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연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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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제네바의 구 국제연맹 본부 건물.
유엔으로 조직이 계승된 뒤에는 유엔 유럽본부 사무국(유엔 제네바 사무국)으로 쓰이고 있다.
'''국제연맹'''
League of Nations(L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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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맹기(1939년~ 41년까지 쓰인 준공식기)'''
형태
국제기구
존속기간
1920년 1월 10일 ~ 1946년 4월 18일
위치
전세계
본부
스위스 제네바
사무총장
에릭 드러먼드(1920~33)
조세프 아베놀(1933~40)
숀 레스터(1940~46)
공식언어
영어, 프랑스어
주요사건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1919년: 베르사유 조약
1920년: 설립
1939년: 제2차 세계대전
1946년: 해체
해체 이후
유엔
1. 개요
2. 회원국
3. 역사
3.1. 창립
3.2. 가입국
3.3. 문제점
3.4. 짧은 평화
3.5. 균열
3.6. 폭풍 전야
3.7. 전쟁과 해체과정
4. 국제연맹의 교훈과 유산
5. 국제연맹 관할지
6. 여담
6.1. 한국과의 관계
6.2. 대중매체의 국제연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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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차 세계 대전전쟁의 재발을 막기 위해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제안하여 1919년 기획되어 1920년 설립되었으며, 초기 회원국은 42개국, 최대 60개국이 참여했던 국제 기구이다.
유엔(국제연합)의 밑거름이 되었으나 사실 전쟁을 막는다는 원 목적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1946년 해체되고 연합국에 그 자산과 국제법원(국제사법재판소)과 국제 노동 기구 등 대부분의 하위 조직이 이전되었다. 당시 본부는 스위스 제네바에 있었다. 스위스가 오랫동안 유엔 회원국이 아니었음에도 유엔 산하 기구들의 본부가 대부분 제네바에 설치된 것은 이러한 역사적 이유도 한몫 했다.

2. 회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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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해당 국가'''[1]
'''창립 회원국'''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2][3], '''프랑스 공화국''', 네덜란드 왕국, 벨기에 왕국, 룩셈부르크 대공국, 스위스 연방국, 포르투갈 공화국, 폴란드 공화국, 노르웨이 왕국, 스웨덴 왕국, 그리스 왕국, 라이베리아 공화국, 남아프리카 연방[4], 이란 제국, 인도 제국[5], 중화민국[6], 시암 왕국[7], 오스트레일리아 연방[8], 뉴질랜드 자치령, 캐나다 자치령[9], 쿠바 공화국, 파나마 공화국, 콜롬비아 공화국, 우루과이 동방공화국
'''탈퇴 후 재가입한 창립 회원국'''
유고슬라비아 왕국, 아르헨티나 공화국
'''탈퇴한 창립 회원국'''
스페인국, 프랑스국[10], '''이탈리아 왕국''', 덴마크 왕국,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 루마니아 왕국, '''일본 제국''', 과테말라 공화국, 엘살바도르 공화국, 온두라스 공화국, 니카라과 공화국, 아이티 공화국, 페루 공화국, 베네수엘라 볼리바르 공화국, 브라질 공화국, 파라과이 공화국, 칠레 공화국
'''도중 가입한 회원국'''
아일랜드 자유국[11], 핀란드 공화국, 에스토니아 공화국, 라트비아 공화국[12] , 리투아니아 공화국[13], 불가리아 왕국, 터키 공화국[14], 이집트 왕국, 에티오피아 제국, 이라크 왕국[15], 아프가니스탄 토후국, 멕시코 합중국, 에콰도르 공화국
'''도중 가입하고 탈퇴한 회원국'''
'''독일국'''[16], 단치히 자유시[17], 오스트리아 연방국, 헝가리 왕국, 알바니아 왕국,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코스타리카 공화국
'''국제연맹 위임통치령'''
토골랜드(영), 토골랑(프), 카메룬(영, 프)#, 르완다-우룬디(벨)[18], 탕가니카(영), 나미비아(영남아), 시리아-레바논(프), 팔레스타인(영), 요르단(영), 메소포타미아(영)[19], 나우루(영), 사모아(영뉴), 뉴기니-비스마르크 제도-부건빌(영오), 남태평양(일)
'''위임통치표기''' 영국-영, 프랑스-프, 벨기에-벨, 영국령 남아프리카 연방-영남아, 영국령 오스트레일리아 연방-영오, 영국령 뉴질랜드-영뉴, 일본-일
'''미가입국'''
리히텐슈타인 공국, 산마리노 공화국, 모나코 공국, 안도라 공국, 바티칸 시국, 아이슬란드 왕국[20], 헤자즈 왕국[21], 예멘 왕국, 네팔 왕국, 부탄 왕국, 몽골 인민 공화국, '''미합중국'''[22], 필리핀 자치령[23]
'''회원국의 속령·식민지'''
'''영국령'''[24] 감비아, 시에라리온, 골드 코스트, 나이지리아, 수단, 소말릴란드, 우간다, 케냐, 잔지바르, 북로디지아, 남로디지아, 니아살랜드, 베추아날랜드, 스와질란드, 바수톨랜드, 쿠웨이트, 카타르, 트루시얼 스테이트, 오만, 아덴, 실론, 말라야 연방, 싱가포르, 사라왁, 북보르네오, 뉴기니, 솔로몬 제도, 뉴펀들랜드 자치령[25], 가이아나
'''프랑스령'''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 서아프리카[26], 적도 아프리카[27], 인도차이나, 기아나
'''네덜란드령''' 동인도, 수리남
'''벨기에령''' 콩고
'''포르투갈령''' 기니비사우, 앙골라, 동아프리카
'''탈퇴한 회원국의 식민지'''
'''스페인령''' 사하라, 모로코, 적도 기니
'''이탈리아령''' 리비아, 동아프리카, 소말리아[28]
'''일본령''' 관동, 가라후토[29], 조선, 대만
'''덴마크령''' 그린란드
'''미가입국의 속령·식민지'''
'''미국령''' 하와이, 알래스카[30]

3. 역사



3.1. 창립


우드로 윌슨은 '평화 원칙'을 내세우며 베르사유 조약 1조에 국제연맹을 설립한다는 항목을 넣는 데 성공했고, 42개국이 가입했다.
UN과 달리 최고기관이 이사회가 아닌 총회였는데, 초기 상임이사국영국, 프랑스 제3공화국, 일본 제국, 이탈리아 왕국이었다. 뒤에 보겠지만 이후 바이마르 공화국(1926년~1933년)과 소련(1934년~1939년)이 잠시 상임이사국을 맡았다. 이밖에 브라질, 스페인, 폴란드가 상임이사국 자리를 얻기 위해 노력했지만 좌절되었다.[31]

3.2. 가입국


1919년에는 영국 본국(연합왕국) 및 당시 영국령 자치령들(뉴펀들랜드 자치령 제외)[32]과 최대 식민지 인도 제국, 프랑스 제3공화국, 일본 제국, 이탈리아 왕국, 그 외 유럽중남미의 여러 독립국들 위주로 가입되었고, 체코슬로바키아 제1공화국, 유고슬라비아 왕국, 루마니아 왕국 등이 독립국으로서 새로 가입했다.
뒤이어 1920년에는 최초로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인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과 구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았던 알바니아 제1공화국, 불가리아 왕국, 1921년에는 발트 3국, 1922년에는 헝가리 왕국, 1923년에는 아일랜드 자유국에티오피아 제국이 들어가면서 점점 국제연맹은 회원을 확대했다.

3.3. 문제점


이런 초기 상황에도 불구하고 국제연맹은 세 가지의 근본적인 문제점이 있었다.
  1. 제1차 세계 대전의 패전국인 독일 제국, 오스만 제국[33]공산주의 국가인 소련이 가입을 거부당했다.
  2. 정작 본 제안국인 미국이 먼로 독트린을 이유로 공화당이 다수인 미국 상원에서 부결되어 가입하지 못했다.[34]
    말 그대로 차 떼고 포 뗀 상황이었다. 여기에 더해...
  3. 다수결이 아닌 만장일치제였고, 군사적 제제 수단이 전무했으며, 상임이사국이 특별히 이권이 없었다.[35]
이건 여러모로 막장이었다. 강대국의 입장에선 자신이 특별하게 대접을 받는 게 아닌 수십 개 나라 가운데 하나로만 취급되었기 때문에 국제연맹에 가입해 있다고 해서 특별히 이득을 볼 거리가 없었고, 이권이 없다는 것은 '''나가도 손해 볼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으므로''' 뭔가 마음에 안 드는 게 있다면 그냥 탈퇴하면 그만이었다. 반면 약소독립국들의 입장에선 강대국이 설친다고 해도 국제연맹이 항의와 경제봉쇄 외에는 뭔가를 할 수가 없었고, 숫자를 빌미로 단체 머릿수 과시에 나서지도 못하니 뭘 써먹을 수도 없었다. 그러니까 어느 나라 입장에서도 이익이 될 게 없었다.
결국 강대국도 약소국도 '''"수틀리면 탈퇴한다!"'''를 시전하게 된다.
다만 영국과 프랑스 중심 체계도 당시 미국의 국제적 영향력이 비교적 제한적이었고, 국력이 절정에 달한 (것처럼 보이는) 대영제국과 프랑스 식민제국을 중심으로 세계 질서가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이 무렵에는 크게 결함있는 사항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이미 가입한 국가와 그 식민지 만으로 전 세계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또한 미국은 전반적으로 정치권과 국민여론이 고립주의를 옹호하고 있었기 때문에 윌슨의 정치력이 좀 더 뛰어나서 가입을 했다고 해도 결과적으로 큰 차이는 없었을 것이다.

3.4. 짧은 평화


코스타리카가 가입한 지 5년만인 1925년 탈퇴하고, 다음 해인 1926년 6월에는 브라질이 상임이사국 진출에 실패하고 분노하여 탈퇴해버리면서 국제연맹의 탈퇴행렬은 시작되었다.
그래도 당장은 모든 것이 무너진 게 아니었고, 오헝제국 해체와 러시아의 공산화 등으로 들끊었던 유럽 내부의 여러 위기들을 국제연맹이 조정에 성공하면서 어느 정도의 성과를 보였다. 무엇보다 같은 해 9월 바이마르 공화국이 가입해서 상임이사국이 되었다. 또한 군비축소위원회도 그럭저럭 돌아가고 있었고, 조금 이르게는 워런 G. 하딩이 태평양 군축회의에서 영일동맹을 끊고 군비경쟁을 완화시켰다. 이런 상황이 되자, 국제연맹체제를 진두하던 영국과 프랑스는 이제 전쟁 이전의 상황으로 완벽하게 돌아왔다고 안도하게 되었다.
사실 세계대공황이 망쳐놓기 전에는 여러 성과들을 냈다. 1921년엔 스웨덴핀란드 사이의 올란드 제도 분쟁을 정리했고, 바이마르 공화국폴란드사이의 북실레시아 영토분쟁을 해결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국제 연맹의 커다란 공헌으로 1921년에 알바니아 제1공화국과 유고슬라비아 왕국 사이, 1925년에 그리스 제2공화국과 불가리아 왕국 사이의 전쟁을 막으면서 1925년의 로카르노 협정과 함께 대화와 존중을 통한 전쟁없는 세계로 점점 다가가는 듯 보였다. 그러나 1929년 대공황이 시작되면서 국제연맹은 점차 쇠퇴하게 된다.

3.5. 균열


세계대공황의 앞에서 국제연맹은 무력하게 영국과 프랑스의 블록화를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국제연맹은 빠르게 무너져내렸다. 물론 이 와중에 멕시코(1931년), 터키와 이라크 왕국(1932년)이 가입하긴 했지만, 나치파시스트가 등장하고 일본 제국은 만몽과 화북 지역의 이권이 일본의 생명선이라 주장하며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국을 수립했고 성동격서를 위해 1932년 제1차 상하이 사변을 일으켰다. 이어 1933년 열하사변을 일으키기에 이르렀다. 이에 중화민국의 국제연맹 제소가 있었지만 일본의 탈퇴 협박과 실질적인 제재 수단 부재 때문에 국제연맹의 대응은 지리멸렬했다.
게다가 이 와중에도 소련은 계속 거부되었고, 미국은 끝까지 가입하지 않았다(...).
그래도 국제연맹을 구성한 기존 열강들은 평화의 가능성을 신뢰하고 있었다. 일본에는 경제 제재를 경고하고 실제로 만주까지 조사단(그들이 쓴 보고서는 Lytton report)[36]을 파견하고 만주국의 승인을 거부하고 일본군 철수를 권고했다. 또 같은 회원국끼리의 전쟁인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공(1935년)과 스페인 내전(1936년)에도 훈수를 두고 다른 회원국의 참전을 막았다.[37]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일본과 이탈리아는 그런 말을 듣느니 탈퇴가 더 빨랐다.''' 독일 역시 아돌프 히틀러가 베르사유 체제의 폐기를 선언하면서 1933년에는 일본과 독일이, 뒤이은 1937년에는 이탈리아가 탈퇴했다.

3.6. 폭풍 전야


국제연맹은 그 직후 1934년 소련을 상임이사국으로 가입시키면서 뭔가 기대를 했지만, 소련은 '''독소 불가침조약으로 상큼하게 국제연맹을 배신하고 1939년 핀란드 침공과 함께 탈퇴한다.''' 게다가 이 막장의 와중에 명색이 상임이사국이라는 영국프랑스, 그리고 그들의 동맹이자 원년 멤버였던 폴란드는 독일의 오스트리아 합병, 체코슬로바키아 합병을 '우리 시대의 평화'라며 허용하는 병크를 저지른다. 국제연맹에서 탈퇴해도 편 들어주고 달래주고, 도리어 '''회원국들을 망하게 내버려두는''' 상황이 되었다.
한편 여전히 국제연맹을 탈퇴한 일본 제국과 이탈리아 왕국은 말 그대로 중일전쟁(1937년)과 알바니아 왕국 합병(1939년)으로 깽판을 치고 있었다. 이렇게 되니 중미의 여러 나라들도 주르르 탈퇴해버리고, 스페인도 독자적 노선을 택한다.
1930년대 말기에 다다르면, 국제연맹을 탈퇴한 나라들은 이제 열강들이 직접 나설 수밖에 없는 수준에 이르른다. 태평양에서 일본 제국을 그나마 제어할 수 있는 나라는 회원국이 아닌 미국밖에 없었고, 결국 미, 영, 중, 네덜란드는 ABCD 봉쇄를 통해 석유의 수출을 제한해버린다. 같은 이유로 나치 독일의 야욕은 점차 심해지면서 뒤에 나오는 단치히 자유시를 빌미로 폴란드 합병을 주장하고, 영국과 프랑스는 이번만큼은 극구 반대한다. 결국 폴란드 침공과 함께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전쟁을 막겠다던 국제연맹은 전쟁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3.7. 전쟁과 해체과정


눈 깜짝할 사이에 유럽은 독일의 손아귀에 들어간다. 망명정부를 차린 폴란드, 자유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노르웨이, 유고슬라비아 왕국[38] 정도를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의 추축국의 괴뢰 정부는 국제연맹에 탈퇴를 선언한다. 더구나 이 망명정부를 차린 나라들도 국제연맹한테 뒷통수를 맞은 데다가 실권도 전혀 없어 이름뿐인 처지였다.
국제연맹은 졸지에 영국과 망명정부의 모임 수준으로 전락했다. 마지막 가입국인 이집트 왕국(1937년)이나 터키도 비슷했다. 유명무실해진 국제연맹은 1945년 설립된 UN에 자리를 내주게 된다. 회원국이나 업무 같은 것은 모두 UN에 인계되었으므로, 사실상 UN체계로 재창단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4. 국제연맹의 교훈과 유산


국제연맹에서 교훈을 얻은 UN은 철저하게 탈퇴와 배제를 하지 않는다는 데 중점을 둔다.[39] 이러한 생각은 철저하게 열강에 유리하게 짜여진 상임이사국 제도에서 엿볼 수 있다. 안보리(UNSC)가 불공평한 건 사실이지만, 핵무기의 등장과 뒤이은 냉전으로 인류 공멸 가능성은 더더욱 높아진 상황에서 다른 답이 없었다.
만장일치제도 폐지하고[40], 다수결과 군사력(유엔군, 평화유지군)을 바탕으로 한 직접적 개입과 여러 단체를 포괄하는 더욱 큰 조직을 만들게 된다. 그 대표적인 첫 개입이 바로 한국전쟁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한국전쟁과 같은 사례의 적극적인 개입은 UN에서도 두 번 다시 나오지 않았고, 각 나라의 입장 차이와 현실적 제약 때문에 평화유지군은 그야말로 '제한적인 치안 유지 임무' 정도로만 한정되게 된다. 그래도 군사적으로 무력했던 국제연맹보다는 다소 발전한 것이지만.
이렇게 실패한 국제연맹에서 교훈을 얻은 UN이었기에 2차대전 종결 후의 국제사회가 '''대충 전반적으로는 인권의 신장과 평화로운 상태를 유지해온 것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제1세계, 제2세계 이야기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5. 국제연맹 관할지


국제연맹이 국가는 아니었지만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자유시, 보호령, 위임통치령들 등 명목상 국제연맹 관할 지역들이 존재하였다.

5.1. 단치히 자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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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그단스크시. 베르사유 조약 체결 당시 폴란드 회랑을 폴란드에 넘길 때 단치히 시는 유독 독일계가 많았던 서프로이센 지역에서도 워낙 독일계가 대다수였기에 국제연맹 관할의 자유시로 분리하게 된다. 국제연맹은 1920년 1월 10일 영구 중립의 도시국가로서 단치히를 독립시켰는데, 독자적 화폐깃발도 있었고 25만 명의 인구로 나름대로 번성했다. 하지만 이와 별개로 단치히 '자유시'는 폴란드에 매우 종속되어 있었는데, 폴란드는 자국군을 자유시 내에 주둔시킬 수 있었으며 세관 통제 및 항구의 자유로운 이용이 가능했다. 애초에 이 자유시의 설립 목적이 폴란드에 넘기려고 했는데 주민구성 상 넘기기 뭣해서 세워진 것이니. 하지만 1939년, 나치 독일의 침공으로 폴란드 제2공화국과 함께 멸망했다.

5.2. 자르 분지 지역



단치히 자유시의 프랑스판.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독일에서 분리되었고 프랑스에 매우 종속되어 있었지만 독일계가 대다수였다는 점에서 매우 유사하다.

5.3. 위임통치




6. 여담


위키 문헌에 국제연맹 헌장이 있다. #

6.1. 한국과의 관계


1차 대전 후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하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은 한국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에 맡기려는 시도를 한다. 위임통치안의 내용은 "한국의 완전한 독립을 보장한다는 조건하에 일본의 통치로부터 한국을 해방시켜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아래 두어달라"는 것이었다. 정한경이 이승만에게 찾아와 이 위임통치안을 제의했고 이승만도 동의했다. 원래는 파리 강화 회의에 참석하여 제출하려 했으나 참석을 못하게 된 이승만과 정한경은 대신 미국 대통령에게 이 문서를 파리 강화 회의에서 안건으로 삼아달라 요청하기 위해 위임통치안 문서에 서명하여 1919년 3월 3일에 백악관에 전달했다.
하지만 열강들 입장에서 그게 될 리도 없었고, 그저 일본의 한국을 다루는 태도를 비난하는 의도가 강했을 뿐, 일본의 한국 식민통치 자체는 인정되고 있었다.
박용만, 신채호를 비롯한 반이승만 무장독립파들이 이 사건을 물어 이승만을 공격하고 같은 외교 독립론은 주장하지만 이승만과 관계없던 세력들도 이승만을 물어뜯으면서 임시정부는 개판으로 치닫는다. 위임 통치 청원 사건에 대해서 신채호의 시각을 일방적으로 추종하여 미리한 매국 운운하는 말들이 보이지만 비슷한 시기 안창호김규식도 유사한 주장을 했고 영국, 프랑스의 위임통치를 받았던 이라크나 시리아, 레바논 같은 중동 아랍권 국가들이 훗날 독립한 것을 보아 이 시도 자체를 비난할 이유는 없다.
이후 이승만과 임정의 관계는 완전히 끝난 것처럼 보였으나 다시 한 번 두 세력이 손을 잡는 사건이 발생한다. 1931년 만주사변이 발발하고 뒤이어 일본의 국제연맹 탈퇴 가능성이 높아지자, 국무령이었던 김구가 국제연맹에 한국의 독립 문제를 전달할 특명전권대사로 이승만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이승만은 1933년 국제연맹총회가 열리는 스위스 제네바에 가서 독립청원서를 제출하고 회원국 대표들과 기자들에게 한인 독립 문제를 회의 의제로 채택해 줄 것을 호소했다. 처음엔 직접 상정시키려 했으나 거부당한 뒤 성명서를 작성하고 국제연맹 사무국과 회원국 대표들에게 발송했다. 만주문제와 만주에 있는 한국인 문제는 불가분의 관계이며 한국이 극동문제의 열쇠이고 국제연맹이 만주국을 승인한다면 그것은 연맹의 기본 정신인 민족자결주의에 위배된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각국 대표들도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고 언론들도 우호적이었다. 실제로 이 국제연맹 총회에서 만주국 불승인 결의안이 통과되었고 일본은 국제연맹을 탈퇴했다. 순전히 이승만 덕분에 그런 결의안이 통과되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의 성명서가 일정부분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무엇보다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이 여전히 활동하고 있고 국제사회에 다시한번 한국 문제를 상기시켰다는 점이 중요했다. 이승만은 "The Koreans in Manchuria(만주의 한국인들)"이라는 책자도 만들어서 배포하며 일본의 영토야욕과 학살, 약탈에 대해 고발하고 간도 참변관동대학살에 대해서도 알렸다.

6.2. 대중매체의 국제연맹


복거일대체역사소설비명을 찾아서에서는 미국과 일본이 1940년에 국제연맹에 가입하고 2차대전 기간에도 유지되어 배경이 되는 1987년까지 국제연맹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고,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일본이 상임이사국이 되어 사실상의 국제연합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는 여전히 독립하지 못하고 있으며, 베트남, 케냐에서 무장독립투쟁이 벌어지고 있다. 마셜 군도 등은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지 않으면서 그대로 일본의 위임통치령으로 남아 있고, 중화인민공화국중화민국이 국공내전 당시 일본의 개입으로 황허 강을 경계로 휴전하여 단치히 자유시 대신에 중국이 분단되어 영토 분쟁 상태가 된 상해, 즉 상하이 자유시가 존재하며, 이곳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만약에라는 대체역사소설 에세이집 2권에서는 존 루카치는 시어도어 루즈벨트1912년 대통령이 되었다는 가정을 한다. 여기서 루즈벨트는 '''닥치고 내 말 들어라'''라는 식으로 일단 전쟁을 종결시키고 만국평화회의를 연 뒤 미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국가를 '''강제로 가입시키는''' 쾌거를 보이지만, 결국 전쟁은 또 일어나고 만다는 암시를 준다.
이것은 1차대전이 온건하게 끝났다고 해도 2차대전의 발발이 어느 정도는 필연이었다는 시각을 반영한다. 심지어 러시아 혁명을 차단했다는 가정 하에서도. 바로 앞의 앨리스테어 혼이 쓴 "엠스 전보 사건보불전쟁 발발의 가능성이 나폴레옹 3세의 침착한 태도 덕에 사라지면서 양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지 않게 되었다"는 가정과는 상충되는 점. 바로 뒤의 로버트 L. 오코넬의 가정에서는 독일이 승리하지만 독일 11월 혁명으로 전쟁은 대충 정리되고 윌슨의 계획은 한방에 씹힌다.
TRPG 게임 겁스 무한세계 속의 평행우주 중 하나인 건스백에서는 국제연맹이 '세계과학위원회'의 버프를 받아 원자폭탄을 비밀리에 개발하고 있던 이오시프 스탈린의 소련을 박살내는 등 국제연합 못지않은 믿음직스러운 국제 기구로 거듭나게 된다. 소련과의 세계 대전 이후에는 '''상비군'''인 "연맹평화유지군"도 두고 있다.
물론 이 세계의 국제연맹은 서구 열강의 입장에서만 평화의 수호자로 여겨지지, 식민지인한테는 원수나 다름없다. 인도와 아프리카에서 반(反)연맹 반란 을 '''연맹평화유지군으로 진압했다.''' 또한 아직도 건스백에서는 인종차별성차별이 공공연히 이루어지고 있다. 이 세계에서도 당연히 한국은 일본 제국의 지배하에 있다. 사실상 연맹은 세계과학위원회의 지시를 받고 있는 꼭두각시일 뿐이다.
한국에서 연재된 웹소설 내가 히틀러라니!에서는 독일이 재가입하며 존속되어 유엔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상임이사국은 미국, 소련, 독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중국 7개국.

[1] 해당 국가는 현재 존재하는 국가가 아니라 국제연맹 창설 당시의 국가를 기준으로 하였으므로, 현재 존재하는 국가의 명칭, 영토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2] 1927년 현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으로 국호 변경. 다만 연합왕국에서 아일랜드 자유국이 1922년에 분리돼 자치령(dominion)이 되었기 때문에 그레이트브리튼 북아일랜드 연합왕국의 실질적인 시작은 1922년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3] 창설 당시 대영제국의 자치령(dominion)이었던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남아프리카 연방과 최대 식민지였던 영국령 인도 제국은 별도의 회원 자격을 지닌 채 출범했다. 하지만 1931년에 웨스트민스터 헌장이 발효되어 자치령들이 영국 본국(연합왕국)과 대등한 지위를 지닐 때까지는 독자적인 외교권이 없었기 때문에, 영국은 국제 연맹에서 여러 표를 행사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리고 자치령에 대한 영국의 실질 영향력은 웨스트민스터 헌장 발효 이후에도 상당 기간 이어졌다. LON에 나중에 가입한 아일랜드만 반영 감정 때문에 영국을 무시한 채 따로 놀았고(...) LON 소속의 다른 대영제국 자치령들은 영국의 입장에 대체로 동조하였다. 그리고 인도 제국은 제2차 세계대전까지 계속 영국의 자치령이 아닌 식민지였으니 LON이 존재하는 내내 영국의 거수기였음은 말할 것도 없다.[4] 당시 대영제국 자치령. 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전신.[5] 당시 대영제국 최대 식민지.[6] LON 출범 당시 북양정부, 1928년 이후 국민정부로 대체. 사실상 속국인 티베트 왕국 포함.[7] 1932년부터 해체 직전까지는 타이 왕국, 즉 태국.[8] 당시 대영제국 자치령.[9]뉴펀들랜드 래브라도 주는 당시 캐나다 소속이 아닌 별도의 뉴펀들랜드 자치령이었으므로 여기서 제외. 뉴펀들랜드 자치령은 크기가 작아서인지 끝내 LON에 가입하지 못했다. 그리고 원칙대로라면 웨스트민스터 헌장 발효 후 사실상의 독립국이 되었으나, 이후 세계 대공황으로 경제적으로 쪼들리게 되자 스스로 독립국 지위를 포기하고 영국에 통치권을 반납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캐나다에 가입하게 된다.[10] 다만 자유 프랑스는 탈퇴하지 않았다.[11] 대영제국 자치령. 웨스트민스터 헌장 발효 후 사실상 독립국화. 이후 아일랜드로 국호 변경.[12] 1940년부터 해체 직전까지는 라트비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13] 1940년부터 해체 직전까지는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14] 가입 이전 1922년까지는 오스만 제국.[15] 국제연맹의 위임 통치국이었다가 후에 가입함.[16] 이후 나치 독일 시기에 탈퇴.[17] 국제 연맹에 의해 독립했다가 나치 독일에 합병되며 멸망 (자세한 내용은 후술)[18] 르완다 왕국과 부룬디 왕국의 연합체[19] 영국이 위임 통치하였으나 후에 위임 통치가 끝나고 국제연맹에 가입함.[20] 1944년부터 해체 직전까지는 아이슬란드 공화국.[21] 1925년 네지드-헤자즈 왕국을 거쳐 1932년부터 해체 직전까지는 사우디아라비아.[22] 미국은 국제연맹의 창설을 주장했고, 상임이사국 자리까지 받기로 하였으나 국제연맹에 가입하지 않았다.[23] 필리핀은 1935년 이후 도민정부가 폐지되고 자치령으로 승급되어 하나의 독립국처럼 간주되었다.[24] 개별 회원국 지위를 가진 영국의 속령들은 제외.[25] 국제 연맹의 창설 당시 뉴펀들랜드 래브라도는 캐나다 소속이 아니라 별개의 영국 자치령이었다(애초에 캐나다도 브리티시 컬럼비아, 퀘벡 등 많은 영국 식민지들의 연합이었으니). 따라서 뉴펀들랜드는 국제연맹에 가입하지 못했다. 1930년대에는 웨스터민스터 헌장에 따라 잠시 사실상의 독립국이 됐으나 바로 몇 년 뒤 세계 대공황에 의해 뉴펀들랜드 정부가 주권을 영국에 스스로 반납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1949년에 주민투표를 통해 캐나다에 가맹하게 되었다. 따라서 뉴펀들랜드는 국제연맹에 가입할 기회가 사실상 없었고 실질적 후신인 유엔에도 가입하지 못했다.[26] 기니, 니제르, 코트디부아르, 모리타니, 말리, 세네갈, 베냉, 부르키나파소.[27] 가봉, 콩고, 중앙아프리카공화국, 차드, 마다가스카르.[28] 이탈리아령 소말릴란드는 현 소말리아 공화국 지방이다. 영국령 소말릴란드가 미승인국인 현 소말릴란드 공화국 지방이다.[29] 1943년부터 일본 제국에 편입, 1945년부터 해체 직전까지는 소련에 편입.[30] 이들 두 지역은 아직 미국의 정식 회원 주가 아닌 속령이었다.[31] 이를 이유로 브라질은 격분하여 탈퇴한다.[32] 1922년 탄생한 아일랜드 자유국(이후 아일랜드)는 창설 멤버는 아니나 나중에 LON에 가입했다.[33] 이에 반해 같은 제1차 세계 대전의 패전국이었던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불가리아는 국제연맹에 가입했다.[34] 먼로 독트린도 독트린이지만, 회원국의 1/3에 달하는 남미 17개국과 대등한 상황이란 것도 맘에 안 들었을지도 모른다. 윌슨은 결국 이 죽도 밥도 안 되는 상황에서 반신불수로 쓰러져 아내가 사실상 직무를 대행했고, 정권도 공화당에 빼앗겼으며, 4년 후 사망했다.[35] 이권은커녕 더 많은 자금을 납부해야 했다. 일본이 상임이사국이 되었을 때 내부에서 찬반논란이 있었을 때도 이렇게 이권은 없는데 더 많은 의무가 있어서이기도 했다.[36] 하지만 이 조사단 이라는 것도 만주까지 파견되기까지 회원국간 합의가 이뤄지고 승인이 나기까지 3달, 1931년 12월 파견이 승인 되었음에도 '''배'''로 만주로 향해서 1932년 봄이 다 되어서야 도착하고 6주간 조사하여 사변이 일어나고 10달이 돼서야 보고서가 올라왔다[37] 근데 또 다르게 생각해보면 '''깡패 놈이 약한 놈 패는데, 동네 싸움 날까봐 그냥 싸움 냅두고 다른 애들 보고 끼어들지 말라고 내버려둔 격이다.''' 더구나 '''소련이랑 나치 독일은 회원국이 아니어서 잘만 후원했다.'''[38] 1941년에 탈퇴했다가 1944년에 재가입.[39] 물론 팔레스타인이라든지 대만이라든지 세르비아라든지 남아프리카 공화국이라든지 예외적인 케이스가 있고, 냉전 시대 당시 대한민국북한도 수십년간 이런 케이스였다.[40] 안보리 상임이사국에 거부권이 있기 때문에 완전한 폐지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