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형
1. 개요
조선 중기의 재상.
2. 생애
조선 중기 최고 명문가 중 하나인 광주(廣州) 이씨 출신이다.[2] 한성 성명방(誠明坊 : 지금의 남대문과 필동의 사이)에서 아버지 이민성(李民聖)과 영의정 유전[3] 의 누이 동생인 어머니 유씨(柳氏) 사이에서 외동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소년기에는 영의정으로 있던 유전의 집이 있던 경기도 포천으로 가서 성장한다. 자라면서 영특하다고 명성이 돌았으며, 이후 토정 이지함의 눈에 띄어 그의 조카인 동인의 중진이자 이후 북인의 영수가 되는 이산해의 사위가 되었다.
1580년 약관 20세의 나이에 별시에 급제[4] 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이후 대제학 이이의 눈에 들어 승승장구 하며 1591년 예조 참판에 오르고 겨우 31세에 대제학을 겸임했다. 당시 이덕형의 학문과 인품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며 조선 역사에서 가장 젊은 나이에 대제학에 올랐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일본 사신과 교섭을 벌이기도 했으나 결렬되었다. 그후 청원사로 명나라로 가 만력제를 설득하여 명나라의 원병을 얻어오는 데 성공한다. 이항복과 교대로 병조판서를 역임하며 군사 정책을 수행하였다.
1598년 38세의 나이로 우의정이 되었으며[5][6] 이후 좌의정, 1602년에는 영의정이 되었다. 이항복과 함께 현실적인 판단으로 임란 극복에 큰 역할을 하였다.
광해군 즉위 후, 임해군의 처형을 반대하다가 광해군의 눈 밖에 났고[7][8] 이후 영창대군의 사사에 반대하다가[9] 삭탈관직되었다. 그 후 1613년 실의에 빠져 고향 집[10] 에서 병으로 숨졌다. 이덕형의 죽음을 들은 이항복은 곧바로 이덕형의 사저로 찾아가 유가족들과 함께 곡을 하고 그의 시신을 염습해주고 돌아갔다고 한다. 야사에 따르면 영창대군의 처형을 반대할 때 이덕형은 이항복도 함께 해주기를 원했지만 이항복은 거절했고, 삭탈관직된 이덕형은 실의에 빠졌다가 곧 사망했다. 이덕형은 사망한 후에도 눈을 감지 않고 있었는데, 이때 이항복이 찾아와 자신이 함께 하지 못한 이유("이제 곧 폐모론이 일어날 텐데, 그때 반대하다가 죽음을 맞이할 신하가 하나 남아 있어야 하지 않겠나")를 설명해 주자 그제야 눈을 감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항복은 역시나 이후 인목대비의 폐위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실각하고 함경도의 북청으로 유배를 떠난 뒤 사망했다. 남인계와 서인계 전반에서 두루 존경을 받던 정치원로 이덕형과 이항복의 실각과 죽음으로, 두 당파는 광해군과 집권세력인 북인에게 완전히 등을 돌리게 된다.
묘는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목왕리에 있다.
3. 이항복과의 관계
이항복과 더불어 조선 왕조 사상 (아마도) 최강의 개그 콤비인 오성과 한음의 한 명. 한음은 그의 호이다. 다만 오성은 이항복의 호가 아닌 '오성 부원군'이라는 작위의 이름에서 따온 것. 실제 이항복의 호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백사(白沙)이다. 이항복과는 평생의 우정과 둘이서 같이 남긴 장난기어린 코믹 에피소드로 유명하여, 평생을 같이한 유쾌한 친구로서 어린이 동화집의 단골 소재이다.
그러나 사실은 이항복보다 5살 어리다. 이순신 - 유성룡의 친분 관계라든지 퇴계 이황과 고봉 기대승의 나이를 초월한 우정이 있기는 하나 이는 두 사람 모두가 성인이었기에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실록을 보면 이항복과 이덕형이 만난건 '''과거 시험장에서'''[11] 이다. 어렸을 때부터 만났다는 것은 야사라는 이야기. 둘이 하도 친하게 지내다보니 이런 야사가 생긴 것으로 추정된다. 다른 사람 앞에선 좀 깐깐했지만 이항복에게는 찡찡대는 성격이 강했는데 편지에 이항복을 '''형'''이라 부르며 "나 몸이 아파요", "지난번에 임금께 올린 상소는 좀 아니었어요", '''"형도 내 마음 몰라!"''', "이 사람 관직 좀..."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낸걸로 보아 친하긴 친했던듯 하다. 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명에 원병을 청하러 갈 때 서로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배웅했다.
4. 기타
이들을 소재로 한 박수동 화백의 만화 오성과 한음도 유명하다.
평소에는 사람이 좀 멍해 보이고 뛰어나 보이지는 않았지만[12] 일을 처리할 때는 빛이 날 정도로 빠르고 꼼꼼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항복이 평소 '나댄다' 싶을 정도로 분방한 인물이면서도 정치적으로는 이리저리 눈치보고 다닌 데 비해, 이덕형은 평소엔 온화했으나 원칙에 충실하여 서슴없이 직언을 했다. 대표적인 것이 공신첩 사양으로, 임란 직후 선조에 의해 공신 직첩이 여기저기 남발되자, 자신에게 주어진 공신 직첩 - 호성 공신, 선무 공신 모두에 추천되었다- 을 부끄러워서 못 받겠다고 고사했다. 보다 정확히는, 호성 공신은 임진왜란 때 선조를 의주로 모시고 '''피난'''한 공을 치하한 것인데, 이덕형은 다른 일도 아니고 일본 및 명과의 외교 교섭 문제 때문에 선조의 곁을 떠나 있었던 시간이 길었다. 이 때문에 본인은 임금을 충분히 모시지 못했다고 끝까지 공신 책봉을 사양한 것. 한편으로 보면 이덕형 같이 진짜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 고사한다는 것 자체가 강한 어필인 셈. 이항복 역시 같은 이유로 공신직을 사양했으나 선조의 눈물어린 호소[13] 와 장인이자 선무 공신이 된 권율 등과의 관계 등 때문에 1등 공신 책봉을 받았다. 당시 사람들이 공신 책봉과 관련하여 논하기를, 이항복은 합당하고, 이덕형은 분통하고, 유영경은 비루하다 하였다.
외모가 뛰어나서 그가 조정에 출사하러 집을 나설 때면 태양이 두 개가 뜬다고 할 정도였다. 위의 초상화만 봐도 상당히 잘 생긴 얼굴임을 알 수 있다.[14]
북인을 이끌던 이산해의 사위이자, 이후 북인이 갈라져 생긴 대북의 영수 이이첨이 그의 10촌 형제임에도 그는 남인으로 남았으나, 당색이 강하지는 않았다.
다만 재치가 부족하고 사려가 지나쳐 혼자 끙끙댄 적은 많았다. 이런저런 일로 선조나 다른 사람에게 오해를 샀을 때 적극적으로 나서서 해명하지 못하고 끙끙 앓는 일이 있었던 모양으로 이런 경우에는 주로 이항복이 나서서 해명해주곤 했다. 그런 일화 중에 하나로 그가 임진왜란에서 명나라 장수 이여송을 접대할 때, 그가 이산해의 사위란 것을 알고 같은 이씨끼리 혼인하다니 금수만도 못한 자[15] 라 여겨 박대할 때, 해명하지 못하고 앓고 있었다. 이를 본 이항복이 이여송에게 원래 이덕형은 김씨 성이었는데 재주가 뛰어나 임금이 국성인 이씨 성을 하사하여 이덕형이 되었다고 적당히 둘러대서 무마해주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이여송은 국성을 하사받을 정도로 뛰어난 인재를 오해하여 박대한 것을 부끄럽게 여겨, 이후 이덕형에게 더 예를 갖추어 대했다.
다른 야사로 첩과 관련된 이야기가 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전후 복구 등으로 자택에서 출퇴근하기 곤란할 정도로 바빠지자, 궁 근처의 집에 첩을 데려다 놓고 음식을 차리도록 했다. 하루는 몹시 더운 날 이덕형이 첩의 집으로 돌아왔는데, 이덕형이 미처 부탁도 하기 전에 첩이 음료수인 제호탕을 내왔다. 그 모습을 본 이덕형이 "더 이상 첩으로 두지 않을 테니, 본가로 돌아가시오."라며 쫓아냈다. 갑작스러운 일에 당황한 첩은 이항복을 찾아가 하소연했고, 이항복도 평소 이덕형이 그 첩을 아꼈던 것을 알고 있어서 의아해하며 이덕형에게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이덕형은 "그녀에게 죄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 더운날 미처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제호탕을 내온 것은 참으로 총명하고 사랑받을 만한 일이다. 하지만 지금과 같이 시국이 어려운 때에 재상인 내가 이렇게 사랑스러운 여자와 사랑에 빠졌다간 나라 일을 그르칠 것이라 여겨 단호하게 내쫓은 것이다."라고 해명했다고.
2015년 드라마 화정에서는 배우 이성민, 화정보다 좀 더 앞의 시간대인 징비록에서는 배우 남성진이 연기했다.
5. 관련 항목
[1] 現 대한민국 남양주시 조안면[2] 이 집안은 조선 초, 중기 최고 권력 가문의 하나였지만 연산군 때 멸문지화라 부를 정도로 크게 타격을 입는다. 자세한 것은 이극돈 및 무오사화와 이이첨 항목을 확인. 한창 때는 성종이 "아들을 낳는다면 광주 이씨 같은 아들을 낳아야 할 것이오."라고 할 정도로 인재들이 많았다.[3] 사람보는 눈이 뛰어나고 기억력이 매우 비상했다고 전해진다. 후술할 유희서의 부친. 활을 쏘던 어떤 무인에게 "그 화살통이 마음에 드니 나에게 줄 수 없겠는가?"라고 청했다가, 그 무인에게 "화살통 하나로 대감과 소인의 이름을 더럽힐 수는 없습니다"라는 말로 거절당한 일화를 남긴 인물이다. '''그 무인은 뒷날 조선을 구한다'''. [4] 을과 1위라 2위다. 당시 기본적인 과거 합격자는 등급을 갑과, 을과, 병과로 나뉘어 갑과(제1위라 칭한다)를 3명, 을과(제2위라 칭한다)를 7명, 병과(제3위라 칭한다)를 23명으로 총 33명을 뽑았다. 물론 그 사이에서도 등수를 나눠 벼슬을 다르게 하였다. 그러나 별시는 기본적인 정기 과거 시험이 아니라서 왕이 원할 때 치렀고 합격자 인원은 당시 관리 자리가 부족할 때 뽑는 시험이다 보니 그 부족한 만큼 유동적으로 하여 보통 33명보다 많이 적었다. 그러니 실제로는 합격자 수가 더 적어 더 치열했다.[5] 40살 이전에 정승이 된 케이스는, 세조 때 구성군 이준 이후 최초다. 그나마도 이준은 종친이었고 세조의 정치적 판단으로 인해서 능력보다는 라인 잘 타서 정승된 케이스. 이덕형 역시 선조의 정치적 판단에 의해 재상이 되었지만 그의 능력이 없었으면 재상이 되었을리 만무하다.[6] 1884년에 임오군란 당시 홍영식이 당시 만 27세의 나이로 우의정과 좌의정이 되었으나 정변을 일으켜 된 것이므로 실력으로 되었다고 볼 수 없다.[7] 임해군이 이덕형의 외사촌이자 형제보다 더 가까운 사이었다는 도승지 유희서를 살해한 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덕형은 임해군에게 은혜를 베풀 것을 주장했다. 대인배 인증.[8] 하지만 임해군은 어차피 사형당할 이유가 너무 많았다. 사형시키려는 이유가 좀 억지여서 그렇지.[9] 계축옥사에 영창대군을 끌어들인 건 누가 봐도 어거지였지만 일단 역모에 말려든 이상 처벌 자체를 막을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더구나 이 시기의 광해군은 역모 사건이면 거의 히스테리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옥사를 무한정 확장시켜 나갔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이덕형은 어린 아이를 죽이는 것은 국왕이 법을 어기는 행위라며 처형에 반대하고 은혜를 베풀 것을 주장하였다.[10] 조선시대 당시에는 이덕형의 본관인 광주부였지만, 오늘날의 행정구역으로는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에 해당한다. 조안면 송촌리에 이덕형이 말년을 보낸 집터가 유적지로 남아있다.[11] 다만 두 사람이 치른 과거는 달랐다. 시험장만 같았던 것이다. 이항복은 성균관 유생만 치를 수 있는 과거 시험인 알성시를 치렀고, 이덕형은 성균관 유생이 아니었고 3년에 1번 치러지는 정기 과거가 아닌 왕이 원하는 해에(혹은 관리가 부족한 해) 치르는 별시를 치렀다. 당시 이항복 25세, 이덕형 20세에 시험을 봐서 이항복이 병과, 이덕형이 을과로 급제한다.[12] 그 때문인지 박수동 화백의 만화 오성과 한음에서도 오성은 키가 작고 잔꾀에 능한 제리 스타일로 나오는데 한음은 키가 약간 크고 당하는 역할을 많이 맡는 멀대 스타일로 묘사되었다. 하지만 정작 제대로 된 최후의 일격은 한음이 주로 먹인다.[13]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선조가 이순신을 비롯한 장수들에게는 단 한번도 이런 모습을 보여준 적 없다고 깠다.[14] 이 당시에는 사람의 얼굴을 그릴때 뽀샵이니 뭐니 해서 미화하여 그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그리는걸 선호했으니 맞다고 봐도 좋을듯하다.[15] 당연히 이덕형과 이산해의 집안은 본관이 달라서 동성 동본의 금혼에 해당되지 않는다. 그러나 본관이라는 개념이 없는 중국의 장군으로서는 조선의 관례를 모르니 오해할 수밖에. 이건 일본도 마찬가지라서 동래 부사 송상현의 첩은 이씨라는 이유로 조선 왕족으로 오인받았다. 참고로 이덕형의 부인인 한산 이씨는 임진왜란 때 피난을 떠나다가 일본군이 온다는 말을 듣고 욕을 당하지 않기 위해 절벽에서 뛰어내려 자결하였다. 안타깝게도 이 말은 피난민 무리 사이에서 떠돈 헛소문이었다. 이후 조정에서는 그녀에게 정려를 내렸으며 이덕형은 죽을 때까지 재혼하지 않았다. 그래도 이후 본부인을 두지 않은 것은 한산 이씨를 유일한 본부인으로 여김으로 한산 이씨에 대한 각별한 마음과 도리와 예우를 지킨 것이라 할 수 있다.[16] 저자가 동명이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