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묘제례악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image]
이름
한국어
종묘제례악
영어
[1]
프랑스어
[2]
국가·위치
대한민국
목록구분
대표목록
등재 연도
2001년
지정번호
16
1. 개요
2. 역사와 구성
3. 악단과 무용수 배치
4. 제례 절차
5. 장단에 대한 연구들
6. 그 밖에
7. 같이보기
8. 현대화 시도


1. 개요




宗廟祭禮樂
한국의 궁중음악 중 하나. 문묘제례악과 함께 대표적인 궁중음악으로 손꼽히며, 수반되는 제례의식과 함께 '''중요무형문화재 1호'''로 지정되었다. 지정연도는 1964년. 그리고 2001년에는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세계무형유산' 에도 한국 무형문화재 중 최초로 포함되었다.
이름 그대로 조선왕조의 역대 왕과 왕비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서울 종묘에서 제사를 지낼 때만 연주되는 전례용 음악이다. 일종의 종교음악으로도 분류할 수 있는데, 왕조 시절에는 음력 기준으로 연중의 큰 제사 5회 때마다 연주했다.
하지만 지금은 왕조고 뭐고 없으니 1년에 딱 한 번, 양력 5월의 첫째 주 일요일에만 연주하다가, 유네스코 등재 10주년이 된 2011년부터 1년에 2번 실시한다. 5월 첫째 주 일요일은 그대로 실시하고 11월 첫째 토요일이 추가되었다. 물론 연주 장소는 예나 지금이나 모두 종묘의 정전과 영녕전[3]. 그래서 이 날에는 종묘 내의 관광객 입장이 통제되거나 제한된다. 다만 일반인들도 소음이나 소란을 피우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공연 관람의 목적으로 참관하는 것은 허용되므로, 보기 드문 기회이다 싶으면 가서 봐도 무방하다.
궁중음악의 최고 위치를 차지하는 음악인 만큼, 민속악에서 보여지는 흥겨움이나 강렬함은 없고 의전에 맞추어 엄격하게 진행하기 때문에 대중성은 거의 없다. 하지만 사물놀이판소리만 가지고 한국 전통음악을 이야기하는 것은 앙금 없는 호빵이고, 국악 전공자들도 정악과 속악 모두를 공부하고 연주하는 것이 필수인 만큼 살면서 한두 번쯤은 꼭 들어볼 만한 음악이다.

2. 역사와 구성


종묘제례악 등 아악으로 분류되는 제례음악은 송나라 휘종이 창제한 <대성아악大晟雅樂>(1105)에서 기원했다. 이것이 한반도에 전해진 것은 고려 예종 11년(1116)으로 편종편경 스물두 틀ㆍ일현금ㆍ삼현금ㆍ오현금ㆍ칠현금ㆍ구현금ㆍ슬ㆍ지ㆍ적ㆍ소ㆍ소생ㆍ화생ㆍ우생ㆍ훈ㆍ박부ㆍ진고ㆍ입고ㆍ축ㆍ어 등 아악기 20종을 송나라로부터 받았다.
그러나 불교를 우선하던 고려에선 유교식 제사음악인 대성아악이 크게 발전하진 않았고, 대몽항쟁기를 거치며 서서히 쇠퇴하다가 조선에 접어들어 세종과 세조 두 임금이 대대적으로 재정비했다.[4]
현행 종묘제례악은 세종대왕 치세 때 창작되거나 중국의 제례악에서 편곡 혹은 개작된 곡들이 주를 이루는데, 크게 '정대업(定大業)'과 '보태평(保太平)' 두 묶음으로 구성된다. 하지만 세종 재위 시절에는 딱히 종묘제례악이란 개념이 없었다. 이 두 묶음을 정리하고 일부 수정해 제례악으로 통합한 것은 세조 때였다.
'''정대업'''은 왕조의 군사적인 업적, 즉 무공을 찬양하는 곡이고, 기본 조성은 남려음을 기본으로 하는 남려계면조로 되어 있었다. 세종 때는 소무ㆍ독경ㆍ선위ㆍ탁정ㆍ혁정ㆍ신정ㆍ개안ㆍ지덕ㆍ휴명ㆍ순응ㆍ정세ㆍ화태ㆍ진요ㆍ영관 15곡이 묶여 만들어졌지만, 세조가 정리하면서 각 곡의 순서가 바뀌고 몇 곡이 삭제, 수정 또는 추가되어 11곡으로 확정되었다. 그리고 기본 조성도 남려계면조에서 황종음을 기본으로 하는 황종계면조로 바뀌었다.
확정된 순서: 소무(昭武)-독경(篤慶)-탁정(濯征)-선위(宣威)-신정(神定)-분웅(奮雄)-순응(順應)-총유(寵綏)-정세(靖世)-혁정(赫整)-영관(永觀)
'''보태평'''은 왕조의 학문적인 업적, 즉 문덕을 찬양하는 곡이고, 기본 조성은 임종음을 기본으로 하는 임종평조로 되어 있었다. 세종 때는 희문, 계우, 의인, 형광, 보예, 융화, 승강, 창휘, 정명, 대동, 역성 11곡이 묶여 만들어졌지만, 이 역시 세조가 정리하면서 여러 차례의 개작과 첨삭을 거쳐 변경되었다. 조성도 마찬가지로 황종음을 기본으로 하는 황종평조가 되었다;
확정된 순서: 희문(熙文)-기명(基命)-귀인(歸仁)-형가(享壽)-집녕(輯寧)-융화(隆化)-현미(顯美)-용광정명(龍光貞明)-중광(重光)-대유(大猷)-역성(繹成)
두 곡 모두 황종음이 기본이 되어 있기는 하지만, 사용되는 악기가 모두 같은 황종음을 쓰는 것이 아니라서 평균율 기반의 서양음악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음고가 불안정하다는 인상을 종종 받게 된다. 실제로 제례악에 동원되는 악기 중 대금해금, 태평소의 황종은 서양 평균율에 (억지로) 대입시켜보면 내림마(Eb) 음에 해당되지만, 나머지 악기들의 황종은 다(C) 음이다.
세조가 종묘제례악을 완성한 이후로 의식이나 음악, 무용에 큰 변화는 없이 쭉 전승되어 왔지만, 경술국치 이후에는 일제의 갖은 방해와 협박 등으로 인해 제례와 공연 양식 보존에 어려움을 겪었다. 해방되고 정국이 공화정으로 전환된 후에는 몇 가지 절차를 수정하거나 생략한 뒤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5]를 주축으로 매년 이어진다. 제례는 종약원 회원들이 담당하고, 음악 연주와 무용은 국립국악원 정악단과 무용단이 주축이 되어 맡았으나 현재는 종묘제례악 보존회에서 맡는다. 다만 국립국악원의 정악단과 무용단에서 소수의 단원을 파견/지원하는 정도로 참여한다.
참고로 국립국악원은 신라시대의 음성서(音聲署), 고려시대의 대악서(大樂署)와 관현방(管絃房), 조선시대의 아악서·전악서·장악원(掌樂院), 대한제국 시대의 교방사(敎坊司), 일제강점기의 이왕직아악부로 이어져 오다가 해방 후 궁중음악기관이 해체되며 한때 구왕궁아악부(舊王宮雅樂部)로 존속하다가 1951년 이후 국립국악원으로 격상된 국가 최고의 음악 연구/보존/재현 기관으로, 전신(前身)들을 쫓다보면 1000년에 달하는 유구한 기관이다. 이런 곳이 종묘제례의 음악과 무용의 재현에서 배제되었음은 쉽게 납득할 수 없다.
제례와 함께 연주되는 음악인 만큼, 모든 절차에 각 음악이 배당되었고 순서를 바꾸어 연주함은 용납되지 않는다. 그리고 연주자와 악기의 배치, 음악에 곁들여지는 노래나 춤도 마찬가지로 엄격한 절차에 따라 편성되고 공연된다. 다만 1990년대에 들어서는 1년에 한 번밖에 못 듣는다는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서인지, 종종 국립국악원 등에서 연주회 형식으로 축약해 공연하기도 한다. 이때는 연주와 관람의 편의상 의식 절차나 악곡ㆍ악기ㆍ무용이 일부 생략되기도 한다.

3. 악단과 무용수 배치


제례악에 동원되는 악단은 크게 두 개로 나뉘는데, 각각 댓돌 윗쪽과 아랫쪽에 걸터앉아 연주한다. 윗쪽의 악단이 '''등가'''(登歌), 아랫쪽 악단은 '''헌가'''(軒架)로 불리는데, 악기 편성도 조금씩 다르다.
등가: 박, 편종, 편경, 방향, 대금, 당피리, 해금, 아쟁, 장구, 절고, 축, 어, 성악(악장이라고 한다)
헌가: 박, 편종, 편경, 방향, 대금, 당피리, 태평소, 해금, 장고, , 진고, 축, 어, 악장
등가와 헌가는 함께 연주하지 않고, 제례 절차에 따라 연주하는 부분이 나뉘어 있다.
무용수도 보태평과 정대업에 따라 따로 동원되는데, 각기 '''문무'''(文舞)와 '''무무'''(武舞)를 춘다. 정전과 영녕전 앞마당에서 가로세로를 모두 8열로 맞추어 총 64명의 무용수가 추는데, 팔일무(八佾舞)라고 한다[6]
문무의 경우 피리인 약(籥)과 의 깃털로 만든 셔틀콕 비스무리한 장식물을 겹친 적(翟)을 각각 왼손과 오른손에 쥔다. 무용수의 모자도 문신들이 쓰는 것을 착용한다. 무무를 추는 무용수도 왼손과 오른손에 각각 나무방패인 간(干)과 용머리 모양의 나무도끼인 척(戚)을 쥐고, 무신들의 모자를 쓴다.
물론 그렇다고 무무가 문무보다 춤사위가 역동적이라거나, 문무가 무무보다 더 얌전하거나 하다고 생각하면 실망할 듯. 둘 다 종횡대를 유지하며 몸의 동작을 최소화한 제례무이기 때문에, 웬만한 전문가 아니면 큰 차이점을 구별하기 힘들다.
참고로 문무와 무무 모두 중국의 제례악에서 파생된 것인데, 본토에서는 거의 사멸된 탓에 가끔 중국이나 대만 쪽 음악학자 혹은 무용학자들이 연구하러 오기도 한다.[7]

4. 제례 절차


종묘제례악이던 문묘제례악이건, 사용되는 제례의 절차를 모른다면 제대로 이해하기가 불가능하다. 흔히 집에서 지내는 제사와 틀은 비슷하지만, 한층 복잡하고 엄격하며 때로는 장황한(...) 절차를 지니고 있다.
영신(迎神): 왕과 왕비의 혼을 부르는 의식. 닭피와 털, 고기를 기름에 버무려 쑥불에 태운다. 집박이 끝나면 악장이 희문곡(熙文曲)을 아홉 번 반복해 부르는데, 연주는 헌가에서 하고 문무가 추어진다.
전폐(奠幣): 신들에게 폐백을 드리는 의식. 비단을 올린다. 연주는 등가에서 하고 역시 문무가 추어진다.
신관(晨祼): 초헌관이 제사지내는 방으로 들어가 향을 피우면서 땅에 울창주를 부으면서 선조들의 혼을 맞아들이는 의식. 향을 피워 하늘에 있는 혼을, 울창주를 부어 땅에 있는 백을 부른다고 한다. 영신과 근본적으로 다른 게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왕이 친제할 때는 당연히 왕이 한다. 지금은 왕이 없으므로 영친왕의 아들 이구가 했고, 이구가 죽은 이후에는 이구의 양자가 된 황사손 이원이 한다.
진찬(進饌): 신들에게 음식을 올리는 의식. 기본적인 음식은 제사 전에 미리 차려두지만, 중요한 음식을 이때 올린다. 연주는 헌가에서 하고 춤은 추지 않는다.
초헌(初獻): 신들에게 첫 번째 술잔을 올리는 의식. 전폐와 마찬가지로 연주는 등가에서 하고 문무가 추어진다. 이 절차에서 보태평 전곡이 모두 연주된다.
독축: 독축관이 축문을 읽는다.
아헌(亞獻): 신들에게 두 번째 술잔을 올리는 의식. 연주는 헌가에서 하고 무무가 추어진다.
종헌(終獻): 신들에게 마지막 술잔을 올리는 의식. 아헌과 마찬가지로 연주는 헌가에서 하고 무무가 추어진다. 이 절차에서 정대업 전곡이 모두 연주된다.
음복(飮福): 차려두었던 술과 음식을 먹는 의식. 제사에 참여한 모든 사람이 먹기엔 시간이 안 되기 때문에 초헌관이 전체 참가자를 대신해서 음식의 일부를 조금 먹는다. 신이 강림한 자리에서 신이 먹었던 제사 음식을 누군가는 먹어야 하기 때문에 초헌관이 대표로 한다. 제사에 참석한 모든 사람이 정말로 제사 음식을 나누는 것은 제사가 다 끝난 뒤.
철변두(撤籩豆): 제례에 사용된 제기를 거둬들이는 의식. 신께서 식사를 다 하셨으니 상을 물리는 것이다. 다만 정말로 제기를 다 정리하지는 않고, 상징적인 의미에서 제기 중 변과 두를 상에서 위치를 조금 옮긴다. 철변두란 이름 자체가 '''변과 두를 철상한다'''는 뜻. '진찬'에서 연주되었던 음악을 이번에는 등가에서 연주한다. 무용 생략.
송신(送神): 신들을 보내는 의식. 폐백을 함께 태운다. 이번에는 다시 '진찬'의 음악을 헌가에서 연주한다. 역시 무용 생략.
망료(望燎): 사용한 축문 등을 태우는 의식. 제사에 사용한 자잘한 것들을 깨끗이 없앤다는 것이다. 음악과 무용은 모두 생략. 다만 사직에서는 태우지 않고 땅에 묻으며, 이 경우에는 망예(望瘞)라고 한다. 하지만 망료와 망예란 단어를 혼용해서 쓰기도 한다.

5. 장단에 대한 연구들


흔히 국악 관련 이론 서적들에서는 제례악의 박절법은 일정하지만, 장단은 불규칙하다고 서술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제례악이 전해지고 있는 세종실록과 세조실록, 대악후보, 속악원보 등의 고악보에 대한 해독과 연구가 진행되면서 이러한 내용에 수정이 가해지고 있다.
가령 희문곡 같은 경우, 대악후보에 기재된 정간보에는 비교적 정확한 형태의 장단이 규칙적으로 반복되고 있는 것이 판명되었다.[8] 물론 제례악의 곡들이 전반적으로 장단을 느끼기 어려울 정도로 상당히 느리게 진행되기 때문에, 어지간한 전문가들이 아닌 이상 장단을 알아맞추기는 쉽지 않다. 불규칙 무패턴 장단

6. 그 밖에


  •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은 종묘제례뿐만 아니라 사직제례도 거행한다. 원래 사직제례용 음악이 따로 있었는데, 이를 복원하지 못하여 한동안 종묘제례악을 그대로 사용했었다. 하지만 2014년 사직제례악 복원에 성공하여 지금은 사직제례에 종묘 제례악을 연주하지 않는다.
  • 종묘제례악은 매년 5월 첫째 주 일요일에 관람할 수 있다.
  • 종묘제례악을 관람하려면 선크림이 필수다. 종묘에는 그늘이 없다. [9]

7. 같이보기



8. 현대화 시도


  • 해파리(가수)를 방문해 본다. 영신희문 , 진찬, 형가 , 소무 , 송신 등을 전자음악(앰비언트 테크노)으로 편곡했다.
  • 전폐희문 최신 편곡도 있다 (그룹 이름은 확실치 않다)[10].
  • 음악그룹 "나무" 역시 종묘제례악에 관심을 둔다.
[1] Royal ancestral ritual in the Jongmyo shrine and its music[2] Le rituel royal ancestral du sanctuaire de Jongmyo et sa musique[3] 원래 종묘 정전은 태조와 현 왕으로부터 선대 임금 넷을 모신다. 단, 이는 제후국 예법으로 대한제국 선포 이후에는 태조와 현 왕으로부터 선대 임금 여섯을 모셨다. 태조와 현 왕으로부터 선대 임금 넷/여섯을 외에도 불천위신위로 지정된 임금 신위는 계속 정전에 모신다. 하지만 불천위신위로 지정되지 않으면, 후대로 내려가 당시 임금으로부터 4대 이상이 되는 때에 정전에서 물러나와야 한다. 이런 신위는 원래 정갈한 곳에 묻어야 하지만, 세종은 그러길 원치 않았다. 그래서 본디 정갈한 곳에 묻었어야 할, 정전에서 나온 신위를 따로 모시는 건물을 세웠다. 이것이 영녕전이다. 영녕전은 어디까지나 종묘 정전에서 물러나온, 묻었어야 할 신위를 모신 곳이므로 정전보다는 제사를 덜 지냈다. 예전 판본에서는 영녕전이 막장 임금, 혹은 재위기간이 짧은 임금을 모시는 곳이라고 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하지만 제례 절차는 모두 종묘와 동일하게 행해진다.[4] 세종 이전에는 상태가 어느 정도였냐면 편경의 경우 기와를 잘라 매달았을 정도로 편종은 높낮이가 제멋대로였다. 이 때문에 박연이 처음 한 일도 악기를 정비하는 일도 아닌 음계 자체를 새로 만드는 일이었다.[5] 대동종약원에서 산하 위원회를 구성하여 종묘제례악을 연구, 전수한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을 종묘제례악 기능보유단체로 공식 인정한다.[6] 다만 조선시대에는 6X6, 즉 36명이 육일무를 추었다. 팔일무는 황제의 예법이기 때문. 육일무에 대해서는 중국에서도 학자들 의견이 갈려서 6X6명이 추는지, 6X8명이 추는지 분분했다. 하지만 조선은 6X6설을 채택했다. 학술적인 고증 문제도 있겠지만, 그게 더 안정적으로 보여서가 아닐까. 팔일무로 바뀐 건 당연히 대한제국 때부터. 처음부터 팔일무를 추진 않았다.[7] 긴 혼란기와 결정적으로 문화대혁명 크리로 거의 사라졌기 때문에, 제례악을 올리는 장소인 종묘(중국에서는 '태묘')는 중공 수립 직후 '노동인민문화궁'으로 마개조해버렸다.[8] 이를 토대로 작곡가 김대성이 국악기와 양악기를 혼합 편성한 편곡 작품인 '희문' 을 2003년에 발표했다.[9] 종이모자를 나눠주기도 하지만 별 도움이 안 된다.[10] 출연진: 최덕렬(음악감독·작곡), 김소엽(피리), 김승태(해금), 김진욱(대금), 오단해(소리), 이은지(아쟁), 하수연(가야금), 한솔잎(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