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만(1881)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박용만
朴容萬 | Park Yong-man
'''
'''출생'''
1881년 음력7월 2일
강원도 철원군 서변면(현 철원읍) 중리
'''사망'''
1928년 10월 17일
중국 베이징(암살)
'''학력'''
헤이스팅스 대학(졸업)
'''서훈'''
건국훈장 대통령장
1. 개요
2. 생애
2.1. 가계와 초년기
2.2. 미주에서의 독립운동
2.3. 하와이에서의 독립운동
2.4. 중국-러시아에서의 독립운동
2.5. 독립군기지 개척운동
2.6. 암살
3. 사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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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강원도 철원군 서변면(현 철원읍) 중리 출생. 본관은 밀양(密陽)#, 이명은 박용필(朴容弼), 박용만(朴容晩)이며, 호는 우성(又醒, 宇醒), 종교는 개신교이다. 옌시산 계열의 국민혁명군 참의(參議)[1]

2. 생애



2.1. 가계와 초년기


박용만은 1881년(고종 18년) 음력 윤7월 2일 강원도 철원군 서변면(현 철원읍) 중리에서 태어났다. 서변면 중리는 철원도호부가 있던 관전리에 인근한 지역으로, 철원군의 중심지였다. 그는 밀양 박씨 충헌공(忠憲公) 24세손 양산공파(楊山公派) 15세손으로, 부친은 박선병(朴善秉)이다.
박용만은 김해 김씨와 결혼하여 1906년경 딸 박동옥(朴東玉)을 낳았으며, 1921년 9월 중국 베이징에서 중국 여인 웅씨(熊氏)와 결혼하여 아들 박광원(朴光遠)을 낳았다. 딸 박동옥은 1927년경 산후후유증으로 사망했고, 박광원은 중일전쟁 발발 후 베이징에서 행방불명되었다.
박용만의 집안 중 독립운동에 가담한 이는 그를 포함해 4명이다. 박용만의 8촌인 박용각3.1 운동에 참여한 뒤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강원도 의원을 역임했으며, 1925년 대한청년동맹회 집행의원으로 활동하고 의열단 단원으로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박용철은 박용각의 친동생으로, 1919년 철원농업학교 재학 중에 3.1 운동에 참가하여 경고문과 호소문을 배포했다가 체포되었으나 나이가 어려 훈방 조치된 뒤 1922년 상하이로 망명하여 상하이 청년동맹회에 가입했고, 1931년 1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강원도 의원으로 활동했다.
마지막으로 박건병3.1 운동 직후인 1919년 8월 대한독립애국단, 일명 '철원애국단'을 조직하여 학무과장에 선임되어 임시정부 지원 활동을 전개했으며, 상하이로 망명한 뒤 1920년 1월 임시의정원 강원도의원에 선출되었으며, 1921년 9월 군사통일회의와 국민대표회에 참석하여 박용만과 뜻을 함께 했다.
박용만은 얼굴이 길고 구리빛이며, 키가 크고 체격이 좋았다고 한다. 그는 어릴 때부터 적극적이고 괄괄한 성품을 지녔으며, 실력으로 모든 일을 해내려 했다. 부친 박선병은 아들에게 근대교육을 시키기 위해 1893년 개화파 인사인 박희병(朴羲秉)[2]에게 의탁시켰다. 박희병은 박선병의 친동생이자 박용만의 숙부로, 조카와 약 13년간 동거동락하며 개화사상과 사회진화론을 전파했다.
독립운동가 김현구(金鉉九)의 증언에 따르면, 박용만은 어려서 부친을 잃은 뒤 숙부 박희병의 양육을 받았고, 숙부가 상경해 영어를 배울 때 관립일본어학교를 다녔다고 하며, 1년 후 일본유학 시험에 합격하여 일본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뒤 게이오의숙에서 2년간 정치학을 공부했다고 한다. 이때 숙부의 소개로 박영효를 만났고, 유신개혁파가 조직한 활빈당(活貧黨)에 가입했다.
1901년 3월 안국선, 오인영과 함께 귀국했다가 역적으로 낙인찍힌 박영효와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다 숙부와 선교사의 구명활동에 힘입어 수개월만에 석방되었다. 출옥 후 상동청년회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평안도 선천군 일대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전도활동을 했다. 1904년 상동청년회 활동을 본격화하여 교육사업을 시작했고, 보안회와 관련을 맺었다.
1904년 6월 일본이 대한제국 정부에게 전 국토의 30%에 해당되는 황무지 개척권을 요구하자, 그는 보안회 임원들과 함꼐 반대투쟁을 벌였다. 이 일로 재차 투옥된 그는 감옥에서 정순만, 이승만과 만나 결의형제를 맺고 독립운동을 함께 하기로 했다. 세상은 그런 그들을 가리켜 '삼만(三萬)'이라 불렀다.
출옥 후 숙부가 근무하던 순천 시무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대한제국의 국권이 쇠진해지자 해외로 망명하기로 결심했다. 1905년 2월, 그는 미국 망명길에 올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이때 이승만이 옥중에서 저술한 원고 <독립정신>을 드렁크 밑바닥에 숨겨 가져갔고, 이승만의 어린 아들 이태산(李泰山)과 정순만의 아들인 정양필을 데리고 갔다.

2.2. 미주에서의 독립운동


미국에 건너간 후, 박용만은 먼저 옥중 동지였던 신흥우를 만나기 위해 로스앤젤레스로 향했다. 이후 1905년 9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안정수와 함께 한인 전도사로 임명되었고, 9월 27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숙부 박희병과 함께 미국 네브래스카주로 떠나 커니시에 정착하여 한인들의 생활 안정을 위해 철도회사와 교섭하고, 어린 학생들을 커니시 유지들에게 ‘스쿨보이(School Boy)’로 채용해줄 것을 권유했다.
박용만은 커니시에서 유일한, 정한경 등과 교제했다. 그러다 1906년 2월 숙부 박희병과 함께 콜로라도주 덴버로 이사갔다. 당시 덴버는 신흥도시로서 탄광과 철도회사에서 노동자를 계속 모집하고 있었고, 사탕무농장이 호황을 맞이하여 많은 인력을 취직시킬 수 있었다. 또한 중, 고등학교 등록금이 면제되었고, 주립대학도 등록금이 적었으며, 특히 덴버고등학교에서는 군사교육을 실시하고 주립대학에서는 간부후보생 훈련과정을 의무화했다. 평소 군사학에 관심이 많았던 박용만에게는 실로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1907년 6월 10일 숙부 박희병이 덴버에서 위암으로 사망하자 장례를 치른 뒤, 콜로라도예비학교에 입학하는 한편 여관과 노동주선소를 홀로 운영했다. 이 시기 미국의 여러 한인단체들이 통합해야 한다는 여론이 조성되었다. 1907년 9월 하와이지역 내 24개 한인단체가 한인합성협회(韓人合成協會)로 통합되었다. 그러나 미국 본토의 공립협회와 대동보국회, 공제회, 동맹신흥회 등 4개 한인단체는 통합이 잘 되지 않았다. 공립협회는 공화정(共和政)을 지향하고 평안도 출신들이 주축이고, 대동보국회는 보황주의(保皇主義)에 기호 출신들이 주류를 이뤄 대립관계에 있었다.
이에 박용만은 애국동지대표회(愛國同志代表會)를 결성할 것을 제의했고, 1908년 1월 1일 덴버 근처 한인 유지들과 의논해 6월에 해외동포대표회의를 소집할 것을결정하고 소집취지서를 미주, 하와이, 러시아의 한인사회단체에 보내면서 대표 파견을 요청했다. 그러던 1908년 3월 23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장인환, 전명운이 일제의 대한제국 침탈을 옹호하던 더럼 W. 스티븐스를 암살했다. 이로 인해 공립협회, 대동보국회는 제각기 장인환과 전명운을 지원하기 위해 노력했고, 자연히 박용만이 추진한 애국동지대표회 개최는 다소 연기되었다.
1908년 7월 11일 덴버의 그레이스 감리교회에서 애국동지대표회가 개최되었다. 회의 결과, 향후 국내외 통일기관을 조직할 것, 이에 대한 준비로 각지에 통신국을 설치하여상호간에 연락할 것이 의결되었다. 하지만 국민교육에 필요한 내외서적의 저술, 번역 등에 관한 문제는 합의하지 못하고 후일 토의과제로 삼았다. 이 회의에서 가장 큰 성과는 둔전병제를 바탕으로 한 군사학교 설립안을 통과시킨 것이었다.
1908년 9월, 박용만은 네브래스카 주립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링컨으로 떠났다. 이 학교는 유사시 장교로 활동할 수 있는 간부후보생을 양성하고 전통있는 군사훈련 프로그램을 갖춘 학교였다. 1908년 9월 15일 네브래스카대학에 입학하여 그해 겨울 박처후(朴處厚) · 임동식과 한인군사학교 관한 사항을 논의하고, 1909년 6월 초순 해외 최초의 독립군관학교인 ‘한인소년병학교(The Young Korean MilitarySchool)’를 커니시에 소재한 한 농장에 창립했다.
한인소년병학교는 학기 중에는 각자 학교에서 공부하다가 여름방학 때 입소하여 평균 8주간의 군사훈련을 받는 하계군사학교 체제로 운영되었고, 수학과정은 3년이었다. 첫해 생도는 13명이었다. 1910년 4월 1일 헤이스팅스 대학내로 이전한 한인소년병학교는 6월에 두 번째로 개교하였는데, 인근지역 한인유학생들이 자원 입학하여 생도 수가 26명으로 늘어났다. 박용만은 학교운영자금 마련을 위해 캘리포니아지역을 순회하여 총 15자루와 의연금 약 600달러를 모금하였고, 그것으로 군복과 유니폼을 구입하고 교사들 급료도 지불했다.
1911년 여름 세번째 하기훈련에 44명이 등록하였고, 8월 제21회 졸업식에는 1909년 여름 입학한 13명이 졸업했다. 1912년 6월 네번째 하기훈련에는 34명이 입학하였고, 8월 16일에 13명이 졸업했다. 1913년 6월 16일 개강한 다섯 번째 훈련에는 30여명이 등록했다. 1914년 6번째 훈련에 20명이 입소하였는데, 이것이 마지막 학기로서 일본측 항의로 폐교해야 했다. 한인소년병학교는 6년간 170여명 학생들이 등록했고, 졸업생은 40명 가량 되었다.
한인소년병학교의 일과는 오전에 노동과 학습, 오후에 군사훈련, 밤에 문학활동과 학습을 하였다. 생도들은 인문과목은 물론 사관에게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군사학과 야외실습 등 고된 군사교육을 이수했다. 한인소년병학교는 자치기관을 만들어 법에 의한 구속력을 가지고 둔전병식으로 군인을 훈련해 독립전쟁에 대비하고자 하는 박용만의 구상을 그대로 반영하였다. 소년병학교 출신인 정한경 · 유일한 · 한시호 · 신형호 · 홍승국 · 김용성 · 김현구 등은 이후 재미 한인교포사회의 중견 지도자로 활동하며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했다.
박용만은 1908년부터 1912년까지 네브래스카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하면서 ROTC에 입단해 군사훈련을 받았다. 1911년 3학년 때 <신한민보> 주필로 선임되어 샌프란시스코로 가게 되자, 그는 시험 연기수속을 하면서도 모든 과목을 우수한 성적으로 이수하는 열성을 보였다. 그는 신한민보 주필로서도 왕성하게 활동했다. '대한인의 자치기관'이란 논설에서, 그는 민주주의에 입각한 지방자치, 임시정부 수립, 법으로 구속해 의무금을 납세케 한다는 구상, 그리고 '국민개병설' 등 평소의 주장을 펼쳤다.
1911년 3월 4일 샌프란시스코지방회 회원으로 가입한 뒤 중앙총회를 설립하고, 중앙총회를 임시정부로 조직하기 위한 국민여론 수렴과 국시(國是)를 통하여 정치 · 법률 조직을 구성할 것을 결정했다. 그는 조선민족을 특정 헌법 앞에 관할하여 하나의 무형한 국가를 설립하고자 했다. 또한 국권회복 후 건설할 신국가의 국호에 대해서는 다수의 한인이 지지한 ‘대한(大韓)’보다 ‘조선(朝鮮)’을 체택하고자 했으나, 상당한 반발에 부딪히자 결론을 유보했다. 박용만은 한 논설에서 임시정부의 필요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이제 아메리카와 하와이 한인의 정치적 조직에 대하여 의무와 권리를 의논할진대 대저 한 나라에 대하여 백성의 의무는 그 백성이 군대에 종사하여 그 나라를 보호하는 의무가 있고 그 백성이 부세(賦稅)를 물어 그 나라의 경비를 지탱하는 의무가 있으되 오늘날 우리의 의논하는 바는 한 무형한 국가라. 그런고로 군인되는 의무는 스스로 벗어지고 다만 한 부세 무는 의무밖에 없으니 이렇게 된 것이 우리의 다행은 아니로되 오늘날 책임은 가벼운 것이다.

가령 이것까지 면하여 천지간에 한 恣行恣止하는 백성이 되고자 하면 그것이 옳으뇨, 그르뇨? 시방 우리로 하여금 독립전쟁을 시작하는 지경이라도 명령이 한 곳에서 나서 한 호령 아래 복종치 않으면 능히 성공치 못할뿐더러 위선 질서가 문란하여 우리 단체를 우리가 스스로 부지치 못할지라. 그런고로 정치제도를 조직하여 완전한 기관을 사용하자 함이라. 만일 헌법을 세우지 않으면 어찌 무형한 국가를 성립하며 만일 권리를 분간치 않으면 어찌 의무를 담당하기를 요구하며 또한 만일 행정기관을 완전히 만들지 않으면 어찌 무슨 일에 성공하기를 기약하리오. 나는 이만치 말하고 다시 후일 기회를 기다리노라.

(중략)

그런고로 우리 新韓國民은 전일에 몇 사람의 손으로 농락하던 전제정치를 박차고 춤받아 이세상에 용납지 못하게 할 것이오. 일반 인민의 사상을 통괄하여 국민의정신을 대표할만한 자로써 정사를 행케 하여 일반국민이 공식으로 인정하는 법률은 우리가 스스로 제정한 법률이니 우리가 스스로 복종할 의무가 있는 줄을 깨달은 연후에야 그 가운데서 가(假)정부가 변하여 진(眞)정부가 되어 무형한 국가가 자라서 유형한 국가가 될지니 우리는 각각 우리의 예비할 바를 먼저 예비하여 우리의 실행할 바를 먼저 실행함이 옳도다.

대한인국민회는 1911년 6월부터 해외의 모든 한인에게 ‘무형국가론’에 따른 국민의무금 제도를 시행하면서 사실상 재미한인의 자치정부로서 위상을 갖추었다. 국민회는 박용만에게 무형국가의 틀에 걸맞는 헌장을 기초하도록 하고 중앙총회 설립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 시기 박용만은 저술에 몰두하여 <국민개병설(國民皆兵說)>과 <군인수지(軍人須知)>를 발행하였다.
국민개병설은 크게 군인의 정신적 교육, 국민개병의 시행방책, 군사교육의 실행방법 등 3부분으로 나눠진다. 박용만은 군인정신으로 애국심, 공덕심, 명예심, 자격과 인내 등 4가지를 꼽았으며, 국민개병 시행방책으로는 가정교육, 학교교육, 사회교육을 통한 국민개병 시행을 거론했다. 또한 군인수지는 1909년 6월 박용만이 한인소년병학교를 창립한 후 군인양성운동을 확대 보급할 목적으로 군인이 알아야 할 기본 지식에 관한 사항을 정리한 책이다. 이 책은 한인소년병학교를 비롯해 하와이 대조선국민군단사관학교 교재로 사용되기도 했다.
당시 한인들은 대한제국을 인정하지 않고 신국가로서 건설되는 대한인국민회의 ‘임시정부’ 건설 인식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이 상당했다. 이에 박용만은 다소 유연한 태도로 ‘임시정부’를 목적으로 설립되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 대해 ‘정부’란 용어를 쓰지 않음으로써, 이러한 반대세력들의 비판을 누그러뜨리려 하였다. 1911년 11월 하순 대한인국민회 헌장 초안이 탈고되자, 북미지방총회에서는 11월 23일부터 10일간 대의회를 개최하고 총 20개 조항을 의결하였다.
1912년 2월 15일 대한인국민회는 국가주의로 국시(國是)를 정할 것을 촉구하면서 중앙총회 대표원회의를 개최하였다. 1912년 11월 8일 개최된 중앙총회 제1회 대표원 의회는 11월 29일까지 약 20여 일에 걸쳐 진행되었다. 박용만이 작성한 중앙총회 결성 선포문은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가 해외 한인의 대표기관임을 밝히면서 대한제국을 대신해 ‘민주주의국가’로 발흥할 것을 천명하였다.
이는 근왕주의를 청산하고 공식적으로 공화주의를 표방한 최초의 선언으로 개항 이래 추진되어온 근대국가 수립 노력이 이때와서 맺음하는 것이었다. 또한 이 선언은 후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될 때 공화제를 채택하는 데 일정부분 영향을 끼쳤다.

2.3. 하와이에서의 독립운동


1912년 11월 30일, 박용만은 하와이국민회 기관지 <신한민보> 주필로 초빙받자 박상하(朴相夏)와 함께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몽고리아 호를 타고 12월 6일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하였다. 이후 1913년 하와이지방총회장에 당선된 박상하의 지원하에, 그는 하와이에서 한인 자치제도를 실현하고자 했다. 1913년 1월 27일 자치규정 6장 155조를 기초하여 발표하였고, 5월에 하와이지방총회를 법인으로 인정해달라고 하와이지방정부에 요청하여 관허를 받았다.
박용만은 자치제도 확립에 이어 국민의무금제도를 실시했다. 그는 지방총회 재정을 국민의 자격이라는 관점에서 납세의 의무로 전환해 모든 회원에게‘국민의무금’을 부과하여 재정 안정을 꾀하였다. 또한 1913년 12월부터 군단과 사관학교 설립을 추진하였고, 1914년 6월 10일 오아후 가홀루에서 '대조선국민군단'과 '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를 창설하고 8월 29일 병영 낙성식을 거행해 병학교 학생 180여 명이 총회장 박상하 앞에서 사열식을 가지게 했다.
대조선국민군단과 사관학교 운영은 하와이 각 지방의 군사훈련을 담당하던 하와이지방총회 연무부에서 담당했으며, 사관학교 주요 인물은 박용만을 비롯하여 박종수 · 안원규 · 구종곤 · 이호 · 김세근 · 이정권 · 노훈 · 임응천 · 한태경 · 한치운 · 이치영 등이었다. 이들은 군단 창설에 필요한 재정 마련과 후원은 물론 사관학교 주요 기간요원과 교관으로 활동했다. 다만 하와이군사령부가 실제 군총 사용을 불허했기 떄문에, 훈련시에는 목총으로 대체했다.
대조선국민군단은 파인애플 경작지를 물려받거나 일부 농업인들의 기부를 받아 군단의 재원을 확보했다. 대조선국민군단의 운영은 한인소년병학교 시절부터 지켜왔던 둔전병제가 원칙이었는데, 단원들은 군단에 기숙하면서 농장에 나가 노동을 하고 틈틈이 군사훈련과 학습을 하였고 100여명으로 시작하여 많을 때는 300여명에 이르렀다.
대조선국민군단 사령부는 모든 한인 독립군을 ‘국민군단’으로 편성하려는 목적하에 조직된 것이었다. 이 사관학교의 교과내용은 박용만이 헤이스팅스 한인소년병학교의 교과과정을 발전시킨 것이며 교재는 28종에 달하였고, 특히 박용만이 저술한 <군인수지>는 사관학교의 주요 교재로 사용되었다. 군사훈련 도구로는 사관의 45식 단총 39정, 군도 10개, 나팔 12개, 북 6개, 목총 350정이 있었다.
1914년경, 박용만은 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관 건축사업을 실시했다. 이때 이승만도 그해 7월 독자적으로 한인여자기숙사 설립을 위해 동포들로부터 교육특별의원금을 모집했다. 하지만 자금 마련이 어려워지자 국민회에 원조를 요청했다. 그런데 이승만은 국민회가 이전에 교육사업을 위해 마련한 엠마기지를 자신의 명의로 제공해 달라고 요구했다. 이에 박용만은 이승만에게 불편한 감정을 가졌고, 이로 인해 서로간의 갈등이 불거지기 시작했다.
1915년도 하와이지방총회 선거에서, 박용만 계열의 김종학 총회장이 당선되고 임원진이 구성되었다. 그러자 이승만은 국민회 개혁을 명분으로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승만은 교육비 지원과 <국민보> 보조 문제, 그리고 박용만의 국민군단 지원 및 규정 개정문제 등을 거론하면서, 자신이 하는 일을 반대하는 것은 곧 국민회를 반대하는 것으로 못 박으면서, 자신이 하와이 한인사회의 모든 문제를 직접 처결할 것임과 동시에 국민회 재정을 직접 관장하겠다고 하였다.
이후 1915년 5월 임시대의회가 개최되었지만 정족수가 미달되었는데, 회의 참석자는 이대로 강행하기로 하고 지난번 총선거와 모든 법안을 일체 무효화하기로 의결했다. 국민회에서 국민회관 건축비를 유용한 사건이 터졌는데 그 책임을 물어 김종학 회장을 파면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이승만 지지세력이 새로운 임원진을 형성하면서, 국민회는 이승만 지지세력에 의해 완전 장악되었다. 당시 박용만은 중앙총회 부회장 취임식에 참석하기 위해 하와이를 떠나 샌프란시스코에 있어서 이승만의 이같은 행위를 저지하지 못했다.
이후 이승만 지지자들은 박용만 지지자들을 향한 구타와 테러를 자행했다. 이승만은 여기서 더 나아가 1915년 7월 박용만에게 편지를 보내 김종학 등 국민회 전 임원들과 관계를 단절하라고 경고했다. 박용만은 대세가 기울었다는 걸 깨닫고 자신이 직접 운영하던 국민보 사의 모든 소유 재산과 노상주식회사 주식 전부를 하와이국민회에 반환하여 국민회와의 관계를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
박용만 계열이 이렇듯 하와이에서 약화되면서, 대조선국민군단은 갈수록 위축되었다. 여기에 1915년 여름 일제가 미국 국무장관에게 강력히 항의했고, 하와이지방정부는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에 승인했던 특별경찰권을 취소했다. 게다가 박용만의 사관학교는 농장주가 나가달라는 압력을 넣는 바람에 폐쇄되었다. 결국 대내외의 압력과 재정난에 시달린 대조선국민군단은 1917년경 해산되었다.
이렇듯 하와이에서 갈수록 무장투쟁이 어려워지자, 그는 다른 곳에서 독립운동 방략을 모색했다. 이보다 앞서 1912년경 만주에 둔전병제에 입각한 독립군기지 건설을 추진했고, 1916년경 조선, 상하이, 서북간도에 여러 기관을 조직했다. 1917년 일제보고서에는 박용만이 이승만과의 대립에서 세를 잃고 신변의 위협을 느껴 단신으로 하와이를 탈출한 뒤 상하이에 거주하면서 양기탁, 박은식, 신규식 등과 대동보국단이라는 비밀결사단을 조직했다고 기술되었다.
1917년 7월 14일 상하이에서 대동단결선언을 신규식, 조소앙 등 14인과 함께 발표한 그는 1917년 10월 29일부터 31일까지 뉴욕에서 개최된 소약소국동맹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했다. 이는 이승만과 하와이지방총회장 안현경이 비밀리에 자금을 모금하여 그를 대표로 파견한 것이었다. 이 당시만 해도, 박용만은 이승만과 완전히 단절하지는 않았다. 이승만은 하와이를 완전 장악한 뒤 박용만에게 유화적인 태도를 가졌고, 박용만 역시 이승만과 더이상 대립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런데 1918년 1월 15일 국민회 대의회에서 조사원이 재정장부를 조사하던 중 이승만 계열 인사들이 재정을 유용한 사실이 밝혀졌다. 이에 2월 11일 회석에서 이승만의 재정 남용에 대해 해명을 요구하자, 바깥에 매복하였던 사람들이 들어와서 몽둥이를 휘둘러 유혈이 낭자하였고, 대의회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승만은 경무청에 달려가 대의원 중에 흉기를 가지고 사람을 살해하려는 위험이 있으니 그들을 체포하라고 하였다. 이후 총회장 안현경이 마침 재정 유용사건 조사를 강경하게 주장했던 유동면, 김성률, 이찬숙, 김한경 4인을 지목했고, 경찰이 이들을 포박했다.
이후 살인미수 혐의로 재판이 열렸고, 증인으로 출석한 이승만은 그들을 박용만 패당이라 지칭하며, 미국과 일본 사이에 중대 사건을 일으켜 평화를 방해하려는 자들이라고 비난했다. 1918년 2월 27일 재판에서, 이승만은 박용만이 미국 영토에 한국 국민군단을 설립하고 일본군함인 출운호가 호놀룰루에 도착하면 파괴하려 한다면서, 미·일 관계를 악화시키고 국제평화를 저해하는 음모행위이므로, 미국 내에서 그의 군사활동을 금지시키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하와이법정은 3월 8일 이승만의 고소를 모함으로 판명하고 살인미수는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기각되었다.
이 일련의 상황에 격분한 박용만은 시국소감을 발표해 그동안 쌓였던 울분을 토했다.

이승만이 재무 직임을 갖고 공금을 잘못 쓴 것이 분명한데 그것을 교정하려는 대의원들을 모함하여 경무청에체포하고 재판한 것이 염치없는 일이다. 더욱이 재판석에서 국민군단의 항일운동이 죄이고 국제평화의 소란을 음모하는 것이니 초처하라고 호소한 것은 우리 동포의 애국정신을 변천시키고 독립운동을 음해하는 악독한 행동이다.

이승만이 하와이 오던 때까지도 국민회의 기상이 장쾌하였고 동포의 염치와 양심이 아름다워 안으로 단체에 화기가 있고 밖으로 각국 사람들의 칭송이 있더니 오늘의 정형은 동포가 있는 곳마다 싸움인데 호소할 곳이 없고 외국인들의 치소(嗤笑)를 받아서 대외신용이 폭락되었으니 어찌하여 이렇게 된 것을 살피고 깨닫는 바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이승만이 글로는 민주를 주장하고 실제는 경우와 공론을 멸시하며 말로는 도덕을 부르고 행실로는 작당과 몽둥이질을 교촉하며 동포를 대하여 죽도록 싸우자 하고 파쟁을 기탄없이 조장하니 이것이 자기의 조그마한 지위를 보존하려고 동포로 하여금 서로 충돌하여 망운을 초래케 하는 행동이다.

박용만 계열은 국민회 재정남용에 대한 정확한 조사를 촉구하기 위해 1918년 3월 10일 오아후 지방대표들을 중심으로 ‘하와이국민회임시연합중앙회’라는 임시단체를 조직하였고 하와이지방총회장 안현경의 불신임과 지방총회에 국민의무금을 납부하지 말 것 등을 결의했다. 이후 하와이 한인사회는 하와이국민회와 갈리히연합회(임시연합회)로 양분되었고,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의 위상 역시 하와이 한인사회에서는 급격히 약화되었다.
이에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 안창호는 직권으로 안경현 지방총회장과 이종흥 연합회 중앙회장 그리고 전체동포에게 각기 3가지 권고문을 작성하여 <국민보>에 게재할 것을 요구하고, 11월 연합회 해산을 권고했다. 이로서 미주한인사회는 안창호, 박용만, 이승만 계열로 3분되었고, 10여년간 해외한인의 최고기관으로 기능했던 대한인국민회는 북미와 멕시코 지역으로 영향력이 축소되었다. 이후 박용만과 이승만의 관계는 완전히 파탄났다.

2.4. 중국-러시아에서의 독립운동


1919년 3.1 운동 소식을 접한 뒤, 박용만은 오아후, 하와이, 카우아이 섬에서 남아있는 지지자들을 모아 대조선독립단 하와이지부를 조직하고, 대한독립선언서를 번역하여 지역신문에 게재했다. 이후 3월 30일 대조선독립단 하와이지부가 정식으로 조직되었고, 6장 58조로 구성된 약장을 제정했다. 이후 4월 13일 상하이에 조직된 임시정부 외무총장에 피선되었으며, 한성정부로부터 외무총장으로 임명되었다.
1919년 5월 17일 미 육군 운송함 토마스 호를 타고 호놀룰루를 출발한 박용만은 마닐라를 거쳐 7월경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다. 8월 말 조성환, 백준, 박상환, 이승복, 김병희 등과 만나 대한국민군(大韓國民軍)을 조직하고 총사령에 조성환을 추대하고 자신은 총참모로 취임했다.
1919년 9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총장에 피선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이동휘 등과 함께 하와이 대조선독립단을 비롯하여 국내 및 해외 각지에 국민군을 확대, 조직하는 방안을 강구했다. 이에 임시정부 측은 상하이에 와서 외무총장으로 활동하지 않는 박용만을 비판했고, 박용만은 1920년 4월 3일 상하이로 와서 만찬회에 참석해 안창호에게 "나는 군사주의에 뜻이 있으므로 외교일은 보지 못하겠다."고 말한 뒤 4월 19일 국무원 회의에서 사임했다.
그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국민군을 창설하는 것이 연해주에 주둔한 일본군의 탄압으로 여의치 않자 베이징으로 거점을 옮겼다. 1920년 4월 중순 문창범을 만나 군사단체의 통일과 러시아에서의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는 방안을 협의했다. 이후 김가진이 조직한대동단에 가담하여 무정부장으로 활동하다 상무부장 나창헌이 러시아로 가서 활동할 것을 권하자 5월에 신채호, 유동열, 김영학 등과 함께 베이징을 떠나 러시아로 향했다.
그는 러시아에서 문창범, 김영학, 김하석, 고창일, 신채호, 유동열 등과 함께 독립군의 무장투쟁을 위한 무기 및 탄약 구입을 위해 노력하는 한편 바이칼 호 서쪽 지역에서 국민군 조직을 추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1920년 7월 극동공화국 전권위원인 유린을 베이징에서 만나 그해 늦여름 비밀리에 모스크바로 건너가 소련 정부와 비밀조약을 맺었다. 그 내용은 임시정부와 러시아정부는 상호 승인하고, 러시아정부는 한국의 독립을 위해 시베리아에 독립군 근거지를 마련하여 탄약과 무기를 공급하고 함께 대일항전을 전개하며, 러시아정부와 임시정부는 중국 · 러시아 · 한국 3국이 중로연합선전부를 설치하자는 것이었다.
<오사카아사히신문>은 이 정보를 입수하여 1920년 12월 10일자 기사에 비밀조약 전문을 실었다. 이에 대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20년 12월 20일 "우리는 구두상으로나 성문(成文)으로나 아직 소련 정부와 아무런 조약도 맺고 있지 않으며, 조약 운운은 일제가 임시정부를 모함하려고 일부러 지어낸 흑색선전이다."라고 해명했다. 박용만이 실제로 이런 조약을 맺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당시 그는 임시정부 외무부장에서 면직된 상태였기 때문에 실제로 조약을 맺었다고 해도 큰 의미는 없다.
1921년 1월 베이징에서 유린과 다시 만난 그는 일부 위원을 국내로 파견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이동휘, 문창범, 조성환과 만나서 극동공화국과 소련의 후원을 얻어 이동휘의 한인공산당, 문창범의 대한국민의회, 만주의 독립운동세력과 연계해 베이징에 만주독립군총사령부를 설치할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은 일본군의 간도 출병 이후 만주 독립군이 러시아로 대거 이동하자 만주에 남아있던 독립군을 총괄하고자 한 것이었다.
1921년 3월 러시아 공산주의자 극동위원과 함께 베이징으로 돌아온 박용만은 그해 4월까지 신숙과 함께 이동휘 계열의 한족공산당 소속 박진순 · 김립과 함께 재정 지원과 군사단체 통일문제를 논의하였다. 박용만이 이동휘의 한족공산당과 문창범의 대한국민의회의 군사적 통합을 시도한 것은 러시아와 극동공화국, 그리고 코민테른의 지원을 얻어 독립 군을 무장시켜 대일항전을 전개하려는 목적 때문이었다.
1921년 4월 17일 군사통일회의를 베이징 교외의 삼패자회원에서 개최한 박용만은 국민회, 대한광복단, 조선청년단, 노동당, 통일당, 하와이 대조선국민군단, 대조선독립단, 대한국민회, 서로군정서, 광한단, 대한국민의회를 하나로 통합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협의 중에 광한단과 서로군정서가 이탈했다. 군사통일회의는 군사통일촉성회에 참석한 인물들을 중심으로 박용만과 신숙의 천도교 계열 인물들이 주로 참가하였다.
이들은 군사통일회의를 통해 군사단체 통일과 군사상 총기관 설립안 등이 통과되자 바로 실행에 들어갔다. 5월 31일 중국 · 러시아 방면에 사관학교를 건설하고 매년 800명 장교를 양성하기로 했고, 러시아의 통일된 독립군부대는후일의 국내 진공작전을 ‘준비’하고 만주의 독립군부대는 지휘계통을 통일하여 국경지대에서 유격전을 벌이는 ‘진공(進攻)’을 감행하기로 의결했다.
이들의 계획은 산동방면에서 특공대가 황해를 건너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 서울 교외 한강가의 서울발전소를 파괴하고 미리 구매하여놓은 일본인 집 3채에 휘발유로 화재를 일으키고 각 혁명무장단체가 일제히 서울의 일본 수비대를 습격한다는 것이었다.
한편, 박용만은 베이징에서 신채호, 김창숙, 조성환, 노백린, 서왈보 등과 함께 제2차 보합단을 조직했다. 단장엔 박용만, 군임장에 노백린, 재임장에 김창숙, 내임장에 신채호, 사령관에 김좌진이 선출되었다.
박용만은 군사통일회의 개최 직후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부정하고 새로운 정부 수립을 도모했다. 1921년 4월 24일, 군사통일회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 불승인안을 통과시키고 임시정부에 통고했으며, 27일 대조선공화국 임시정부 승계안을 통과시켰다. 그들은 선언서에서 "우리 독립문제는 군사(軍事)가 아니면 해결이 불가능하고 군사운동이 성공하려면 군사통일이 절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그러면서 임시정부 불승인 사유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첫째, 상해임시정부는 상해 한 구석에 있는 극소수 사람의 사심으로서 만세소리 중에 국내 국민대회에서 조직 발표된 정부를 무시하며 국내외 의사를 널리 수렴하지 아니하고 국부적으로 조직되었다.

둘째, 그 신조직이 벽두에 대미위임통치 청원사건이 드러났기 때문에 그 조직이 근본적으로 부정당하고 불신성하다.

1921년 11월, 군사통일회의는 베이징에서 조선공화정부를 수립하고 대통령 이상룡, 국무총리 신숙, 외무총장 장건상, 학무총장 한진산, 내무총장 김대지, 재무총장 김갑, 군무총장 배달무, 교통총장 박용만이었다. 이들은 군사통일촉성회 발기인이거나 군사통일회의에 참여한 인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조선공화정부는 예산 부족과 내부 분규로 수립되지 못했다.

2.5. 독립군기지 개척운동


1922년 봄, 박용만은 훈하유역에 땅을 빌려 벼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그는 이때부터 둔전병제에 입각한 독립군기지 개척을 준비하면서 후원을 이끌어내기 위해 고심했다. 1922년 4월 베이징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던 우페이푸를 찾아가 병기와 군자금을 제공해주면 동북삼성의 한인들을 무장시켜 선양군을 배후에서 공격하여 장쭤린을 무찌르겠다고 제안했으나 거절당했다.
이후 거액의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김규흥과 함께 1922년 11월 4일 북경흥화실업은행을 창립했다. 흥화실업은행은 처음엔 김규흥이 중국의 여러 인사들을 규합하여 추진했는데, 박용만이 여기에 가세하여 군자금 모집에 나섰다. 박용만은 베이징 인근 석경산 농장을 경영할 목적으로 1922년 겨울 흥화실업은행으로부터 2,500원의 융자를 받았으나, 1923년 지난 차치료도 갚지 못해 중국인 지주로부터 고소를 당할 정도로 극심한 자금난에 빠졌다.
이와 같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1923년 초 북만주와 서북간도 동지와 연락하여 농장을 개설하고자 노력하였다. 자금 모집 계획이 거듭 실패하여 하와이에도 도움을 요청하여 6월에 400달러, 1923년말에 600달러를 송금받았으나 턱없이 부족했다. 그러던 중 1923년 말 창조파 국민위원회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개최되는 국민위원회에 초청해 1924년 1월 15일 참석하였고 국민위원회에서 박용만은 비서장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파벌싸움을 하는 광경을 보고 환멸을 느낀 그는 러일조약 체결을 앞둔 러시아정부가 한인독립운동가에 대해 국외추방정책을 추진하자 하는 수 없이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이 시기 박용만의 동태를 감시하던 베이징 주재 조선총독부 통역관 기토 가쓰미는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군사통일회는 1922년 박용만 · 신숙 등이 재외선인의 군사단체를 통일하려고 조직한 것으로서 당시 남북 만주 방면과 중국 각지에서 대표자들이 참여하였지만 경비 관계로 뜻과 같이 되지 않고 거의 와해한 것인데 박용만은 당시 통일한 군대를 ‘대조선국민군’이라 명명하고 스스로 총사령관이 되어 군사비를 징집하고 군인을 소집하여 군적부를 작성하고 재외 각지방과 조선내지에 각종의 군직을 임명하는 등 계획했다.

(중략)

만주에서 군정서(軍政署) 기타의 군사단체를 통일하고 이들 군인을 만주 각지에 귀농시켜 소위 둔전병(屯田兵)의 제도를 따라 양병하려 하였다. 그러나 재정 부족으로 실패한 것 같다. 박용만은 그간 서간도 방면에 사람을 보내 군정서와 통일교섭을 하였고 한쪽으로는 북경성의 석경산(石景山)에 있는 땅을 빌려 수전(水田)을 경영했고 또 김복(金復) 등과 상의하여 흥화실업은행 창립을 위해 크게 뛰어다녔는데 불행히 그의 계획은 사사건건 실패로 돌아갔다.

1924년 6월, 박용만은 장춘시에서 일본영사와 면회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김현구(金鉉九)의 <우성유전(又醒遺傳)>에 따르면, 박용만은 중국 군벌 펑위샹이 득세하자 그의 세력기반이며 일본군이 미치지 못하는 내몽고에서 한인에 의한 둔전병 양성을 꾀하기로 하고 펑위샹에게 제안했다고 한다. 펑위샹은 그 제안에 매료되어 일을 추진했다. 그러다 일본이 방해할 것을 우려한 펑위샹은 박용만을 비롯한 3인의 밀사를 일본관동군과 조선총독부로 파견하기로 했다.
이리하여 박용만은 중국인으로 가장해 총독부로 향하다가 총독부에서 운영하던 조선호텔에 묵었다가 일본의 밀정으로 일했던 이주현의 추적을 받고 겨우 중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정두옥의 회고에 따르면, 박용만은 조선에 들어가서 조선총독부를 꾀어내 돈을 취하여 둔전병 양성을 위한 군자금에 사용하려 했다고 한다. 또한 그는 조선에 있는 부인을 만나기 위해 2번 찾아갔다고 한다.
1925년 7월 8일, 박용만은 독립군기지 개척자금 마련을 위해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한인 교포들은 6년만에 돌아온 그를 대대적으로 환영했다. 11일에 독립단 주최로 서재필과 박용만의 환영만찬회가 열렸고, 12일에 500여 청중이 참석한 환영연설회가 열렸다. 박용만은 자신의 계획을 발표하면서, 대조선독립단을 비롯한 하와이 한인들에게 재정 지원을 촉구했다. 일제 정보기록에 따르면, 이때 그는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고 한다.

현재의 조선 반도는 지역이 협애하여 도저히 독립군으로 만들기 부족하다. '''구조선의 영토였던 시베리아 및 만주, 몽고의 땅을 근거로 하여 조선인을 여기에 이주시켜 발전을 추구하여 사실상 동포의 영유로 귀속하게 할 것'''이다. [3]

하지만 이것은 본 첩보원이 미국 내의 한인들에게서 대략적으로 들은 내용을 요약한 것이라서 정확하지 않으며, 실제로는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군자금을 모아달라는 것이었다. 그는 하와이에서 약 1년간 머무르며 군자금 모집과 독립단 조직 강화에 주력했다.
1925년 12월 초, 그는 하와이지구 주둔군사령부에 17매에 이르는 레포트를 제출했다. 레포트의 제목은 '일본과 러시아에 의하여 중국 영토에서 준비되고 있는 또 하나의 세계대전'이었다. 제1장 <러시아의 중국정책>에서, 박용만은 정권과 주의는 바뀌었지만 계속 남하정책을 추진하고 있으며, 소련의 목적은 중국을 비롯한 세계 모든 나라에서 불안과 혼란상태를 야기시키는 것이며, 만주를 점령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기술했다.
그리고 제2장 '중국에 있어서의 일본의 활동'에서는 일본과 소련이 미국과 영국에 대항하는 의미로 동맹관계를 생각하고 있으며, 일본도 중국의 혼란을 원하고 있고 어떠한 대가를 지불하여도 장쭤린을 지지하고 만주를 점령하려 하며, 조선반도는 일본인이 식민하고 2천만 한인을 만주로 내쫓으려 한다고 기술했다. 제3장 '중국의 현황'에서는 군벌 할거하의 중국 현황을 설명하면서, 국립북경대학은 중국에 있어서 좌익교수와 좌익학생들의 소굴로 노동자들을 선동하여 중국을 파멸의 길로 몰고 있으며, 중국을 파멸시킬 3대 인물로 쑨원, 장쭤린, 펑위샹을 거론했다.
박용만은 미국 당국에게 우페이푸를 지원해야 한다고 역설했고, 1926년 4월 20일 워싱턴의 미국무부나 육군부의 고위인사를 만나려 했으나 거절당했다. 이후 1926년 6월 26일 베이징으로 돌아와서 하와이에서 모금한 10,000달러를 가지고 베이징 부근 땅을 구매해 대륙농간공사를 설립하고 영정하(永定河) 부근에서 수전(水田)을 경영하였다. 그리고 소규모 정미소를 설립하여 부근 수전에서 나오는 벼를 사들여 수만석을 정미하기도 했으나 성공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일제 정보기록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연래 북경에 재주하는 배일선인(排日鮮人)의 영수 박용만이 작년 하와이에 가서 동지를 규합하여 얻은 자금 만여원을 가지고 귀래하여 영정하 부근에서 수전 경영을 기도하는 한편 숭무문(崇武門) 밖에서 소규모 정미소를 창설하고 북경 부근의 수전에서 벼를 사들여 수만석의 정미를 만들었으나 중국인측 미상(米商)과의 연락이 원만하지 않아 그 판로에 궁하여 어찌할 바 모르는 상태라고 한다. 정미업은 일시적인 것으로 오래 계속할 전망이 없는 것 같다.


2.6. 암살


1928년 10월 17일, 박용만은 자신의 집에서 의열단원으로 알려진 이해명(李海鳴)의 권총 저격으로 절명했다. 자세한 내용은 박용만 암살 사건 참조.

3. 사후


미국에 거주하는 서재필, 이승만 등 독립운동가들은 박용만을 애국자로 칭송하고, 그의 죽음에 애도를 표했다. <신한민보>는 박용만을 평생에 계획하던 혁명사업을 성취하지 못하고 불행히 흉한에게 암살당한 '드문 애국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 추켜세웠다. 서재필과 이승만도 뉴욕의 유학생들이 발행하는 '삼일신보'에 박용만의 죽음은 암살이라는 장문의 글을 실었다.
그러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비롯한 박용만 반대파들의 입장은 이와는 정반대였다. 1928년 11월 20일, 김구는 이승만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이번에 북경에서 이해명이 박용만을 처형한 것을 암살이라고 하고 장편설(長篇說)을 기재한 것은 우리 독립운동자는 물론 모모주의자들도 삼일신보 에 침을 뱉을 것입니다. 우리가 박용만이 적 총독부에 투항하고 목등(木藤)놈과 동행하여 비밀입국하야 철도여관에서 묵으면서 기밀비를 받아가지고 나온 일이 발각되었습니다.

청년들이 총살하려고 함을 알고, 박은 비밀히 하와이에 가서 노동동지들을 꾀어 자금을 긁어모아 가지고 북경에 몰래 와서 중국여자를 첩으로 두고 농간을 부리므로, 이해명이 총살하고 즉석에서 피포 되어 중국법정에서 조사한 결과 정치범으로 5년 역을 선고받은지라. 박의 첩이 박용만이 평시에 운동하던 문적을 제출하고 이러한 역사가 있는 사람을 정탐이라 하느냐 항고하는 것을 안 북경의 우리 각 단체들이 연합증명을 하고, (임시)정부에서 중국정부에 박용만의 죄상이 사실임을 통보하였습니다.

김구는 박용만을 적의 스파이로 단정하면서 청년들이 그를 총살한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보았다. 이는 임시정부 인사들의 공통된 시각이었다. 그들은 임시정부를 공개적으로 부정하고 반임시정부파 인사로서 활동한 그를 용납할 수 없었다. 다른 독립운동계열 인사들 역시 박용만을 부정적으로 바라봤다. 1928년 10월 21일 중국신문 <세계일보>는 박용만의 피살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실었다.

이달 17일에 숭외상 2조에 살던 박용만 피살사건이 발생한 후 각방에서의 보도가 옳지 못한 점들이 있어 지금 취재하여 얻은 실정을 다음에 게재한다. (중략) 서력1919년 구라파전쟁이 끝난 후 한인들도 독립을 선포하게 되고 임시정부를 상해에 설립하게 되었는데, 박도 경력관계로 외무부장에 추천되어 중국에 건너와 독립당의 환영을 받은 바 있었다.

그런데 중국에 온 후 독립당에 충성스럽지 못한 행동이 하나둘이 아니었기에 크게 당의 신용을 잃었고 후에 박은 음밀히 북평주재 일본정보원 모와 연락하여 조선총독부에 항복하여 남몰래 두 차례나 조선에 들어가 타합한 바 있다. 이것이 폭로된 후 한당의 간부는 곧 사형선고를 내렸다.

박은 한인사회에 용납되지 못할 것을 알고 또 미영토 호놀룰루에 도망가서 재미한국인 노농단체들을 속여 수만금을 빼앗고 북평에 돌아와 소위 대륙농간공사를 조직하고 편안한 생활을 도모하고 있었다. 이번 피살사건이 일어나자 많은 한인들이 잘했다고 하였다. 범인 이 아무개가 돈을 꾸려다 못 꾸어 죽였다는 이야기는 마땅히 사실을 엄폐하려는 낭설일 것이다.

중국인들 역시 박용만을 일제에 협력한 자로 인식했고, 박용만을 암살한 이해명의 법정진술에 갈채를 보냈다. 결국 중국 법정은 이해명을 애국자라 하여 정치범으로서 징역 4년형을 선고했다. 이에 박용만의 유족이 최고법정에 상고하자, 1929년 4월 30일 한국독립당 난징족성회는 '중국동포에게 삼가 알리는 글'을 중국 법정에 제출했다. 이 글은 박용만에 적대적이었던 독립운동가들의 인식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한국독립당 하북(河北) 교우부(交友部)가 보내온 편지에서 저희 나라 사람 이해명군이 박용만을 총살한 사건이 해당 지역 법정(法庭)의 일심과 재심 심판처를 거치면서 5년 2개월의 도형(徒刑)에 처해졌으나 북평(北平;北京) 고등법원 검찰관 석병주(石秉鑄)군이 승복하지 않고 장차 수도(首都) 대리원(大理院)의 제3심 최고법정에 항소를 제기할 것이라는 내용을 접했습니다.

이런 자는 십수년간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혁명은 하지 않고 반혁명을 하는 데 이르렀고, 적국에 붙어 적국의 주구[犬]가 되었습니다. 이 말이나 소나 노예와 다름없는 자의 남은 여생에 대해서는 장차 죽여버린다 해도 애석할 것이 없습니다. 근근히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조국 인민들의 반 가닥도 안 되는 삶의 희망을 일방적으로 내던진 것은 마치 살무사나 도마뱀 같은 마음으로 승냥이나 여우같은 행동을 한 것과 같습니다.

무릇 혈기 있는 자라면 누구나 그 살코기를 먹고 쉬려고 할 것인데, 하물며 조선사람이고, 더군다나 조선혁명당 사람임에랴 더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이해명 군은 2천 4백만 민중의 뜻을 대표하여, 전 인류 공동의 적을 토벌한 것이니, 그 기개와 행동은 찬양할 만하고 한편 애도할 만하며,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고 사당에도 모서 뜻을 기릴 만합니다.

김원봉을 위시로 한 의열단 계열 역시 박용만을 적대시하긴 마찬가지였다. 소설가 박태원이 1947년에 김원봉의 구술을 받아서 지은 '약산과 의열단'에는 박용만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되었다.

박용만은 상해임시정부의 초대 외무부장과 다음에 군무부장을 차례로 지냈고 북경에서 군사통일회를 소집한 일도 있어 소위 독립운동의 열렬한 지사로 당시 명성이 가히 혁혁한 바가 있던 사람이다. 그러나 그의 뜻은 굳지 못하였다. 그의 절개는 결코 송죽에다 비길 것이 아니었다. 어느 틈엔가 그가 왜적들과 비밀히 왕래가 있다는 정보를 받고, 이래, 의열단은 은근히 그의 동정을 감시하여왔다.

그리고 마침내, 그와 북경 외무성 촉탁 기후지(木藤)란 자와 사이에 은밀한 교섭이 있음을 적확히 알았다. 얼마 있다 이 변절한 자는 국내로 들어가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도(齊藤實)와 만났다. 우리는 그들 사이에 있은 밀담의 내용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전일의 소위 애국지사가 오늘날에는 강도 일본의 주구가 되어 옛 동지들을 왜적에게팔려는 의논이었음은 다시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일이다.

사이토와 밀담을 마친 그는 곧 서울을 떠나 잠깐 해삼위를 들러서 북경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개척사업을 하겠노라 하여 대륙농간공사라는 것을 만들어 놓았다. 의열단은 이 추악한 변절자를 그대로 두어 둘 수 없었다. 그들은 이 자에게 마침내 사형을 선고하기에 이르렀다.

이렇듯 박용만은 미국에 있던 몇몇 독립운동가들을 제외한 모든 이들에게 '일제에게 빌붙은 변절자' 취급을 받았고, 그는 오랜 세월 대중의 외면을 받았다. 그러다 학계의 연구 결과 박용만이 일제에게 협조했음을 입증하는 기록이 없으며, 박용만이 암살될 무렵 그를 불령선인으로 지칭한 일본 문서들이 대거 발견되면서, 학계는 그가 변절하지 않았으며, 그의 암살은 오해로 인한 것이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에 따라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정부는 박용만을 독립유공자로 인정하고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1] 1928년 초, 옌시산이 국민 혁명군 제3 집단군 총사령에 임명된후 8월, 옌시산의 부하인 제3 집단군 제26사 사장 장잉우(張英武)은 위임장을 써 박용만을 국민 혁명군 참의(參議)로 임명되게 하였다. (한애라. 박용만의 중국과 러시아에서의 민족 운동, 학위 논문(석사)-- 상명 대학교 일반 대학원 : 사학과 2015년 8월, 64쪽)[2] 1895년 관비유학생으로 일본에 유학하여 게이오의숙을 재학하고, 1896년 미국으로 유학가서 버지니아주 로아노크대학에서 2년간 수학했다. 이후 소환되어 외부주사, 농상공부 기수(技手)로 활동한 뒤 1900년경 관직에서 물러난 후 평남 순천군 사립시무학교에서 일본어와 영어를 가르쳤다.[3] 최용호(하와이 주립 대학교 역사학과 명예 교수), 박용만 - 문무를 겸비한 비운의 민족주의자 (한국사 시민 강좌 47집 1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