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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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千興
1909년 3월 30일 ~ 2007년 8월 18일
한국의 국악인이자 조선왕조의 '''마지막 무동.'''
호는 심소(心韶). 1909년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고, 정동보통학교[1] 를 졸업 후 1922년에 이왕직 아악부 아악사양성소 2기생으로 입소했다. 1923년 순종황제 오순탄신연에 무동으로 참가하였고, 해금을 전공, 양금을 부전공으로 하여 1926년에 졸업하였다. 그는 1940년까지 이왕직 아악부에 근무하며 아악수, 아악수장을 역임했다.
1940년부터 민간음악인들과 음악활동을 했고,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과 강사, 조선권번의 사무원으로도 활동했다. 광복 후 대한국악원 이사 겸 무용부장을 맡았고, 1951년 국립국악원 예술사가 된 후 2007년까지 연주원, 자문위원, 원로사범, 명예종신단원으로 활동했다. 이후 1964년에는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 및 일무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으며, 1971년에는 제39호 처용무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궁중정재의 대가로 통했으며, 국립국악원 무용단에서 평생 후학을 양성했다. 민속무용에도 일가를 이루어 살풀이춤, 승무로 무대에 서기도 했으며, 2007년 99세로 타계하기까지 친구인 성경린과 함께 국악계의 산증인으로 활동했다.
조선왕조 궁중무용의 대가, '''마지막 무동'''이라는 표현이 그를 압축적으로 잘 설명하는 말이라 할 수 있다.
본래 이왕직 아악부 아악사양성소 2기생으로 입소하면서 해금과 양금을 각기 전공, 부전공으로 삼아서 졸업했고, 해방 이후에도 몇몇 음반에서 해금과 양금 주자로 활동한 적이 있다. 또 종묘제례악이나 궁중 정악 합주의 집박[2] 으로도 참여하는 등, 기악 연주 쪽에서도 활발히 활동한 것이 사실이다.[3]
그러나 만년까지 국립국악원 무용단에서 무용 제자들을 지도했고, 이애주[4] , 인남순 등 현재까지 활발하게 무용가로 활동하는 이들이 그의 제자인 것에서 드러나듯, 무용 분야에서의 활동이 두드러진 것이 사실이다. 또 그의 중요한 사승 인맥 중 한 사람이 한성준인 것 역시 주목할 부분. 궁중무용은 정악 거문고의 대가였던 이수경에게서 배웠으며, 거기에 그치지 않고 권번 재직시절에는 탈춤과 같은 민속무용을 배우는데에도 주력하여 궁중무용과 민속무용을 겸전했던 몇 안되는 인물 중 하나가 되었다.[5] 그 때문에 살풀이춤[6] 이나 승무로도 제법 많이 무대에 섰다.
장기는 예능보유자로 지정되기도 했던 처용무와 궁중 정재 가운데 독무인 춘앵전. 춤에만 능했을 뿐 아니라 정재 전반의 구성에도 탁월한 면모를 보였는데, 특히 정재에 포함되어 있는 창사(唱詞)도 잘했다. 담백한 창법으로 부르는 그의 창사는 일품으로 꼽힌다.
1923년 이른 봄 그는 이왕직 아악부 2기생 중 무동으로 뽑혀 창덕궁 인정전 앞뜰의 순종황제 50회 탄신 축하연장에 참석하여 순종을 알현하였다고 한다. 더불어, 1910년 경술국치와 함께 사라졌던 궁중무동춤이 다시 선보인 것도 이 때가 처음이라고 한다. 이때의 상황을 그는 이렇게 증언하였다.
金千興
1909년 3월 30일 ~ 2007년 8월 18일
1. 소개
한국의 국악인이자 조선왕조의 '''마지막 무동.'''
2. 생애
호는 심소(心韶). 1909년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고, 정동보통학교[1] 를 졸업 후 1922년에 이왕직 아악부 아악사양성소 2기생으로 입소했다. 1923년 순종황제 오순탄신연에 무동으로 참가하였고, 해금을 전공, 양금을 부전공으로 하여 1926년에 졸업하였다. 그는 1940년까지 이왕직 아악부에 근무하며 아악수, 아악수장을 역임했다.
1940년부터 민간음악인들과 음악활동을 했고,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과 강사, 조선권번의 사무원으로도 활동했다. 광복 후 대한국악원 이사 겸 무용부장을 맡았고, 1951년 국립국악원 예술사가 된 후 2007년까지 연주원, 자문위원, 원로사범, 명예종신단원으로 활동했다. 이후 1964년에는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 및 일무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으며, 1971년에는 제39호 처용무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궁중정재의 대가로 통했으며, 국립국악원 무용단에서 평생 후학을 양성했다. 민속무용에도 일가를 이루어 살풀이춤, 승무로 무대에 서기도 했으며, 2007년 99세로 타계하기까지 친구인 성경린과 함께 국악계의 산증인으로 활동했다.
3. 예술세계
조선왕조 궁중무용의 대가, '''마지막 무동'''이라는 표현이 그를 압축적으로 잘 설명하는 말이라 할 수 있다.
본래 이왕직 아악부 아악사양성소 2기생으로 입소하면서 해금과 양금을 각기 전공, 부전공으로 삼아서 졸업했고, 해방 이후에도 몇몇 음반에서 해금과 양금 주자로 활동한 적이 있다. 또 종묘제례악이나 궁중 정악 합주의 집박[2] 으로도 참여하는 등, 기악 연주 쪽에서도 활발히 활동한 것이 사실이다.[3]
그러나 만년까지 국립국악원 무용단에서 무용 제자들을 지도했고, 이애주[4] , 인남순 등 현재까지 활발하게 무용가로 활동하는 이들이 그의 제자인 것에서 드러나듯, 무용 분야에서의 활동이 두드러진 것이 사실이다. 또 그의 중요한 사승 인맥 중 한 사람이 한성준인 것 역시 주목할 부분. 궁중무용은 정악 거문고의 대가였던 이수경에게서 배웠으며, 거기에 그치지 않고 권번 재직시절에는 탈춤과 같은 민속무용을 배우는데에도 주력하여 궁중무용과 민속무용을 겸전했던 몇 안되는 인물 중 하나가 되었다.[5] 그 때문에 살풀이춤[6] 이나 승무로도 제법 많이 무대에 섰다.
장기는 예능보유자로 지정되기도 했던 처용무와 궁중 정재 가운데 독무인 춘앵전. 춤에만 능했을 뿐 아니라 정재 전반의 구성에도 탁월한 면모를 보였는데, 특히 정재에 포함되어 있는 창사(唱詞)도 잘했다. 담백한 창법으로 부르는 그의 창사는 일품으로 꼽힌다.
4. 일화
1923년 이른 봄 그는 이왕직 아악부 2기생 중 무동으로 뽑혀 창덕궁 인정전 앞뜰의 순종황제 50회 탄신 축하연장에 참석하여 순종을 알현하였다고 한다. 더불어, 1910년 경술국치와 함께 사라졌던 궁중무동춤이 다시 선보인 것도 이 때가 처음이라고 한다. 이때의 상황을 그는 이렇게 증언하였다.
'''“그 때 순종 황제의 용안은 화사하시면서도 핼쓱했었습니다. 워낙 병약하셨던 터라 시종들의 부액을 받으셨지만, 너그러운 미소를 잃지 않고 진연이 끝난 아악부원들에게 가벼운 목례를 보내 주셨지요.”'''
[1] 현 서울봉래초등학교[2] 일종의 지휘자격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오케스트라 지휘자와는 달리 시작과 끝을 알리는 역할만 한다.[3] 기본적으로 '집박'은 국립국악원 정악단 소속의 원로사범들이 주로 하는 경우가 많다. 60년대 녹음에서 후일 국악원장이 되는 김기수가 집박을 맡는 경우가 많고, 80년대 이후에는 김천흥, 성경린 등 1900년대 태생 원로 단원들이 집박을 맡아 녹음한 경우가 많이 나타난다.[4] 이애주는 이후 송범의 문하에 들어갔다가 한영숙의 문하로 들어가 한영숙류 승무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5] 다른 한 사람으로는 한영숙(무용가)을 들 수 있다. 물론 이 분은 애초에 할아버지가 궁중무용, 민속악을 넘나들었던 대가 한성준이다.(...)[6] 그냥 하얀 바지저고리 차림으로 나와서 아주 짧은 수건을 들고 춘다. 현재 실연되고 있는 한성준-한영숙류 살풀이와는 다소 다른 것도 사실이고, 이대조-이매방류의 그것과는 판이하게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