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상순(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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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남상순(南相淳)

흑구(黑鷗)
생몰
1926년 2월 19일 ~ 1978년 3월 3일
출생지
충청남도 대전군 대전면 대흥리
(현 대전광역시 중구 대흥동)
본관
의령 남씨[1]
사망지
경상북도 구미시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남상순은 1926년 2월 19일 충청남도 대전군 대전면 대흥리(현 대전광역시 중구 대흥동)에서 부친 남경희(南景熙)와 모친 용궁 전씨(龍宮全氏) 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경북 구미군 무을면 무등리로 이사갔고, 무을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1940년 1월 일본으로 유학가서 니혼대학 부설 오사카(大阪)중학교 야간반에 재학했다. 그러던 1941년 9월, 학우 전영수(田永秀)로부터 일제의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조선청년학생이 주동이 되어 독립을 달성해야 한다는 설득을 받은 그는 이에 동의하고 항일투쟁에 앞장서기로 결의했다. 이들은 충성회(忠誠會)를 조직하고, 1942년 12월까지 30여차례의 모임을 가졌다.
충성회의 운동방략은 고향에 야간사숙을 열고 수시로 귀국하여 민중계몽에 힘쓰는 한편, 국제정세를 주시하고 일본과 소련이 전쟁을 벌이면 즉시 귀국해 국내의 청소년들을 지도하여 독립투쟁을 전개하는 것이었다. 또한 이들은 실력양성에 힘을 기울이고 안중근과 같은 선각자의 충정을 본받기로 맹세했다. 그러나 1942년 12월 충성회 조직이 발각되면서, 남상순은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후 그는 혹독한 고문을 받다가 1944년 2월 대판지방재판소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이상 3년이하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8.15 광복 직후 석방되었다. 이후 국내에 돌아온 그는 이범석이 이끌던 민족청년단(民族靑年團)에서 활동했고, 구미시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1978년 3월 3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남상순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그의 유해는 1995년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1] 24세손 상(相) 항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