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은식

 



'''제2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
박은식
朴殷植
'''
'''아호'''
백암(白巖), 겸곡(謙谷)
'''필명'''
태백광노(太白狂奴), 무치생(無恥生)
'''본관'''
밀양 박씨
'''출생'''
1859년 9월 30일
조선 황해도 황주군 주남면
'''사망'''
1925년 11월 1일 (향년 66세, 총 24,138일)
중화민국 장쑤성 상하이
'''활동 분야'''
정치, 사회, 교육
'''재임'''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 (1925)
1. 개요
2. 생애
3. 어록
4.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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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운동가, 정치인, 역사학자, 양명학자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제2대 대통령이다.
대한매일신보황성신문을 비롯하여 다수의 신문과 잡지들에 나라를 위한 논설을 쓰고 애국 계몽 사상가로서 영향을 끼쳤다.

2. 생애


1859년 9월 30일 황해도 황주군 주남면에서 박용호(朴用浩)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오랫동안 몰락한 상태로 지냈으나 할아버지 박종록(朴宗錄)의 대에 농업으로 재산을 모아 가세를 일으켰고 아버지 박용호는 서당의 훈장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10살 때 부친 밑에서 한학을 공부하여 1885년 향시(鄕試)에 급제했다. 1888년부터 참봉을 지냈고 1898년 위암 장지연이 속한 황성신문의 주필을 지냈다. 이 때를 계기로 계몽 운동에 참여하여 만민 공동회, 독립협회 등에 참가하게 되었다.
1908년 서우학회의 후신인 서북학회 회장을 맡았으며[1] 1909년 보수적인 유교와 유림 사상을 질타하는 유교구신론(儒敎求新論)을 발표해 을사조약을 막아내지 못한 보수 유림들을 질타하는 기고문을 내었고 중국의 양명학을 중시하여 이를 필두로 한 '대동교'를 창시하여 종교 부장을 지냈다.
1910년 한일병합으로 교육 활동을 포기하고 독립운동가로 전향하여 일제의 침략에 맞서게 되었다. 1911년 만주로 망명하여 구국 운동을 하게 되었으며 1912년 상하이로 이동하여 박달 학원을 세우고 상하이에 있는 동포들에게 민족 교육을 양성했다.
1915년에는 이상설, 신규식과 '신한 혁명당'을 조직하여 감독이 되었고 독립 단체인 '대동 구국단'을 결성하여 독립 운동에 기여했으며 1918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물게 되었다가 1919년 상하이로 돌아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2]의 사장을 맡았다.
'노인 동맹단'도 조직했으며 대표적인 인물로는 강우규가 있다.
1925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1대 대통령인 이승만탄핵되자 후임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대통령제가 대통령이 의정원의 동의없이 대통령이 독단적으로 행동할 수가 있다며 제왕적 대통령제를 비판하였고 이후 대통령제를 국무령제로 개정한 후 대통령직을 사임하게 된다. 사임한 이후 그 해 11월 병고(病苦)와 노환을 앓게 된 그는 독립을 위한 민족의 통일을 주창하는 유언을 남기고 향년 67세를 일기로 순국했다.
순국 후에는 상하이 공동묘지에 안장되었고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1993년 노백린, 신규식 등과 함께 국내 운구가 결정되어 중국에서 유해가 이송되고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 임시정부 묘역에 안장되었다.

3. 어록


'''국혼(國魂)은 살아있다. 국교, 국학, 국어, 국문, 국사는 국혼에 속하는 것이요,
전곡, 군대, 성지, 함선, 기계 등은 국백(國魄)에 속하는 것으로 국혼의 됨됨은 국백에 따라서 죽고 사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국교와 국사가 망하지 아니하면 국혼은 살아 있으므로 그 나라는 망하지 않는다.'''

- 『한국통사』 中

'''옛사람들이 이르기를 나라는 멸할 수 있으나, 역사는 멸할 수 없다고 했다. 대개 나라는 형체와 같고, 역사는 정신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의 형체는 허물어졌으나 정신만큼은 남아 존재하고 있으니, 이것이 통사를 서술하는 까닭이다. 정신이 존속해 멸망하지 않으면, 형체는 부활할 때가 있으리라.'''

- 『한국통사』 中

'''전술을 알지 못하는 유생이나 무기도 없는 농민이 순국을 각오하고 맨손과 맨주먹으로 적과 싸워 뼈를 들판에 파묻을지언정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으니 이것이야말로 오랜 역사적 전통 가운데 배양된 민족 정신의 발로였다.'''

- 『한국독립운동지혈사』 中

'''천자가 있은 이래로 (중략) 경쟁이 없는 때가 없었으니, 승자는 주인이 되고 패자는 노예가 되었으며, (중략) 승자는 존재하고 패자는 멸망했으니, 그 경쟁의 시대에 처하여 무릇 지각이 있고 움직일 수 있는 사람 중 다른 사람에게 승리할 것을 바라지 않는 사람이 있겠는가? 비록 보통으로 나누는 이야기와 간단한 노름일지라도 승리를 좋아하고 패배를 싫어하거늘, 하물며 국가의 존망이 달린 큰 문제에 있어서랴!'''

- 『서우』 제1호


4. 저서


고종 즉위부터 105인 사건까지의 역사를 다룬 『한국통사』, 한국 독립 운동사를 다룬 『한국독립운동지혈사』가 있다.

[1] 당시 서북 지역은 개신교가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었으며 박은식도 기독교계 인물들과 많은 교류를 하게 되었다. 이에 양명학의 '양지(良知)'라는 개념을 기독교의 '성령'과 비교하려는 시도를 했고 결국 박은식의 양지론은 양명학의 기반하에서 기독교 '성령'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게 된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인격을 가진 신으로의 개념까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2] 1896년 독립협회가 발간한 독립신문과 당연히 별개의 신문이지만 신문 이름은 거기서 따 온 게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