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범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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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부 장관 등을 역임하여 대한민국 국군의 정통성을 빛낸 인물이다.'''“조국(祖國)!”''' 너무나 흔하게 쓰이는 말이고, 또 생각 없이 불리며 일컬어지는 단어다. 그러나 조국이라는 이 두 글자처럼 온 인류, 각 민족에게 제 각기 강력한 작용과 위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다시 없으리라 본다. 아니 그렇게 믿는다. 믿는 것이 옳은 내 견해이고, 내 체험의 소산이다.
이범석의 회고록『우둥불』
2. 생애
세종대왕의 5번째 아들인 광평대군의 17대손이자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의 20대 직계 후손이라고 한다. 1900년 한성부에서 아버지 이문하와 어머니인 연안 이씨 사이에서 태어나 어릴 때 어머니를 여의고 8살 때 새어머니인 김해 김씨를 맞이하여 그 슬하에서 자랐다. 어려서부터 영특하였지만 개구쟁이였는데 그 탓에 일본 헌병이 말을 타고 지나가면 말에게 돌을 던지거나 새총을 쏘기도 했다. 하루는 말이 놀라 요동치는 바람에 일본 헌병들이 땅바닥에 떨어졌기 때문에 일제는 이범석의 아버지를 소환해 벌금을 물리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 헌병들을 대상으로 한 장난인 탓인지 그의 아버지는 이범석을 별로 혼내지 않고 그냥 넘어갔다.
이범석은 장난을 멈추지 않았는데 한번은 뱀을 맨손으로 잡아다가 외양간에 가서 소들 항문에 집어넣었다고 한다. 소들이 놀라 경기를 일으키다가 하나 둘씩 푹푹 쓰러져 그대로 죽었고 아버지는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이범석에게 도끼를 던졌다.[2] 그러나 새어머니인 김해 김씨는 어린 아이가 그 정도 장난도 칠 수 있지 않느냐며 이범석을 편들어 감싸줬고 아버지가 던진 도끼를 몸으로 막기까지 한다. 도끼는 새어머니의 무릎에 맞았고 새어머니는 이후 절름발이가 된다.
이후 이범석이 독립운동을 하러 만주로 떠나고 집안은 일본 경찰 감시하에 놓인다. 그러나 새어머니는 그가 노숙자 생활을 하며 끼니를 거르지 않나 염려하며 그를 찾아 만주를 돌아다니기도 했다. 정작 자신이 낳은 친자녀들은 본국에서 일본 감시하에 놓이게 됨에도 새어머니의 지극 정성에 감복하여 이범석은 새어머니와 배다른 동생들에게 더욱 각별하게 된다.
1907년 자신을 친동생처럼 보살피던 집안 머슴 출신의 대한제국 군인이 정미 7조약이 강요한 군대 해산에 저항하다 죽는 것을 보고 항일을 결심했다. 1915년 경성고등보통학교 3학년 때 한강에서 수영을 하던 여운형[3] 을 만나 함께 중국으로 떠났다. 상하이에서는 이범석의 매형인 신석우가 살고 있었고 이범석은 신석우가 함께 살던 신규식의 집에서 지내게 된다. 이때 신규식이 중국 동맹회 회원으로 쑨원 등과 인연이 있었기에 이범석은 쑨원의 소개[4] 로 1917년 운남 육군강무학교[5] 의 기병과를 들어가 1919년 수석으로 졸업했다.[6]
1919년 5월 3.1 운동 소식이 전해지자 이범석은 상하이로 돌아갔지만 상하이에서는 무장 투쟁이 여의치 않아 만주로 이주한다. 만주 서간도에서 신흥무관학교의 교관이 되었고 1920년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로 옮겨 사관연성소 교수부장이 되었으며 청산리 전투에 참여했다. 이승만은 이 소식을 듣고 이범석에게 얼마나 고생이 많으냐며 노고를 칭찬하는 친필 서신을 매년 보냈으며 만년필, 종이, 호랑이 가죽 피복을 선물로 보내는데 이범석은 감격을 받게 된다. 청산리 전투 이후 일본군에 밀려 연해주 이만(달네레첸스크)으로 넘어가 다른 독립군과 합류했다. 1921년 초 무장 해제를 요구받자 김좌진과 서일 등 북로군정서의 일부는 만주로 돌아갔는데 이범석은 김좌진보다 앞서 만주로 돌아갔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일본 측 기록에 따르면 중국과 러시아 이만을 왔다갔다하며 독립군을 모았다고 한다.
이범석은 1923년 러시아에서 김규식의 고려 혁명군(대한독립군단) 기병 대장을 맡았다고 회고했는데 동아일보의 1922년 11월 기록에 이미 시베리아에서 이범석이 김규식의 기병 대장으로 활약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1923년 11월 연해주에서 백군이 축출되자 러시아 공산주의 세력은 고려 혁명군을 무장 해제시키려 했고 반발한 김규식 등은 중국으로 돌아갔는데 이범석도 아마 같이 중국으로 돌아간 듯하다. 그러나 1922년부터 1925년까지 소련 합동 민족군 연해주 지구 지휘관으로 활동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후 이범석은 만주에서 김좌진, 김규식 등과 활동했고 1925년 김좌진이 주도한 신민부에 참여했다. 이 무렵 연인인 올레리야가 자살했고 김마리아와 결혼했다. 1927년 신민부가 군정파와 민정파로 내분을 겪자 이범석은 신민부를 이탈했다. 1928년 고려 혁명군(결사단)을 조직해 무장 테러 활동에 나섰지만 주요 동지들이 체포되고 장쉐량의 탄압이 강해지자 중앙아시아로 도피했다. 만주 사변 즈음에 쑤빙원의 부름으로 중국으로 돌아왔다가 마잔산의 작전 참모와 중국 동북 항일군 작전과장(중국군 소장)이 되었다. 1932년 마잔산이 일본군에 밀려 소련으로 도주했을 때 이범석도 같이 포로처럼 수용되었지만 중국과 소련의 국교 회복 후 주소련 중국 대사 옌후이칭의 중재로 협상을 거쳐 풀려났다. 1933년 4월 석방된 이범석은 중국 국민당 군사위원회의 지시로 군사 시찰단이 되었는데 독일에 갔을 때가 때마침 아돌프 히틀러 정권이 출범한 시기였다.
이범석은 나치의 경제 재건에 감명을 받았고 독일에서 공부하던 한국인 유학생 '명'[7] 의 영향으로 나치즘에 우호적인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 이범석은 로마를 거쳐 6월에 상하이로 귀국했고 김구의 부름으로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교관 및 학생 대장이 되었다. 1936년 시안 사변 이후 양후청 밑에서 기병 연대장을 했고 장제스의 명으로 양후청이 중국을 떠나자 한푸취의 고급 참모가 되었다. 한푸취가 처형된 뒤에도 주임 참모로 활동했으며 1939년 중국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 훈련위원회 훈련단에서 훈련을 받았는데 파시즘적인 사상 훈련과 영향을 받았다. 이후 1941년 1월까지 훈련단에서 중대장과 교관 등을 지냈으며 1940년 9월 19일 한국광복군의 참모장으로 인선되었지만 한국광복군이 중국 국민당 정부에 예속되는 형태로 바뀌면서 1942년 3월 참모장은 중국인 인청푸가 되고 이범석은 부참모장 및 참모처장이 된다. 인청푸는 이범석이 중국 국민당 정부의 말을 잘 듣지 않아서 자신이 참모장이 되었다고 회고했다.[8] 1942년 8월 부참모장 자리를 버리고 제2지대 지대장을 맡았는데 이는 김원봉의 합류 등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공 합작에 반발하는 차원이었다. 이후 미국 OSS와 협작하며 서울 진공 작전을 준비하다가 광복을 맞았다. 아래 사진의 아랫줄 가운데가 이범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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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15 광복 이후 개인 자격으로 귀국한 뒤 미군정의 지원을 받아 한국광복군 동지들과 함께 "국가지상, 민족지상"을 내세운 청년 단체인 조선민족청년단(족청)을 창설한다.[9] 이러한 그의 행보는 상대편으로 하여금 그를 조선의 군국주의자, 심지어는 '히틀러 추종자'라는 비판을 받게 만들었고 족청은 '이범석 유켄트'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한다. 실제로 히틀러가 죽고 나치 독일이 망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매우 안타까워했다고 한다.[10] 1940년대 초반 일제 말기에는 민족주의운동 및 나치 연구를 했던 독립운동가도 소수지만 존재했다.
1948년 독립운동 시절부터 이승만과 친했고 이승만의 열렬한 지지자였으며 건국 당시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부 장관으로도 임명되었다. 이승만의 최측근인 윤치영의 후처 이은혜의 인척이기도 했다. 허정은 자서전에서 그가 윤치영 후처인 이은혜를 '누님'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후 여순사건의 배후로 김구를 지목해 "이 사건은 정권욕에 눈이 어두운 몰락한 극우 정객이 공산당과 결탁해서 벌인 정치적 음모"라고 주장했다. 국회 속기록에도 나온다. 훗날 실리 문서에 의하면 김구와 백의사의 염동진은 극우 반대파, 제4연대장과 손잡고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다고 한다. 실리 보고서. 제4연대장은 최남근으로 여순사건의 주모자 중 1명이었다.
1950년 6.25 전쟁 중에 한강 철교 폭파를 건의했다.[11] 사실 한강 철교 폭파는 인민군의 남하를 막기 위해서 언젠가는 해야할 일이었다. 6월 27일 국방부에서 열린 군사원로회의에서 김홍일 장군의 한강선 결전을 지지했던 3인 중 1명이 이범석이었다. 오히려 이범석이 일찍 국무총리 겸 국방부 장관에서 물러나지 않았다면 한국전쟁이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후방 3개 사단 병력뿐만 아니라 1사단 병력을 한강선으로 집결시켜 결전을 했다면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지금의 한국전쟁 초기 서부전선사와는 다른 이야기가 쓰여졌을지도 모른다. 군사 경험이 전무한 신성모가 타이밍을 놓치고 한강 철교를 폭파한 탓에 국군의 물자 및 장비들이 후퇴를 하지 못한 문제가 발생하고 만다. 그래서 이 문제로는 이범석 대신 신성모가 주로 까이는데 신성모는 국민방위군 사건으로 더 까여야한다. 사실 이범석도 제대로 된 건의를 한 것은 아니었는데 이범석이 한강 철교를 폭파해야 한다고 주장한 이유 중 하나는 황당하게도 "퇴로가 막혀야 한강 북쪽의 국군이 더 죽음을 무릅쓰고 용감히 싸울 것"이기 때문이었다. 신성모가 한강 철교를 너무 빨리 폭파해서 국군을 궤멸시킨 것은 이범석의 건의를 충실하게 따른 셈이 되는 것이다.
이범석은 이승만에 대한 열성분자였으며 장택상, 이기붕과 각각 충성 경쟁을 벌이기도 했는데[12] 부산에서 장택상과 이승만에 대한 충성 경쟁을 벌였다(발췌 개헌). 이범석은 계엄군을 동원해 국회의원 통근 버스를 연행하여 발췌 개헌을 통과시키고 이승만 장기 집권에 공헌하였다(부산 정치 파동 이후 1차 개헌). 하지만 이승만 주변에서 과격파들을 떼어놓으려고 했던 미국이 무초를 통해 이승만과 이범석 사이를 이간질했다. 당시 주한 미대사이던 무초는 보고서에서 "이승만의 마음 속에 이범석 집단이 이승만 자신과 한국 그리고 유엔에 대해 위험한 존재라는 사실을 심어놓는데 어느 정도 성공했다.", "여러 사람들이 이승만과 이범석을 격리시키기 위해 막후에서 노력한 일들이 목적에 달성되었다고 말하기는 너무 이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이 최근 나와의 면담에서 이범석을 비난하는 발언을 한 점이나 국무회의에서도 이범석이 여러 차례 비판을 받았다는 사실은 이 캠페인이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썼다.[13]
이승만은 이범석에게 조선민족청년단을 대한청년단에 흡수시켜야하니 해산할 것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이범석은 이를 거부하였고 이승만은 이에 맞서 정부통령 선거에서 부통령 후보이자 족청계 지도자인 이범석을 떨어뜨린 뒤에 이승만보다도 나이가 많은 노인이었던 함태영을 부통령 후보로 올렸다. 이는 사실상 이승만에게 이범석을 후계자로 지목할 생각이 없다는 뜻이었다. 이범석은 부통령이 될 것을 기대하고 있었으나 당시 국무총리 장택상은 비밀리에 자유당 당원들에게 이범석 대신 함태영을 지지하라고 했고 미리 손을 써두었다. 결국 이범석은 부통령에서 낙선했고 장택상이 배후 공작을 벌인걸 확인해 이에 분노한 이범석은 선거에 경찰이 관여했다며 장택상을 고소하였다. 그러나 무죄 판결 이후 족청계 인물들과 정변을 모의했으나 소문이 유포되어 실패한다. 이범석은 나중에 장택상이 일제강점기 때 경기도지사를 지낸 일본인과 부산에서 만난 사실을 조선민족청년단 부하들을 통해 입수하여 장택상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몰아 국무총리직에서 해임시키지만 이 일로 이범석의 측근인 양우정 등이 희생된다.
1960년 4.19 혁명 후에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 후보로 충청남도 참의원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1961년 5.16 군사정변 후에 국민의당을 창당해 최고위원이 되었으나 이후 탈당했다. 1967년 윤보선, 유진오, 백낙준과 함께 4자 회담을 성사시켜 통합 야당 신민당 출범에 이바지하였으며 국토 통일원 고문으로 임명되었다. 1972년 심근경색으로 사망했으며 국민장으로 장례가 치뤄졌다. 시신은 국립서울현충원에 매장되었다.
3. 성향
이범석의 생애와 성향은 자서전에 담겨 있다. 한국의 민족주의자이다. 그리고 안호상 등과 마찬가지로 나치 추종자 혹은 파시스트를 연구 했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1947년 5월말, 미국 신문 기자단은, 서울에서 30마일 정도 떨어져있는 옛 성곽 도시 수원에 있는 대한 청년단의 훈련 학교를 우연히 찾아갔다.(...)
이 운동의 지휘자는 이범석이었는데 그는 일제 시대 김구의 광복군 참모장이었다. 1947년 7월까지 약 7만 명이 수원 훈련 학교에서 훈련을 받았다. 공식 발표에 의하면, 1947년 말까지 10만 명의 훈련생을 배출하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수원 훈련 학교 교장은 1931년부터 1935년까지 독일에서 살았던 사람으로 독일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었으며, '''히틀러 청년 운동의 열렬한 지지자였다는 것을 신문 기자단은 알게되었다. 그 학교를 방문했을 때 신문 기자단은 "Sprechen Sie Deutsch?"(독일어 할 줄 아십니까?)라는 인사를 받았다. 그와의 계속된 대화를 통해서 그 조직이 히틀러 유겐트(Jugend)를 본따서 만들었으며''', 조직의 목적은 남조선 국군을 양성하여 '광복군의 영광스런 전통'을 계승하자는 것이라고 밝혔다. 또 이 훈련 학교는 완전히 '비정치적'인 기관이지만, 김구가 상임 교관이기도 하다라고 말했다. 또한 다양한 정치적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조직에 들어오지만, 나갈 때는 똑같은 사상을 가지고 나간다는 정보도 그는 스스로 제공했다.
리처드 D 로빈슨(한국 미군정의 대민 정보 수집 분야에서 일했고, 이후 제24군단 사령부의 정보과에서 점령기를 다룬 전사 편찬 업무를 맡음. ), 미군의 배반, 과학과 사상, 1988년, 215 - 216
두 사람이 증언하는 이범석의 핵심 참모이자 수원 훈련 학교 교장인 나치 추종 인물의 정체는 오랫동안 밝혀지지 않았는데 서중석 교수의 제자인 후지이 다케시 박사가 관련자들 경력을 조사해 본 결과 강세형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김삼순 박사의 남편이자, 이회창의 이모부.[14]오후에 연락원은 우리를 또다른 "신사"인 한국 민족 청년단(족청)의 단장이며 극우 진영의 스타로 부상하고 있는 이범석 장군에게 데려다주었다. 나는 줄창 그의 이름을 들어왔었고, 몇몇 미국인들은 우리가 한국을 떠나기 전에 그를 만나야 한다고 하기도 했다.
우리는 미군이 한국 민족 청년아 베당해준 2층 건물에 자리잡은 본부에서 그를 만났다.(...) 이는 좋은 체격의 건장한 사람이었다. 그의 얄팍하고 굽은 코와 빈약한 콧수염이 기묘하게도 호전적인 인상을 풍겼다.(...)
그는 말했다. "오늘날의 한국은 1919년의 독일과 같소. 이데올로기적인 대립과 민족적 불화, 경제적 곤궁의 문제가 바로 그것이요. 청년들의 단결이 민족 해방의 관건이 되오. 지도자 양성을 위한 학교를 세우는 것이 우리의 목표이지요. 우리는 그들에게 명령에 복종하는 것, 실천적인 능력의 함양과 도덕심의 회복 등을 고육하려 하고 있오. (...) "
그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나는 점차로 내가 한국의 한 민주주의 조직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히틀러의 저 악명 높은 "지도자 학교"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 처럼 느끼기 시작했다. 민족, 사명, 규율, 인내 등의 단어들이 우선동일했다.(...)
이범석은 예정된 커리큘럼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것은 역사학, 윤리(이범석 자신이 강의할 예정이었다.), 정치학 등이었다. "파업 분쇄 방법도 가르칠 거요. '''히틀러의 유겐트의 역사도 물론." 그의 핵심 참모 중에는 3년 동안 히틀러 유겐트의 열렬한 멤버가 되었던 사람이 있다.'''
마크 게인(동북아시아통의 저널리스트. 마크 게인은 1946년 10월 15일에서 1946년 11월 7일까지 한달 남짓 한국에 머물면서 서울, 개성. 옹진, 부산, 동래, 대구 등을 취재함.), 해방과 미군정, 까치 출판, 1986년, 118 - 120 (본 부분은 1946년 11월 7일 서울에 갔을 때 일기임. -115쪽)
이렇게 나치를 좋아했다고 독립 운동 전적까지 까대는 이들이 많은데, 과연 이게 타당한 견해인지는 생각해 볼 일이다. 에스토니아에서는 아예 소련에 대항해 독립을 부르짖던 이들이 나치 독일군을 해방군으로 환영하고, 상당수가 독일군에 참전했던 사례가 있다.
그러면서도 당대에 나치와 맞선 샤를 드골을 존경하기도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국방일보에 연재 중인 전기 시리즈에 따르면, 드골의 자유 프랑스군 선전 방송도 즐겨 들었다고 한다.[15]
한국 임시정부의 경우, 3.1운동 이후 한국식 민족자결주의 운동을 지향했으나, 한국의 주요 민족운동은 일제와 밀정 의해 타격을 입었고, 몇몇은 중국 공산당과 소련 공산당 입당하며 중국과 소련의 입장으로 움직이는 등으로 반민족적인 경우도 존재했고, 몇몇 한국의 공산당은 공산당끼리 싸우고, 민족주의자를 반공을 말하게끔 독립운동을 방해했다. 또한, 단독적으로 행동해서 실익은 적고, 일제의 화만 돋우는 경우가 많았다. 임정은 외교적인 방법을 통해 체계적인 민족의 독립운동을 원했으나 독립운동에 호의적인 장제스를 빼곤 도와주는 사람이 적었다. 독립 운동도 중구난방식으로 활동하는 바람에 일제에 의해 각개격파 되는 등 단합이 되질 않았다. 이런 난세 시기에 더 강력한 통솔력을 찾거나, 더 강력한 힘과 외교력이 가진 지도자의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위에 언급되어 있지만, 미군이 민족주의 성향이라고 싫어한 이유가 전시 작전권이 미국에게 넘어간 상황에서 이범석이 국방부에 정훈국 창설과 대북 첩보 수집 및 교란국 창설을 시도했기 때문이었다. 미군에서는 이를 분리 공작 의도로 보며 매우 경계했다.
행보야 어떻든 당시 부패한 정치인들과 달리 상당히 청빈한 생활을 했다. 족청을 운영할 때도 기부금에 의존해서 어려운 운영을 했고, 국무총리까지 했으면서도 치부한 게 전혀 없어 은퇴 후에는 서울 변두리 지역을 전전했다. 중화민국 대사 재직 당시에는 대사관 경비를 총 5백불로 아껴서 사용했다. 보다못한 장제스가 자국 장군의 사택을 지원해 줬을 정도. 박정희의 5. 16 쿠데타 때는 쿠데타 진영에서 이범석을 친이승만 계열로 보고 지원을 끊어버려 국가 원로 된 신분으로 식량도 없어 4일을 굶은 적도 있을 정도였다.
여담으로, 임정 시절 장준하는 이범석을 '''좌파 냄새가 난다'''며 깠다.[16]
관련 문헌
- 파시즘과 제3세계주의 사이에서 - 족청계의 형성과 몰락을 통해 본 해방 8년사, 후지이 다케시, 역사 비평사
- 한국 민족 문화 대백과 '이범석' 항목
- 철기 이범석 장군 기념 사업회, 철기 이범석 장군 약력
- 독립 기념관
4. 저서
- 한국의 분노(1946년)
- 민족과 청년(1948년)
- 방랑의 정열(1950년)
- 우둥불(1971년)
5. 노래
- 기전사가(祈戰死歌) : 이범석이 작사, 작곡한 노래다.
6. 대중매체에서
극화물에서는 의외로 공기 수준인데, MBC 쪽은 주로 성우들이 맡은 반면 KBS 쪽은 전문 배우들이 맡은 게 특징이다.
- 1981년작 MBC 드라마 제1공화국에서는 김현직이 맡은 반면, 1982년작 KBS1 특집드라마 <그 여름의 이틀>에선 배우 이동주, 기록드라마 <우둥불>에선 김영철이 각각 맡았다.
- 1983년 이장호 감독의 영화 <일송정 푸른 솔은(1983)>에서는 나름 용감한 독립군 장교로 나오며 미남 액션배우 신일룡이 연기했다.
- 1985년작 KBS1 특집드라마 <전웅실록: 오성장군 김홍일>에선 배우 강민호가 연기했는데, 1990년작 대하드라마 <여명의 그날>에도 같은 배역으로 나왔다.
- 1989년작 MBC 드라마 제2공화국에선 성우 겸 배우 김기현이 연기했는데, 그는 같은 해 특집드라마 <백범일지>, 1990년작 <반민특위>, 1993년작 제3공화국에서 같은 배역으로 나왔다.
- 대체역사물 9전단 1941에서는 이병석이라는 캐릭터가 나오는데 이범석이 모델이다. 그런데 골수 나치로 묘사해 놓고, 하지도 않은 부정축재와 정치자금 비리를 저지르는 등 아주 부정적인 꼰대 캐릭터로 묘사해 놓았다.
7. 기타
- 2016년 11월 8일에 진수된 해군 손원일급 잠수함의 8번함이 '이범석'함으로 명명되었다. 앞서 진수된 손원일급 4번함과 7번함은 역시 청산리 전투에서 함께 활약했던 '김좌진', '홍범도'의 이름으로 명명되었다.
- 기병 병과 출신답게 말을 즐겨 탔다. 국방부 장관 시절에도 말을 타고 서울 시내를 돌아다닌(...) 영상이 남아 있을 정도다.[17] 슈탈헬름을 착용하고서 말을 탄 사진도 남아 있다. 자동차를 탈 법한데 아침마다 말을 타고 경무대에 출근하기도 했다.
- 사냥을 좋아했다고 한다. 독립군 시절에도 시간이 있을때마다 종종 말타고 나가서 토끼나 꿩, 여우등을 잡아 동료들에게 고기를 먹이고 털가죽은 팔아서 군자금에 보탰다는 일화가 있다.
- 한국어를 포함해서 5개국어를 구사할 정도로 어학적 소질도 있었다. 영국어, 중국어, 러시아어는 자연스럽게 구사하여 미국군, 중국군, 소련군 소속 장교로 활약할 정도로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었으며 일본어도 잘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한국군에서 무기개발 경험이 있는 장성급 인사이다. 중국군 시절, 소병문 휘하에서 장갑열차를 직접 설계 운용했던 경험이 있었다. 물론 일본군의 장갑열차 등을 참고했겠지만, 필요에 의해 자발적으로 무기개발을 시도하고 운용까지 한 몇 안되는 사례이다. 장갑열차의 구조는 무개화차를 개조하여 이중으로 널판지를 두르고 이를 레일을 박아 고정한 뒤에 널판지 사이에 흙과 자갈을 채우고, 지붕에도 레일로 구조를 잡고 모래주머니를 쌓아만든 일종의 참호형식이었다. 전간기 화력수준에서는 상당한 방어력을 지닌 셈이었다.
- 박정희가 만주군 중위라는 과거 전력에도 불구하고 광복 후 군에서 활동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범석도 상당한 역할을 했다. 박정희의 형인 박상희가 여운형을 도와 독립 운동을 한 점과 함께, 광복군 참모장에 있었던 이범석이 박정희를 끝까지 지지했기 때문에[18] 이범석 살아 생전에는 박정희의 과거사가 그렇게 문제되지 않았다. 반공, 자주국방을 주장한 박정희와 통하는 측면이 많아서 그런지 박정희가 엄청 띄웠다.
- 1990년대 초반 비밀 해제된 주한미군 G-2 보고서에 의하면 미국 측에서는 상당히 싫어한 인물이었다. 그의 민족(혹은 국수주의)주의적인 측면에 대해서 상당히 싫어한 셈. 미국 측의 시각으로는 "부패한 중국 군벌을 연상케하는 인물"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