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돌석

 




'''3대 전투의병'''
민종식
'''신돌석'''
정용기, 정환직
신돌석 장군 기념관 내의 충의사에 있는 초상화.
'''성명'''
신돌석(申乭錫)[1]
'''본명'''
신태호(申泰浩)
'''일명'''
신태을(申泰乙)
신태홍(申泰洪)
신대호(申大浩)
'''본관'''
평산 신씨
'''출생'''
1878년 11월 26일
조선 경상도 영해군 축산면 도곡리
'''사망'''
1908년 12월 11일
대한제국 경상북도 영덕군 북면 눌곡리
'''자'''
순경(舜卿)
'''가족관계'''
아버지 신석주(申錫柱)
어머니 분성 김씨 부인
부인 한재여
장남 신만이
1. 개요
2. 생애
3. 기타
4. 같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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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제국 시기 항일 의병활동을 한 '''중인'''[2] 출신 의병장. 본명은 신태호(申泰浩). 자는 순경(舜卿). 별명은 태백산 호랑이. 경상북도 영덕군[3] 축산면 출생으로 축산면에 생가가 보존되어 있다.
임진왜란 시기 김덕령 이상으로 야사가 풍부한 인물로 현대 한국인들이 그에 갖는 인식 대부분에 야사에 편중되어 있고, 실존인물 신돌석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2. 생애


어린 시절부터 건강하고 용감하기로 소문이 났고, 거리가 되는 시내를 단번에 뛰어 건널 정도로 몸이 튼튼했다 한다. 야사에 따르면, 일제가 전선을 잇는 작업을 하는 중 단숨에 총을 가진 왜병들을 때려눕힌 뒤 전신주 여러개를 뽑아서 패대기치고 사라졌다고 한다. 물론 그 당시의 전신주는 지금의 돌이나 금속이 아닌 나무였긴 하지만... 의병장으로서의 용맹함을 알리기 위해 쓰여진 일화로 보이기에 곧이곧대로 믿기는 어렵고 휘하 병력과 함께 전신주를 공격하여 파괴시킨 전과가 이런 식으로 알려졌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전신주는 '''일제 침략의 첨병''' 취급을 받아 의병들의 공격 대상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1905년 을사조약 이후 국권을 침탈한 일제에 대항해, 평민 의병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집안이 처음 영덕 지역에 정착할 때는 세가 있었던 걸로 보이나 누대에 걸쳐 가세가 기울어 신돌석 대에 이르러서는 향리만도 못한 집안으로 굴러떨어져 어러운 살림이었다. 다행히 부친의 노력으로 학문을 배울 수 있었고 이것이 의병활동을 하는 기반이 되어주었다.
그의 병력은 산악 지역에서 주로 유격전을 펼치며, 지세에 능하지 못한 일본군을 상대로 큰 성과를 보였다. 참고로 그가 처음 의병에 참여한 시기는 나이 19세로 을미사변 다음해인 1896년이다. 따라서 갑자기 평민 의병장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그 이전 활동과 능력을 인정받아 자연스럽게 추대된 것이다. 아무튼 신출귀몰한 그의 작전에 경악한 일본군은 신돌석을 크게 경계했으며, 회유책이나 현상금을 걸어서 그를 포획하려 했다.
최후엔 그의 부하였으나 일본이 내건 투항자 면책 선언에 마음이 꺾여 투항한 김상렬 형제의 손에 살해당했다. 정확히 말하면 형제중에 동생쪽이 그의 부하였는데, 신돌석이 그를 다시 의병진으로 데려가기 위해 그의 형의 집을 찾아가 강권하나 완고하게 거부하자 집근처 계곡으로 데려가 구타하다가 이웃집에 숨어있다 뒤쫒아온 옛 부하인 동생에게 짱돌로 머리를 가격당해 사망했다. 신돌석 사망 직후 신고를 접수한 영덕경찰서장이 올린 보고서에는 형을 구하려 신돌석을 살해한 동생은 겁에 질려 그대로 달아나 숨어버렸고, 형이 신고를 해서 경찰측에서 신원을 확인하고 과정을 조사했을 뿐이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3. 기타


  • 평해 월송정에 올라 읊은 시가 남아 있다.
>누각에 오른 나그네 문득 갈길을 잊어
>낙목이 가로누운 단군의 폐허를 탄식하노라
>남아 이십 칠세에 이룬 일이 무엇인가
>문득 가을바람이 부니 감개만 이는 구나
  • 죽음과 관련된 비극적인 야사가 하나 있는데 이 고종사촌 형제가 신돌석에게 술과 고기를 극진히 대접하고, 쿨쿨 잘 자고 있을 때 공격했는데, 이때 공격받은 신돌석은 이렇게 외쳤다 "형님, 형님, 누군가 나를 찔렀소!" 마지막 순간까지도, 형제들이 자신을 배신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는 이야기. 이후 그 형제는 신돌석의 목을 가지고 일본 헌병에게 바쳐 상금을 요구했지만 일본 헌병은 사로잡아오지 않고 그냥 죽인 건 소용없다며 이들을 빈손으로 돌려보냈다. 그 형제는 격분하고 오열하면서 후회했다고 한다. 그냥 야사로 듣자. 야사에서 신돌석 죽였다는 사람이 열 손가락 가볍게 채운다.
  • 다른 야사에 따르면 어떤 옹기장수가 신돌석의 죽음을 알게되자 옹기를 전부 깨버리면서 대성통곡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 신돌석의 일대기를 그린 '태백산 호랑이'라는 비디오 애니메이션도 나왔다. 1994년 대영팬더에서 자체 제작을 하였으며, 동년 광복절MBC에서 방영하였다.[4] 그런데 본명인 신태호가 아닌 별명인 신돌석이라는 이름으로 나온다.[5]
  • 각시탈에서는 서커스단의 사회자 신난다가 그 '옆집 사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 네이버의 2016년 한국만화 거장전: 만화 보물섬 특집에서 2화 '고래'라는 백성민 작가의 작품이 신돌석을 그렸다.
  • Why? 한국사 시리즈의 주인공 중 한명인 신천지의 선조로 언급되었다.
  • 진진돌이 에볼루션의 등장 인물명이기도 한데, 여기서 모티브를 따온듯 하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고.
  • 그의 아내였던 한재여 여사의 묘가 경북 영양군 석보면 포산리에 위치하고 있다. 마을 주민과 신돌석의 후손의 증언에 따르면 그녀는 신돌석 사후 일본 경찰에 의해 모진 고초를 겪었으며 작고할 때까지 불에 탄 집에서 생활할만큼 힘든 삶을 살았다고 한다. 당시 일제 치하에서 항일 의병장의 가족을 도와주는 것만으로도 헌병의 의심을 살만한 행동이었기 때문에 마을 주민들도 선뜻 신돌석의 후손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 수 없었다고 한다.

  • 2021년 2월에 경북남부보훈지청은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에 자리한 신돌석유적지를 2월의 현충시설로 지정하기도 했다.

4. 같이보기


[1] 錫 자 대신 石을 표기하기도 한다.[2] 교과서나 인물사전 등에서 평민으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아 평민 출신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향리 가문으로 명백한 중인 계급이다. 조선 시대에 평민은 를 가질 수가 없었다. 신돌석이 평민이라는 인식을 퍼뜨린 것은 체제 특성상 하층 중심의 무장투쟁을 강조하는 북한 학자들이고, 이를 과거 남측 학자들이 무비판적으로 수용했기 때문이다.[3] 당시 행정구역상으론 영해(寧海)도호부다.[4] 대영팬더판에 MBC 전속 성우들이 출연하였다고 KMDB에서 기록되어 있고, 발매한 바로 그 해에 MBC에서 방영한 것으로 봐서 MBC와 대영팬더의 협력으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5] 어린 시절 신에서 자기소개할 때 본명이 아닌 신돌석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