백의 군사 수, 네 번 싸워 이겼다는 것, 계백의 전사만을 기록하고 있다.[44]

이 날에 소정방(蘇定方)은 부총관(副摠管) 김인문(金仁問) 등과 함께 기벌포(伎伐浦)에 도착하여 백제의 군사를 만나 맞아 싸워서 크게 깨뜨렸다. 김유신(金庾信) 등이 당(唐)나라 군대의 진영에 이르자, 소정방은 김유신 등이 약속한 기일보다 늦었다고 하여 신라의 독군(督軍)인 김문영(金文潁)을 군문(軍門)에서 목을 베려고 하였다. 김유신이 무리들에게 말하기를

'''“대장군(大將軍)이 황산(黃山)에서의 싸움을 보지도 않고 약속한 날짜에 늦은 것만을 가지고 죄를 삼으려고 하는데, 나는 죄가 없이 모욕을 받을 수 없다. 반드시 먼저 당나라의 군사와 결전을 한 후에 백제를 깨뜨리겠다.”'''

라고 하였다. 이에 큰 도끼를 잡고 군문에 섰는데, 그의 성난 머리털이 곧추 서고 허리에 찬 보검이 저절로 칼집에서 뛰어나왔다. 소정방의 우장(右將)인 동보량(董寶亮)이 그의 발을 밟으며 말하기를 “신라의 군사가 장차 변란을 일으킬 듯합니다.”라고 하자 소정방이 곧 김문영의 죄를 풀어주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태종 무열왕 7년 7월 9일 소정방이 기벌포에 도착하다. #

7월 11일 김유신 등이 당나라 군영에 도착했을 때 소정방은 김유신 등이 늦게 합류했다는 이유로 신라 독군(督軍) 김문영(金文穎)[45]의 목을 베려 하였다. 김유신이 노하여, '''"반드시 먼저 당나라의 군사와 결전을 한 후에 백제를 깨뜨리겠다."''' 라며 군문에서 도끼를 들고 서자, 소정방의 우장(右將) 동보량이 소정방을 설득해 소정방이 결국 김문영을 곧바로 풀어주었고 이 일은 불문에 부치게 된다.
7월 12일 나당연합군이 사비성을 포위하는데 소정방이 움직이지 않으려는걸 김유신이 설득해 공조가 이루어졌다. 13일 왕자 부여융이 항복하고, 18일 웅진성으로 피난한 의자왕도 나당연합군에 결국 항복했다.
본기에서 중요하게 기록된 황산벌 전투 등을 열전에서는 전부 생략하고 '신라군이 당군과 협력해서 백제를 멸망시켰다. 김유신의 공이 컸다' 정도로 때워버렸다.[46] 거기에 백제 처리의 전권을 위임 받은 소정방이 김유신, 김인문, 김양도(金良圖) 세 장군에게 백제 영토를 나눠주겠다고 하며 당에 붙으라 회유했는데 김유신이 그걸 차버린 다음 무열왕에게 당의 야욕을 경고했다고 적고 있다.

3.6. 문무왕 김법민 시기


661년(67세) 5월 고구려 장군 뇌음신, 말갈 장군 생해(生偕) 연합군이 술천성을 공격해왔지만 이기지 못하자 북한산성을 공격하여 포위했다. 북한산성은 20여일이나 버텼지만 함락되는건 시간문제였다. 그런데 갑자기 천재지변이 일어나 고구려군이 퇴각했다. 고구려 본기에는 뇌음신이 말갈군을 이끌었다고 적고 있으며, 처음부터 북한산성을 공격했고, 열흘 동안 포위했다 적고 있다. 신라본기에서는 북한산성 성주 동타천(冬陁川)의 정성이 하늘에 닿은 것이라며 상을 내렸다고 기록했는데, 열전이나 삼국유사 태종춘추공조에서는 동타천이 아닌 김유신이 하늘에 기도하여 이런 이변이 일어났다고 바뀌어 있다.[47]
7월 17일 대장군직에 임명되어 문무왕의 친정에 따라나서 9월 27일 백제 부흥군의 옹산성을 항복시키긴 뒤, 웅현성을 쌓았다. 문무왕은 10월 29일 당의 사신을 맞이하기 위해 돌아갔는데, 문무왕의 책봉과 군량을 평양으로 수송하라는 칙사였다.
662년(68세) 정월 문무왕이 김유신을 비롯한 아홉 장수에게 수레 2천여 량에 쌀 4천 석과 벼 2만 2천여 석을 싣고 평양성에서 격전을 벌이고 있는 당군에 보급하기 위해 평양으로 가도록 명령하였다. 18일 풍수촌(風樹村)에 머물렀는데 얼어붙은 험한 길을 가기 위해 군량을 전부 수레에서 소와 말에 옮겨 실었다. 23일 칠중하(七重河)를 건너 산양(蒜壤)에 이르렀다. 2월 1일 유신 등이 장새에 도착했는데 평양까지는 3만 6천보 남은 거리였다. 보기감(步騎監) 열기(裂起)등 15인을 선행시켰는데, 날이 추워 사람과 말이 다수 동사했다. 6일 군량을 전달하고 소정방에게 은 5천 7백 푼, 가는 베 30필, 머리털 30량, 우황 19량을 선물했다. 군량을 받은 소정방은 곧 전투를 그만두고 돌아갔다. 유신 등은 당의 군사가 돌아가자 곧 회군하여 과천을 건넜는데, 추격해온 고구려군을 영격하여 수급 1만을 베고, 소형(小兄) 아달혜(阿達兮) 등을 사로 잡았으며, 무수한 병장을 노획했다. 김유신과 김인문은 공을 인정받아 본피궁(本彼宮)의 재화(財貨), 전장(田莊), 노복(奴僕)의 절반을 나누어 받았다. 고구려 본기에는 소정방이 평양성을 포위했지만 폭설 때문에 성과없이 돌아갔다고만 기록되어 있다.
열전에서는 당나라의 보급요청에 조정에서 회의를 열었는데 적국 깊숙한 곳까지 군량을 나르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고 귀족 모두가 반대하던 와중에, 김유신이 스스로 군량수송 작전을 자청했다 적고 있으며, 문무왕은 위험한 일을 맡김을 눈물을 흘리며 걱정하고 국경을 넘은 뒤에는 상벌을 뜻대로 해도 좋다는, 소위 편의종사권(便宜從事權)까지 받았다고 적고 있다.[48] 보기감 열기는 이 보급원정 중 큰 공을 세워, 유신은 이 권한을 이용해 열기에게 임의로 급찬의 관등을 지급했고 원정이 끝난 뒤에는 문무왕에게 특별 요청해 사찬으로 삼도록 요청했다. 열기의 신분은 기록돼있지 않으나 이후의 대화를 미루어보면 사찬 관등을 지급받기 곤란한 낮은 신분으로 추정되고 있고, 김유신이 골품제로 대표되는 신라의 신분제에 얽매이지 않는 성향이었다는 근거 중 하나로 여겨지기도 한다. 김유신의 보급을 받은 소정방군은 추위와 기아에 시달려서 금방 돌아갔다고 적혀있다.
663년(69세) 문무왕의 친정에 참가해 부여풍이 이끌던 백제부흥세력을 와해시켰다.(백제-왜 연합 Vs 나당 연합) 백강 전투 등의 전투에서 패배한 부여풍은 고구려로 도주하고, 왕자 충승(忠勝), 충지(忠志) 등은 백성들과 함께 항복했다. 그러나 지수신만은 임존성(任存城)에 웅거하여 저항했는데 결국 이기지 못해서 11월 4일 회군했다. 이후 논공행상이 있었다고 하는데 열전에서는 이때 김유신이 토지 500결을 받았다고 적고 있다.
664년(70세) 김유신이 은퇴를 요청했지만 문무왕은 허락하지 않고 대신 은퇴를 거부하는 의미로 지팡이 궤장(几杖)을 하사했다. 이 기간에 사비산성에서 백제저항 운동이 있었고 진압되었는데, 열전에서는 이것도 김유신의 은밀한 모책 덕분이었다 적고 있다.
665년(71세) 본기에는 언급이 없고 열전에는 당 고종이 사신 양동벽(梁冬碧), 임지고(任智高) 등을 보내 문안하고 김유신을 봉상정경(奉常正卿) 평양군(平壤郡) 개국공(開國公)으로 책봉하고 식읍(食邑) 2천 호(戶)를 내렸다고 적고 있다.
666년(72세) 천존(天存)의 아들 한림(漢林)과 유신의 아들 삼광(三光)이 내마(奈麻)로서 당나라에서 지내는 숙위(宿衛)가 되었다. 열전은 한발 더 나가서 좌무위익부중랑장(左武衛翊府中郞將)이라는 뭔가 그럴 듯한 관직까지 받았다고 적고 있다.
667년(73세) 문무왕의 친정을 보좌했는데 이때 대각간직에 임명되어 있었다.
668년(74세) 6월 21일 신라군사조직의 구서당(九誓幢),의 수장인 대당대총관(大幢大摠管)에 임명되었다. 29일 본격적인 고구려 정벌이 시작되었지만 김유신은 통풍을 앓고 있어 전장에 나가지는 못하고 왕이 수도에 머물게 했다. 고구려 정벌이 끝난 10월 22일에는 기존에 가장 높았던 대각간직 위의 태대각간직을 새로 만들어 거기에 임명되었다. 현대로 치면 미군의 존 퍼싱처럼 '''6성 장군인 대원수 직위를 받은 것과 같다.'''
열전에서는 668년 고구려 정벌 때 김흠순과 김인문이 말하길, 김유신이 같이 가지 않으면 불안하다고 하니 왕이 세 사람은 나라의 보배라 혹 전부 변고를 당하면 어쩌냐며 만류한다. 결국 김유신은 두 사람에게 덕담을 해주고 수도에 남는다. 전쟁 후 태대각간 관직에 식읍 500호를 주고, 이어서 수레와 지팡이를 하사하고 대궐에 오름에 있어서 몸을 굽히지 않도록 하였다. 그의 모든 보좌관들에게도 각각 위계 한 등급씩을 올려 주었다. 구석#s-2과 같은 특전을 받은 셈이다. 또한 당고종이 조서(詔書)를 내려 상찬했고 가문에서 이 조서를 보관 중이었는데 5대손 때 분실했다고 한다.
669년(75세) 5월 말 목장 174개소를 지었는데 이중 6곳이 주어졌다. 해당 관청(22곳)과 궁(10곳)을 제외하면 가장 많은 수 였다.
670년부터 나당전쟁이 진행 중이었는데 백전노장이라지만 이 때는 나이가 나이인지라 나당전쟁의 전장 선봉에는 서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673년(79세) 7월 1일 사망했다. 열전에 따르면 사망 얼마 전인 673년 정월 황룡사와 도성 사이에 커다란 별이 떨어졌고, 때맞춰 지진까지 일어나자 왕이 걱정했는데, 김유신은 '이 변이는 신에게 있는 것이지 나라의 재앙이 아니니 걱정하지 마십시오.'라고 말했다. 문무왕은 만약 그렇다면 더 걱정이라면서 담당 관서에 액땜을 할 것을 명했다. 또한 김유신의 집에서 갑자기 한 무리의 무장한 병사들이 통곡하면서 나와 어디론가 사라졌다. 이 이야기를 들은 김유신은 '그들은 나를 지켜준 음병(陰兵)들이다. 내 운이 다한 것을 알고 떠났으니 나도 곧 죽을 것이다.'라고 말했으며 이 일이 있은지 10여일 후에 자리에 눕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문병하러 방문한 문무왕에게 당부하는 말을 전했고, 며칠 뒤 자택에서 종을 시켜 문무왕에게 보내는 유서를 작성하게 한 뒤 숨을 거두었다. 문무왕은 그의 죽음을 듣고 크게 슬퍼하여 비단 1천 필과 조 2천 석을 부조로 보내고 군악의 고취수(鼓吹手) 100명을 장례식에 보내주었다. 유신의 유해는 금산원(金山原)에 묻혔고, 왕명으로 그의 공적을 기록한 비석이 무덤 앞에 세워졌으며 수묘인을 두어 무덤을 지키게 했다.
김유신 사후 150여년이 지난 흥덕왕 때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존되었다는데 본기에 있는 기록은 아니며, 삼국유사에도 같은 기록이 있는데 여기서는 흥덕왕이 아닌 경명왕 때 추존되었다고 되어있다. 기록상 신라에서 왕족(박씨, 경주김씨)이 아닌 인물이 왕으로 추존된 사례는 김유신이 유일하다.
참고로 그의 출생지인 충청북도 진천군[49] 길상사에 영정이 봉안되어 있는데, 이러한 사실을 안 경상도 사람들은 의아해 하기도 한다. 일평생 신라를 위한 사람이라 출생 또한 신라 땅 어딘가, 즉 지금의 경상도 쪽일 것이라 짐작하는 경우가 많다.

4. 삼국유사를 비롯한 기타 일화


설화적 기록을 수록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던 삼국유사에서는 삼국사기보다 좀 더 설화적이고 비현실적인 일화가 다수 담겨있으며, 그 외에도 많은 야사가 전한다.
  • 김유신이 수련한 경주의 단석산 정상엔 검법을 전수받은 김유신이 신검으로 돌을 갈랐다는 설화가 담겨있는 돌들이 아직도 남아있다.[50]
  • 백석이라는 고구려의 자객이 김유신을 죽이러 화랑으로 위장했는데 나림, 혈례, 골화라는 세 여신이 나타나서 이를 알려줘 목숨을 건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에 따르면 억울하게 죽은 고구려의 점쟁이 추남이 죽을 때 적국의 대장으로 태어나 고구려를 멸망시키겠다고 맹세했는데, 왕이 추남이 서현의 부인 = 만명부인의 품으로 들어가는 꿈을 꾸고 고구려를 멸망시킬 것이라 하여 미리 제거하기 위해 자객을 보낸 것이라고 한다.# 근데 정작 고구려를 멸망시킬 때 김유신은 너무 나이가 들어 골골거리고 있었다.
  • 특히 유명한 건 고려시대의 문인 이인로의 《파한집(破閑集)》에 실려 있는 이야기다. 화랑이던 김유신은 어느날 친구 모가대, 우기나와 함께 다니다 신녀천관녀를 만나 사랑해 그녀와 교제했는데, 어느 날 어머니 만명부인이 그 꼴을 보고는 "나는 이제 늙었다. 네가 커서 공을 세워 왕과 부모에게 기쁨을 안겨줄 날을 밤낮으로 고대해왔는데 어찌 너는 술과 여자나 쫓아다니느냐"라고 울면서 말했다고 한다. 아예 출가를 하라는 선언까지 떨어지자 김유신은 그 뒤 자신의 행동을 부끄러워 해서 천관에 대한 그리움을 꾹 참고 다시 그 집에 들르지 않기로 어머니께 맹세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술에 취해 곯아떨어진 상태로 집에 돌아가던 중, 말이 평소 길 가던 버릇대로 그녀의 집 앞에 멈춰서자 천관이 즉시 달려나와 영접했는데, 정신을 차린 김유신이 '네가 어찌 주인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이리 하였느냐'며 말의 목을 그대로 베었다고 한다. [51] 현재 김유신의 집이었던 제매정택과 천관녀가 살았던 곳으로 알려진 천관사는 직선거리로 500m 정도 떨어져 있다. 천관녀는 그의 무정함을 원망하며 《원사(怨詞)》라는 향가를 지었다고 하며, 한편으로는 그의 결단에 감동하여 신녀직을 그만두고 비구니가 되어 절에서 지내다 병으로 생을 마감했다. 후에 김유신도 죄책감을 느꼈는지 삼국을 통일한 후에 천관녀를 찾았지만 그녀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던터라 천관사라는 절을 지어 그녀를 위로했다고 한다.[52]
  • 비담의 난 때 김유신이 연을 띄어 반란군의 사기를 꺾자 이후 비담은 직접 2만의 대병력으로 왕위를 찬탈하려 드는데, 김유신에게는 그 절반 병력인 1만밖에 없었다. 이에 김유신이 비담에게 선전포고를 하고 대항하는 자는 9족을 멸하겠다며 진군해 비담의 병력과 대치하자 김유신을 본 병사들은 모두 무기를 버리고 투항했다. 김유신은 3만 병사를 이끌고 그대로 진군해 비담과 반란에 가담한 9인의 9족을 멸하고, 투항한 2만 명의 죄는 전혀 묻지 않았다.[53] 다만 삼국사기 본기에서는 30명정도가 죽었다고 되어있다.
  • 정치적 입지를 올리기 위해 김춘추와의 정략결혼을 시도했는데, 축국 놀이를 하다가 일부러 김춘추의 옷자락을 밟아서 터트린 다음, 옷을 고쳐주겠다면서 자기 집으로 데려와서 누이동생 문희를 방으로 들여보내서 분위기를 조성, 성관계를 가지게 했다. 그런데 문희[54]가 임신을 했는데도 김춘추는 정식 혼인한 관계가 아니었으므로 모른 척을 했는데, 이에 누구의 자식인지도 모를 아이를 임신해서 가문의 명예를 더럽힌 문희를 화형시키겠다면서 일부러 젖은 장작을 쌓아놓고 불을 지펴 연기가 무럭무럭 솟아오르게 해, 그것을 본 지나가던 선덕여왕이 중재를 하여 혼인을 맺게 되었다고 한다.
  • 소정방과 기싸움을 한 다음날, 소정방이 출병하기 전 하늘을 나는 까마귀를 보고 점을 쳤는데 불길한 점괘를 받고 겁을 먹었다. 김유신은 검을 뽑아 까마귀를 가리켰는데 그대로 오체분시되었다고 한다. 이 일로 소정방이 마음을 다잡고 출정할 수 있었다.
'''신라의 풍월주(風月主)'''
박창화가 필사했다고 주장하는 화랑세기의 기록
14대 호림공 김호림

'''15대 유신공 김유신'''

16세 보종공 설보종
  • 위서 논란이 있는 필사본 화랑세기에 의하면 15대 풍월주(화랑의 우두머리)가 김유신이고, 삼국유사에서는 18세 때 화랑의 우두머리인 국선이 되었다고 한다.

4.1. 사후 전설


신문왕만파식적을 보낸 것도 김유신과 문무왕의 혼백이라 한다. 또한 후에 후삼국시대가 형성되고 신라가 망할 때가 되자 왕궁에서 수많은 군사의 혼령들이 울며 김유신의 묘로 들어갔다는 전설이 있다.
조선시대의 야담집 《천예록(天倪錄)》에는 서악서원이 조정으로부터 사액[55]을 받던 때를 배경으로 한, 김유신과 관련된 이야기가 있다. 김유신과 설총, 최치원 세 사람의 위패를 모신 경주의 서악정사[56]가 비로소 조정으로부터 사액을 받게 된 것과[57] 관련해 경주의 유학자들이 모인 회의에서 어떤 서생이 "설총은 중국의 유교 경전을 이두로 풀이하여 가르친 공적이 있고 최치원은 문장으로 중국에까지 이름을 떨친 공적이 있지만 김유신은 무장(武將)으로서 유학자들에게 모범이 될 만한 일을 한 것이 없다." 허며 김유신의 위패를 빼고 사액을 청하자고 주장하고 나섰다. 그 자리에서 논의가 나지 않아 회의를 파하고 얼마 뒤, 이 서생이 서원에서 깜빡 잠이 들었는데 갑옷을 입은 무사들이 몰려와 서생을 잡아다 뜰에 꿇어앉히고, 병사들을 거느린 김유신이 그의 앞에 나타나 서생을 향해 "유학자들이 중히 여기는 덕목이 충(忠)과 효(孝)가 아니던가. 내가 살아서는 위태로운 나라를 위해 전장에 나아가 어려움을 구제하고 삼국을 통일하는 공을 세웠으니 그것이 충이고, 그렇게 공을 세우고 입신양명하여 집안과 부모의 이름을 빛냈으니 그것이 효인데, 어찌 함부로 이야기하느냐."라며 호통을 쳤다. 깨어난 서생은 두려워하며 시름시름 앓다가 이틀만에 피를 두 말이나 토하고 사망했다.
많은 기담과 전설을 남겨서 뭔가 영력이 강한 장군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인지 김유신은 한국 전통무속신앙에서도 신으로 모시는 역사인물이다. 강원도 강릉시 지역에서는 김유신을 산신으로 모시는 사당도 있다. 강릉 지역 구비전설에 따르면 임진왜란 때 산신령이 된 김유신이 대관령의 소나무를 모두 병사로 보이게 해서 왜군이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또한 경상북도 군위군 지역에서도 김유신을 산신령으로 모시고 신당이 있고, 그 외에도 오늘날에도 전국 방방곡곡에서 김유신을 모시는 신당은 매우 많다.

5. 가계


김유신의 가계도는 그 당시 신라에서는 순혈주의를 지키려는 의도 때문에 당연한 것이지만[58] 철저히 유교화된 조선시대를 거쳐 오늘날 한국인의 기준으로 따지면 완전히 막장이었다. 김유신은 자신의 여동생 김문희가 김춘추에게 시집갔는데 문제는 김춘추와 김문희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 김유신에게 시집왔다는 것. '''즉 외삼촌과 조카가 결혼한 셈이다.'''[59]어쨌든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이 전하는 김유신의 가계는 아래와 같다.
  • 조부: 김무력
  • 조모: ?[60]
  • 외조부: 숙흘종
  • 외조모: 만호부인[61]

  • 아내[65]: 지소부인[66]
    • 장남: 김삼광(金三光) 이찬
    • 차남: 김원술(金元述)[62][63] 소판
    • 3남: 김원정(金元貞) 해간
    • 4남: 김장이(金長耳) 대아찬
    • 5남: 김원망(金元望) 대아찬
    • 딸 4명[64]
    • 서자: 김군승(金軍勝) 아찬
김유신의 부인 지소부인은 655년에 김유신과 혼인했는데, 김유신이 죽은 후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으며 성덕왕 때까지도 생존해 있었다고 한다. 지소부인은 문희의 딸이 아닌 전처 소생이었을 거라는 말도 있는데, 그렇다고 쳐도 김유신과 무열왕부터가 8살이나 차이가 나기 때문에 무열왕의 딸이 김유신과 엄청난 나이 차이였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지소부인의 나이에 대해 구체적인 기록은 없지만 신라본기 성덕왕 11년(712) 기록에서 김유신의 아내가 살아있으며 존칭과 곡식을 하사받았다는 기록이 등장하므로, 무려 57년 전인 655년에는 10~20대의 젊은 연령대였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재혼하는 경우가 아니면 그쯤에 결혼하는 게 전근대 사회에서는 정상적이기도 했다.
열전에서 김유신의 다섯 아들과 딸 넷은 모두 지소부인의 소생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장남 김삼광의 경우 666년에 당나라에 숙위로 간 적도 있고 고구려 정벌 당시 당군과 함께 평양성에 참전하기도 했다. 이 기록대로라면 삼광은 10대 초반에 당나라와의 숙위외교와 고구려 전쟁에서 활약한 천재소년이라는 얘기가 된다. 아무리 나이 열다섯이면 성인 취급을 하던 시대임을 감안할지라도 숙위라는 직책은 단순히 황제를 시중들거나 볼모 개념이 아니라 신라와 당과의 외교관계를 조정하는 중요한 역할도 맡고 있었기에 어린아이를 숙위로 보냈을 가능성은 거의 없고, 삼광의 활약 연대로 봤을 때 삼광은 사실 지소부인이 아니라 기록에 남지 않은 전처의 소생일 가능성이 높다.
삼국유사를 보면 '재매부인(財買夫人)'과 관련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게 기록된 게 삼국유사 기이편의 김유신 편이다. 여기서는 '김씨 집안의 종부'라고만 기록해 놓았으며 그녀가 죽자 청연 위의 골짜기에 장사지내 그곳을 '재매곡'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래서 해마다 봄이 되면 김유신 가문의 남녀들은 그 골짜기 남쪽 시냇가에 모여 잔치를 베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이 '재매부인'을 지소부인과 결혼하기 전의 김유신의 부인으로 보는 설도 있다.[67]
화랑세기 필사본에서는 태종 무열왕의 딸과 결혼하기 전 김유신이 미실김세종의 손녀와 결혼을 했었으며, 이와 별개로 천관녀와의 사이에서 아이가 있었다고 한다. 위서 의혹을 받는 화랑세기 필사본이니까 저 내용을 다 믿을 수는 없다 해도, 당시 김유신의 나이로 봤을 때 재혼이라 보는 게 타당하다.
김유신의 후손들은 희곡으로 만들어질 정도로 유명한 일화를 남긴 원술랑을 제외하면 신라가 망할 때까지도 크게 이름을 드러내질 못했으며 기록도 별로 없다. 삼광은 삼국사기 열기 열전을 보면 열기에게 삼년산군의 태수 직을 주었다는 것과 신문왕의 혼사에서 관여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데, 나름대로 신문왕 때까지 조정에서 역할을 했던 것을 유추할 수 있다.
서자로 김군승이 있었는데, 그는 661년 2월 김유신이 김인문, 김양도 등을 이끌고 태백산맥을 우회하여 평양에 고립된 소정방에게 군량을 공급할 때[68], 참전했다고 한다. 그는 김인문과 함께 당군과 접촉했다는 기록을 볼 때 제법 중국어에도 능통한 사람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661년에 전장에서 한 역할을 맡을 정도로 장성했다면 655년에 결혼한 지소부인 소생 아들들보다 적어도 한 세대 위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 김군승을 비극적인 러브스토리로 유명한 천관녀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보는 견해도 있다고 한다. 김유신이 지소부인 이전에 교제한 여자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는 것은 천관녀뿐이고 결국 정식 혼인은 하지 못해 아들을 낳았다면 서자가 되었을테니, 현재로선 추정 가능한 후보는 천관녀뿐이다.
장남 김삼광의 아들인 김윤중은 명장 김유신의 손자라는 이유로 당나라가 먼저 요청해 733년 발해 공격의 대장으로 북진했으나 발해로 가는 중에 폭설을 만나 전투 없이 그냥 돌아왔다. 성덕왕의 총애를 받았으나 다른 귀족들의 시기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무렵부터 김유신 집안 사람들은 신라 조정에서 힘을 잃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서 김유신 후손들에 대한 기록이 적은 것과 삼국사기/유사에 기록된 김유신 무덤에서 김유신의 귀신이 뛰쳐나와 통곡했다는 전설은 이를 잘 보여주는 이야기다.
또한 김유신의 서손[69]으로 당에 유학을 다녀오고 둔갑술(!!!)에 능했다고 전해지는 김암이 있다. 이밖에 신라 하대에 중국에서 일어난 이사도의 난과 김헌창의 난 때에 이를 진압한 인물들 중에서 김웅원<金雄元>이라는 인물이 있는데, 『김해김씨 삼현파보(金海金氏三賢派譜)』에 김유신의 후손으로 그의 행록을 지은 장청(長淸)의 아들로 김웅원이 기록되어 있음을 근거로 그렇게 보기도 한다.

5.1. 김유신장군묘



[image] '''대한민국의 사적''' '''제21호'''
'''김유신묘'''
金庾信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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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경상북도 경주시 충효동 산7-10
'''분류'''
유적건조물/무덤
'''면적'''
23\,042㎡
'''지정연도'''
1963년 1월 21일
'''제작시기'''
신라
'''위치'''


[image]
김유신의 묘는 경주시 충효동에 위치해 있다. 대한민국의 사적 제21호이며 입장료는 2018년 기준 1천원. 인근에 위패를 모신 사당 숭무전, 9천평 규모의 흥무공원이 있다. 아래의 이유로 전 김유신묘, 흥무대왕릉 등으로도 불린다. 밑으로 철길이 있어 열차가 수시로 지나간다.
김유신은 왕이 아니었지만 사후 왕으로 추존된 영향인지 그의 묘는 신라 왕릉에 준하는 양식으로 조성됐는데, 주위에 둘레돌[護石]을 만들었으며 십이지신상을 부조로 조각해 두었다. 김유신의 묘는 어지간한 왕릉 못지 않게 크고 아름다운 규모를 자랑한다. 묘 앞에 묘비가 두 개인데 이는 모두 후대에 세워진 것으로, 하나는 조선 숙종 때 경주부윤 남지운이 세운 묘비로 '신라태대각간 김유신묘(新羅太大角干金庾信墓)'라고 적혀 있다. 다른 하나는 1970년대에 세워진 '개국공순충장렬흥무왕릉(開國公純忠壯烈興武王陵)'인데, 이 비석의 '''능(陵)''' 자가 비가 오면 ''''묘(墓)'''' 자로 바뀐다고 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다. 김유신은 사후 162년 후에 흥무왕으로 추존되는데, 성도 다르고[70] 부계 왕족이 아닌 인물이 왕으로 추존된 것은 한국사에서는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으므로 매우 예외적인 경우였다. 1970년에 비석을 세울 당시 처음엔 김유신이 어쨌든 왕족이 아닌 일반인이므로 흥무왕묘(墓)라고 새겨 놨으나, 추존이긴 하나 '왕'이 되었으므로 왕에게는 능(陵) 자를 써야 한다는 주장에 처음엔 묘(墓)라고 써있던 것을 메우고 능(陵)이라고 다시 새겼다고 한다. 글자를 고친 것이므로 옛날 묘 글자가 희미하게 남아있어서 두 글자가 겹친데다가, 원래 비석에 쓰인 석재와 글자를 메울 때 쓴 석재의 색과 질감이 미묘하게 달라서 물을 뿌리면 글자가 바뀌는 듯하게 보이게 된 것이다. 예전에 스펀지 에서도 이 능 자에 물을 뿌려 묘 자로 바뀌는 실험을 했는데, 이후 이 신비한 현상(?)을 직접 보기 위해 관광객들이 물을 하도 뿌려대서 비석이 중간부터 아래쪽은 살짝 색이 변해있다. 하지만 이 비석도 상당히 오래된 문화재고, 여기에 물을 뿌려서 훼손시키는 것은 문화재보호법에 위반하는 행위이니 하지 말자. 보고 싶으면 유튜브에서 보자.
다만 이 묘는 사실 김유신의 진짜 묘가 아니고 오랜 세월이 지나며 와전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일제강점기 일본 학자들도 제기한 문제이기도 하고 해방 후 이병도는 사실은 김유신의 묘가 아니라 신무왕의 능이며 진짜 김유신의 묘는 오늘날 태종 무열왕의 차남인 김인문의 묘로 전해지고 있는 '각간묘'라는 설을 제기하기도 했다.[71] 왜냐하면 둘레돌이나 십이지상을 두른 김유신 묘의 양식은 동시대 인물인 무열왕릉의 양식과는 다르고 후대 성덕왕 이후에나 확립된 양식이라는 것이다. 이런 이병도의 설에 김상기 박사는 훗날 흥덕왕이 김유신을 흥무대왕으로 추봉하면서 흥덕왕 무렵의 신라 후기 양식으로 김유신묘를 개수한 것이라고 반박하기도 했지만, 그렇다면 당시 이미 추봉된 여러 선왕들의 능을 개수하지 않고 있었는데 굳이 김유신의 묘만을 개수할 이유는 없다는 점이 이 설의 주요 논지.[72] 여기에 후대의 일이기는 하지만 조선 시대 경주 서악서원의 모태였던 서악정사를 지은 목적이 원래는 인접한 '''김유신묘'''의 관리를 위해서였다는 것도 포함된다. 서악정사는 동시에 김유신을 모신 사당이기도 했는데, 서악서원은 김인문의 묘로 알려진 각간묘에서 약 300m, 지금의 김유신장군묘에서는 약 2km 정도 떨어져 있다. 이를 바탕으로 쓴 소설이 차무진의 <김유신의 머리일까?> [73]이다. 또한 현재 김유신장군묘로 알려진 무덤이 신무왕릉이 아니라 경덕왕릉으로 보는 설도 있다.[74]
어쨌든 이런 견해도 있지만 오늘날의 그 묘를 김유신의 묘로 간주하고 있다. 무덤을 발굴하는 행위는 유교적 관점에서 금기시되고 있으며, 게다가 후손 김해 김씨 문중이 엄연히 지금도 존재하는데 이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릉원의 주인을 알 수 없는 능들처럼 대대적으로 발굴할 수도 없는 노릇이며, 설령 그렇게 발굴한다고 해도 무령왕릉마냥 지석을 부장하지 않았다면 '김유신묘가 맞다' 혹은 '아니다'는 구체적인 증거를 찾지 못할 가능성도 크다. 그리고 사실 이 부분은 어른의 사정 탓이 더 크다. 당장 문중 입장에서도 지금까지 수백 년 동안 중시조나 다름없는 중요한 조상의 무덤이라고 철썩같이 믿고 있었던 무덤이 열어서 과학적 조사를 해 보니까 실은 가령 경주 김씨박씨 등 딴 집안 무덤이고 진짜 조상 무덤은 다른 곳에 있거나 아주 영영 잃어버렸을지 모른다고 한다면 지금까지 수백년간 잘못된 제사를 한 셈이 되므로 섣불리 받아들이기 어려우니 애초에 의심을 안 하는 게 가장 상책이고, 관공서 입장에서도 학설 하나에 그 많은 안내책자며 지도, 안내판, 심지어 교과서 사진 및 설명까지 죄다 뜯어고쳐야 하는데 하루 아침에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상황.

6. 평가



6.1. 고려, 조선시대의 평가


신라가 유신을 대우한 것을 보면 친근히 하여 간격을 두지 않았고, 임무를 맡길 때도 의심하지 않았으니, 그의 말과 계책이 실행되어 그로 하여 자신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원망을 품지 않게 하였다. 그러므로 가히 육오동몽(六五童蒙)의 길함을 얻었다고 할 만하다. 그러므로 유신은 자신의 뜻한 바를 행할 수 있어 상국(당)과 협력하여 삼국을 합쳐서 한 나라로 만들었고, 능히 공명으로써 일생을 마칠 수 있었던 것이다. 비록 을지문덕의 지략과 장보고의 의롭고 용맹함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중국의 서적이 아니었던들 흔적이 없어져 듣지 못하였을 것이다. 유신과 같은 사람은 우리 나라 사람들의 그에 대한 칭송이 지금까지도 끊어지지 않으니, 사대부들이 그를 아는 것은 그럴 수 있지만 꼴베는 아이와 가축을 기르는 아이까지도 또한 능히 그를 알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사람됨은 반드시 일반 사람들과는 다른 데가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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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제43권 열전 제3 김유신 하}}}
고려 중기의 김부식을지문덕장보고의 업적은 중국 서적이 없었으면 몰랐을 거라고 하면서, 반면 김유신은 (글을 모를) 고려의 신분 낮은 어린아이들도 다 안다고 평했다. 이를 보면 김부식삼국사기를 편찬한 고려 중엽까지도 김유신의 명성이 크게 남아 있었다 볼 수 있다. 당장에 윤관 조차 김유신을 흠모하여 관련 책이나 기록을 자주 읽었다고 했으니 명성은 의심할 것이 없다. 또한 김유신이 명성을 떨칠 수 있었던 이유를 신라(왕과 귀족 등)가 그를 쓸데없이 의심하거나 차별하지 않은 것에서 찾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위대한 업적과 무거운 인망이 고금에 비할 데 없다'거나, 임진왜란 발발 당시 한국사에서 손꼽히는 위인으로 정몽주김유신 두 사람을 꼽고, 이후에도 김양, 성충, 계백, 강감찬, 정몽주와 함께 전대 한국사의 충신의 대표격 6명 중 한 명으로 나오는 등 긍정적인 이미지로 일관적으로 그려지고 있었다.

6.2. 근현대의 평가


일제강점기 무렵부터는 서양과 일본을 통해 현대적 개념으로 정립된 사학이 도입되었고, 일제라는 '외세'에 짓밟힌 당시 시대배경상 이를 사상적으로 극복하기 위해 단재 신채호로 대표되는 민족주의 사학이 발달했다. 김유신이 소속했던 7세기 중엽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과정에서 외세인 당의 힘을 빌렸고 그 과정에서 김유신이 군사적으로 활약했던 주역이었다는 점 때문에 근현대 민족주의 사학계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단재 신채호조선상고사에서 "교활한 음모로 적국을 혼란에 빠뜨린 음험하고 무서운 정치가"라고 비판적으로 평가, 아래 단락의 현대의 평가 중 부정적 평가에 대한 시초가 되었다.[75] [76]

6.3. 현대의 평가



6.3.1. 기록


유신의 현손(玄孫)으로서 신라의 집사랑(執事郞)인 장청(長淸)이 행록(行錄) 10권을 지어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여기에는 만들어서 넣은 말이 상당히 많기 때문에, 일부 삭제해 버리고 기록할 만한 것들을 취하여 전(傳)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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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제43권 열전 제3 김유신 하, 김유신의 현손, 김창정.}}}
삼국사기 안에서도 김유신 열전의 경우 비현실적이고 기이한 기록이 꽤 많이 나타나는데, 사실 이런 것들보다는 삼국사기 본기와 동떨어진 기록이나 당시 시대상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기록이 많이 섞여있기 때문에 긍정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특히 열전 648년 기록을 보면 백성들이 편하게 생활한지 오래되어 싸우기를 바랐다고 적고 있고, 유신이 이들을 이끌고 백제를 침공하여 무려 21개 성이나 함락시키는 모습이 나온다. 그러나 백성이 편하게 생활한지 오래되었다는데 그 동안에도 같은 삼국사기의 다른 부분을 보면 백제의 신라 침공이 연이어 있었고, 1년 전에는 내전까지 겪었던 신라의 백성이 편하게 생활했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된다. 또 본기에서는 침공을 막아낸 것으로 기록되어있는데, 오히려 침공을 했다고 되어있어 열전의 내용은 본기와도 다소 차이가 있다. 황산벌 전투는 기록조차 남아있지 않으며 북한산성 전투는 아예 김유신의 공으로 왜곡까지 하고 있는 수준. 애초에 열전 자체가 객관성과는 담쌓은 행록에서, 그나마도 아주 말이 안 되는 부분은 책 몇 권 분량을 빼고 올렸다고 김부식이 따로 적어 놓았는데도 불구하고 본기와 열전의 차이가 이렇게 심하게 난다.
그나마 <삼국사기>는 <사기>의 사마천이 한 것과 같이 김부식이 나 홀로 집안에서 저술한 책이 아니라 왕의 명령에 따라서 고려의 지식인들이 각각의 파트를 담당해서 자료를 수집하여 편찬하고,고위관직자들의 검토를 거쳐 왕이 최종적으로 읽어보고 승인하는 국책사업이라 본기와 열전이, 삼국의 본기끼리 조금씩 다른 부분이 존재하므로 자체적으로 최소한의 교차검증은 가능하다는 게 위안.

열전이 반쯤 김유신뽕에 물들어 있다보니 삼국사기 본기의 경우도 김부식이 김유신을 꽤 고평가 했다는 점, 삼국사기에서 김유신 열전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는 점을 들어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이 일부 있는데, 김유신과 관련된 고구려, 백제, 신라 본기를 서로 비교해 보면 고구려 본기 중 662년 신라가 당군에 군량을 보급하고 회군 중 고구려군을 격파했다는 기록이 없다는 것만 빼면 서로 큰 차이가 없다. 개중에는 신라가 최후의 승자고 김유신이 신라에서 명성이 높았으며 김부식이 그를 고평가한 것을 들어 혹 기록이 조작된 것이 아닌가 우려하지만 그렇다면 같은 삼국사기 안에서 고구려 본기만 차이를 남겨둘 이유가 없다. 김부식이 조작하고자 했다면 고구려 본기도 똑같이 조작할 수 있으나 그러지 않았다. 본기와 열전의 내용이 서로 다른 부분이 있는 것은 지금은 없어졌으나 삼국사기를 편찬한 고려시대 중엽 당시에는 남아있던, 서로 다른 원전을 삼국사기의 파트별 편찬자들이 제각기 참고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으로 사학자들은 판단하고 있다.
현대에 들어서는 김유신 열전이 과장되었다는 것만 알고 본기는 읽어보지도 않아서 본기 내용을 적어도 '김유신 열전 특유의 과장' 운운하는 사람들이 일부 존재하는데 까기 위한 거라도 일단은 사료를 먼저 읽어보는 것이 올바른 자세다.
한편 김유신 열전의 신뢰도와는 별개로, 이런 기록의 문제점은 삼국사기 집필의 난이도를 추정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어린 아이들도 그 위명을 알 정도로 유명하다는 김유신에 대한 기록마저 남아 있는 내용이 부실해서 거의 퓨전 판타지 수준의 미화가 들어간 행록을 검토해야 할 정도였으니 그보다 유명세가 못한 다른 인물 및 사건에 대한 사료는 얼마나 찾기 힘들었을지 충분히 짐작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에서도 이러한 난점을 따로 언급하며 아쉬워하는 대목이 있다.

6.3.2. 명장


들어가기 앞서 김유신의 당시 위치 및 역할에 대해 이해하는 것이 필요한데, 그가 본격적으로 신라의 방패 역할을 맡아 역임한 자리가 서라벌 바로 옆인 압독주(혹은 압량주, 오늘날 경상북도 경산시)의 군주로, 그 이전에 압독주에 대한 기사가 없기에 대야성(오늘날 경상남도 합천군) 일대를 상실한 신라가 비상조치로 만든 주로 보고 있다. 그러니까 당시 김유신이 이끈 군사는 이 주군이었던 것.
신라에겐 김유신이 마지막으로 남은 희망의 보루이자 방패였다. 선덕여왕 말년 김유신이 백제 및 고구려와 전투를 치르면서 일곱 성을 함락하고 다시 탈환해오는 등 군공 하나 만큼은 신라 내에서도 손에 꼽힐 만큼 출중한 명장이었고, 1만 정예군을 지휘하는 자리를 그에게 맡긴 것도 그런 맥락에서였을 것이다. 그리고 김유신은 이러한 신라 조정의 기대에 부응하듯 군을 이끌고 나아가 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백제의 진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하지만 김유신은 압승이 아니라 매번 악전고투 끝에 승리를 거두었고, 제 아무리 김유신이 매번 승리한다고 해도 싸움에서는 몰아냈을지언정 전쟁 면에서는 계속 밀려 전선은 점차 무너져 가고 있던 형세였으며 백제 뿐만 아니라 고구려 역시 진평왕 때부터 계속 신라의 북쪽 전선에 압박을 넣고 있었던데다 혹시 모를 일본의 침공에도 항상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으니 후방을 통째로 비워두고 백제 전선에 집중하기도 힘들었을 것이다.[77]
결국 김유신은 주변 3개국에 의해 고립된 신라의 방패 역할을 충실히 해내면서 생명을 연장해 줄 수는 있더라도 홀로 전세를 완전히 역전시킬 수 있는 인물은 또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사실은 무엇보다도 김춘추와 진덕여왕이 잘 알고 있었기에 훗날 비굴하다고까지 평가받은 대당외교에 사활을 걸었던 것이다. 즉 김유신은 당나라라는 거대 동맹국을 김춘추가 외교로 만들어낼 때까지 신라를 지켜낸 단단한 방패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훗날 백성들에게 신격화까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훗날 고려최영과 비슷하다. 다만 최영은 명장이었을지언정 능숙한 정치인은 아니었기에 김유신과 다른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했다.
김유신 열전이 과장된 기록이 많다고 해서 심지어 김유신을 명장이 아님을 넘어 졸장이라는 주장을 제기하는 사람도 일부 있지만 설령 열전을 다 빼고 본기 부분만 반영한다 해도 김유신이 열전 내용처럼 무패의 군신까지는 아닐지언정 수도권이 최전방이 되어 자신이 뚫리면 수도를 바로 공격당하는 국가위기상황에서 자신의 부족한 군사력을 효율적으로 지휘하여 크고 작은 전투를 수없이 이기면서 적의 침공을 막아내고 어려운 상황에서 황산벌 앞까지 진출한 신라의 소방수이자 당대, 더 나아가 한국사 전체에서도 손꼽힐 정도의 명장들 중 한 사람임을 부정하기는 어려운 부분이다.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당대 사람들이 김유신에 대한 평을 부풀린 것, 그가 사후 왕으로 추존된 것을 보았을때 졸장의 대우라고 보긴 힘들다. 오히려 난세에 신라를 구한 명장이었기에 그 내용이 더욱 부풀려질 수 있었던 것. 광개토대왕릉비용비어천가에 과장된 내용이 많다고 해서 광개토대왕이나 이성계가 졸장이 아닌 것과 같다.

6.3.3. 삼국통일(남북국시대 형성)의 영향



6.3.3.1. 긍정론

김유신의 영향력이 적었다고 하지 못하는 이유는 김춘추 등이 외교적 성과를 내기 전까지 신라라는 국가의 생존을 위해 헌신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김유신이 총지휘관으로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건 요충지인 대야성이 떨어진 이후 압독주(압량주) 군주가 되고부터인데, 이 압독주의 위치가 대 백제 전선의 새로운 요충지였고, 그 바로 뒤가 서라벌이었다. 당의 개입으로 한강 유역의 요충지인 당항성을 함락시켜 신라를 완전히 고립시킨다는 백제의 대전략은 어긋났지만 신라 서부에 대한 침공까지 그만둔건 아니었다. 김유신의 영향이 미미해 보이는 건 임진왜란 시기로 비유하면 김유신이 권율의 역할을 하고 이순신의 역할을 당이 했기 때문이다.[78] 고구려 기록에는 없지만 신라와 손잡고 백제를 멸망시킨 후부터 당의 군량확보가 쉬워졌다는 건 부정하기 어렵다.

6.3.3.2. 부정론

그러나 한반도남북국시대가 형성된 제1원인은 당의 개입 때문이라는 점을 보면 과연 김유신의 신라의 생존에 큰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선 의문의 여지가 많다. 신라 내부로 보자면 외교로 당의 힘을 이끌어내 신라의 우군으로 활용한 태종 무열왕의 역할이 더 위이고 그동안 장수로서 백제 하나 처리하지 못한 김유신의 영향력은 미미할 수밖에 없다.[79] 백 번 양보해 백제까지야 당과 연합하여 사비성을 공략했으니 아주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없지만, 고구려의 경우 이 시기를 3차 고구려-당 전쟁이라고 할 정도로 신라군의 영향력이 무척 적었고, 이 고구려 원정이나 이후 나당전쟁에서는 김유신은 고령으로 참전조차 하지 못한 채 전쟁이 끝나기 전에 세상을 떠나기까지 했으니 언급할 필요도 없다.[80]

6.3.4. 민족주의적 관점


남한의 민족주의자나 민족주의 사관에 경도된 북한에서는 김춘추와 함께 매국노로 세트로 비판받는데 이는 민족의 의미를 잘못 이해해서 생기는 문제다. 복식이나 언어 등이 유사하긴 했지만 따로 노는 건국신화만 봐도 알 수 있듯 고구려·백제와 신라는 그 정신적 계통이 상이하며, 계통이 비슷한(부여계) 고구려와 백제조차도 서로 왕들의 목숨을 빼앗거나 말갈이나 왜인 같은 이민족을 전쟁에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등 삼국시대에 서로가 정말 민족적 동질성을 얼마나 느꼈을지는 꽤 의문인 부분이다.[81][82]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을 통일되어야 하는 동질적인 한 집단으로 보는 것은 결과적으로 신라에 의해 통합된 이후에 민심을 안정시키고 원활한 통치를 하기 위해 시작한 프로파간다부터이며, 삼국통일(또는 일통삼한) 이전 고구려, 백제, 신라는 한 나라였던 적이 없으니 김유신 입장에서는 어디까지나 적국이었던 것. 한 나라로 1000년을 넘게 지내온 한국인들이 시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내리는 명백한 오류다.[83]

6.3.5. 정사와 야사의 혼재


정사 삼국지삼국지연의처럼 정사와 야사가 잘 구분되지 않은 탓에 열전에 수록되지 않은 내용인데도 열전 내용이라 하거나 많은 사람들이 야사를 정사처럼 인식하기도 한다. 김유신 열전 자체가 문제점이 많은 건 맞지만 이런 것들은 올바른 역사인식이라고 할 수 없다.
보통 김유신에 대해 평할 때 '''수하를 희생시키는걸 특기로 삼았다'''는 이미지가 짙게 배어있고 당장에 나무위키에서도 김유신 관련인물 문서에서 이런 시각이 굉장히 팽배한 편인데 이는 열전의 비령자와의 일화만 가지고 확대 해석했기 때문이다. 김유신 활동 시기만 해도 김유신과 관련없는 귀산, 추항, 해론 등이 비령자, 반굴, 관창과 비슷하게 전사했고, 본기 및 자신들의 열전에서도 재차 확인 가능한 부분이다. 게다가 김유신 본인도 젊을 적 629년 낭비성 전투, 661년의 고구려 보급원정 등 자기희생에 가까운 위험한 일을 자청해 수행하였고, 반대로 죽지 않고 전장에서 도망쳐 살아돌아온 아들 김원술은 비정하게 연을 끊어버린 것처럼 스스로 모범이 되려고 노력했으며 내로남불이라고 볼 여지도 없다.
또 열전에 기록된 전공을 믿을 수 없다고 하면서도 열전에도 없는 대표적인 야사인 천관녀와의 일화나 앞서 말한 수하들의 희생은 김유신과 연관시켜[84][85] 냉혹 비정하고 권력/출세 지향적인 인물이었다는건 철썩같이 믿는 것도 문제인 부분이다. 김유신이 골품과는 상관 없이 능력만 보고 우대했다는 열기, 구근의 일화는[86] 언급조차 되지 않는걸 보면 사실 현대인들이 김유신이란 인물을 굉장히 편협하게 보고 있다는걸 알 수 있다. 애초에 당시 신라 귀족층의 몸을 사리지 않는 적극적인 임전과 전사는 김유신과 상관없이 당시 사회상에서 권장되는 일이었다.

6.3.6. 신라라는 국가에 대한 반발


당시 신라 지도층의 행적을 보면 처절하다 못해 굴욕적이기까지 한데 그 정점이 바로 '''치당태평송'''이다. 을지문덕의 여수장우중문시와 비교하며 까는 사람도 있다.[87] 또 신라가 당을 도와 고구려를 멸망시키면서 북방영토 대부분을 포기한 것도 협소한 영토가 콤플렉스인 현대 한국인들에겐 안좋게 보일 수 밖에 없는데 비단 현대인 뿐만 아니라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고려에서도 이러한 이유로 신라의 삼국통일의 한계성을 지적하거나 인정하지 않았다.[88] 변방영토의 크기에 매몰되는 현대인과 달리 당시에는 정통성의 통합을 중요시했기 때문이다.[89]
거기에 고구려나 백제에도 폐쇄적 신분제도가 존재했다지만 신라 측의 기록이 자세히 남은 점 때문에 더 알려진, 현대인의 시각에는 거의 한국판 카스트 제도로 보이는 폐쇄적 신분제도인 골품제로 유명한 것도 마이너스 요소. 한마디로 현대 한국인이 싫어할만한 요소들로 무장한 신라의 존속을 위해 싸우고 그 국가의 높으신 분이기까지 했으니 현대 한국인들이 싫어하는 경우가 꽤 있다.
이런 식의 평가가 나오는 이유는 대한민국에 대한 불만을 그대로 신라라는 나라에 투영하는 태도 때문이다.[90] 이런 시각이 간과하거나 외면하고 있는 점은 신라가 살기 위해 굴욕적인 행보를 한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저자세로 일관한 국가는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신라가 당나라와 필사적으로 벌인 전쟁은 설명이 되지 않는다'''. 이는 나당전쟁 이전 고구려 멸망까지의 상황은 잘 알려져 있으면서, 정작 이 시대의 끝맺음이 되는 사건인 나당전쟁이 오랫동안 간략한 설명에 그치고 그 의의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91] 만약 신라가 당시 최강대국인 당나라를 상대하기 위해 얼마나 치열한 준비를 하고, 외교를 펼쳤는지 안다면 신라에 대한 이미지는 상당히 바뀔 것이다.[92]
수나라는 당시 패배적인 상황에서 을지문덕에게 농락당한 것이고, 치당태평송은 적의 공세에 무너져 내리는 신라가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다.[93] 신라, 나아가 이후의 조선왕조에 대한 감정적힌 폄하는 일제강점기와 주위의 최강대국이 득실한 상황에서 나온 열등감이 작용한 측면이 상당히 많다.
하지만 한 가지 알아야 하는 것은 치당태평송을 바쳤을지언정 당나라가 신라를 속국화하려 했을 때 신라는 치밀한 계획을 바탕으로 당시 최강대국인 당나라와 당당하게 맞섰고, 결국 패배해 멸망한 고구려와 달리 당당히 승리했으며 그 후 수백 년 뒤까지 이어가는 저력을 보여주었다. 당장에 김유신부터가 '''소정방에게 도끼 들고 쳐들어가서 따졌던 것'''만 봐도 저자세로만 나왔다고 볼 수 있을지 의문.[94] 현대 한국의 상황만 보더라도 중국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동맹이 절실한 동시에 경제적으로 중국에 기대야 하는 아이러니가 있다. 그리고 미국중국은 중립외교를 용납하지 않고 있다.[95] 그리고 일본만 보더라도 인구, 국토 모든 면에서 한국을 앞선다. 그래서 한일협정에 고압적으로 나서도 한국은 제압할 방법도 없다. 그리고 북한 역시 핵실험을 해도 한국 혼자서는 뾰족한 방법도 없다. 실제로 한국 단독으로 상황을 헤쳐나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며 7세기 신라도 다르지 않았다. 혼자 단독으로 상대해 이길 수 없는 상황에서 당나라와의 동맹은 절실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비슷한 이유로 욕을 많이 먹는 태종 무열왕 문서에도 있는 내용이지만 신라와 당의 연합은 '외세를 끌어들인 반민족적 행동'[96]으로 폄하되지만, 중국을 부추겨 고구려를 공격해 달라고 요청하거나 일본을 끌어들여 고구려[97]와 신라를 쳤던 백제의 외교 활동이나 거란, 말갈, 돌궐 등의 유목민들을 끌어들이거나 '자주적'이라는 이미지와 달리 북위나 당 같은 중화제국에 조공외교를 행했던 고구려의 행동은[98] '살기 위한 몸부림'이나 '뛰어난 외교수완'으로 추켜세워지는 것은 어찌 보면 모순이자 이중잣대이다.
백제멸망이후 백제부흥운동에 <당나라 +신라 vs 백제유민[99] + 왜군 >의 대결로 이루어졌다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고구려 역시도 국경을 맞대는 당과는 계속 갈등관계 였지만, 백제 신라 왜와 직간접적으로 연대하였고, 북방 부족과 국가들인 말갈족, 돌궐, 토번국등이 당에 같이 대항하는 세력이었다. 이후 고구려 후속국가 발해만 해도 말갈족이 주류였다
백제가 당과 결합해 고구려를치고, 백제가 왜와 연합해 신라를 치고 그걸 고구려가 구원하는등 합종연횡은 계속됐고, 외국 세력 끌어들이는것에 백제가 앞장섰지만, 신라가 한강유역 확보후 < 고구려, 백제, 왜 > vs < 신라, 당> 연합으로 맞섰던것을 고려하면 이런 외교적 합종연횡은 계속 이루어진 것이므로 어느 한 국가만이 특별히 외세를 끌어들인 것은 아니다.
사실 한반도 3개국가 백제 고구려 신라와 차례로 전쟁한 직후, 당도 급격히 당나라 군대화되어 토번에 시달리는 등 약화된 상황에 오기도 하고, 백제의 멸망 역시 불가항력이라기보다 백제가 어이없이 무너진것에 가까웠다. 고구려도 연개소문이 맏아들에게 권력을 몰아줬으면 금방 무너지지않았을 가능성이 높았다.
만약 백제+고구려+왜의 연맹이 당이 약해질 몇년을 잘 버터서, 신라+당 연맹에 이겨서 신라 멸망시키고 이후 <고구려+ 말갈 돌궐> vs <백제+왜> 이렇게 최종 패권전쟁이 벌어지지 말라는 법이 없었다. 신라가 한반도 승자가 되지 않고 고구려나 백제가 승자가 되어도 외세의 개입이 없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라가 아닌 백제 고구려 위주로 통일되었어도 요동요서를 과연 한반도 국가가 차지할 수 있었을까는 의문스러운 것인데, 백제가 승자가 되었어도 북방영토는 없었을 가능성이 높았을 수도 있으며, 고구려가 승자가 되어도 결국 고구려 멸망이후 북방영토가 한반도 국가에 남기 어려울 수 있다. [100]

7. 부록: 본기에 기록된 김유신 활동 시기의 삼국간 전투


  • 진평왕 17년 (595년): 김유신 태어남
  • 무왕 3년 - 진평왕 24년 (602년): 8월 백제가 신라 아막성을 공격했고 저항이 심해서 물러났다. 신라쪽에서 4개의 성을 쌓고 국경을 침범해 좌평 해수를 시켜 공격했다. 신라 장군 건품, 무은이 군사를 거느리고 마주 싸웠다. 귀산과 추항이 분전하다 전사했고, 해수가 패해 돌아왔다.[101]
  • 영양왕 14년 - 진평왕 25년 (603년): 8월 고구려 장군 고승이 신라의 북한산성을 쳤다. 왕이 친정하여 격퇴했다.[102]
  • 무왕 6년 - 진평왕 27년 (605년): 8월 신라가 백제를 침공했다.
  • 영양왕 18년 - 무왕 8년 (607년): 5월 고구려가 백제 송산성을 공격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하자, 석두성을 공격해 남녀 3천 명을 잡아갔다.
  • 영양왕 19년 - 진평왕 30년 (608년): 2월 고구려가 신라의 북쪽 변경을 습격하여 8천 명을 사로잡았다. 4월 신라의 우명산성을 함락시켰다.
  • 무왕 12년 - 진평왕 33년 (611년): 10월 백제가 신라 가잠성을 100일간 포위해 성주 찬덕을 죽이고 성을 함락시켰다.
  • 무왕 17년 - 진평왕 38년 (616년): 10월 백제 달솔 백기가 신라 모산성을 공격했다.
  • 무왕 19년 - 진평왕 40년 (618년): 신라 장군 변품이 가잠성을 공격해 되찾았다. 신라 장수 해론이 전사했다.[103]
  • 무왕 24년 - 진평왕 45년 (623년): 백제가 신라의 늑노현을 침공했다.[104]
  • 무왕 25년 - 진평왕 46년 (624년): 10월 백제가 신라의 6개 성을 함락시키고, 급찬 눌최를 죽였다.[105]
  • 무왕 27년 - 진평왕 48년 (626년): 8월 백제가 신라 주제성을[106] 공격하여 성주 동소를 죽였다.
  • 무왕 28년 - 진평왕 49년 (627년): 7월 백제 장군 사걸이 신라 2개 성을 함락시키고 남녀 3백여 명을 잡아갔다.[107]
  • 무왕 29년 - 진평왕 50년 (628년): 2월 백제가 신라 가잠성을 공격했지만 격퇴되었다.
  • 영류왕 12년 - 진평왕 51년 (629년): 8월 신라가 고구려 낭비성을 함락시켰다. 김유신 35세[108]
  • 진평왕 53년 (631년): 칠숙과 석품이 난을 일으켰다.
  • 무왕 33년 - 선덕왕 원년 (632년): 7월 백제가 신라를 침공했지만 불리했다. 신라쪽은 기록이 없다.
  • 무왕 34년 - 선덕왕 2년 (633년): 8월 백제가 신라 서곡성을 함락시켰다. 신라쪽은 공격받았다고만 적고 있다.
  • 무왕 37년 - 선덕왕 5년 (636년): 5월 백제 장군 우소가 독산성을 공격하려 했으나 신라 장군 알천이 옥문곡에서 기습하여 패했다.
  • 영류왕 21년 - 선덕왕 7년 (638년): 10월 고구려가 신라 칠중성을 공격했다. 11월 신라 장군 알천에게 격퇴되었다.
  • 의자왕 2년 - 선덕왕 11년 (642년): 7월 의자왕이 친정하여 미후 등 신라 40여성을 함락시키고, 8월 장군 윤충이 대야성을 함락시켰다.
  • 보장왕 3년 - 의자왕 4년 - 선덕왕 13년 (644년): 정월 고구려 연개소문이 신라의 2개 성을 함락시켰다. 신라측은 기록이 없다. 9월 신라 장군 유신이 백제를 공격하여 7개 성을 함락시켰다. 김유신 50세
  • 의자왕 5년 - 선덕왕 14년 (645년): 5월 신라가 당을 돕기 위해 군사를 징발한 사이 백제가 7개 성을 되찾았다.[109]
  • 선덕왕 16년 (647년): 비담과 염종이 난을 일으켰다.
  • 의자왕 7년 - 진덕왕 원년 (647년): 10월 백제 장군 의직이 신라 3개 성을 침공했지만 신라 장군 유신이 이를 격퇴했다.
  • 의자왕 8년 - 진덕왕 2년 (648년): 3월 백제 장군 의직이 요거 등 10개 성을 함락시켰다. 4월 신라 장군 유신에게 옥문곡에서 격퇴당했다.
  • 의자왕 9년 - 진덕왕 3년 (649년): 8월 백제 장군 은상이 석토 등 7개 성을 함락시켰다. 이후 김유신 등에게 패했다.[110]
  • 보장왕 14년 - 의자왕 15년 - 태종무열왕 2년 (655년): 정월 고구려, 백제, 말갈 연합군이 신라 북부를 침공해 33개 성을 함락시켰다.[111]
  • 의자왕 19년 - 태종무열왕 6년 (659년): 4월 백제가 신라의 독산, 동잠 두 성을 공격했다.[112]
  • 의자왕 20년 - 태종무열왕 7년 (660년): 7월 황산벌 전투, 백제 멸망
  • 보장왕 20년 - 문무왕 원년 (661년): 5월 고구려 장군 뇌음신, 말갈 장군 생해가 술천성을 공격했지만 이기지 못하자 북한산성을 공격하여 20여일간 포위했다. 천재지변이 일어나 고구려군이 퇴각했다. 고구려 본기에는 뇌음신이 말갈군을 이끌었으며, 처음부터 북한산성을 공격했고, 열흘 동안 포위했다 적고 있다.
  • 보장왕 21년 - 문무왕 2년 (662년): 2월 신라 장군 유신 등이 평양을 포위하고 있던 소정방의 당군에 군량을 수송했다. 회군중 고구려군을 격퇴했다. 고구려 본기에는 당군이 평양을 포위했지만 폭설로 물러갔다고만 적고 있다.
  • 보장왕 27년 - 문무왕 8년 (668년): 나당연합군이 고구려를 멸망시켰지만 김유신은 참전하지 않았다.

8. 각종 매체에서의 김유신




9. 참고 문서



[1] 충청북도 진천군(김유신이 태어난 만노군은 오늘날의 진천군.)의 김유신 사당 길상사에 소장되어 있다. 장우성 화백 작품. 이 영정을 그릴 때 김해 김씨 남성 50여 명의 얼굴을 보고 이를 기준으로 그렸다고 한다.[2] 대한민국 역사상 유일하게 신하에서 왕으로 추존된 인물이자 유일하게 왕가 출신이 아닌 추존왕이다. 김유신이 사망하고 162년 후 흥덕왕(삼국유사에서는 경명왕이라고 한다)이 '김유신은 신하였지만 삼국 통일을 이루는 큰 공을 세웠고 많은 백성들이 받들고 있으니 왕으로 부를 만 하다.'해서 흥덕왕은 김유신을 흥무대왕으로 높여 불렀다.[3] 김유신이 당고종으로 부터 하사 받은 작위이다. 작위 뿐만 아니라 관작과 식읍도 받았는데 봉상정경(奉常正卿)과 식읍 2,000호 이다. 그래서 합쳐 부르면 봉상정경평양군개국공식읍이천호(奉常正卿平壤郡開國公食邑二千戶)이다. 다만 김유신에게 내려진 영지인 평양은 실제로 김유신이 지배한 것은 아니니, 명목상 식읍인 것으로 보인다. 유사하게 김인문에게 내려진 작위인 임해군 개국공(臨海郡 開國公)이 있다. 봉지 임해군은 백제 서해안에 해당한다. 참고로 고구려를 무너뜨린 설인귀의 작위는 평양군공(平陽郡公)으로 고구려 멸망에 큰공을 세우고 안동도호부의 도호로 임명되어 고구려 지방을 다스린 적이 있으므로 고구려의 수도 평양의 작위라 헷갈리기 쉽지만 설인귀 작위 평양의 양(陽) 자가 한국 평양의 양(壤) 자와 다르고 중국어 독음도 다르다. 설인귀 작위의 평양(平陽)은 현재의 중국 산시성에 위치한 다른 지역으로 서로 다른 지역이다.[4] 원 금관가야 왕족에서 신라 진골로 편입됨.[5] 김해 김씨의 중시조로 모든 김해 김씨의 공통 조상이다.[6] 서자. 어머니 미상[7] 비록 어머니가 신라 왕족이기는 하나 매우 이례적인 사례인데 신라의 골품제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8] 삼국통일에 기여한 정도가 아니라 국내외의 어려움으로 자칫 무너질 뻔했던 신라를 김춘추와 함께 기사회생시키고 마침내는 삼국통일까지 시키는 등 전세를 완전히 뒤집어버렸다.[9] 행록 10권 분량 중 열전 3권에 실리지 못하고 빠진 내용들은 고려 유학자의 시점에서 지나치게 설화적인 내용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지만 현재 전하지는 않는다. 설화적인 내용을 가감없이 수록한 삼국유사에 있는 여러 김유신과 관련된 설화들이 빠진 나머지 분량에 들어있었던 내용 중 일부로 추정되고 있는데 역사학자 이기백고구려 첩자 백석과 고구려 무당 환생 이야기, 김춘추와 여동생 문희결혼시키기 위해 화형쇼를 벌였던 것(본기에도 실려 있지만 태워 죽이려는 내용은 삼국유사에만 있다), 김유신의 영혼미추 이사금과 대화하는 내용, 천관녀 이야기 등을 그런 사례로 추정했다.[10] 주보돈, 「김유신의 정치지향 -연구의 활성화를 기대하며-」, 《신라사학보》 11, 2007, 11쪽[11] 주보돈, 김춘추와 그의 사람들 280쪽[12] 648년 김춘추가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당태종이 김유신의 이름을 들은바 있어 김유신의 사람됨이 어떠한지 김춘추에게 먼저 물어보기도 했고 일본서기에서는 668년 신라 사신 김동암이 일본에 갔다가 귀국할 때 일본에서 김유신에게 줄 선물로 배 1척을 따로 준비하기도 했다. 일본의 역사서 등씨가전(藤氏家傳)에서 등장한 평가를 보자면 '신라에는 김유신, 백제에는 성충, 고구려에는 연개소문, 당나라에 위징과 더불어 당대의 준걸로서 이름을 만리에 진동시켰다'고 하고 있다.[13] 다만 삼국유사에 실려있는 김유신의 소정방 신라 침공 야욕 간파 기록은 설화적으로 각색된 내용이고 일연 본인조차 밑에 주석으로 신빙성이 부족한 기록임을 보충 설명을 해두었을 정도라서 학계에서 거의 주목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김유신의 행동에 대한 개연성을 설명하는 이 발견을 통해서 물론 삼국유사 기록처럼 김유신이 소정방을 암살한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떤 모종의 대립이 있었는데 설화적으로 각색된 것일 가능성이 있다.[14] 이민수, 백제 멸망기 당의 신라 침공 계획, 한국고대사탐구학회, 2019[15] 진흥왕백제성왕을 사로잡아 전사시킨 부대의 지휘관이었다.[16] 야합(野合)했다고 기록되어 있다.[17] 낳고도 10달 정도 출생신고(...)를 못한 것을 설화적으로 윤색한 것으로 볼 수있다. 만명은 김유신을 낳을 당시 애인을 따라서 무단가출한 미혼모였다. 게다가 김서현은 진골이라곤 하나 당시 진골중에서도 차별받던 가야계 진골이었으니 숙흘종이 김유신을 즉시 외손자로 인정해줄 리가 없다. 김서현과 만명의 사실혼이 인정받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다만 아이를 20달간 품는 일 자체는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임신 항목 참조.[18] 예기에는 이름 짓는 법도에 대해 나와 있는데, 여기서는 나라 이름이나 달이나 날짜의 이름, 산이나 강의 이름 등으로는 사람 이름을 짓는 것이 아니라고 적혀 있다.[19] 남북조시대 ·북주에서 활약한 인물인데 김유신과 달리 문인으로 명성이 높았다.[20] 이 때문에 훗날이라면(물론 현대 대한민국에서도) 웬만해선 이름에 안 넣었을 노(奴)독(毒), 시(尸) 같은 부정적인 훈을 가진 글자가 음차를 위해 이름에 들어가는 경우도 있다. 어쨌든 금석문과 역사서도 편찬하던 6~7세기 당시 신라인들이 이 글자들의 훈을 몰랐을 리는 없고, 즉 한자는 음차 수단일 뿐이지 훈은 별로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21] 경주시 단석산으로 비정된다고 한다. 삼국통일 이후의 중악은 대구광역시 팔공산이지만, 이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면서 영토의 확대 과정에 따라 새로이 정한 것이라고 이기백은 이해하였다.[22] 사실 이런 '소싯적의 비현실적 일화'는 당대의 영웅을 후대에 기록히면서 으레 붙는 부분이다. 가령 조선태조 이성계만 해도 왕이 되기 전까지는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일화가 다수 보인다.[23] 직책은 본기에는 부장군(副將軍), 열전에는 중당당주(中幢幢主)[24] 이 말의 원 출처는 <송사> 직관지. 즉 어떤 일을 풀어가는 핵심이 되겠다는 의미다.[25] 열전에서는 아버지 김서현에게 한 말로 기록하고 있다.[26] 다만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밑에서 올라가야 하는데, 이때에 밑에서 이런저런 것들을 국가에서 일일이 기록해주지도 않고, 후손도 자기 조상이 얼마나 훌륭한지를 기록할 때에 누락했을 수도 있다. 당장에 35세에서 10여년이 지난 대야성 점령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나온다는 것을 봐도 그저그런 기록들을 몽땅 누락하였을 가능성도 있다.[27] 개인적 원한도 없지는 않겠지만 그보다는 사위 김품석의 실책으로 요충지 대야성을 잃었으니 비담파나 알천파 등이 존재하던 당시 신라 정계에서 김춘추가 상당한 타격을 받았을 것이고 이를 수습하는 성과를 만들어내기 위해 위험한 고구려행을 자처한 것이다.[28] 오늘날 경상북도 경산시.[29] 對고구려 방위는 한강 유역의 신주(한주)가 주 방위 지역인데 경주에서 가장 먼 지역이다.[30] 열전에는 소판(蘇判), 상장군(上將軍)[31]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658쪽).[32] 당시 재위 중이던 선덕여왕, 당시 후계자로 내정된 것으로 보이는 진덕여왕을 모두 포함한 지칭으로 추정되고 있다.[33] 원문은 吉凶無常惟人所召.[34] 상나라의 제22대 왕인 양왕(襄王) 무정(武丁)을 말한다.[35] 백제 본기에는 백제군 숫자만, 신라 본기에는 신라군 숫자만 기록되어 있다.[36] 김유신, 비령자 열전[37] 경산시. 압량주의 다른 이름[38] 백제군 숫자는 백제 본기 기록이다.[39] 실제로 654~655년 사이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다른 상대등 관련 여러 기록을 찾아보면상대등직은 사망할 때까지 역임하는 종신직으로 추정되는데, 알천이 역임하던 상대등 직위를 655년 정월에 금강(金剛)이라는 인물이 맡기 때문이다.[40] 왕의 시대에 '''알천공(閼川公)ㆍ임종공(林宗公)ㆍ술종공(述宗公)ㆍ호림공(虎林公)【자장(慈藏)의 아버지이다.】ㆍ염장공(廉長公)ㆍ유신공(庾信公) 등이 남산의 우지암(亐知巖)에 모여 나라 일을 의논하였다. '''이때 큰 호랑이 한 마리가 이 자리로 뛰어들었다. 여러 공들이 놀라 일어섰지만 알천공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태연히 이야기하면서 호랑이 꼬리를 잡고 땅에 매쳐서 죽였다. '''알천공의 힘이 이처럼 세어서 맨 윗자리에 앉았지만, 그래도 모두들 유신공의 위엄에 마음으로 복종하고 있었다.'''-《삼국유사》 삼국유사 제1권 기이 제1 진덕왕- [41] 앞서 나온 것과 같이 선덕여왕시기 대야성 함락으로 對백제전선이 낙동강까지 밀려버렸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김유신은 對백제전선 사령관 이자, 近畿지방 방위사령관으로써 신라 주력군을 자신의 지휘권 아래에 두면서 실력자로 급성장하였다. 이러한 힘을 바탕으로 비담의 난을 진압하고, 이후 진지왕의 손자이자 진평왕의 외손인 춘추를 즉위시킬 수 있었다.[42] 본기에는 사사(死士)라 적고 있다. 계백의 군사가 5천이었다는건 백제 본기 기록으로 신라의 기록에는 몇 명이었는지 기록이 없다.[43] 관창 열전에는 '저쪽은 많고 이쪽은 적었다(彼衆我寡)'라 하여 혼자 돌격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고 별동대를 이끌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혼자 돌격하라고 하는 것은 그냥 개죽음이나 당하라는 소리나 다름없으니 그런 상황에서 사기가 오를리가 없다.[44] 황산벌 전투는 신라군이 몇 만이고, 백제군이 몇 천이기에, 신라군의 4번에 걸친 패전이 지휘관들의 무능으로 보일 수는 있지만, 사실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13만 명이나 되는 당군이 숫자면에서도 그렇고, 당나라의 전쟁 목적에서도 그렇고 아무래도 연합군의 주력이였다. 이에 신라군의 주 목적은 이들 당군에 대한 보급을 위한 것에 가까운 것으로 보이는데, 이렇게 보면 당시 신라군의 다수는 보급병으로구성되어야 하였고 계백이 몇일이나 버틴 것도 아니라 하루를 겨우 버티다가 패배한 것이다.(여기에 당시 낙동강 서안 일부는 아직까지 백제의 영역권으로 보이는데, 신라군도 이들에 대한 방비책을 마련하고 있어야 했다.) 이에 비하여서 비록 긴급하게 모은 백제군은 훈련상태가 부족할 수는 있지만, 수도 인근에 방어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였기에 보급이나 기타 잡병들이 많을 이유가 없었다.[45] 훗날 김문영은 문무왕, 신문왕 때까지도 활약하여 효소왕 때는 상대등까지 오른다.[46] 이는 황산벌 전투에서 김유신이 결국은 이기긴 했지만 상당히 고전했는데, 열전의 원전인 행록은 광개토대왕릉비용비어천가마냥 김유신을 찬양하기 위한 목적으로 작성된 것이므로 부정적인 기록은 그냥 생략한 것으로 볼 수 있다.[47] 다들 알다시피 하늘에 빌었더니 응답했다는 식의 내용은 당연히 사실 그대로라기보다는 천재지변이 일어나긴 했고, 왜 일어났는지에 대해 당대인이 그렇게 믿었다는 것에 대한 기록이라 보면 된다. 천재지변이 누가 빌어서 발생했는지는 별 의미가 없다.[48] 이는 본래는 왕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이지만, 작전 중에는 왕의 승인 없이 재량껏 해도 된다고 전권을 위임한 것이다.[49] 당시엔 만노군. 아버지 김서현이 만노군 태수로 있었다.[50] 이 일화를 담고자 함인지 드라마 연개소문, 선덕여왕 등에서는 김유신이 꾸준히 바위를 내려치는 수련 끝에 결국 갈라버리는 장면이 나왔다.[51] 다른 설화와 조합하면 그 말이 다름아닌 용마였다고 한다.[52] 이 일화는 드라마 연개소문에서도 나와있다. 배우는 이종수.[53] 다만 툭 까놓고 말하자면 선덕여왕-진덕여왕 교체 시절은 신라가 궁지에 몰린 상황이었다. 이런 마당에서는 2만명의 병사'만'을 처형하는 것으로도 큰 손해인데(병력으로 쓸 수 있을 정도라면 요역이나 농사 등에도 투입할 수 있는 노동력으로도 쓸 수 있다는 의미인데 그들을 다 제거하는 거다.) 그들의 9족까지 멸한다면 그 숫자는 끝없이 올라갔을 것이다.[54] 그 전에 언니 보희가 산에서 소변을 봤는데 그게 수도를 가득 메우는 민망한 꿈을 꿨다. 문희가 그 꿈을 샀는데 그게 왕후가 되는 꿈이었다는 거다.[55] 국가에서 현판을 내려주는 것으로 사립학교격인 서원에 대한 일종의 국가 공인인 셈이다.[56] 지금의 서악서원의 전신으로 원래는 김유신 한 사람을 위해 지어졌던 것이 나중에 설총과 최치원까지 모시게 되었다.[57] 서악정사의 사액이 조정에 건의된 것은 인조 1년(1601년)의 일이다.[58] 이런 근친혼은 신라를 넘어 고려 초기까지도 계속되었고 후대 인물 중 비교적 잘 알려진 사례로 천추태후가 있다. 신라가 조금 더 가계 기록이 구체적으로 남아 이 쪽으로 유명해지긴 했지만 고려 중후반 이전까지는 대부분 비슷했던 것으로 봐도 된다.[59] 신라 왕실에서 3촌 간의 결혼은 흔하다. 왕족 가계도를 보면 오히려 3촌 간에 결혼하지 않은 케이스를 찾는 것이 더 어려울 정도. 심지어 김충공은 친여동생과 결혼한 기록도 존재한다.[60] 위서인 필사본 화랑세기에 따르면 동륜태자진지왕의 친누이 아양공주이다. 그러나 정사에는 아예 나오지 않는다.[61] 위서인 필사본 화랑세기에 따르면 숙흘종의 이부 여동생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정사에서는 숙흘종의 친여동생으로 본다.[62] 김유신의 자식 중 가장 유명해서 김원술을 주인공으로 하는 희곡 원술랑이 과거에 중학교 국어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63] 문무 양면에서 김유신의 아들들 중에서 최정상급이었지만 패전 한 번으로 인해 나락으로 추락하고 만다.[64] 위서인 필사본 화랑세기에 따르면, 장녀 진광은 흠돌(서현의 딸 정희의 아들, 곧 유신에게 친조카이자 사위)의 아내, 차녀 신광은 문무왕(유신에게 친조카이자 사위)의 후궁, 삼녀 작광은 진평왕과 보량궁주 설씨의 아들인 보로전군의 아내, 사녀 영광은 흠순의 아들인 반굴(유신에게 친조카이자 사위)의 아내라고 한다.[65] 김유신과의 나이 차이로 보아 첫 아내가 죽은 후 재혼한 후처라는 것이 통설이다.[66] 태종 무열왕 김춘추의 3녀. 김유신의 조카딸. 진흥왕의 어머니 지소태후와는 동명이인.[67] 드라마 대왕의 꿈에서는 이 설을 적용했다. 재매부인을 지소부인과 동일인물로 보는 해석도 있으며, 김유신의 친척이라는 해석도 있다. 한편 <화랑세기>에서는 이 '재매부인(財買夫人)'을 노리부와 미실 사이에 아들인 하종의 딸 '영모부인'이라고 하고 있다. 비록 <화랑세기>는 노리부와 세종을 2명으로 나눠서 표기하고 있지만 , <삼국사기>를 기준으로 하면 노리부=세종은 동일인물이다. 현재 노리부를 구형왕이 신라에 귀순시 동행한 장남과 동일인으로 판단하고 있기에 구형왕의 삼남인 무력의 손자인 유신에게는 從祖父이며, 유신과 영모는 6촌관계가 형성된다.[68] 이때 김유신이 소정방을 구원하지 않았다면, 고구려군에게 죽었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디고 한다.[69] 삼국사기에는 김유신의 적손(嫡孫)인 김윤중의 서손으로, 《김해김씨족보》에는 김유신의 3남 원정의 손자로 적었다.[70] 김유신은 김해 김씨, 신라 왕가는 경주 김씨[71] 그 각간묘는 무열왕릉 맞은편에 있다.[72] 다만 김유신이 통일신라 사회에서 그만큼 높은 위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73] 차무진. 김유신의 머리일까?. 끌레마. 2010[74] 이것은 2011년에 작고한 이근직 교수(전 경주대학교 문화재학과)의 설. 사후 이근직 본인의 주장을 담은 《신라왕릉연구》가 2012년에 출간되었다. 이근직은 아예 경주에 왕릉이라고 전해지는 가운데 7기(27대 선덕여왕릉, 29대 태종무열왕릉, 30대 문무왕릉(대왕암), 33대 성덕왕릉, 38대 원성왕릉(괘릉), 41대 헌덕왕릉, 42대 흥덕왕릉)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그 비정이 잘못되었으며(실제로는 다른 왕의 무덤이거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왕족 또는 귀족 인사의 무덤일 것이라고 추정) '''영원히 사라져버린 왕릉도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한 그의 주장 때문에 이근직 교수 본인께서는 생전에 박, 석, 김씨 이렇게 세 문중에게 항의도 많이 받으셨다고. 이근직 교수는 애석하게도 2011년 6월 17일 아침 경주대학교 앞 사거리에서 불의의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하셨다. 고인의 유고가 된 신라왕릉연구는 고인이 생전에 쓰셨던 영남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신라 왕릉의 기원과 변천'을 단행본으로 출판하고자 수정과 보완을 거듭해 편집까지 완료한 상태로 PC에 남아 있었고, 부인 주진옥 씨와 그와 같은 연구실에서 공부한 동료가 찾아냄으로써 출판되었다고.[75] 역사 평가는 시대를 반영하는 만큼 신채호 선생은 외세의 나라가 멸망하고 신음하는 시대였다. 그런 점에서 외세는 당나라, 매국노는 동족을 친 신라로 대입되었을 것 이다. 그리고 멸망한 백제와 고구려의 감정이입이 되는 동시에 강대한 고구려의 향수도 작용 했을 것 이다. 다만 세밀히 따져보면 국가적 위기에서 필사적으로 발버둥쳐 나라를 구한 것은 신라였다는 점이 아니러니인 동시에 국경에서 열세인 대국과의 싸움도 치밀하게 준비해 결국 나당전쟁에서 승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채호 시대에 조선은 그러지 못했다. [76] 애초에 민족주의와 아나키즘에 심취한 신채호 선생 입장에서는 김유신은 민족의 반역자요,계급제에 굴복한 반영웅이니 곱게 보일 리가 없다. 반대로 마키아벨리가 김유신을 평가했다면 사자의 심장과 여우의 잔꾀를 동시에 지닌 군주의 이상적 표본으로 소국이 대국 사이에서 살아남는데 기여한 모범사례로 극찬했을 것. 고로 위인이 위인을 평가했다고 하여 그 평가를 무분별적으로 받아들이는 건 지양해야 한다[77] 당시 신라가 어떻게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일본은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의 공격에 무너지면 군사를 보내 영토를 얻으려 시도했다. 그리고 좀 뒤늦긴 했지만 나중에 백제 부흥군을 지원하기 위해서 3만의 무시못할 군세를 바다를 건너 백제 땅까지 보내 백강 전투에 파견하기까지 했는데, 그 위치를 생각해보면해 일본이 신라의 후방을 공격할 잠재력은 충분히 가지고 있었음을 어림잡아 알 수 있다. 승하하면서 문무왕이 남긴 유언과 호국룡의 전설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었던 셈. [78] 이순신의 존재로 인해 일본의 전략은 크게 어긋났지만 이미 내륙에 상륙한 일본군을 상대한건 조명 연합군과 다른 장수들이었다.[79] 백제의 성왕이 관산성에서 전사하고, 엄청난 피해를 입었음에도 백제라는 국가 자체는 생각보다 그다지 심한 영향을 받진 않았다. 이는 백제의 저력이 상당하였다라는 것을 반증한다. 당장에 백제와 고구려 멸망 이후 호구수를 보면 백제가 훨씬 상회하는데, 이는 고구려의 동북부 일부가 여전히 점령되지 않았고, 유목하던 인구수를 제외로 한다고 하더라도 영역의 크기상 두 국가가 많은 차이를 보이지는 않았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렇게 본다면 신라가 백제보다 호구수에서 밀릴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해봐야 하고, 삼국시기가 더 늘어날 수 있을 봐야 한다. 당장에 진흥왕 시기에 진출했던 한강 유역의 서남부는 넓은 평야이지만, 백제와 경계를 하고 있고, 낙동강도 대야성이 점령되면서 서안 일부가 백제에 영역으로 편입되었다. 경북 내륙 지역과 강원도지역은 산지이기에 인구가 많을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신라가 백제를 점령한다는 것은 압도적인 어떠한 힘이 아니라면 불가능하다'''라는 것을 의미한다.[80] 무열왕이 당태종 이세민과 나눈 이야기에서 신라는 백제라는 원수를 제거해 준다면 고구려 공격에 지원하겠다라는 의미에 가까웠다. 진평왕시기부터 羅濟간에 전쟁이 치열해졌고, 대야성 함락으로 서라벌까지 직공이 가능한 국가위급상황에서 신라에서 고구려까지 통합하는 삼한일통이라는 거창한 생각을 하는 사람은 상식적으로 거의 없었을 것이다. 다만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하고, 당의 야욕이 신라까지 넘보는 상황에서 백제와 고구려의 유민들을 회유하겠다라는 신라인들의 고유지책이 아닐까 한다.[81] 단적으로 신라가 화평을 맺자고 했을 때 고구려는 영토를 내놓으라고 압박해 협정을 맺지 않았다. 신라가 고구려 국경과 맞대고 있다는 점에서 신라와 동맹을 체결하면 남부는 안정화 시킬 수 있을 것 이다. 즉 위기의 몰린 신라가 갈 곳은 자신을 받아 줄 당나라 밖에 없었다. 고구려 역시 자국의 이득을 위해 신라를 외면 했는데 이것을 민족의 관점이 아니라 철저하게 자국의 이득 중심임을 알 수 있다.[82] 반박하는 측에선 매소성 전투와 기벌포 전투를 포함해서 고구려와 백제 유민들이 신라와 힘을 합쳤으며, 신라에 큰 문제없이 동화되었고, 김춘추가 애초부터 당이 아니라 고구려를 찾아갔으며, 언어와 복식을 비롯한 문화에 큰 차이가 없었던 것으로 인해서 그래도 삼국이 오늘날만큼은 아니더라도 희미하게나마 고조선 이래로 민족적 동질성을 어느 정도 느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83] 일단 민족이라는 개념부터가 19~20세기 들어와서 생긴 개념이다. 비슷한 언어와 문화를 공유하였다는 측면과 이후 이들이 하나의 국가에서 공존하며 뒤섞였다는 점에서 그렇게 볼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특정시기에 역사학적으로 분류하던 방식일 뿐이지 당대에 이러한 개념을 적용하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구한말에 함경도 일부지방에는 과거 여진인들과 같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고 하는데, 이들을 타민족이라고 분류한다고는 듣지 못하였다.[84] 비령자의 일화는 김유신, 비령자 열전 내용이지만 반굴과 관창은 김유신 열전에 없고, 반굴의 아들 김영윤 열전과 관창 자신의 열전에 있는데 이 중에 김유신이 명령한건 비령자 뿐이다.[85] 황산벌 전투에서 전사한 반굴과 관창에 관해서 김유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아버지들이자 부관이었던 김흠순과 김품일에게 책임을 떠넘긴 것 아니냐는 의혹이 있는데 본기에서 묘사하지 않은 비령자와 김유신의 일화를 실은 것이 김유신 미화에 가장 적극적일 열전이었다는 점을 보면 불명예스러운 일이라 책임전가했다는 의혹이 터무니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예시로 언급된 7인 중 김유신을 포함한 앞 세대는 자발적인 행위였던 반면 비령자부터는 타인의 명령을 받은 행동이었다는 차이점이 있다.[86] 삼국사기 열기 열전에 나온다.[87] 그러나 현대인이 보기에는 지나치게 비굴해 보이는 이런 어법은 신라 치당태평송만 그런 게 아니라 현대 이전의 동아시아에서 중국과 교류할 때 다들 하는 관행에 가까웠다. 삼국사기와 수서 동이전에 의하면 고구려의 영양왕수나라의 침입을 물리친 후 화해를 요청할 때 스스로를 '요동 의 신하(遼東糞土臣某)'라고 자칭하면서까지 사죄하는 문서를 보냈고, 위서에 전문이 실린 백제 개로왕북위에 고구려 공격을 요청할 때 보낸 국서에서는 '백제 공주를 (북위에 보내) 후궁을 청소하게 할 수도 있다'라고까지 했다. 치당태평송이 결국 이후 역사를 바꾼 나당동맹과 직결되기 때문에 사대굴욕외교의 유명한 사례로 알려져있긴 하지만 고구려나 백제도 중국에 보내는 저런 표현들이 치당태평송의 구절들의 수위에 못지 않았다. 물론 전후사정을 보면 세 나라 모두 진심 따윈 없이 외교적 이득을 얻기 위해 말뿐인 외교적 수사였을 뿐이다. 무엇보다도 일단 을지문덕때 싸웠던 수나라는 고구려보다 먼저 망했긴 했지만 그 뒤를 이은 당나라와의 전쟁에서 끝내 고구려는 져 멸망했지만 그렇게 기었던 신라는 끝내 삼국 중 유일한 승자가 되어 200년 이상 왕조를 더 이었다. 잊지 말자 '''강해서 살아남는게 아니라 살아남아서 강한거다.''' 역사 속에서 아무리 강한 대제국이라 해도 200년을 넘기지 못하는가 하면 약소국이라 해도 그 이상을 간 경우는 많다.[88] 고려발해의 북방영역 대부분을 통합하지 못했으니 신라 통일과 영토적 한계성은 근본적으로 다를 바가 없으며 고려의 통일은 거의 '신라가 통일했던 영역'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므로 신라의 통일을 부정하면 고려의 통일도 성립이 불가능하다라고 보는 의견이 있다. 그러나 어찌되었건간에 고려는 근본적으로 외세의 개입없이 자주적으로 통일을 했다는 점에서는 분명히 신라의 통일과는 차이가 존재하는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고려의 통일만이 진정한 통일이라고 보는 의견도 존재한다 [89] 그리고 현대에는 만주 지역에도 가치를 부여할 수 있었지만 그 때 당시에는 요동반도를 제외하면 정말로 가치가 없었다. 왜, 어째서 그 시절에는 그 땅에 한족이 안 살았는지 생각해보자[90] 비슷한 이유로 대중으로부터 자주 폄하되는 나라가 바로 조선이다.[91] 사실 기벌포와 매소성에서 당군을 이기고 나서도 나당전쟁은 끝나지 않았는데, 토번의 공세에 당나라가 주력군을 수도 장안 인근의 관중일대로 '잠시' 이동시켰던 것이다. 여기에 요서일대에 거주하던 거란이 당나라에 대항하고, 고구려유민과 말갈인들이 동모산에서 일어나게 되자, 동북방지역에 대한 영향력이 감소하면서 당나라의 대외정책이 신라에 대한 추가공격을 포기하고 유화책으로 변하게 되었다.[92] 실제로 박제가는 북학의에서 현재 조선의 상황과 신라의 상황을 비교하면서 "신라때보다 왜 조선이 안 좋은 거냐?" 라는 식으로 비판하기도 했다.[93] 치당태평송을 보낼 때에 신라의 상황은 매우 암울하였는데, 선덕여왕때에 합천의 대야성이 함락되면서 낙동강 중류지역을 백제와 경계로 두게 되었다.(이때 김유신이 압량주도독으로 백제전선 지휘관 이자, 수도인근지역 방위를 책임지는 지휘관으로 군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서 신라는 한강유역에 대한 통제력이 떨어지고, 중국과의 교섭통로마저 사라질 위기였다.(한강유역이 위험하다고 병력을 파견하다가 백제가 경주를 공격하면 나라가 망할 수 있는 상황이였고, 그것도 아니라면 상주일대만 공격해 교통로를 끊어 버리면 한강유역은 더이상 신라의 영역으로 남아 있지도 못할 것이였다.)[94] 이러한 행위는 무례하게 보일 수 있으나 먼저 무례를 행한건 소정방이지 김유신이 아니다.[95] 미국은 자국과 동맹국이라면 독재국가라 할 지라도 OK하지만 반미국가면 민주국가라 해도 NO를 외치며 중국은... 더 말할 것도 없다.[96] 당시의 개념상 삼국이 하나의 민족이라는 동질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기에는 매우 어려운데, 고구려와 백제가 부여와의 연관성(최소한 지배층 내에서 이러한 것들을 찾을 수 있다.)을 가지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신라는 이러한 내용도 없다. 사실 부여계란 연관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구려와 백제는 삼국시대 수백년간 서로 멸망시키려고 치열하게 싸웠지 같은 동족이라고 친하게 지내고 그런 것이 거의 없었으니 연관성이 있어도 딱히 의미가 없었지만. 그리고 민족이라는 개념 자체가 19세기 서구문물이 유입되는 구한말과 강점기시기에 도입된 것이다.[97] 광개토왕릉비에 404년 백제의 지원을 통해 왜군이 고구려의 대방(황해도) 땅을 침공한 것이 언급된다.[98] 그 막강한 장수왕 시절에도 북위에는 조공을 바쳤다. 당시 북위가 한창 짱짱하던 시절이라곤 하나 조공에 부정적인 이들의 눈대로라면 고구려는 북위를 공격해야 했지만 고구려는 북위를 공격하기는 커녕 자기들 옆에 있는 나라인 북연이 멸망하는데도 구원병을 보내도 북연의 군복을 입혀 '우린 너님과 싸울 생각 없음'을 어필하였다. 그나마 북연 황제 풍홍을 받아주고 북위의 송환 요구를 거절한 것이 자주적이라 할 수 있으려나?[99] 특히 왜에 인질 겸 외교관으로 가 있던 부여풍왕자가 백제 부흥군 이끌었다[100] 세계적으로 외세침략이 거의 없는 국가는 일본이나 영국과 같은 섬나라이며, 한반도도 유럽 아랍 중원 등에 비해 주인이 수시로 바뀌거나, 왕조가 숱하게 바뀌는 지역이 아니었다. 경주는 역사상 3번의 왕조를 거쳤을 뿐이고, 한반도 대부분의 지역이 굉장히 안정된 지역이었다. 하지만 만주일대는 다르고, 중원은 난세도 길고 숱하게 주인이 바뀌고 한족으로 융합되었다. 사실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도 한족으로 녹아없어졌다. 물론 그전에 이미 돌궐, 거란족도 녹아 없어졌다.-서쪽으로 간 흉노, 돌궐이 훈족, 투르크(터키)가 되었다는 이론도 있지만, 어쨌건 중원일대에 남은 자들은 한족 문명에 동화하였다.-현대의 티벳이나 위구르 또한 청나라에 합병된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에서 하나의 중국정책으로 천천히 동화하고 있다.[101] 신라 본기보다 백제 본기가 더 자세하다.[102] 고구려 본기에는 고승이 겁먹고 퇴각했다 한다.[103] 해론은 삼국사기에서 열전을 받았다.[104] 신라 본기는 겨울 10월, 백제 본기는 가을로만 적고 있다.[105] 눌최는 삼국사기에서 열전을 받았다.[106] 백제 본기에는 왕제성[107] 백제 본기에서는 여기에 더해 무왕이 친정했지만 신라가 당에 구원요청을 하자 그만 두었다고 적고 있다.[108] 신라 본기에는 주장이 김용춘, 김서현이나 고구려 본기에서는 김유신이다.[109] 신라 본기에는 이전부터 교전이 있었다 적고 있고, 백제 본기에는 이 이후에도 김유신이 공격했다 적고 있다.[110] 백제 본기에는 은상이 7천 명을 이끌었다 적고 있는데, 신라 본기에는 취한 수급이 8천이 넘는다. 장소를 옮겨가며 열흘간 싸웠다하니 원군까지 포함한 숫자일 수도 있다.[111] 백제 본기만 8월 30여 성이라 적고 있다.[112] 신라 본기에는 국경을 침범했다고만 적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