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종(조선)

 


'''경종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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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20대 국왕
경종 | 景宗'''

[image]
경종 상상 어진
'''경종덕문익무순인선효대왕
景宗德文翼武純仁宣孝大王'''

<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묘호'''
'''경종(景宗)'''
'''시호'''
'''조선'''
덕문익무순인선효대왕
(德文翼武純仁宣孝大王)
''''''
각공(恪恭)
'''출생'''
1688년 11월 20일 (음력 10월 28일)
조선 한성부 창경궁 취선당
'''즉위'''
1720년 7월 21일 (음력 6월 13일) 사시
조선 한성부 경덕궁 숭정문
'''사망'''
1724년 10월 11일 (음력 8월 25일) 3시
(35년 10개월 21일 / 1만 3108일)
조선 한성부 창경궁 환취정
'''능묘'''
의릉(懿陵)
'''재위'''
'''조선 왕세자'''
1690년 7월 21일 ~ 1720년 7월 17일
(음력 1690년 6월 15일 ~ 1720년 6월 13일)
'''조선 국왕'''
1720년 7월 17일 ~ 1724년 10월 11일
(음력 1720년 6월 13일 ~ 1724년 8월 25일)
(4년 2개월 25일 / 154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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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본관'''
전주(全州)
''''''
윤 또는 균(昀)[40]
''''''
휘서(輝瑞)
'''전호'''
경소전(敬昭殿)
'''부모'''
부왕 숙종, 모후 옥산부대빈
'''부인'''
단의왕후(추존), [선의왕후

1. 개요
2. 출생과 성장
3. 대리 청정기
4. 재위와 경종독살설
5. 경종은 불임이었나?
6. 연잉군과의 관계
7. 비만 경종
8. 왕비
9. 능
10. 경종이 등장한 작품
10.1. 영화
10.2. 드라마
10.3. 소설
10.4. 뮤지컬
11. 관련 문서
12.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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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의 제20대 국왕. 숙종희빈 장씨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기나긴 치세를 자랑하는 숙종영조 시대 사이에서 4년 간 재위하였으며 35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아버지인 숙종의 재위 45년. 동생인 영조의 재위 52년을 합하면 한 세기에 가까운 97년이며 조선왕조 500년사의 약 5분의 1에 해당하는 기간이 숙종과 영조 두 임금의 시대이다. 이와 비교하여 경종의 재위는 단 4년에 불과하다.
재위 기간이 너무도 짧아 이렇다 할 치적을 남기지 못하였고 자연히 한국 역사에서의 비중은 미미하다. 그러나 52년에 달하는 영조 시대를 설명하는데 있어 경종의 시대는 빼놓을 수 없는 주요한 역사의 한 장으로 평가받는다.

2. 출생과 성장


숙종후궁 소생이지만 첫 아들이었던 까닭에 태어난지 100일도 안되어 원자 책봉을 받았다. 무엇보다 당시 숙종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던 희빈 장씨의 소생이었고 연잉군, 연령군 같은 다른 왕자들이 태어나기 전에는 왕자가 숙빈 최씨 소생의 요절한 아들밖에 없었기에 그는 숙종의 지극한 총애를 받았다. 그리고 장희빈과 이를 배경으로 하는 남인들이 든든하게 버티고 있었던 까닭에 유년기에는 비교적 평탄한 세자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숙종은 알다시피 일당 전제화를 방지하고 왕권 강화에 목적이 있어 무수한 환국을 일으키며 신하들을 찍어눌렀고 어머니가 후궁으로 낮추어지고 인현왕후가 복위되면서 그도 인현왕후의 법적 아들이 된다. 어찌보면 어머니의 원수지만 그래도 인현왕후를 극진히 모셨다고 한다. 14세가 되던 해에는 결국 생모인 희빈 장씨가 중전인 인현왕후를 모함하고 저주했다는 사실이 숙종에게 밝혀져 희빈 장씨가 사약을 받는 사태가 터졌다. 이 때 세자였던 경종은 대신들에게 찾아가 어머니를 죽이지 말아달라고 간청했지만 "이게 다 세자 저하를 위한 것"이라 둘러대면서 세자의 요청을 쌩깠다. 야사에서는 장희빈이 전주 이씨의 씨를 말리기 위해 경종의 고환을 잡아땡겨 성 불구자가 된 이후로 경종이 아이도 못 보고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물론 신빙성은 부족하다.
실제로는 생모가 사약을 받는 와중에도 법률상 어머니인 인현왕후의 빈소를 상주로서 지켜야 했다. 이후 1716년(병신년)의 병신처분으로 2년 전 죽은 윤증이 추탈[1]되면서 상황은 최악으로 몰렸다. 이런 상황에서는 경종도 마음 고생이 심했을 가능성이 높고 이게 경종의 병세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3. 대리 청정기


숙종 말년에는 부왕이 지병으로 누워 대리청정을 맡게 된다. 이는 노론이이명이 숙종과 독대(정유독대)한 후에 청한 것으로서[2] 주도자에서 보듯 경종의 실수를 통해 세자를 연잉군으로 교체하고자 하는 목적이었다. 그런데 경종은 대리청정시 내리는 비답이 "아뢴대로 하라", "따르지 않겠다", "유의하겠다"가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극도로 조심스러웠다. 기록에 보면 하도 답답했는지 김창집을 비롯한 노론계 신하들이 유의하겠다고만 하지 말고 가끔은 모르면 물어보고 의견도 내어보시라고 간했는데 그에 대한 경종의 답변이 또 유의하겠다였다. 단, 유일하게 신하들의 요구를 안 따른게 있었는데 처벌 요구.[3]
그러나 딱 한 번 큰소리를 내며 노발대발한 적은 있다. 승지 유숭이 지각[4]하자, '''"당장 여기서 물러나라. 사관들도 물러가라! 신하가 되어서 너희들이 이렇게 날 기다리게 할 수 있느냐? 여섯 승지들을 모조리 나문[5]해라!"''' 하며 폭발을 한 것. 돌발 상황에 대신들도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라 했고, 공포에 질린 승지 및 사관들은 벌벌 떨며 세자 앞에서 물러나야 했다. 신하들이 왜 화가 나셨는지 좀 알려달라고 해도 경종은 물러나라고 하지 않았냐며 더 분노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화를 푼 세자는 행동이 지나쳤음을 인정하며 승지들에게 다시 입시[6]를 하라고 했다.[7] 아마도 억누른 감정이 작은 일을 계기로 터져나온 것으로 보인다. 물론 며칠 뒤에 신하들이 이 일을 지적할 때의 대답은 "유의하겠다"가 전부였다. 이에 대해 숙종은 비망기를 통해 지나친 행동이었다고 질책하였는데, 세자를 두둔하는 소론 신하들이 오히려 '주상께서 지나친 행동임. 비망기로 질책할 정도는 아닙니다'라고 말해 유야무야 넘어가게 되었다.[8] 당시 숙종은 중병을 앓고 있는데다 대리청정을 하고 있는 세자의 권위를 깎아서는 안된다는 인식에서 비롯한 것 같다. 숙종은 "내가 세자의 아버지인데 부자간의 정리로 그런 말도 못하냐?"라고 투덜거렸으나 병세가 위중하여 화도 못 내고 드러누워 버렸다.
숙빈 최씨의 소생인 연잉군, 명빈 박씨의 소생인 연령군 등이 숙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었는데다가, 자신도 정궁의 소생이 아니라서[9] 언제든지 갈릴 수 있었기 때문에 신중하게 행동한 듯하다. 정궁인 인현왕후의 폐서인과 복위, 어머니의 사사를 보면서 부왕(숙종)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실제로 숙종은 세자 교체를 내심 고려했는데, 당시 청나라 강희제가 태자를 교체했고[10], 연약하고 강하지 못한 경종을 못 미더워하는 점이 실록에도 간간히 보인다.
노론에서는 이런 왕의 의도를 알고 연잉군을 밀어주려 안간힘을 썼고, 숙종의 의중을 어떻게든 활용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세자를 지지하던 소론 측 인사들이 격렬하게 반발했고, 숙종은 앓으며 누워있는데다, 대리청정을 그럭저럭 잘하고 있는 세자를 함부로 바꾸자고 나오기 어려웠다. 위에 나오듯 극도로 조심스럽게 행동하다 보니 특별히 공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두드러진 실책을 한 적도 없었다. 당연히 세자를 교체할 뚜렷한 명분이 없었다.
당시의 정황을 보면 숙종이 "내가 아파서 왕 노릇을 못해먹겠는데 세자에게 대리청정 좀 시키는게 어떠냐?"라고 하자, 영의정 김창집을 비롯한 노론 대신들이 즉각 찬동하면서 세자의 능력을 칭찬했는데, 그동안 반(反) 세자임이 분명했던 노론이 이러는 것이 너무 냄새가 나서 소론 대신 영부사 윤지완 등이 지부상소[11]를 하는 등 한동안 분위기가 험악했다.
어쨌든 세자 자리를 유지하고 있던 경종은 1720년 숙종이 승하하면서 간신히 왕위를 물려받을 수 있었다. 숙종이 조금만 더 건강했거나 오래 살았으면 왕위에 못 올랐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조선 시대 시스템상 국왕이 마음대로 세자를 팽개칠 수 있는 것이 아니라서[12] 무기력하긴 해도 실수가 없고 다음 정식 후계자였던 경종을 내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조선에서 공식적으로 아버지인 왕에 의해 폐세자된건 양녕대군과 사도세자 두 사람뿐이며, 나머지 3명은 아버지의 의지와 별개로 쿠데타를 당해서 폐세자되었다. 양녕은 세자의 자질이 없는 광인임을 대놓고 보여줬으며, 사도세자 또한 영조에게 워낙 괴롭힘을 당해서라고해도 온전한 정신 상태가 아니었다. 게다가 이렇게 결격 사유가 명백한 세자들을 폐세자 할때도 태종과 영조도 여러 신하들의 강한 반대를 꺾으며 밀어붙이느라 권위와 정치력을 많이 소진했었다. 건강이 좀 안 좋고 정치적 기반이 약하다고 인격과 능력에는 큰 문제가 없어보이는 세자를 폐하는건 왕에게도 굉장히 힘든 일이다. 무엇보다도 재위 기간은 물론이요 조선 왕들 중에서 살만큼 살고 재위할 만큼 재위한지라...
여담이지만 조선의 역대 왕세자 중 30년이라는 최장기간을 세자로 지낸 기록을 가지고 있다.[13] 세자로 지낸 긴 기간 동안 쌓인 권위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기에 더더욱 폐세자론을 함부로 꺼내기 힘든 것이다.

4. 재위와 경종독살설


즉위 후 노론의 우려와는 달리 피의 복수가 벌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즉위했다고 해도 다수파인 노론의 지지를 얻지 못했고, 경종 본인도 하루가 멀다하고 "콜록콜록"하며 자리보전하고 눕기 일쑤였으니, 치적을 세울만한 환경은 전혀 못되었다. 사실 노론은 이 당시 왕만 자기 편이 아니지 의정부, 비변사, 육조, 승정원, 삼사, 오군영, 의금부, 포도청 등이 노론 차지며, 지방의 관찰사나 수령들, 그리고 지방의 병마절도사나 수군절도사도 다 노론 차지였고 게다가 성균관, 사학의 유생들 대다수가 노론이고, 심지어 궁내의 내관, 궁녀도 노론과 줄이 이어져 있어서 궐 안 상황도 생방송으로 체크할 수 있었다. 이런 '''야당 같지도 않은 초거대 집권 야당(?)'''(지금으로 치면 여소야대의 현상)이 버티고 있는데 어쩌겠는가?
이런 상황에서 노론은 연잉군왕세제 책봉을 관철시켰고[14] 심지어 대리까지 주장했다. 이 대리는 이뤄지지 않았으나 김일경이 이를 근거로 노론의 숙청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고, 이것이 받아들여지면서 피바람이 분다. 또 다음해인 1722년, 목호룡이 노론이 경종을 살해하고 이이명[15]을 옹립하려 한다고 고변하는 사태(삼수의 옥)가 발생했다. 이렇게 신축년, 임인년 2번에 걸쳐 대숙청이고 노론4대신이 '''신임옥사'''로 소론 쪽의 모함을 받아 사약을 먹고 죽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 과정이 경종의 태도 변화와 맞물려 매우 드라마틱 하므로 문서 참조. 일부[16]에서는 경종이 처음부터 노리고 있었다는 해석을 택하고 있고, 알려진 해석들은 병약한 경종이 소론의 주장을 그대로 따랐다는 것인데, 실록의 기록을 보면 전자의 가능성이 상당하다. 노론의 변명에 경종이 태도가 돌변하여 '''"결탁(結託)이니 교통(僑統)이니 따위의 말은 심히 무엄하다. 번거롭게 하지 말라!"'''라고 일갈을 날려버렸다든지...
대리 청정 논란으로 유배되어있던 노론 4대신(이이명, 김창집, 조태채, 이건명)이 유배지에서 사약으로 사사되고, 노론 측 인사들이 대거 숙청된 뒤, 경종 말년까지 소론 강경파들이 집권하며 노론의 씨를 말리는 피의 나날들이 이어졌다.

이후에도 경종이 한 번 제대로 분노를 폭발시킨 적이 있다. 노론이 초토화되자 소론 측에서는 얼씨구나 하고 노론 씨말리기에 더불어 영조의 세제 추탈에도 앞장섰는데, 그 와중에 너무 경종이 소극적이라는 식의 주장이 나왔다. 그 말에 경종은 전에 없이 크게 분노하여 일갈했다[17].
당황한 소론은 싹싹 빈 끝에 겨우 경종의 화를 가라앉혔고, "우리도 너무 나대다가 노론처럼 싹 갈리는 거 아냐?" 하는 불안감에 노론에 대한 공격 수위를 낮추기 시작했다. 바로 그 상황에서 소론 강경파(준론 - 김일경 등)와 온건파(완론)의 분당이 일어났다.
과소평가 받는 면이 없지 않지만, 보는 바와 같이 얌전해 보이면서도 신하들을 쥐어잡을 때에는 확실히 쥐어잡았다. 주변에서 끊임없이 이간질하고 실제로 개인적으로 앙심을 품을 수 있음에도, 왕실의 리더로서 똘똘하고 자신 다음의 정통성을 갖춘 이복 동생 연잉군을 지켜줘서, 아들이 없었음에도 왕위 계승이 차질 없이 이루어질 수 있게 했다. 어머니 문제, 자신의 좋지 못한 건강, 경쟁자라고 볼 수도 있었던 동생, 갈라져 있던 조정의 분위기 등 여러 난제가 산적해 있었지만, 숙종과 영조 사이에서 자신의 역할은 충실히 다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노론과 소론의 격렬한 정쟁에 치이다가, 결국 즉위 4년, 37세의 이른 나이로 승하했다. 세자 시절 대리청정을 할 때 노론 대신들을 찍어누르고 양전 사업을 강행해서 완성시켰던 기록 등이 있는 걸 보면, 뒷 배경만 안정적이었으면 국정을 잘 이끌어나갔을지도 모른다는 설도 있다.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밝혀 놓은 남구만약천집이 발간되었고, 서양의 것을 모방한 소화기가 만들어지기도 했다.[18] 와문진종(시계)[19]을 들여온 것도 이때. 태엽 시계를 수입하면서 조선의 시간체제는 12간지에서 따온 12시간제에서 서구식 24시간제로 바뀌기 시작[20]했다. 서구식 24시간제가 제도화한 것은 정조 말년에 가서였지만 경종 때부터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에서는 태엽 시계를 기반으로 한 24시간제 시간단위가 조금씩 기록되기 시작했다.
참고로 경종 독살설은 무수리 숙빈 최씨의 출신 성분 논란과 함께 평생 영조를 괴롭혔다. 자세한 내용은 경종 독살설.

5. 경종은 불임이었나?


경종은 자식을 두지 못했고, 이미 연잉군을 왕세제로 지명해뒀기 때문에, 연잉군이 그 뒤를 이었다. 이에 잘 알려진 경종의 불임설이 있다.
경종은 젊어서부터 병약했다. 어머니가 당쟁에 휘말려 죄인으로 사약을 먹고 죽는 모습을 어린 나이에 직접 목격한 상황에서, 제2의 연산군처럼 되어 피바람이 몰아칠까 봐 두려워한 노론 신하들이 틈만 나면 갈궈대고, 아버지 숙종도 희빈 장씨의 아들이란 이유로 허구한 날 갈궈대니, 거기서 받은 정신적 스트레스가 상당했을 것이다. 미치지 않은 것만 해도 대단하다는 평이 있긴 한데, 노론 측에서 남긴 기록을 보면 살짝 정신이 돌아버린 부분도 있었던 모양.
노론 강경파의 영수 민진원의 단암만록을 인용하자면, '''"세자는 때때로 벽을 향하고 앉아서 조그마한 소리로 중얼거려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것처럼 했다. 또 한밤중에 계단과 뜰 사이를 방황하기도 했고 정신도 안정되지 못했으며 지각도 불분명했다. 숙종의 상에도 한 번도 곡소리를 내지 않았으며 까닭 없이 웃기까지 했다."''' 노론의 기록이란 특성상 악의적인 표현일 가능성이 있으나, 경종이 느낀 스트레스가 대단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불임설도 여기에 나왔다.
경종이 불임인 것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가장 유명한 일화가 사약을 받기 전 희빈 장씨가 죽기 전에 세자를 보고 싶다고 애원했고, 이에 마음이 약해진 숙종이 세자를 데려오도록 했다. 하지만 희빈 장씨는 돌연 "전주 이씨의 씨를 말리겠다!"면서 세자의 성기를 꽉 붙잡고 당기는 만행을 저질렀고, 그 때문에 경종이 기절했으며, 이로 인해 자식을 둘 수 없는 성불구자가 됐고 병약해졌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는 야사에서 나오는 이야기이고 조선 왕조 실록에 쓰여진 정사가 아니기 때문에 사실이 아니다. 설민석이 이를 방송에서 애기했다가 역사 전공자들에게 줄기차게 까이기도 했다. 단, 강의에서는 '야사'라는 사실을 덧붙였다. 그리고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면, 희빈 장씨를 깎아내리고 윤지술이 어머니를 사사한 업적에 대해 경종이 불쾌하게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경종이 불임이 되어 자식을 못 낳으면 당연히 세자 자리에서도 밀려날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 당시에는 '''후사를 이을 수 없는 사람이 왕위에 오를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후사를 이을수 없으면 세자에서 밀려나고, 세자에서 밀려나면 곧 왕이 될 수 없는 것이며 더 나아가 죽음으로도 이어질 수 있는데, 그렇게 되면 남인 복귀, 명예 회복은 꿈조차도 꿀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이 사실을 장희빈이 '''당연히 모를 리가 없다.''' 특히나 생모가 의도해서 성불구를 만들었다는 것 자체가, 아이를 낳아본 적 없는 이들이 믿거나 만들어낸 말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사실 장희빈의 경우 (최소한 스스로 생각하기엔)억울하게 사약을 받았는데, 이를 복수해 줄 이는 세자인 경종 말고는 없었다. 그렇다면 경종이 내내 안녕해서 왕위를 물려받기를 원하는 것이 상식이다. 애초에 경종을 세자 자리에 앉히려고 노력한 게 장희빈이며, 더군다나 사약 먹을 때는 금부도사를 비롯해서 죽는 모습을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 앞에서 그런 짓을 저질렀다면 금부도사가 보고하지 않을 리 없고, 보고하면 즉시 기록으로 남는데, 정사에는 그런 기록이 없다. 즉 '''야사는 야사일 뿐'''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경종이 완전한 성 불구였다고 단정하기는 힘들다. 학자들은 대체로 과도한 스트레스로 인한 생식 능력 저하 정도로 추측하고 있다. 굳이 장희빈과 연관을 짓자면, 위에서 언급했듯이 경종이 생모의 죽음 자체에 충격을 받아 쇠약해진 정도. 결혼을 2번이나 했음에도 끝내 자손을 두지 못했고, 계비인 [선의왕후와 함께 양자를 들이려고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단순한 생식 능력 저하였다면, 왕비의 불임을 의심하고 후궁을 한 명이라도 들이려는 노력이 있었을 것이나, 경종은 단 하나의 후궁도 들이지 않았고, 양자를 고려하는 등의 아예 자식을 낳을 기대 자체를 하지 않았음을 볼 때, 성 불구가 절대 아니라고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왕실의 대전제, 대원칙인 효종 - 현종 - 숙종 '삼종의 혈맥'을 고려하면 해당자는 연잉군의 아들(효장세자) 뿐이었다. 그러나 즉위 당시 효장세자의 나이는 겨우 생후 16개월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의외로 간단한 해법이 있는데 '''소현세자의 증손자 밀풍군'''이었다. 이인좌의 난에서 그들이 괜히 밀풍군을 옹립한 것이 아니다.[21]
세자 / 세제 책봉은 청나라의 승인을 받아야 되는 일이었는데 청나라에서 "아니 왕이 아직 젊은데 왜 동생을 세제로 책봉하나?"라 의문을 제기하자 당시 책봉 요청을 위해 갔던 노론의 이건명, 윤양래 등이 "왕이 발기가 불능[22]이라 자손을 둘 수 없다"고 보고했다.[23] 결국 청나라의 기록[24]에도 남게 됐는데 그 때문에 경종이 성 불구였다는 설이 퍼진 모양이다. 이래저래 '''안습'''. 훗날 노론과 연잉군은 이것을 두고 단순히 마비를 말한다고 항변하지만 청실록에는 분명히 氣甚痿弱、嗣續絕(기운이 심히 위약하여 사속(자녀)이 끊긴다)라고 말했는데 그냥 거짓말이다.

6. 연잉군과의 관계


노론과 소론의 정쟁 속에서 이복 동생 연잉군이 왕권을 위협하는 인물이었으나, 형제 간에 우애는 형님 동생하며 각별했다고 한다.[25] 소론의 공격으로부터 연잉군을 필사적으로 보호했고, 동생이 찾아오면 환대하고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는 등 평소에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야사로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경종이 병색이 완연해져 자리 보전을 하고 있을 때 연잉군이 병문안을 들었다. 그러자 아픈 와중에도 경종이 "창문을 열어라, 세제가 덥겠구나"라고 말했다고 할 정도.
박시백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 박상검이 일으킨 역모 사건 이후 경종이 속으로는 연잉군을 매우 불신했으나, 세제에 대한 의혹들을 차단하고 보호함으로서 좋든 싫든 연잉군이 자신의 하나뿐인 후계자임을 인정했다고 주장한다.[26] 사실 객관적으로 보면 당시 조선 왕실에서 법적으로 문제 없는 계승자는 연잉군뿐이었다. 소현세자의 후계인 밀풍군은 촌수가 너무 먼 데다 자칫 잘못하면 효종의 정통성과 관련된 역린을 건드릴 수도 있었다.[27] 그의 시각에 따르면 연잉군은 이후 "황형"이라며 경종의 우애를 강조했으나 이것은 정치적인 쇼맨십이었을 뿐이며, 진정한 대계를 생각한 경종이 더욱 우애를 표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간단하게 말하면, 애증.''' 하기야 경종 자신도 아버지의 환국으로 인해 자신의 생모와 외삼촌이 죽음을 당한, 아버지 숙종의 의심과 변덕에 시달린 골육상쟁의 직접적인 피해자이다. 비록 이복동생인 영조가 마음에 안 들었어도, 사적으로는 이복동생을 처단하는 골육상쟁을 벌이기 싫었을 것이다.
경종과 연잉군의 정치적 대립이 극에 달했을 때는 경종이 연잉군에게 직접 '''폭언'''을 한 적이 있다. 신축환국 직후 정치적 위협을 느낀 연잉군이 '환관과 궁녀 중 나를 해치려 하는 자가 있다'며 조사해 처벌해 줄 것을 요구하자, 경종은 이를 거부했다. 연잉군이 거듭 요구하자 경종은 '차마 듣지 못할 하교'를 내린 것.(경종 실록 1년 12월 22일 기사) 임금이 직접 욕을 했을 경우 실록에서는 이런 식으로 적절히 필터링을 하는 편이다. 연잉군의 의도는 내관 및 궁녀 집단에 있는 자신의 반대 세력을 탄압함으로서 세제로서의 위치를 강화하고자 한 것인데, 이를 간파한 경종은 지나친 부탁에 분노한 나머지 연잉군에게 폭언을 한 것이다.
하지만 이후 연잉군이 '주상께서 내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시니 차라리 세제 자리를 내놓겠다!'는 폭탄 선언을 거듭했고, 당황한 조정 대신들이 수사를 속개했다. 이 때 노론은 물론이고 소론조차 세제를 편들었다. 반대 세력이긴 해도 어쨌든 확고한 왕위 후계자인 세제 대신 일개 환관 및 궁녀들을 편들 수는 없었기 때문. 조사 결과 실제로 연잉군을 해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내시 박상검과 문유도, 궁녀 석렬과 필정을 잡아들여서 자백을 받아낸 후 사형을 집행했다.[28] 이로 인해서 연잉군의 위치는 제법 견고해졌다. 그러다가 목호룡의 고변으로 신임옥사가 터지자 연잉군은 졸지에 역적 수괴로 몰릴 판국이 되었고, 거적을 펼치고 그위에 엎드려 '나같은 죄인이 어찌 세제가 됩니까?'라고 울며불며 고할 정도였다. 하지만 경종은 노론이 세운 세제임에도 불구하고 연잉군의 사직을 윤허하지 않았다. 왕에게 독을 먹인 김씨 성의 궁인을 찾아야 한다는 상소에도 김씨가 한둘이 아니라 못 찾겠다고 거부하여 옥사의 확대를 막았다.
서로의 속마음이야 어쨌든 경종은 끝까지 연잉군을 소론 준론들의 공격으로부터 지켜주었고, 연잉군 역시 죽을 때까지 이복 형 경종에 대해 자주 회상하고 그리워하는 말을 자주 했다. 특히 영조 재위 초반기 영조가 내세운 탕평책의 중심 인물들은 바로 경종을 지지했던 소론 온건파 인사들이 대부분이다. 대표적 인물이 바로 박문수.(소론 강경파들은 끝내 영조를 거부했지만) 결과적으로 이것은 노론의 지지를 받은 세제 영조가 소론 정권 아래서 무사히 정권을 장악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고 나아가 영조의 탕평책에 힘을 실어준 셈이니 영조 입장에서 경종은 분명한 생명의 은인이자 자신의 정책에 힘이 된 신하들까지 내려 준 '어진 황형'이다. 영조가 경종에 대한 우애를 정치적으로 이용한 면도 있지만, 자기 권력이 막강해져서 꼭 이런 정치적 제스처를 취할 필요가 없는 말년까지도 형을 그리워한 행적을 보면 영조가 경종을 그리워한 것이 완전히 정치적 제스처였다거나 가식이었던 것만은 아닌 듯하다. 선조나 인조 같은 케이스처럼 자기 친자식도 견제하는게 더러운 궁중 권력판이었다. 애초 영조 본인조차도 아들을 경쟁자로 보았다는 의혹이 있는 마당이니 정적인 이복 동생을 지지해준 경종은 보통 대인배가 아닌 것이다. 훗날의 영조 본인조차 결국 비정상적으로 마무리지은 후계자 문제를 경종은 인내심을 유지하며 깨끗하게 처리한 셈이니.
심지어는 영조가 죽기 6년 전인(경종이 죽은지 약 '''46년 후''') 77세 때 손자 정조와 함께 존현각에 올라서는 "이 건물이 우리 황형(경종 대왕)께서 세자 시절 공부하시던 곳이다. 오늘 할아비와 손주가 함께 앉으니 황형에 대한 마음이 더욱 간절해지는구나"라고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사실 영조는 이런 행동을 상당히 자주 하는 임금이기도 했다. 걸핏하면 부왕 숙종을 그리면서 울고, 생모인 숙빈 최씨를 그리면서 또 울고(...) 가뜩이나 눈물을 필살기로 장전한 임금이었는데 잔정도 참으로 많았던 듯 하다. 오죽하면 영조가 죽고 16년이 지난 정조 16년에는 윤구종이 혜릉(경종의 제1비 단의왕후 심씨의 무덤) 앞에서 "이 무덤에서도 말에서 내려야 하나?"라는 발언을 한 적이 있다는 혐의로 붙잡아 국문하니 '의릉(懿陵 : 경종의 능호)에 신하 노릇을 하지 않으려 했다(='경종에게는 신하로서 충성하고 싶지 않았다'는 뜻)'하였다. 그러자 정조가 "아니 선왕의 효성과 '''우애'''는 모두가 알아주는데 어찌 이럴 수 있냐?"라고 한 적이 있다. 조정 대신들도 '이게 무슨 흉악한 발언이며, 천지간의 사람으로서 어찌 이처럼 극악한 말을 할 수 있는가'라며 경악하였고 이에 동조했다. 즉, 윤구종의 행동이 오히려 영조를 모욕한 행위라고 지적할 정도로 후대 사람들은 영조의 우애를 인정했다는 뜻이 된다. 당연히 윤구종은 역적 수준으로 국문을 받았고 , 이를 이기지 못했는지 처벌받기도 전에 사망했다.[29]
그러나 윤구종 사건은 원래 정언 유성한이 정조에게 '''"너님 공부도 안 하는데다 여악이 난잡하게 논다는데 그래서야 되겠음??"'''이라는 불온한 상소[30]를 올려서 신하들이 죄를 줄 것을 청하며 뒷배경을 조사하다가 밝혀진 것으로 채제공을 비롯한 남인들은 유성한이 과거 사도세자를 핍박하는 발언을 한 것과 유성한윤구종이 같은 패거리임을 거론하며 '''"경종대왕께 충성을 다 하지 않는 역적 놈들이 사도세자를 핍박했는데 이런 자들이 경종과 영조, 사도세자에게는 충성했겠음???"'''을 주장하며 사도세자 신원 문제를 들고 나오기 시작했다. 이후 같은 해에 영남 유생들이 올라와 사도세자의 추승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니 이것이 바로 영남 만인소로 경종의 죽음부터 사도세자의 죽음까지 복잡하게 얽힌 사건이 된 것. 자세한 내용은 경종 독살설.
이후 영조는 경종을 모셨던 친소론 상궁과 내관들로 하여금 사도세자를 모시게 하여 사도세자의 권위를 높여주려 했는데, 이게 나중에 사도세자가 소론이 아니냐는 논란이 있다.

7. 비만 경종


대중이 여기는 경종의 모습은 이런 '병약하다'는 이미지가 강해서 마른 체형에 파리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비만 체형이었다. 뚱뚱하고 후덕한 외모가 대중적인 병약한 이미지와 거리가 멀기 때문에 일어나는 오해.[31]
승정원 일기의 기록이 이를 뒷받침하는데(숙종 39년 일기), 25세 때인 1713년 기사에는 경종의 모습을 "비만태조(肥滿太早·아주 일찍부터 살이 찌다)"라고 했고, 재위 2년 기사에는 "성체비만(成體肥滿·다 커서도 살이 쪘다)"으로 묘사돼 있다. 비만한 만큼 더위를 많이 느끼고, 땀이 많이 나는 질환(다한증)을 자주 앓았다.[32]
몸이 안 좋은 것 자체는 사실이었던 듯하다. 자식도 없었던 점이며 마흔도 못돼서 일찍 죽은 점이며...심지어 경종 2년 6월 24일에는 삼수의 옥 문제를 논의하다가 신하들 앞에서 오줌을 싸기도 했다. 민망해진 대신들이 물러나길 청했으나, 경종은 괘념치 말고 남으라고 했다.[33] 해당 구절에 "小回身放溺"이라고 한 것을 보아, 잠시 몸을 돌려 요강에 소피를 눈 것으로 추측된다. 그래서 사헌부 지평인 이거원이 "군신 간에도 예의가 있는데 말도 안 하고 소피를 누다니 예의에 어긋납니다"라고 왕을 비판하기도 했다.

8. 왕비


그의 두 아내들은 꽤 팔자가 사나운 편이었다. 첫 아내 단의왕후 심씨는 세자빈 시절에 요절했는데, 실록에 보면 정신 질환이 있었다고 한다. 경종의 자식이 없는 이유는 단의왕후의 탓도 있다. 그녀의 집안은 나중에 이인좌의 난에 참가하는 바람에 몰락했다.
2번째 아내 [선의왕후 어씨는 일찍부터 당시 연잉군이었던 영조를 경계했다. 선의왕후는 14세에 경종과 혼인했는데, 불과 2년 뒤 숙종이 사망했고, 뒤이어 경종이 사망했으므로, 여러 모로 아이를 가지기 힘든 상황이기는 했다. 어씨와 그의 친족들은 다른 왕족을 양자로 들여 경종의 뒤를 잇게 하려는 계획까지 세웠다고 한다. 이 탓에 영조와 사이가 나빠서, 영조가 즉위한 뒤에 둘이 서로를 무시하는 일이 잦아 난감한 일이 여럿 있었다고 한다. 이인좌의 난을 뒤에서 부추겼다는 말조차 있을 정도니. 그래서 그런지, 효장세자를 그녀가 독살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경종 독살설효장세자 문서에 보면 나와 있듯이 효장세자는 일개 궁인에 의해 독살당했다고 추정한다고 하나, 일개 궁녀가 국본(國本)인 왕세자를 독살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당시 친국에서도 궁녀가 김상궁이 사주했다고 납초하였고, 실록에도 김상궁은 동조(東朝)를 섬기던 상궁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다는 점, 영조가 이를 서둘러 차단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9. 능


의릉(懿陵) 문서로.

10. 경종이 등장한 작품


사극에서는 주로 어린 시절이나 청소년기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왕이다. 왜냐하면 어머니인 장희빈이 주역인 경우가 많다 보니, 정작 경종이 왕이 된 이후의 이야기는 잘 다뤄지지 않는 편이기 때문. 왕이 된 이후 이야기를 다루려 해도 재위기간이 짧았으니 사극에서 다루기는 쉽지 않으며, 이번에는 이복 동생인 영조에게 밀리는 판. 37세에 사망했기에 '청년 임금'이라는 이미지는 완전히 맞지 않을 수도 있지만 적어도 사극 속 경종은 주로 청년 모습으로 등장한다.

10.1. 영화


사도(영화)에서는 영조와 사도세자가 종묘를 참배하는 장면에서 언급되는데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이 어른은 나의 형님이신 경종대왕이시다. 사람들은 내가 이 어른을 독살했다고들 한다"며 영조의 정통성 콤플렉스를 나타내는 장면에는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중반부에는 고문당하던 죄인이 영조에게 경종대왕을 독살한 당신이 어찌 왕이냐며 절규하는 장면도 나온다.[34]

10.2. 드라마


  • 1988년 MBC 드라마 《조선왕조 500년 - 인현왕후》 배우: 김성환(청소년), 여민구(아역)
세자 시절에만 나온다. 임금으로서의 모습은 나오지 않는다.
  • 2002년 KBS2 드라마 《장희빈》 배우: 곽정욱[35](아역), 이승형(성인)
주로 왕세자로서 등장하며, 희빈과 장희재는 세자의 생모/외숙임을 내세워 부심을 부리거나 행패를 부린다. 후반에 신사무옥 때 생모를 구명하려고 노력하지만 실패하는 모습도 그렸으며, 94화에선 장희빈의 부름으로 인현왕후의 빈소에서 취선당으로 불려왔다가, 다시 빈전으로 데리고 오라는 숙종의 명을 장희빈이 거부하며 세자를 뺏기지 않기 위해 세자를 붙잡고 늘어지다가 바짓가랑이를 잡아당기자 세자가 쓰러지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은 장희빈이 경종의 하초를 못 쓰게 했다는 야사를 반영했으며, 세자가 쓰러지자 장희빈이 당황하는 장면도 넣었다.
>우리는 여기서 전설처럼 전해지는 야사 한 토막을 상기하게 된다. 이 날 희빈 장씨가 어린 세자의 국부를 잡았던 탓으로 후일 세자에게는 후사가 없었다는 것이며, 또한 세자는 이 때의 일로 단명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진위는 확인할 수 없다.
>
>94화에서 쓰러진 세자를 보며 희빈이 당황하는 장면에서 나레이션.
아무튼 드라마에선 세자가 인현왕후의 빈소로 돌아간 후 앓아눕자, 장희빈은 날 죽이려거든 세자부터 죽이라고 발악하다가 강제로 사약을 마시고 죽는 걸로 처리했으며, 세자는 그 소식에 취선당으로 달려가지만 막 사약을 마시고 죽은 생모를 끌어안고 통곡한다. 연잉군과의 사이는 그렇게 나쁘지 않게 나오며[36], 세월이 흘러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에선 즉위식 때 생모의 환상을 보는 장면에서 등장한다.
왕세자로서 등장하는데 여기서는 역사 고증오류로 태어날 때부터 고자였다는 설정을 적용했다. 또한 연잉군(영조)와의 관계가 매우 우애가 깊게 묘사되어 있다.
등장한 왕세자 이각의 모델이라는 설이 팬들 사이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친모가 폐위된 왕비이고, 경종 독살설의 증거로 꼽히는 게장과 감이 극에서도 소재로 등장하며, 경종은 세자 시절에 한번 세자빈[37]을 죽음으로 잃었기 때문.
왕세자 시절부터 나온다. 근데 작가가 경종에게 무슨 악감정이 있는지 매번 연잉군에게 열폭을 해대는 찌질이 왕으로 나온다.
  • 2019년 SBS 드라마 《해치》 배우 : 한승현[38]
경종이 비만이었던 고증을 따라 통통한 배우를 섭외했다.
  • 이강백이 지은 희곡 《진땀 흘리기》는 노론들에게 빨리 영조에게 양위하라는 괴롭힘을 당하는 경종의 심리적 고통을 다루고 있다.

10.3. 소설


숙종 44년을 배경으로 세자 시절의 경종과 생과방 나인을 주인공으로 하는 로맨스 소설이다. 경종 외에 연잉군(훗날의 영조)과 내시 박상검, 선의왕후 어씨, 숙종 등이 대거 등장하고 망가지는 팩션 소설. 독살당했다는 역사 기록과 달리 독살당한 척 하고 궁을 나와 순심과 함께 행복하게 살아간다.

10.4. 뮤지컬


  • 뮤지컬 <경종수정실록> : 2019년 10월 27일 ~ 2020년 1월 12일, 대학로 TOM 1관 (초연)
경종과 연잉군(영조) 사이의 갈등 및 정치 대립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 뮤지컬이다. 홍수찬이라는 가상 인물이 경종의 친구이자 스승, 그리고 사관으로 등장한다.
  • 초연 캐스팅
경종: 에녹, 성두섭, 정동화
연잉군: 신성민, 박정원, 홍승안
홍수찬[39]: 김종구, 정민, 주민진

11. 관련 문서



12. 둘러보기


<color=#ffd400> '''경종 어필'''
[image]
경종 상상화(우승우 作)
[1] 追奪, 죽은 사람의 죄를 논하여 살았을 때의 벼슬 이름을 깎아 없앰. 대충 서훈 취소나 신분 박탈형이라고 보면 된다.[2] 다만 당시 독대의 내용이 직접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달리 말하면 숙종과 이이명이 비밀리에 세자의 대리청정을 확실하게 합의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의견을 주고 받으면서 암묵적으로 상호 동의를 내린 수준인지는 확실하지 않다.[3] 집권 세력이 노론이었기 때문. 괜히 처벌 요구를 따랐다가 친소론 인사를 잡아죽이면 자기 지지 세력만 깎아먹는 꼴이다.[4] 그냥 지각한 정도가 아니라 '''일부러 늦게 왔다'''. 그것도 무려 1시간이나. 입궐을 해서 출석 체크를 하고 노론 쪽 인사랑 노닥거리다가 어전회의에 들어온 것. 당연히 노론이 경종을 시험하려고 한 거다.[5] 拿問, 죄인을 잡아다가 심문함.[6] 入侍, 대궐에 들어가서 임금을 만나뵈는 일.[7] 숙종실록 63권, 숙종 45년 6월 11일 임자 1번째 기사[8] 노론 쪽에서도 사간 이봉익이 상소를 올려 숙종이 승정원에 내린 비망기가 지나쳤다고 말했을 정도였다.[9] 따지고 보면 후궁 소생. 장희빈이 한때 중전까지 된 적은 있으나, 경종을 낳을 당시 장희빈의 신분은 중전이 아니었다.[10] 새 태자가 바로 경종 년간에 즉위한 옹정제이다.[11] 持斧上疏, 도끼를 지참하고 하는 상소. 안들어주려면 가져간 도끼로 자기 목을 치라는 의미가 있다.[12] 앞에서 언급한 청나라도 원래 청나라는 적장자 계승의 전통이 없던 나라라서 가능한 이야기였다. 당장 강희제도 적장자가 아닌데 형을 제끼고 황제가 되었고 애초에 청나라는 강희제 이전에도 모두 적장자가 아닌데 형을 제끼고 황제로 즉위하고 그 뒤로도 적장자 황제가 매우 드물다,[13] 왕세자 + 황태자 기간을 합하면 순종이 32년으로 더 길다.[14] 연잉군을 세제로 삼을 것을 주청했을 때가 경종 1년(!)이고 경종의 나이가 서른넷, 선의왕후 어씨가 열일곱이었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경종이 설령 이때까지 자식이 없었다고 해도 아직 나이가 창창한 젊은 왕에게 득남을 위한 섭생을 권하는 것이 신하된 자의 도리인데 다짜고짜 연잉군을 세제로 책봉하자고 하는 것부터가 그만큼 노론이 당시 궁지에 몰려있었다는 의미로 해석하였다. 심지어 수렴청정이나 대리청정도 아니고 경종 자신이 친정하는 중이었음에도 굳이 '''왕께서 대비에게 가서 연잉군을 세제로 책봉하는 것에 대한 동의를 구할 것'''을 경종에게 강권하기까지 했다.[15] 이이명이 부각된 것은 아들 이기지가 경종 살해에 참여한데다가 이이명이 전주 이씨로 왕실의 먼 친족이었기 때문이다. 실질적 이유는 노론 4대신의 필두였기 때문이지만...[16] 현대 저작물 중에는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등에서 다루고 있다.[17] 이때 사관의 평이, "왕께서는 평소에 지나치게 얌전하셔서 흉악한 무리들이 전하를 업신여겼었는데, 하룻밤 사이에 하늘과 땅을 뒤집듯 피의 숙청을 하시니 '''전하께서 본성을 숨기고 계셨음을 이제야 알겠다'''"고...[18] 불 끄는 소화기가 맞다. 수총기(水銃器), 즉 물대포였다. 경종 실록 3년 5월 25일에 보면 관상감의 허원이 청나라에서 들여왔다고 한다. 그러나 비용 문제로 각 군문에 수총기를 두라는 목표는 실현되지 못했다.[19] 벽걸이형 태엽 시계이다.[20] 청나라강희제 때 12시간제를 폐지하고 24시간제로 바꿨다. 일본네덜란드와의 통교 문제로 에도 막부 초기에 이미 24시간제를 도입한 것을 보면 한국과 중국의 시제 개혁이 늦었던 것.[21] 하지만 밀풍군은 경종과 촌수가 8촌이나 된다. 왕실에 자손이 없기로서니 정말 그렇게 되는 경우는 가까운 친척이 아예 없을 경우인데 연잉군이 있는 마당에 밀풍군 영입은 명분없는 행동이다. 게다가 아무리 소현세자의 후손들이 복권되었다고 하지만 잘못하면 예송논쟁마냥 '''효종의 정통성 역린'''을 건드릴 수 있다.[22] 실록에는 위약(痿弱)이라고 기록되어 있다.[23] 이는 모욕을 넘어서 능멸에 가까운 발언이다. 발언의 수위를 생각하면 당장 주살당해도 할 말이 없는 수준. 주살 수준이 아니라 경종 정도의 배짱이면 '''아예 이건명 집안 자체를 박살 내버릴 수도 있고.''' 경종이 이 사실을 몰랐을 리 없다. 훗날 이건명사약을 받아 죽고 경종은 급속도로 쇠약해져 2년 만에 죽는다. [24] 청실록 1강희 61년(1722년) 음력 2월 25일 기사(한문)[25] 영조 역시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도 자주 경종의 은혜를 들먹이곤 했다고 한다. 과장된 정치적 제스처에 불과했을 수도 있겠지만 아예 실체조차 없는 일을 과장하진 않았을 것이다.[26] 이 근거로 경종을 독살하려 한 김씨 궁녀의 진실을 밝하지 않은 것을 들었다. 보통 왕을 독살하려 한 이는 끝까지 파헤쳐 잡는 게 보통이지만 수사 도중 자칫 동궁(연잉군)쪽에 불리한 진술이 나올까봐 차단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에 대한 나름대로의 근거를 대자면 실제로 삼수의 옥 당시 연잉군 측 인물들이 끌려나오기도 했다.[27] 당장 효종이 죽고 그의 적장자이자 유일한 아들인 현종이 즉위하였음에도 예송논쟁이 일어난 것을 생각해보자.[28] 다만 박상검의 경우 자복하지 않고 죽었고, 석렬과 필정은 자살했으며, 문유도만이 자복했다. [29] 영정조대의 인물인 성대중청성잡기에 따르면 이에 얽힌 재밌는 얘기가 있다. 윤구종을 사형시키려고 백정 몇명을 꾀어 망나니 준비를 시켰는데 윤구종이 후유증으로 옥사하는 바람에 유야무야됐다. 졸지에 일감이(?) 끊긴 백정들은 항의한답시고 사적으로 봉화를 피워 난동을 일으켰고 정조가 노해 그들 모두 처벌 후 귀양을 보냈다.[30] 정조는 조선왕조 내에서 손에 꼽히는 공부벌레 임금으로 유명했기에 사실관계조차 무시한 모욕이었다.[31] 그래서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 허약한 모습으로 그려졌으나, 개정판에서 허약하지 않은 모습으로 수정했다.(뚱뚱하게 수정할 시 현종과 중복되기 때문일 듯.) 조선왕조실톡에서는 파오후인 모습으로 제대로 묘사했다.[32] 승정원 일기 477책 (탈초본 25책) 숙종 39년 4월 9일 병진 22/23 기사 입진할 때 이이명 등이 입시하여 진맥 결과 등에 관한 문제, 의관 중 사관 시임이 올라온 지 오래된 문제, 왕세자(경종)의 증후에 관한 문제에 대해 논의함.[33] 14번째 줄[34] 이에 대한 영조의 대답도 흥미로운데 25년동안 지겹지도 않냐며 한숨을 쉬다가 그 죄인의 입을 찢어버린다.[35] 야인시대김두한 아역[36] 즉위식 장면 직전에 연잉군의 활쏘기 연습을 돕기도 했다.[37] 청송 심씨로, 이후 단의왕후로 추증했다.[38] 배우 양희경의 아들이다[39] 중간에 잠시 숙종으로 나온다. 즉 1인 2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