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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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호는 아계(丫溪)며 사색당파 중 소론에 속했다.
2. 생애
2.1. 관직생활
1687년 진사와 생원 양시에 합격했고, 1702년 식년문과에 장원하여 벼슬을 시작했으며 1707년 문과 중시에 장원하여 판결사로 특진했다. 노론 측 기록에서도 '김일경에게 문예(文藝)가 있었다.[2] '는 기록으로 보아 학문이 상당한 수준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숙종의 뒤를 이어 경종이 즉위하고 나서, 1721년 노론 정권이 경종의 병약함을 이유로 세제(뒤에 영조)가 대리청정을 실시하게 했다. 김일경은 이것을 반대하며 노론 탄압에 앞장섰다. 결국 김창집, 이이명, 조태채, 이건명 등의 노론 4대신을 사형에 처하게 하였다. 그 밑에 있던 노론의 신하 수백 명을 살해, 추방시켰다. 이것이 신축년인 1721년과 임인년인 1722년에 걸쳐 일어난 신임옥사(신임사화)이다. 다만 김일경이 소론 강경파인 건 사실이나, 그렇다고 없는 죄를 지어 정적을 탄압한 것은 아니다. 실제로 4대신 중 이이명은 그 자신이 노골적으로 국왕을 능멸한데다,[3] 정당하다고 했지만 자식이 역모에 참여하기도 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이는 다른 3명도 마찬가지. 신임옥사 항목에 자세히 적혀 있지만 애초에 노론 주류는 경종에게 대단히 '''적대적'''이었다.
2.2. 사망
이후 영조가 즉위하면서 노론이 재집권하였는데, 신임사화의 수괴라는 죄목으로 1724년 참수형을 당하였다. 영조에게 국문을 받으면서도 신이라는 호칭을 쓰지도 않고 꼿꼿하게 대들었으며, 영조도 김일경을 미워해 형 판결이 내려지자마자 바로 사형을 시켰다.
조선시대 참형은 추분 이후 춘분 이전 사이에 집행하게 되어 있는데, 역모같은 특수한 상황에서는 그런거 없이 절차에 따라 곧바로 처형했다. 김일경이 이랬으니 한마디로 왕실을 능멸한 역적 취급을 했다는 얘기다.
2.3. 사후
사후 그는 소론 준론들에게 충신 취급을 받으며 무신년에 난을 일으킨 이들은 그의 죽음에 분노했고 그의 종손들이 역모를 꾀하다가 영조 31년에 생을 마감했으며 자그마치 11명이나 되었다.[4] 때문에 역적의 이미지가 굳어졌는지 '''정조 8년'''[5] 김하재가 자신도 김일경처럼 악명을 남기려고 정조를 욕했다는 진술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