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욱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김창욱(金昌旭)'''

<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1882년 12월 6일
함경북도 온성군 영충면 회덕동
<color=#fff> '''사망'''
1935년 7월 21일 (53세)
함경북도 온성군 영충면 북창평동
<color=#fff> '''산소'''
함경북도 온성군 영충면 북창평동
<color=#fff> '''본관'''
경주 김씨
<color=#fff> '''배우자'''
이옥경(李玉竟)[1]
<color=#fff> '''국적'''
[image] 대한민국
<color=#fff> '''직업'''
독립운동가, 서당 교사
<color=#fff>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대통령 표창
1. 개요
2. 생애
3. 참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80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본래는 온성군 영충면 일대의 서당 교사로 부임해 있었으며, 1919년 4월 4일 천도교도인 전창우(全昌禹), 안병손(安秉孫) 등과 함께 함경북도 온성군 일대의 3.1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곳은 함경북도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지역으로 3월 15일 간도에서 활약하던 무장독립군 오백여명이 두만강을 건너 일본경찰 및 수비대와 전투를 벌여 크게 승리한 후, 이에 자극을 받아 독립만세운동이 계획되었다. 그런데 만세시위를 계획하던 최성암과 권순천이 사전에 체포되어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러나 3월 30일 전창우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전해받고, 만세시위 주동 제의를 받은 김창욱은 독립만세운동의 주동을 흔쾌히 승낙하고 곧 안병손을 만나 그의 협력을 구하였다. 그는 이들과 수차례의 협의 끝에, 4월 4일 회덕동 회동교에서 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정하고, 대형 태극기 1매와 소형 태극기 35매를 제작하고, 동지포섭에 전력을 기울였다.
4월 4일 오전 10시 약속대로 회덕교에 250여명의 시위군중이 모이자, 그는 이들 앞에서 독립만세시위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연설을 하고, 이어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그리고 영충면사무소를 지나 북창평 장터를 향하여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다. 이때 급보를 받은 북창평 헌병파견소에서 15명의 헌병이 출동하여 총칼을 휘두르며 이를 제지하자,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투석과 몽둥이로 이에 대항하였으나 역부족이었다. 결국 일본 헌병의 무차별 사격으로 5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강제로 해산되었다.
그후 일제의 검속 때 체포되어, 이해 4월 25일 함흥지방법원 청진지청에서 선고한 유죄판결에 항소, 5월 2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1년 6월형을 선고 받고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치르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3. 참고


判決文(京城覆審法院:1919. 5. 21)
判決文(高等法院:1919. 6. 19)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2권 781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5권 1066면

[1] 2월 23일, 광복 이전 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