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임옥사

 


1. 개요
2. 상세
3. 배경
4. 신축환국(1721년)
4.1. 경종, 칼을 들다.
5. 임인의 옥(삼수의 옥, 1722년)
6. 관련 항목


1. 개요


'''辛壬獄事'''
조선 시대 경종 1년('''신'''축辛丑년)과 2년('''임'''인壬寅년) 두 해(1721년 ~ 1722년)에 걸쳐 있었던 정치 분쟁. 삼수의 변이라고도 하며 훗날 임인국안이라는 애매한 이름으로 바뀌었다가 모든 문서가 태워지기도 했다.

2. 상세


그 막대한 여파는 환국이라 불리지만 않을 뿐 환국에 맞먹었고, 그 갈등은 영조 시대 전반까지 이어졌다.
알려진 신임사화(辛壬士禍)라는 표현에서 "사화(士禍)"는 사림이 화를 입었다는 것인데, 이 화를 입은 대상은 노론에 불과했기에 공정성에 어긋나다는 지적이 있다[1]. 그래서 이것은 4대 사화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래서 신임옥사가 문서명이 되었다. 간혹 신임사옥(辛壬士獄), 임인옥(壬寅獄)이라고도 한다. 또 신임옥사는 한 해에 일어난게 아닌 두 해에 걸쳐 일어난 것이다.

3. 배경


병신처분으로 권력을 장악한 노론숙종과 결탁하여, 남인소론의 지지를 받던 장희빈이 낳은 세자(경종)를 폐출하고 연잉군, 즉 훗날의 영조세자로 세우려 하였다. 이를 위해 노론은 일종의 덫으로서 세자의 흠결을 잡기위해 대리청정을 맡기도록 숙종에게 청하고 비슷한 생각으로 세자를 탐탁치 않게 생각하고 내심 연잉군을 보위에 올릴 생각이었던 숙종도 그에 응한다. 하지만 그들의 의도와는 다르게 경종의 대리청정은 그를 쫓아내게 할 만큼의 흠집이 발견되지 않았고, 노론에게는 설상가상으로 숙종이 급격히 병약해져 원래의 계획을 실행할 틈도 없이 60세를 일기로 승하한다.[2]
이에 경종이 조선의 20대 국왕으로 즉위하게 되니 집권세력 노론은 당연히 그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경종을 옹립했던 남인은 박살났으며, 지지세력인 소론병신처분으로 이미 실각한 상태였다. 노론은 더욱 공세적으로 나왔다. 집권 초부터 경종의 어머니 희빈 장씨를 두고 압박해, 국왕 어머니의 추숭(명예회복)을 청한 유생 조중우를 '''처형하게 하고''',[3] '''국왕의 어머니의 죄를 명백히 저술하라며'''(...) '''사실상 왕을 모욕한''' 사관 윤지술을 왕이 변방으로 유배하려 하자, 역시 압박하여 석방케 하는 등,[4] 경종에게 왕 구실을 할 수 없게 했다. 참고로 윤지술은 결국 신축옥사 때 김일경 일파의 탄핵으로 사형당한다.[5]
당시 노론의 중심은 이이명, 김창집, 이건명, 조태채[6][7] 4대신을 위시로 했고, 그 중에서도 중심은 영상 김창집과 판부사 이이명이었다. 그들은 한걸음 더 나아가 경종이 죽은 후를 대비하여 확실한 노론 정권을 보장받기 위해 경종에게 연잉군을 세제로 책봉할 것을 '''강요'''했다. 이 때가 경종이 33살에 즉위한 지 겨우 1년 남짓이었는데 '''34살의 젊은 임금에게 후사는 생각하지 말고 이복 동생에게 물려주라는 어마어마한 주장'''을 한 것이었다.[8]
이 과정부터가 완전 날치기였다. 하도 소론 측에서 반대를 하니 아예 경종의 하루 스케줄을 전부 '''취소시키고''', '''오밤중에 기습적으로 노론들끼리만 입궐해''' 통과시켰다. 사실상 경종을 몰아세운 끝에 '세제 책봉'을 이룩한 것이다.
이렇게 정언 이정소를 시작으로 4대신을 비롯한 노론 수뇌부가 왕에게 강경하게 요청하여 경종을 굴복시켰는데, 거기서 그치지 않고 경종에게 '''대비'''(새어머니 인원왕후 김씨)에게 가서 누굴 후계로 할지 '''결정을 받아오라는 요구'''까지 했다. 수렴청정 중도 아니고, '''친정 중인 왕이 30살이 넘은 상태인데 대비의 허락을 받으라 하는 것은, 아예 왕을 왕으로 안본다는 뜻이나 다름없다.''' 숙종 때 숙종의 친어머니 명성왕후는 숙종이 아직 어렸던 14살이던 때 국정에 개입하려다가 아니꼬운 시선을 받았는데, 인원왕후는 성년 34세로 경종과 겨우 1살 차이나는 새어머니였다.[9]
결국 노론이 지지하던 연잉군이 후계로 결정되었고 노론은 왕을 겁박한 절차상의 문제를 지적한 유봉휘를 귀양보내버린다. 이렇게 세상은 명실상부하게 노론의 것이 된 것 같았다. 여기까지라면 단순히 국본을 세운 일(?)로 간주하여 넘어갈 수도 있었겠지만...[10]
사실 여기까지만 읽어봐도 알겠지만 '''조선 역사상 신하가 왕을 이렇게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사태는 경종 때 이외엔 없었다.''' 그 세도정치 기간에도 왕은, 비록 실세는 없다시피했어도 어쨌든 최고 결재권자였으며 왕이 도장을 찍어줘야 무슨 일이든 이루어졌다. 그런데 경종 초 노론은 '왕의 도장'이 지니는 권위마저도 무시하고 '엄마한테 확인 도장 받아오세요'라는 태도로 나온 것이다. 이후의 대리청정 사태도 그렇고 이건 시쳇말로 '''임금열외'''를 시킨 거나 다름없다. 그러나 이렇게 어지간했으면 삼족이 작살날 망언을 연발함에도 경종이 별 조치가 없자, 노론의 발언수위는 점차 폭주를 거듭한 끝에 결국 스스로 '숙청거리'를 제공하고 만다.

4. 신축환국(1721년)


때마침 노론 강경파 조성복이 자살골을 날린다. 34살 건강한 왕이 있는데, 세제에게 이유도 없이 대리청정을 시키라고 해버린 것이 었다.[11] 일반적이라면 역적이라고 목을 쳤겠지만, 경종은 윤허를 해버렸다. 식겁한 소론이 들고 일어나고, 상황을 잘 몰랐던 노론 수뇌부들이 정청을 하며 명을 거두어주길 청하면서 좌참찬 최석항 등의 만류에 왕은 명을 거두었다.
이일로 인해 뒤통수를 맞은 노론은 명분상 수세에 몰렸고 조태억, 이광좌를 비롯한 소론 강경파들이 노론 대신들을 잇달아 탄핵했다. 노론은 도승지 절차를 빌미로 징징거리면서 변명했지만 한세량 등 소론 준론이 맹렬한 탄핵에 나섰고 노론도 이판사판으로 맞섰다. '''그런데 이번에는, 경종이 직접 연잉군한테 대리청정을 시키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번에는 노론, 소론, 세제(연잉군)가 한몸이 되어 반대했지만 왕이 한 번 더 대리의 명을 내렸다. 그러자 노론은 이제는 이를 왕의 진심으로 생각하고 소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에라 모르겠다. 이게 웬 떡이냐.' 하고 그냥 그걸 받아들여 버렸다.
노론이었던 도승지 홍계적은 한술 더 떴다. 최석항 등 소론 신하들의 반대 상소를 모조리 물리치고 자기보다 훨씬 상관인 우상[12] 조태구의 알현 요청까지 물리친다.[13] 거기에 왕에게 직접 조태구는 세제를 반대했던 유봉휘나 옹호하는 자라며 처벌을 요청했다. 그러나 이런 홍계적의 사보타주에도 불구하고[14] 경종이 세자 때부터 손발인 내관들이 직접 우상이 왔다는 사실을 알려 경종과 조태구의 알현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에 경악한 승지들이 노론 대신들에게 알리면서 4대신을 비롯한 삼정승과 육조 판서 및 조정 대신들이 한밤중에 헐레벌떡 입궐하여 온 도성이 반란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난리가 났다고 한다.

4.1. 경종, 칼을 들다.


조태구가 임금의 자리는 임금 혼자 결정하는 사사로운 자리가 아니라고 울면서 간했고, 김창집 등 노론 대신들도 힘써서 막지 못한 신들의 죄를 먼저 다스리고 대리의 명을 거두셔야 한다고 엄청난 저자세로 데꿀멍했다. 그리고 경종은 분위기에 맞추어 대리를 결국 무른다.
이렇게 되니, 대리는 실현되지도 않았는데 노론은 반대도 하지 않고 설치면서 스스로의 불충을 자인하는 최악의 상황이 닥친 것이었다. 노론은 살고자 하여 우상이 무례했니, 도승지가 막았는데 어떻게 알았느냐, 내관이 수상하니 등의 변명과 의혹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그 순간 '''경종의 숨겨왔던 모습'''이 드러났다. 세자 시절의 대리 때는 물론이고, 평소에는 말도 어눌하게 더듬던 왕이 신하들에게

'''결탁[15]

이니 교통이니 따위의 말은 심히 무엄하다. 다시는 번거롭게 하지 말라!("締結交通等語, 殊甚無嚴。 更勿煩瀆。")"'''[16]

라고 큰 소리를 친 것이다. 실록에서는 (경종이) ‘하룻밤 사이에 건단(乾斷)을 크게 휘둘렀다’라고 표현했는데, 이는 왕을 하늘에 빗대어 용단을 내렸다는 의미이다.
노론은 알아서 기었고 소론도 일단 정쟁을 중지하여 소강 상태에 들어갔는데 50일 후 김일경이 중심이 되어 박필몽, 이명의, 이진유, 윤성시, 정해, 서종하가 연명한 상소가 올라와 4대신 및 노론을 탄핵한다.

"강(綱)에는 삼강(三綱)이 있는데 ‘군위신강(君爲臣綱)’이 삼강에 으뜸이 되고, 윤(倫)에는 오륜(五倫)이 있는데 ‘군신유의(君臣有義)’가 오륜의 으뜸이 됩니다. 이것은 하늘의 떳떳한 이치요 백성의 떳떳한 법칙입니다. 공자(孔子)가 《춘추(春秋)》를 저술하여 대강(大綱)을 바로잡고 인륜(人倫)을 밝혀서 군주를 섬기는 의리를 엄정히 하고 신하된 직분을 한결같이 하였습니다. 은미한 데 삼가고 싹이 틀때 살펴서 배반하면 역적이 되고 모해(謀害)하려 하면 반드시 주살(誅殺)됩니다. 몇 마디의 붓대를 움직여 삼척(三尺)의 율(律)을 게시(揭示)하였으므로 난신(亂臣)과 적자(賊子)가 두려워하니, 진실로 천하 만세의 대경 대법(大經大法)입니다. 아! 《춘추》를 이 세상에서 강론하지 않은 지 오래 되었습니다. 은미할 때 방지 하지 않고 싹이 터서 또 자라나 기강(紀綱)을 무너뜨리고 윤리(倫理)를 타락시킨 것이 오늘날 같은 때가 없었습니다. 조성복(趙聖復)이 앞에서 느닷없이 머리를 쑥 내밀었는데도 현륙(顯戮)의 형벌을 오히려 시행하지 않았고, 사흉(四凶)이 뒤에 방자하게 굴었으나 목욕(沐浴)하고 토벌을 청하였다는 것을 아직까지 듣지 못하였습니다. 군주의 형세는 날로 외롭고 흉도(凶徒)는 실로 번성하여 다시 군신(君臣)의 분의(分義)가 있지 않으니, 사직(社稷)이 폐허가 되는 것은 단지 다음 차례가 되는 일일 뿐입니다."[17]

노론은 상소의 내용이 흉참하다고 말했으나, 경종은 김일경의 상소에 '''"구언에 응하여 진언(盡言)[18]한 것을 깊이 가납(嘉納)[19]한다"'''라고 말하며 수용했다. 그리고 경종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환국을 진행한다. 승지와 삼사가 모두 삭탈 관직·문외출송되었고 훈련 대장 이홍술을 비롯 영의정과 좌의정이 모두 바뀌었으며 우의정인 조태구가 영상이 되고 좌의정에 최규서, 우의정에 최석항이 임명되었다. 이 같은 조치에 노론은 물론이요 소론도 놀랐다고 한다.

5. 임인의 옥(삼수의 옥, 1722년)



“성상(聖上 = 임금이나 황제)을 시해하려고 모의하는 역적(逆賊 = 나라나 임금에게 반역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혹 칼로써, 혹 독약으로, 또 폐출(廢黜 = 작위나 관직을 떼고 내침)을''' 모의한다고 하는데, 나라가 생긴 이래 없었던 역적들이니 급하게 토벌해서 종사를 안정시키소서…신은 비록 신분은 미천하지만 왕실을 보존하려는 뜻을 가지고 흉적이 종사를 위태롭게 하려는 모의를 직접 보고는 호랑이 입에 먹이를 주어서 은밀히 비밀을 알아낸 후 감히 이처럼 상변(上變 = 행위를 고발함)하는 것입니다.”

―『경종실록』 2년 3월 27일, 목호룡의 고변

다음 해인 1722년(임인년), 지관이었던 목호룡(睦虎龍)이 노론의 어린 자제들이 '''경종을 살해하고 이이명[20]을 옹립하려 한다'''라고 고변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칼·독약·폐출(반정)의 3가지 방법'''을 썼다는 점에서 삼수의 옥, 혹은 삼급수(三急手)라고 한다.

목호룡(睦虎龍)이란 자가 상변(上變)하여 고(告)하기를,

“역적(逆賊)으로서 성상(聖上)을 시해(弑害=부모나 임금, 국가 원수의 생명을 해침)하려는 자가 있어 혹은 칼로써 혹은 독약(毒藥)으로 한다고 하며, 또 폐출(廢黜)을 모의한다고 하니, 나라가 생긴 이래 없었던 역적입니다. 청컨대 급히 역적을 토벌하여 종사(宗社 = 종묘와 사직, 즉 나라)를 안정시키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역적 중에 동궁(東宮 = 세자, 여기에서는 세제를 말한다.)을 팔아 씻기 어려운 오욕을 끼치려 하는 자가 있습니다. 역적의 정상을 구명(究明 = 본질이나 원인 따위를 깊이 따지고 연구하여 밝힘)해서 누명(累名 = 사실이 아닌 일로 이름을 더럽히는 억울한 평판)을 씻어 국본(國本 = 세제)을 안정시키소서.”

하였다. 승지(承旨) 김치룡(金致龍) 등이 변서(變書 = 고발 서류)를 가지고 입대(入對 = 임금을 뵙고 자문(諮問)에 응하는 일)하여 왕옥(王獄 = 의금부)에 회부하고 대신(大臣)을 불러서 처리하게 할 것을 청하니, 드디어 내병조(內兵曹)987)에 정국(廷鞫 = 죄인을 신문하는 일을 이르던 말)을 설치하였는데, 목호룡이 공칭(供稱 = 널리 터놓고 일컬음)하기를,

“저는 비록 미천(微賤 = 보잘것없고 천하다.)하지만 왕실(王室)을 보존하는 데 뜻을 두었으므로, 흉적(凶賊)이 종사(宗社)를 위태롭게 만들려고 모의하는 것을 눈으로 직접 보고는 호랑이 아가리에 미끼를 주어서 비밀을 캐낸 뒤 감히 이처럼 상변(上變)한 것입니다. 흉적(凶賊)은 정인중(鄭麟重)·김용택(金龍澤)·이기지(李器之)·이희지(李喜之)·심상길(沈尙吉) 홍의인(洪義人)·홍철인(洪哲人)·조흡(趙洽)·김민택(金民澤)·백망(白望)·김성행(金省行)·오서종(吳瑞鍾)·유경유(柳慶裕)입니다. 저는 감여술(堪輿術)을 조금 알고 있으므로, 일찍이 용문산(龍門山)에 들어가 묏자리를 구하러 다니다가 이희지를 만나 서로 더불어 시(詩)를 논하였는데, 이희지가 그의 낙일시(落日詩)를 외며 전해 주었습니다. 그때 선왕(先王)의 병환이 바야흐로 위중(危重)하였는데, 시(詩)의 뜻이 음험하고 참혹하였습니다. 또 묻기를, ‘네가 이미 감여술(堪輿術)[21]

을 알고 있으니, 또한 둔갑술(遁甲術)도 아는가?’ 하므로, 제가 ‘내 친구 중에 둔갑(遁甲)을 잘 하는 자가 있다.’고 하였는데, 또 그 사람의 성명(姓名)을 묻기에 제가 즉석에서 지어내어, ‘담이(談爾)란 사람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다음날 이희지가 다시 저를 찾아와 담이의 거처를 묻고, 또, ‘내가 바야흐로 연동(蓮洞) 상공(相公)의 숙부(叔父) 집으로 돌아가려 하는데, 네가 만약 나를 찾아 온다면 반드시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 친구인 마전(麻田) 사는 정인중 또한 기사(奇士)이니, 너를 보면 반드시 크게 기뻐할 것이다. 다만 와서 보기만 하라.’ 하므로, 제가 응락하였습니다.

그리고 헤어진 뒤 닷새 만에 집으로 돌아왔는데, 이희지가 노새를 보내어 저를 부르므로 연동(蓮洞) 김용택의 집으로 갔더니, 이희지·김용택·정인중·이기지 등이 둘러앉아 있다가 평생을 사귄 사람처럼 기쁘게 맞았고, 모두들 담이를 만나볼 수 있게 되기를 원하였습니다. 둔갑(遁甲)·우보(禹步)에 관한 책을 얻기를 원하였는데, 제가 웃으며, ‘둔갑은 사람에게 달려 있지 어찌 책에 있겠는가?’ 하였더니, 이기지·정인중 등이 아주 기이하게 여기며, ‘이 사람은 더불어 마음을 논할 만하다.’라고 하고, 인하여, ‘네가 사는 동네에 지금 세상에도 형(荊) 섭(聶)과 같은 부류가 있어 도시(屠市)[22]

간에 숨어 살고 있는가?’라고 물었습니다. 제가 이미 속으로 그 마음을 알아차리고 답하기를, ‘내 친구들 중에는 협객(俠客)과 같은 부류가 많다.’라고 하였더니, 좌중의 손들이 모두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이 뒤로 왕래가 서로 잦았는데, 그래도 깊이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정인중이 김용택의 집에 가서 저를 부르기에 제가 갔더니, 이희지·김용택·정인중이 모두 있었습니다. 정인중이 묻기를, ‘너는 현학 산인(玄鶴山人) 이태화(李泰華)의 성명을 들어보았느냐? 이 사람이 거문고를 타면 현학(玄鶴)이 내려와 앉으며 백 리 밖의 일을 알 수 있는데, 네가 말한 담이(談爾)라는 사람은 이 사람과 비교해 보아 어떠한가?’ 하므로, 제가 답하기를, ‘담이를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 이 사람과 서로 만나볼 수 없는 것이 한스럽다. 내가 천서(天書)를 가지고 있는데, 그 사람에게 주고자 한다.’ 하였더니, 정인중의 눈썹이 꿈틀하며 기뻐하는 기색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문밖에 와서 자기가 이태화라고 하면서 스스로 둔갑술에 능하다고 하므로, 제가 답하기를, ‘시무(時務)를 아는 것은 준걸(俊傑)에게 달려 있으니, 둔갑을 어찌 족히 말하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이태화가, ‘지금의 호걸은 누구인가?’ 하므로, 제가 ‘정인중이 지금의 방통(龐統))과 같은 부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다음날 정인중이 저를 찾아와 도시(屠市) 간의 협객(俠客)을 구하였습니다. 때마침 백망(白望)이 어떤 일 때문에 제 집에 왔는데, 용모(容貌)와 풍신(風神)이 멀쑥하고 당당(堂堂)하였으므로, 정인중이 눈여겨 보면서, ‘이 사람 또한 협객의 부류인가?’ 하기에, 제가 답하기를, ‘이 사람은 협객 중에서 제일 가는 사람으로서 그 용력(勇力)은 대적(對敵)할 자가 없다.’고 하였더니, 정인중이 백망(白望)의 거주지를 상세히 묻고 갔습니다. 제가 백망을 머무르게 하고 이르기를, ‘너의 집을 물어본 것은 장차 너의 용력을 쓰려는 것이다. 이 사람은 상대하기가 쉬우나 그 중에 이희지란 자가 있는데 꾀가 깊은 사람이다. 만약 너를 만난다면 반드시 나의 심사(心事)에 대하여 물어 볼 것이니, 너는 「사생지교(死生之交)를 맺었다.」고 답하라.’고 하였는데, 백망은 본래 교활하고 구변(口辯)이 좋은 사람이므로, 제 말을 듣자 이미 그가 장사(壯士)를 구하려는 마음을 가졌음을 알아차리고 서로 약속한 뒤 돌아갔습니다.

다음날 새벽 정인중이 나귀를 끌고 백망의 집으로 가서 백망을 태워 갔는데, 하룻밤을 지낸 뒤 백망이 돌아와 저에게 말하기를, ‘내가 어제 크게 꿰맨 자루 속으로 들어갔다.’고 하였는데, 꿰맨 자루란 국청 죄인(鞫廳罪人)이 자루로 머리를 싸매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음은 백망이 한 말의 내용입니다. 처음에 김용택의 집에 갔더니 김용택·이천기(李天紀)·정인중이 둘러앉아 있었는데, 그의 좋은 신수(身手)를 보고는 크게 기뻐하며 그의 용력(勇力)을 물었습니다. 백망이 스스로 그의 용력이 고인(古人)에게 크게 양보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자부(自負)하자, 드디어 술잔에 술을 따라 맹세하고 사생(死生)을 같이할 벗으로 맺었습니다. 백망이, ‘그대들이 나를 쓰고자 한다면 내가 마땅히 힘을 다할 것이다. 주상(主上)의 병환이 날로 위중(危重)해지고 있으니, 만약 불휘(不諱)한 일이라도 있게 된다면 세상에 유비(劉備) 같은 이가 없으니, 어찌할 것인가?’라고 하니, 여러 사람들이, ‘비록 유비는 없지만 장래에 저절로 그런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고, 각자 손바닥에 글자를 써서 심사(心事)를 표시하였는데, 김용택은 ‘충(忠)’자를 썼고, 다른 사람들은 혹 ‘신(信)’자나 ‘의(義)’자를 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백망은 ‘양(養)’자를 썼으므로 좌우에서 서로 돌아보며 그 뜻을 알지 못했으나, 유독 이천기만은 알아차리고 크게 웃었으니, 대개 ‘양(養)’자는 ‘양숙(養叔)’을 이른 것으로 이이명(李頤命)의 자(字)가 양숙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백망이 돌아오려고 할 즈음에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곧 연잉군(延礽君)의 첩(妾)의 조카이다.’라고 하자, 좌우 사람들이 놀라서 얼굴빛이 변하며, ‘이는 반드시 목호룡이 우리들의 일을 엿보아 탐지해 낸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이천기가, ‘목가(睦哥)는 본래 상인(常人)이니, 이익으로 위협할 수 있다.’고 하며, 정인중으로 하여금 편지를 써서 저를 부르게 하였습니다. 제가 이천기의 집에 갔더니, 이천기가 저를 끌고 방으로 들어가 장차 은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하였는데, 정인중이 발을 밟아 제지하므로, 제가 웃으며, ‘그대들이 백가(白哥)와 동모(同謀)한 말을 내가 모두 들었는데 다시 무엇을 감추고 속이려 하느냐?’라고 하였습니다. 이천기가 마침내 저에게 묻기를, ‘백가가 「나인(內人)과 많이 결탁하고 있으므로, 급수(急手)를 쓸 수 있다.」 하였는데, 그 말이 어떠한가?’라고 하므로, 제가 ‘급수(急手)란 어떤 약을 쓰는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이에 이천기가 ‘백가가 「은(銀) 5백 냥으로 중원(中原)에서 사들인 환약(丸藥)을 한 개 먹으면 즉시 쓰러져 죽게 된다.」 하였다.’고 하므로, 제가 답하기를, ‘비록 즉시 쓰러져 죽는다 하더라도 오늘 약을 쓴다면, 주상께서 반드시 노하여 좌우에 캐물을 것이고, 독장(毒杖) 아래에서 여인(女人)이 반드시 자복(自服)할 것이니, 너희들은 장차 어육(魚肉)이 될 것이다. 성상의 만세(萬歲)를 기다린 뒤에 백가로 하여금 잘하게 해야 할 것이니, 이것이 상책(上策)이다.’라고 하자, 이천기는 옳다고 하였으나 김용택만은 유독 소매를 걷어붙이고 성급하게 백가와 결탁하여 역적질을 도모할 것을 권하였습니다.

홍의인(洪義人) 형제는 이천기와 바로 이웃에 살았는데 하는 일을 엿보고서는 스스로 얻기 어려운 기회라고 생각하여 여러 가지로 아첨하여 그 가운데에 느닷없이 끼여드니, 김용택이 노하여, ‘우리들이 매우 위태한(萬死一生) 계책을 내었으니 천고(千古)의 대사업(大事業)이 바로 이 일에 달려 있는데, 저 홍가(洪哥)는 어떤 사람이기에 들어와서 매화점(梅花點)[23]

이 되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김용택·정인중·백망이 동심 합력(同心合力)하였고, 홍의인·이천기·이기지는 저와 더불어 서로 사이가 좋아졌으며, 이희지는 양쪽 사이에서 노닐었습니다. 그런데 이기지가 관상술(觀相術)로 저를 헐뜯기를, ‘이 사람이 얼굴은 검은데 말은 다른 사람의 비위를 잘 맞추니 믿기 어렵다. 멀리하는 것만 못하다.’ 하였습니다. 이천기가 그 말을 저에게 전해 주기에 제가 웃으며, ‘참으로 당거(唐擧)[24]의 새끼로다.’ 하고는 서로 웃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기지는 자못 푸대접하는 기색이 있었으므로, 홍의인이 이기지를 협박하기를, ‘목호룡이 이미 언문(諺文)으로 된 유서(流書)를 쥐고 있고, 또 폐립(廢立)에 관한 조서(詔書)의 초본(草本)을 보았으니, 그대 집안이 멸족(滅族)되는 것은 그가 혀를 놀리는 데 달려 있다. 잘 대우하는 것만 못할 것이다.’ 하니, 이기지가 두려워하여 마침내 홍의인과 결탁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이희지가 저에게, ‘너는 어찌하여 요사이의 은밀한 정상(情狀)을 남인(南人)들에게 누설하였는가?’라고 하므로, 제가 웃으며, ‘내 혀가 있는가 보라. 어찌 다른 사람에게 누설하기를 기다리겠는가? 내가 부귀(富貴)를 취하고자 한다면, 너희들을 고발하는 것은 다만 잠깐 동안의 일일 뿐이다. 너는 어디에서 이런 말을 들었는가?’라고 하였더니, 이희지가 ‘서관(西關) 사람 장사방(張四方)이 귀신의 말을 잘 하는데, 네가 반드시 남인들에게 누설할 것이라고 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웃으며, ‘옛말에 이르기를, 「귀신에게 말을 듣고 따르면 망한다.」고 했는데, 너는 어찌하여 무당의 말을 듣는가?’ 하였더니, 이희지가 크게 웃었습니다. 그러나 이후로 저를 의심하여 실사(實事)를 알려주지 아니하고 몰래 백망과 결탁하여 국상(國喪) 때 임하여 일을 시작하려고 하였습니다. 제가 백망을 협박하기를, ‘네가 만약 불궤(不軌) 한 일을 한다면, 내가 반드시 너를 고발할 것이다.’라고 하자, 백망이 저를 두려워하여 감히 역적질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국상(國喪) 뒤 여러 적(賊)들이 비로소 제가 중간에서 저지하여 방해한다는 것을 알고는 심상길(沈尙吉)을 시켜 저를 전라 병영(全羅兵營)으로 보내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심진(沈榗)의 막하(幕下)에서 어미의 병을 핑계대고 곧바로 돌아오자, 적(賊)들이 크게 두려워하여 저에게 이르기를, ‘우리들의 일을 네가 모두 알고 있으므로, 지금 이기지·김민택(金民澤)·김제겸(金濟謙) 등이 모두 두려워한 나머지 이홍술(李弘述)을 사주(使嗾)하여 장차 너를 체포해 죽이려고 한다. 그래서 내가 이헌(李瀗)을 포도 대장(捕盜大將)에게 보내어 겨우 면하게 해 놓았다. 네가 만약 글 한 통을 써 준다면 이것을 가지고 김용택과 이기지에게 약속할 것이니, 너는 살 수가 있다.’ 하였습니다. 제가 웃으며, ‘그대들은 일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내가 비록 스스로 직접 범한 일이 있다고 할지라도 고변(告變)하면 반드시 무시할 것인데, 무엇 때문에 글을 쓰겠는가?’라고 하니, 이천기가, ‘나는 비록 너를 알지만 저들이 모두 믿지 않으니, 어찌하겠는가? 다만 쓰기만 하라.’ 하므로, 제가 독약(毒藥)을 쓰는 동안에 참섭(參涉)한 일을 써서 주자, 이천기가 기뻐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매번 전고(前古)의 고변자를 들어 저를 협박하기를, ‘고변자를 반드시 죽이는 것은 필연적인 이치이다.’ 하므로, 제가 웃으며, ‘너희들은 어찌하여 나를 큰 공로자로 여기지 않고 도리어 의심하여 노하는가? 지금 주상께서 새로 즉위하시어 전적으로 너희들을 임용하고 있으니, 덕과 도량이 천지(天地)와 합한다. 너희들이 만약 나에 의하여 저지당하지 않고 흉억(胷臆)을 행한다면 하늘이 반드시 몰래 죽일 것이니, 그 후회가 어떠하겠는가?’ 하니, 정인중이 ‘너는 과연 기이하다.’고 하였는데, 대개 정인중은 소급수(小急手)를 결약(結約)할 때 매번 얼굴을 찡그리면서 난색(難色)을 보였지만, 김용택에 의하여 몰려 들어가곤 하였습니다.

이른바 ‘혹은 칼로써 한다.’는 것은 김용택이 보검(寶劒)을 백망에게 주어 선왕의 국애(國哀) 때 담장을 넘어서 궁궐로 들어가 대급수(大急手)를 행하려고 하는 것이고, ‘혹 약(藥)으로써 한다.’는 것은 이기지·정인중·이희지·김용택·이천기·홍의인·홍철인(洪哲人)이 은(銀)을 지 상궁(池尙宮)에게 주고, 그로 하여금 약(藥)을 타게 하여 흉악한 일을 행하는 것이니, 이것은 경자년에 반 년 동안 경영한 일이었습니다. 이른바 소급수(小急手)란 폐출(廢黜)를 모의하는 것으로서 이희지가 언문(諺文)으로 가사(歌詞)를 지어 궁중(宮中)에 유입(流入)시키려 하였는데, 모두 성궁(聖躬)을 무고하고 헐뜯는 말이었습니다. 또 교조(矯詔)를 초(草)하여 나인(內人) 지열(池烈)과 환관(宦官) 장세상(張世相)을 시켜서 국상(國喪) 때 곧 내리려고 하였는데, 그 조서(詔書)를 많이 기억하지는 못하나, 첫머리에, ‘불곡첨위(不穀忝位)’ 등의 글자가 있었고, 중간에는 ‘세자(世子) 모(某)를 폐위시켜 덕양군(德讓君)으로 삼는다(廢世子某爲德讓君).’는 말이 있었습니다. 이 조서의 초본(草本)을 보았을 때 저는 바야흐로 김용택의 집을 찾아가 서쪽 벽에 앉아 있었고, 이희지·김용택·백망은 머리를 맞대고 촛불 아래 앉아 있었습니다. 이희지가 조서를 듣고 다 읽기 전에 이기지가 후원(後園)에서 들어왔으므로, 다른 사람인 줄 잘못 의심하여 이희지가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는데, 제가 실제 눈으로 직접 보았습니다. 그리고 조흡(趙洽)이 은(銀) 2천 냥을 백망과 김용택·이천기에게 주어 나인(內人) 지열(池烈)·이영(二英)에게 나눠 주게 하였는데, 홍의인은 은 50냥을 내었고, 심상길(沈尙吉)은 은 2백 냥을 내었고, 이희지는 은 70냥을 내었습니다. 김민택(金民澤)은 비록 은을 내기는 하였지만 백망에게 주지는 아니하였고, 저와 상면(相面)하자 다만 김용택·이천기를 시켜 왕래하며 서로 의논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백망이 저에게 ‘내가 은을 이영(二英)에게 주어서 그 사촌인 궁인(宮人) 이씨(李氏)와 동성(同姓)인 궁인 백씨(白氏)에게 바치고, 지 상궁(池尙宮)과 더불어 독약(毒藥)을 쓰는 일을 도모해 이루려고 한다.’ 하므로, 제가 이치에 의거하여 금지하기를, ‘역적(逆賊) 무리들이 비록 이 일을 하더라도 왕자(王者)는 죽지 않는 것이다. 네가 만약 이런 일을 한다면 반드시 귀주(鬼誅)가 있을 것이다. 다만 그 은(銀)만 보내고 그 수단을 행하지는 않는다면, 부귀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혹 적인(賊人)들이 몰래 지 상궁과 결탁할까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저는 백망을 통하여 지녀(池女)와 면교(面交)하여 감언이설(甘言利說)로 꾀어서 끝내 그 모의를 저지하였으니, 오늘날까지 아무 일이 없었던 것은 실로 제가 생명을 버리고 주선한 공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동궁(東宮)의 이름을 욕되게 한 것은, 심상길·김성행(金省行) 등이 저사(儲嗣)를 세운 것은 자기로부터 말미암아 성공한 것이라 하여 서로 공을 다투자, 오서종(吳瑞鍾)이 유경유(柳慶裕)와 같이 모의하여 백망에게 많은 은냥(銀兩)을 주고 큰 소리치기를, ‘동궁이 이소훈(李昭訓)의 상(喪)이 났을 때 노론(老論)이 독약(毒藥)을 써서 죽인 데 노하여 힘을 내어 정국(政局)을 뒤집고 다시 남인(南人)을 불러들인다고 말하였다.’고 하게 한 것입니다.”

―『경종실록』 2년 3월 27일 임자 2번째 기사, 목호룡이 상변하여 정인중·김용택 등의 역모를 고하다

목호룡은 남인 집안의 얼자[25]로 종친 청릉군(靑陵君)의 가노였는데, 풍수지리에 능해 연잉군 사친(私親)의 장지를 정해 준 대가로 왕실 소유의 장토를 관리하는 궁차사(宮差使)까지 오른 인물이었다. 그가 신분 상승한 사례에서 보듯 원래는 친연잉군이었고 나중에 핵심 인물이 되는 백망을 소개하기까지 했으나 상황이 바뀐데다가 혹시 그가 소론 첩자가 아니냐는 의심을 받게 되자 진짜로 배신하여 고변에 나선 것이었다.
고변의 대상은 목호룡이 원래 친교했던 이이명의 아들 이기지(李器之), 이사명(李師命)의 아들이자 이이명의 조카인 이희지(李喜之), 김창집의 손자 김성행(金省行), 광성 부원군 김만기[26]의 손자 김민택(金民澤), 김만중의 손자이자 이이명의 사위인 김용택(金龍澤), 김춘택의 사위 이천기(李天紀)로 그야말로 노론 명문가가 줄줄이 걸린 셈이었다. 이이명과 김창집은 바로 혈육이 걸렸고, 김만기·김만중 일가는 인경왕후[27]를 배출한 국구 가문이었으며 이건명은 이이명의 사촌이었으니 그대로 줄줄이 굴비엮듯 엮인 셈이다.[28]
세제가 아닌 이이명을 옹립하려 한다라는 대목이 흥미로운데, 파자(破字)로써 억지 근거를 만든 것이다. 암살 결의를 맺고 각자 손바닥에 글자를 써서 마음을 표현하는데 김용택은 충(忠), 다른 사람들은 신(信)·의(義) 등을 썼는데 음모에 가담한 이중에 하나인 남인 백망(白望)이 양(養)자를 썼다는 것이다. 이천기만 그 뜻을 알고 크게 웃었는데, 이는 이이명의 자(字)인 양숙(養叔)을 뜻한다는 주장이었다.
김일경을 중심으로 한 소론 강경파들은 이를 근거로 노론 숙청을 주장했고 경종은 이를 따랐다. 대리 청정 논란으로 유배되어있던 노론 4대신(이이명·김창집·조태채·이건명)이 유배지에서 사사되는 등 경종 말년까지 소론 강경파들이 집권하며 노론의 씨를 말리는 피의 나날들이 이어졌다. 사형당한 이가 20여 명, 국문을 받다 장살(杖殺)된 이가 백망·김용택·이천기·이기지 등의 핵심 인물을 포함한 30여 명[29], 연루자로 교살된 이가 10여 명, 유배된 이가 100여 명을 넘었다. 윤선거윤증이 이때 복권되었다.

"부채 50자루와 은을 지 상궁에게 보냈습니다." - 심상길

"이희지가 언문 교지를 지어 국상 때 내리게 하려 했고 서덕수 등이 독약 계책을 모의했습니다." - '''영조의 측근인''' 내관 장세상

"남편이 은 이천냥을 제게 주어 지 상궁에게 전해 독약을 쓰게 했습니다." - 백망의 아내 이영

"지난해 11월 장세상이 이 소훈에게 독약을 시험했고 약을 더 쓸 곳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 이정식

"서덕수가 독약을 쓰는 일을 위해 은자를 구하자 조흡에게서 구해서 주었습니다. 진행되는 대강의 일을 '''김창집, 이이명도 알고 있었습니다.'''" - 김창도

"지난해 5월, 장세상과 소훈 독살을 상의했고 독약은 장씨 성의 역관에게서 사서 동궁 주방 나인에게 주어 음식에 섞게 했습니다." - 서덕수[30]

"정우관의 말을 들으니 이이명이 독약을 사와서 서덕수에게 주고 또 이기지, 이천지 무리에게도 주었다고 들었습니다." - 이헌

"장씨 성의 역관이 독약을 사와서 김씨 성의 궁인에게 전해 전하께 한 차례 시험했으나 곧바로 토하시어 실패했습니다." - 김성절

김용택은 심지어 독살기도(소급수, 小急手)를 밝히기 까지 했으니 상당히 정황도 있고 일부 궤도에 오른 반역이라고 해도 옳았다. 경종이 독약을 마셨다는 날짜를 왕의 건강 일지인 『약방일기(藥房日記)』에서 찾아 보니 경종 즉위년(1720년) 12월 15일 ‘어제 거의 한 되나 되는 황수(黃水)를 토했다’는 구절이 있었다. 영의정 조태구와 함께 입시한 약방 제조 한배하가 “그날 수라를 진어(進御)하신 뒤에 즉시 구토하셨습니까?”라고 묻자 경종은 “그렇다”고 답했다. 게다가 이것이 통하지 않자 더한 맹독을 청나라에서 구하려고 했음이 함께 드러났다. 그러나 경종은 여기에 연루된 김 상궁에 대해 "김성 궁인을 조사했으나 그런 인물이 없었다”(혹은 너무 많아 찾을 수 없다)라며 사건을 조사하는 것을 중단시킨다. 장씨 역관은 명단에서 찾을 수 없었는데, 이는 노론이 후에 무고를 주장하는 근거가 되었다. 소훈 이씨[31] 독살도 후에 부정되긴 했는데 이건 영조 본인이 즉위 후 아무튼 아니라고 한 거라(...).
경종 3년(1723년) 목호룡이 처음 역모에 가담했다는 것을 감안해 3등 공신으로 훈호를 감해 봉했고, 이중환[32]의 공을 높이 샀다가 이후 거론하지 않은 것으로 목호룡과 이중환이 잡혀와 추문받으면서[33] 다시 소론의 세가 좀 위축되었으나 큰 대세는 변하지 않았다.
여기에 세제까지 함께 얽혔다. 연잉군의 처남 서덕수가 이 음모에 관여했고, 서덕수의 추대 제의를 연잉군이 거절하지 않았다는 증언이 나온 것이다. 그야말로 역적 확정. 그리고 영조는 나중에 소론 영수 이광좌노론 영수 민진원을 부른 자리에서 서덕수가 자기를 위해 모의하고 있으니 알고 있으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함으로 신빙성을 보탰다.[34]
그러나 경종은 세제(영조)를 죽일 수 있던 시점에서도 그를 죽이지 않았고[35], 결국 경종의 병사 끝에 영조가 자리에 오르면서 다시 상황은 뒤집어진다. 영조는 다시 정국을 노론 우위로 뒤집지만 아버지와 형의 환국 정책의 함정에서 벗어나 탕평책을 이끄니 최후의 환국인 정미환국이었다.
경종이 세제를 죽이지 않은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공식적으로는 연잉군이 유일한 경종의 후계자라는 점이 가장 큰 요인이다. 그렇다고 경종이 연잉군을 무조건 비호하거나 반대로 적대한 것은 아니고 좀 복잡한 편이다. 이 부분은 경종(조선) 문서의 '연잉군과의 관계' 항목을 참고할 것.

6. 관련 항목



[1] 공격자가 소론이고 피를 본 것이 노론인데 이게 사화이면 소론은 사림이 아니다라는 결론이 나온다.[2] 다만 숙종은 숨을 거두는 마지막 순간까지 이이명과 정유독대라는 행위를 하여 경종의 정통성에 먹칠을 한다.[3] 원래는 왕이 변방으로 유배보내려고 했다.[4] '아이러니하게도 왕의 생모의 신원을 청한 이는 변방 유배로도 모자라 죽어야 했고 왕의 생모의 잘못을 명백히 하자는 이는 변방 유배도 모자라 석방시켜야 했다.'라고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 나온다.[5] 사실 그럴만한게 윤지술은 '''이이명'''이 쓴 지문에 나온 내용을 문제삼았는데 이이명은 이 당시 노론의 거두 4명이었다. 그런 그조차도 왕이 눈치보여 그래도 왕의 자존심은 살려줬는데 이걸 비난했으니 물론 일개 유생 따위가 노론 4대신 중 하나인 이이명을 아무 뒷배도 없이 비난했을 리는 없을 것을 감안해보면 짜고 쳤을 가능성도 아주 없지는 않았겠지만...[6] 소론 대신인 조태구의 사촌 동생, 조태억의 사촌형이다. 이들은 모두 인조의 계비인 장렬왕후 조씨의 일가들이다. 같은 일가끼리도 붕당이 나뉘어져서 피터지게 싸웠다. 그나마 조태채만 사약을 먹고 죽었으며 아들인 조관빈을 비롯한 일가는 무사했다. 조관빈이 당숙인 조태구에게 아버님을 살려달라고 울며불며 애원하자, 조태구는 뜻을 바꾼다면 살려줄 수 있다고 했고 조관빈이 조태채에게 그 이야기를 했지만 조태채는 그냥 죽겠다면서 굽히지 않았다. 여담으로 조태채가 소론계와 혈연 관계였던 덕인지 4대신 중 가장 먼저 신원되었다.(원래는 넷 다 신원되었지만 다시 역적이 되었다가 조태채 - 이건명 - 이이명, 김창집 순으로 신원되었다.)[7] 윤승운 화백이 만화에서 조태채를 억울하게 죽였다고 그리기도 했는데 이 와중에 조태채의 머슴에 대한 일화를 만화로 그리기도 했다. 사약을 받아 죽기 전에, 그 머슴이 아직 조관빈이 오지 않았기에 사약을 내다 던졌던 것. 금부도사와 일행들은 기겁하면서 그 머슴을 두들겨 팼지만 엎질러진 사약을 어찌할 수 없었다. 금부도사는 고심 끝에 일행 하나에게 한양으로 편지와 같이 보내 바닷물이 험해 유배지인 섬으로 가던 배에서 사약이 뒤집혀졌다고 적당히 얼버무리면서 다시 사약을 보내달라고 했다. 그동안 며칠이 걸리다보니 조관빈이 도착하여 조태채와 며칠동안 같이 지내며 여러 말을 남겼다고 한다.[8] 지금도 간간히 나도는 경종 불임설의 야사도 노론의 주장이다. 그게 설사 사실이라도 증명된 것이 없다. 물론 경종의 나이 34살이면 아들이 '''있어야 정상'''일 나이이다. 그러니 이것만 놓고 보면 노론이 "아 왕이 나이가 많으신데 아들이 없잖아. 그래서 일이 어떻게 될 지 몰라서 그랬어."라고 할 수도 있다. 다만 위에도 나왔듯 왕은 즉위한지 1년밖에 안 되었고 게다가 당시 왕비는 '''17세'''였다. 이쯤으면 불충이라 불릴 만하다.[9] 여담으로 인원왕후는 경종 재위기의 영조의 가장 큰 버팀목이었는데 때문에 영조는 평생 인원왕후를 극진히 모셨다.[10] 실제로 지나치긴 했어도 어차피 연잉군 외엔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 노론이 급하게 안 움직여도 연잉군이 될 확률이 거의 100%이다.[11] 왕조시대에 제왕들은 마음에도 없는 양위나 대리청정 소동으로 신하들을 불충이라는 이름으로 역적으로 만들어 처단하는 도구로 썻던 매우 민감한 사안이었다. 당시 시대상은 난신적자는 곧 패륜아로 사회적 매장을 당하는 시대였다.[12] 도승지는 정 3품 당상관 말단이고 우의정은 정1품으로 조선의 신하 중 3위 서열이다.[13] 심지어 "너는 유봉휘를 발호해서 사헌부에게 탄핵받은 주제에 뭐가 잘났다고 왔냐?" 정도의 말을 했다.[14] 원래 승정원의 임무가 상소를 접수하는 일인 만큼 사보타주는 맞다.[15] 본문의 한자는 조약을 맺는다 할 때 그 '체결(締結)'이다.[16] 경종 실록, 경종 1년 10월 19일 1번째 기사[17] 경종 수정 실록, 경종 1년 12월 6일 1번째 기사. 경종 실록의 같은 날짜에도 비슷한 기사가 있다.[18] 생각한 바를 기탄없이 다 쏟아 놓은 말.[19] 기꺼이 받아들이다.[20] 그가 세종대왕의 서자 밀성군의 8대손이었기 때문.[21] 풍수지리[22] 전국 시대의 협객 혹은 자객인 형가와 섭정을 이르며, 도시는 대강 저자거리를 뜻하는 걸로 받아들이면 된다.[23] 옛날 악보의 기호 중 하나로 매화 모양.[24] 옛 중국의 유명한 관상가.[25] 양반과 노비 사이의 자식.[26] 김만중의 형.[27] 숙종의 첫 정비.[28] 조태채는 집안도 소론가에 가까운데다가 비교적 온건한 편이었지만 이미 진도에 유배된 상황에서 같이 걸렸다.[29] 굴복하지 않고 죽은 이가 많아서 삼수의 옥 자체가 목호룡의 무고라는 주장이 노론에서 나왔으나 영조도 반역의 존재 자체는 어느 정도 인정했다.[30] 정성왕후 서씨의 조카.[31] 세제(연잉군, 후에 영조)의 후궁.[32]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 맞다. 남인 출신으로 처남이 목씨인 목천임이었으며, 노론과 대립하다 처형을 당한 이잠(李潛, 성호 이익의 형)의 재종손이었다. 그와 같은 향렬의 인물로 훗날 남인의 마지막 영수가 될뻔했던 이가환이 있다.[33] 경종 실록 3년 음력 6월 11일 기사, 그해 9월 2일 대사면으로 석방.[34] 그런데 위에서 나왔듯 목호룡은 그들이 이이명을 추대하려 했다고 했는데 영조는 직접 가담자는 아니지만 목호룡은 직접 가담하였다.[35] 소론 온건파인 조태구도 목호룡의 해당 고변이 무고라고 할 정도였다.(경종 실록 2년 음력 4월 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