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하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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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河洛
1846 ~ 1896
1. 개요
구한말의 의병장. 본관은 고향과 같은 의성(義城), 본명은 김길주(金吉周), 자는 계삼(季三), 호는 해운당(海雲堂)이다.왜놈의 손에 죽느니 차라리 강물에 빠져서 물고기밥이 되겠노라.
- 의병장 김하락 유언
2. 생애
1846년 경상북도 의성군 교촌에서 김운휘(金運輝)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에 한성부로 이주했다. 어려서 천문학, 지리학, 의학서, 병서(兵書) 등을 탐독하였으며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이 일어나면서 경기도 이천에서 이종동생 조성학, 구연영 등과 뜻을 같이하며 항일 의병궐기를 하면서 의병장이 되어 의병부대를 편성하고 여주에서 심상희 부대, 안성에서 민승천 부대 등의 항일 의병부대와 합류하여 경기도 지역에 있는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1895년 12월에 경기도 광주 노루목에서 일본군과 교전을 한 끝에 노루목 장터를 장악하였으나 일본군 지원병력에 의해서 습격을 받아 패전하고 결국 이현을 빼앗기게 되었다. 1896년 1월에 흩어진 의병들을 모집하여 전열을 가다듬고 군사 겸 지휘부장이 되어서 경기도 의병의 선봉장으로 활약하였다. 그는 의병들을 이끌고 한성을 진격하려고 계획을 세웠으나 의병대장 박준영, 좌익장 김귀성 등이 관군에게 이를 밀고하게 되면서 한성 장악을 포기하고 경북 안동으로 피신하였다.
이 때를 계기로 의병부대와 와전되거나 해산되는 와중에도 끝까지 의병장으로서 전투지휘를 맡으며 의병들을 총지휘하고 일본군과 교전을 벌였으며 이후에는 신돌석, 김도현, 오석주[1] 등의 의병부대와 합류하여 경북 의병궐기를 이끌었다. 그러나 1896년 영덕에서 관군과의 교전에서 패배하여 중상을 입게 되었고 결국 부상을 입은 몸을 이끌며 강가로 가서 '''차라리 왜놈한테 죽느니 물고기밥이 되어 죽겠노라'''고 유언을 남기고 강가에 투신하여 순국하였다. 향년 50세.
3. 사후
저서에 김하락진중일기가 있으며 1982년 의병활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1]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오석주(독립운동가)와 동명이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