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상지
駱尙志
생몰년도 미상
명나라의 인물.
요양 사람으로 이성량의 집안을 섬겼고 젊은 시절에 일본 사람에게 포로로 여러 차례 잡힌 적이 있다고 하며, 심유경과 함께 일본인에게 소문이 나있는 사람이었다. 용력이 뛰어나 천근(千斤)을 들어서 낙천근(駱千斤)이라 불렸다.
1592년에 조선이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여송 휘하의 참장이 되어 조선의 원군으로 출정했으며, 남병을 이끌고 제4차 평양성 전투에 참가해 평양성을 공격했다. 조선의 이일, 김응서 등과 함께 평양성의 함구문을 공격해 긴 창을 휘두르면서 적이 던진 큰 돌을 발에 맞아 다쳤음에도 평양성의 성벽에 가장 먼저 오르는 용맹을 선보였다. 1593년에는 오유충, 마우경과 함께 경주에서 수십 명을 죽였지만 일본군이 칼을 휘둘러 돌진하자 당해내지 못하고 후퇴했으며, 냇물을 건너다가 후방에서 공격을 받아 200여 명이 죽는 피해를 입었다.
1594년에 사대수와 함께 군사를 이끌고 물러나면서 류성룡, 이덕형 등에게 여러 가지 조언을 했는데, 일본인이 조공 바치는 일을 허락받아도 반드시 곧 물러가지 않을 것이며, 강화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전라도를 침범할 것이라 경계했다.
일본군에게 포로가 되었다가 나온 사람을 조선에서 공을 바라는 자가 그들의 머리를 베어 바친 것으로 귀순하는 길이 막혔다면서 사실을 제대로 밝혀 이를 금지하게 하면서 귀순하는 자에게 상을 주어 격려하면서 적을 유인하는 역할을 시켜야 된다고 했다. 조선에서 관노, 사노의 법으로 벼슬길이 영원히 막혀 이들에게 불평하는 마음이 없겠냐면서 적에게 간 자들은 돌아오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며, 그 법의 폐단이 심하다고 했으며, 1597년에 정유재란에 참전하면서 남원성을 수축했다.
조선 사람들에게 제독검법, 포술 등을 가르쳤으며, 조선에서 총검술, 염초 굽는 법 등을 가르쳐달라고 하자 부하를 남겨 가르치게 했다. 그 중에서 제독검법은 무예도보통지에 실리게 된다.
이시발과는 병서에 대해 논하면서 이시발의 재주에 대해 감탄해 선조에게 그를 중용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으며, 낙상지가 이시발에게 고서 수 천권을 줬다는 설이 있다. 윤근수는 낙상지에 대해 마음에 어떤 경계나 안팎이 없고 용력이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