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공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6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남공선은 1888년경 함경남도 원산시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만주로 이주해 와룡농장학원을 경영했고, 길림성 훈춘현 대황구의 북일중학교(北一中學敎)에서 역사 교사로 근무하면서 한인 자제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그러던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러시아에서 공산정권이 세워지자, 전로한족회(全露韓族會) 중앙 총회는 니콜리스크에서 대한국민의회를 조직했다. 그는 여기에 가담해 박은식, 조완구 등과 함께 <한족공보(韓族公報)> 신문의 주필로 활동했다.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기 위해 파견될 대표단의 경비 마련을 위한 의연금 모집이 실시될 때, 그는 자신의 명의로 간도에 있는 박경철, 이성근 등에게 서신을 보내 대표 선출을 요청했다. 같은 해 6월 15일에는 김일(金一) 등과 함께 북간도에 가서 장기영(張基永), 구춘선 등과 회합하고, 북간도 일대의 한족 독립운동 의사부 및 신문발행기관을 나자구(羅子溝)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1920년 1월 상순 상하이 미국 조계에서 한국독립운동단체 대표들이 모여 중한노공동맹연합회(中韓勞工同盟聯合會) 가 개최되었을 때, 남공선은 러시아 지역 기독교 대표로 참여했다. 이 연합회는 상하이에 거주하는 미국인들의 지원을 얻어 항일 운동을 전개하면서 공산주의 사상을 동방에 전파하는 목표를 세웠다. 또한 그는 1920년 9월 베이징에서 박용만, 신채호 등과 함께 군사통일 촉성회를 조직했으며, 1921년 4월 20일 베이징에서 북경에서 군사통일주비회(軍事統一籌備會)가 개최되자 시베리아 대한국민의회 대표로서 참석했다.
1921년부터 민족주의에서 공산주의로 전향한 그는 1921년 2월 고려공산당 니콜리스크, 우수리스크 책임자를 지냈으며, 그해 8월 베이징에서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총국을 결성하고 집행위원이 되었으며, <선봉> 주필을 지냈다. 그리고 1921년 4월 19일에 이승만이 국제연맹에게 한국의 위임 통치를 호소하는 것에 반대하는 서명을 53명의 동지들과 함께 헀으며,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하여 임시정부 해체를 주장했고, 1923년 6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대체하기 위해 새로 조직된 국민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1924년 11월 13일 베이징에서 중병에 걸려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6년 남공선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