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스토르 카를로스 키르치네르
Néstor Carlos Kirchner Ostoić
1950년 2월 25일 ~ 2010년 10월 27일
1. 개요
아르헨티나의 정치인, 변호사. 2003년부터 2007년까지 아르헨티나의 대통령을 지낸 인물로, 후안 페론 이후의 아르헨티나 대통령 가운데서 '''가장 임기를 순탄하게 마치면서 성공한 대통령으로 평가된다.'''[1] 비록 임기말에 가뭄과 한파로 인해 전력공급에 이상이 생기고 인플레율이 20%대로 올라간데다가 측근들의 비리도 터지는 등 어수선한 일이 상당히 벌어졌지만 적어도 2000년대 초반에 비하면 사소한 수준이었다.
2. 대통령 임기 이전
1950년 산타크루스 주 리오가예고스[2] 에서 스위스 독일계인 아버지와 크로아티아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1970년대 초반에 국립 라플라타대 법대로 진학했고 거기서 자신의 반려자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와 만났다. 1976년 국립 라플라타대 법대를 졸업하고 크리스티나와 결혼하고 고향 리오가예고스로 돌아가 변호사로 일하였다. 아르헨티나가 민주화되자 페론당에 입당하면서 정계에 진출하였다. 이후 고향인 리오가예고스의 시장직을 거쳐 1991년부터 2003년까지 산타크루스주 주지사직을 역임했는데 매우 좋은 평을 들었다.
하지만 이 시절에는 신자유주의를 완강히 반대하는 기수라는 이미지나 페론주의를 수호하는 주지사같은 이미지는 별로 없었고 오히려 우파적인 성향에 가까웠다고 한다. 사실 이때는 페론당 소속으로 대통령직을 지내고 있던 카를로스 메넴이 대대적인 신자유주의 정책을 펴면서 국영기업을 대대적으로 팔아넘겼던 시절이었고, 페론당의 정책기조도 전형적인 대처리즘 정책에 가까웠기 때문이었지만 말이다. 석유로 얻는 세수를 잘 활용해서 주민들에게 복지혜택과 일자리를 제공해서 주민들의 생활수준을 대대적으로 향상시켰던 것은 사실.
2003년 대선에 출마했을 당시의 아르헨티나는 1997년부터 이어진 경기 침체로부터 시작해서 2001년에 기여히 디폴트를 선언할 정도로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큰 혼란에 빠져 있었다. 같은 시기 에콰도르나 볼리비아 등도 혼란에 빠져있던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아르헨티나가 남미에서도 비교적 부유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충격이 크게 다가왔었다. 어찌어찌 대통령이 된다해도 해결해야되는 일들이 산적한데다가 네스토르 자신의 인지도도 그리 크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부인인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도 대선출마를 말릴 정도였다.[3] 하지만 대통령 선거에서 예상외의 돌풍을 일으키며 결선투표까지 진출하였다. 당시 아르헨티나 대통령 1차 선거는 이변의 연속이었는데, 2001년 선거 당시 반부패 운동을 벌였던 유력 후보 카리요가 1차에서 낙선하고, 1위와 2위, 3위 후보가 죄다 페론당 출신에, 1위는 당시 아르헨티나 경제를 파탄시킨 장본인으로 평가되는 카를로스 메넴이 차지하였다. 그야말로 이변중의 이변.
그의 맞수는 한때 그와 한솥밥을 먹던 페론당 당수이자 대통령이었던 카를로스 메넴이었다. 당초 카를로스 메넴은 대선에 출마하면 승산이 있을것이라고 보고 출마를 결정했다. 하지만 경제 파탄을 초래한 장본인이라는 이미지 때문에 두알데 등 카를로스 메넴을 반대하는 정치인들과 지지자들이 대거 네스토르 지지 선언을 하였고, 때문에 선거 운동 기간 내내 여론조사만 했다하면 네스토르 키르치네르가 내내 압승을 거두는 결과가 나왔다. 결선투표에서 참패할게 뻔한 상태였기 때문에 메넴은 결선투표를 앞두고 전격적으로 사퇴 하였고 자동적으로 네스토르가 대통령이 되었다. 그렇지만 네스토르 키르치네르 입장에서는 선거에서 7:3정도로 이겨서 정통성을 잡을 기회가 있었는데 선거가 치러지지 않아 22%의 사상최저득표율, 2위로 당선된 대통령이라는 꼬릿표가 붙게 되었기에 영 언짢은 기분이었다고.
3. 대통령 취임 후
여하튼 선거공약으로 내놓은 공약이 당시 국제금융계가 내놓은 처방과는 정반대였기 때문에 재임기 내내 비관적인 전망이 나돌았지만 비관적인 전망을 비웃듯 재임 첫 해부터 고성장을 기록했으며, 그의 재임기 4년간 기록한 경제성장률은 8%대로 현대 아르헨티나 역사상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4][5] 물론 이건 부분적으로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의 아르헨티나 경제 상태가 너무 폭망이었기 때문에 기저효과가 어느 정도 반영된 영향도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엉망진창인 경제를 불과 3년 만에 원상복구시킨 것만으로도 괄목할 만한 업적임은 분명하다. 물론 두알데가 페소화 절하 조치를 취한 반사이익도 어느정도 챙기기는 했다. 그 공로로 2005년 중간선거에서 승리를 위한 전선이 대승을 거두며 앞으로의 집권도 탄탄대로를 걸을듯 했다. 그러나 임기 후반기 들어서 고성장에 따른 부작용으로 10% 아래로 떨어졌던 인플레율이 점차 증가하였으며, 이후로부터 인플레율을 무리하게 낮추려고 하다보니 여러 무리수를 두었다는 평도 들으며 인플레율 조작[6] 도 2007년 대선기간을 전후해서 시작했다는 것이 중론이다.
그래도 나름대로 수완은 잘 발휘했기 때문에 외채조정을 그런대로 성공적으로 진행한데다가[7] 때마침 중국이 엄청난 경제성장을 보이고 아르헨티나 화폐가치가 급속히 절상된 덕택에 수출액이 크게 불어나면서 아르헨티나의 경제는 IMF와 국제금융계의 예상을 깨고 다시 급속한 경제성장을 누렸다. 하지만 여전히 국제금융계에서 좋지 못한 평가를 들었는데 이는 여러가지 이해관계가 얽혀있다보니[8]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했음에도 평이 좋을 수가 없는 것이다. 다만 그와 별개로 임기 후반기부터 일부 기업인들에게 상당한 특혜를 준데다가 측근들을 제대로 관리를 못해서 과거의 구태를 일부 재현한 거 자체는 사실이다. 그리고 과거청산에 있어서도 상당한 공을 들였는데 1990년대에 중단되었던 독재정권의 청산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으며 이때를 전후하여 과거 군사독재기에 악명을 떨쳤던 인물에 대한 사법적인 처벌이 시작되고 진상규명도 대대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는데 이것도 경제 회복과 더불어 확실한 업적이다. 여하튼 2007년 대선에서 재선에 도전하지 않고 부인인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에게 대권을 넘겨주었고[9] 네스트로 키르티네르는 이후로도 2011년 대선을 염두에 두고 대통령 남편 자격으로 아내의 부족한 부분을 직접 채워주며 정계에 영향을 끼치고 남미국가연합의 사무총장을 지내는 등의 활동을 펼치다가, 2011년 대선을 1년도 채 남겨두지 않고 2010년에 급작스레 사망한다.
여하간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가 2011년에 재선하면서 빈자리를 채워놓았기는 했지만 2012년 이후로는 여러 실정으로 점차 지지율을 깎아먹다보니 비판자들에게서 역시 남편이 살아있어야 했어라는 말이 종종 나오거나 남편은 그래도 잘했는데 너는 왜 그따구냐?라는 투의 조롱도 종종들었다는 웃지 못할 후문이 있다. 특히 당시 우루과이 대통령이었던 호세 무히카도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를 네스토르 키르치네르와 비교해보면서 애꾸눈은 그래도 일은 잘했는데 마귀할범은 왜 일을 그따구로 하냐라는 식의 조롱을 해서 화제가 되었을 정도. 여하튼 네스토르 시절의 경제성장률은 8%로 높기는 했지만 크리스티나 임기 8년 가운데 5년간 경제성장률을 까먹어서[10] 부부 대통령 시기를 합산한다면 5% 중엽의 수준.
4. 여담
룰라나 우고 차베스와 절친하게 지냈다. 비슷한 시절에 비슷한 이유로 집권했고 일단 지향하는 목표도 비슷했다는 공통점이 있기는 했다. 서로를 축구선수에 빗대기도 했다고 그렇지만 네스트로 키르치네르는 룰라나 우고 차베스에 비해서 색깔이 그리 뚜렷하지 못했기때문에(물론 IMF에게 적극적으로 반대하기는 했지만 그것만으로 색깔이 뚜렷하기는 힘들기는 했다.) 룰라와 우고 차베스에 비하면 국제적으로 주목을 덜 받은 편이었다. 대통령직을 4년 남짓 지낸데다가 2011년 대선에 출마하지 못한채 일찍 죽은 것도 있다.[11] 사실 색깔로 봐도 확연한 사회주의를 내세운 차베스나 온건주의를 내세운 룰라에 비해서 중간에 어중간하게 끼인 위치에 있고[12] 페론주의 성향의 정치인이라는 점도 있기에 사실 좌파내에서도 그리 환영을 받기 힘든점도 있다는 것도 한 몫한다, 그리고 셋다 후임이 그다지 좋지 못한 평을 받는다는 공통점도 있기는 하다.
한편으로 전임 대통령인 두알데와는 1990년대부터 2003년도까지는 상당히 절친한 사이였고, 2003년 대선에서도 두알데가 네스토르 키르치네르의 지지를 선언할 정도로 나름대로 가까운 관계였지만 이후로 네스토르 키르치네르가 이미지 쇄신 차원에서 두알데계 인물을 다른성향의 인물로 갈아치운데다가 2005년 총선을 앞두고 공천권 갈등까지 벌어지면서 완전히 결별하게 되었다.[13] 그래서 두알데가 네스토르와 크리스티나 시절의 비리를 까발린다거나 하는 일도 종종벌어지고[14] 크리스티나도 맞대응해서 두알데의 역린을 건드리면서 까기도 하는데 둘다 떳떳히 활동하는걸 보면 아주 큰 타격은 아닌듯하다.
어렸을 때 백일해를 앓고난 뒤로 사시가 되었다. 위에서 무히카가 애꾸눈이라고 조롱한 것은 이를 빗댄 것.
[1] 농담같지만 '''결코 농담이 아니다''' 후안 페론의 후임인 이사벨 페론은 무능한 통치로 쫓겨났고 이후 벌어진 군사독재 정권때의 대통령들은 죄다 경제를 말아먹고 포클랜드 전쟁도 말아먹었으며 민주화 이후의 첫 대통령인 라울 알폰신과 카를로스 메넴 역시 경제위기 때문에 욕을 먹으면서 임기를 마쳤고 그 이후의 대통령 역시 경제위기를 해결하지 못하면서 임기를 끝맺었기 때문이다. 사실 네스트로 키르치네르 자체가 60세에 사망했기에 오히려 요절한 편이라고도 할수 있지만 그의 부인이 재선에 성공한 이후인 2012년부터 경기침체로 0-2%대의 저조한 성장률과 인플레이션 현상으로 인한 경기침체때문에 그다지 끝을 좋게 맺지 못한 점에 비하면 나은셈이기는 하다 [2] 파타고니아와 티에라델푸에고 사이에 있는 동네이다. 그 일대에선 제일 큰 도시지만 인구수는 10만명대로 상당히 적다. 그도 그럴 법한 게 애초에 이 지역 자체가 남위 50도 인근으로 상당히 춥다.[3] 그래도 남편이 대선에 출마한 이후로 열심히 선거운동을 도와서 기여히 남편을 대통령으로까지 만들었고 후에 자신도 대통령이 되었다.[4] 물론 라올 알폰신이나 카를로스 메넴도 임기 초기에는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지만 재임 후반기에 죄다 까먹었다(...).[5] 당시에 이름을 훨씬 날렸던 우고 차베스는 임기 초기에 일시적인 유가 하락과 2002년부터 2003년 상반기까지의 대규모 파업 등의 영향으로 경제 상태가 위낙에 오락가락했기 때문에 2003년부터 2012년까지의 경제성장률만 친다면 5%대로 준수한 수준이지만 1999년부터 2003년까지의 경제성장률까지 합하면 2.7%고 룰라도 마찬가지로 집권 1기 때는 타 남미 국가에 비해서 성장률이 그다지 높지는 않았고 집권 2기까지 합해도 3.4%의 경제성장률을 보였다. 그래도 헤알화 강세 덕택에 수입물가가 급감한데다가 그러면서도 원자재값의 상승으로 수출은 크게 늘었기때문에 소득이 늘어나는 효과를 톡특히 봤다. 다만 둘 다 경제구도 전환에 실패했기 때문에(베네수엘라는 유가가 한창 고공행진을 하던 2000년대 중후반에 석유 산업 이외에 다른 산업을 육성하는데 상당한 공을 들였지만 2010년대 와서 침체되었고, 브라질도 마찬가지로 중공업 육성에는 큰 성과를 내지 못했다.) 후임이 덤터기를 쓰기는 했다.[6] 덧붙혀 빈곤율도 조작했다는 의혹도 산다. 사실 조작 전의 빈곤율도 경제위기가 정점에 달했던 2002년에 비하면 획기적으로 낮아진 수치이기 때문에 그런지 타 남미 국가에서 보면 왜 했는지 모를 수준이다.[7] 그러나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시절에 외채상환을 두고 미국 헤지펀드와 갈등이 벌어졌는데 법정에서 패소하면서 모라토리엄을 선언했고 덕택에 한동안 안습한 신세가 되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2000년대 초반급의 경제 폭망 사태는 벌어지지는 않았지만 그 대신 아르헨티나의 기업 자금들이 투자처를 찾아 주식시장으로 몰려들면서 자산에 커다란 거품이 형성되었다(...).[8] 일단 채무재조정을 했지만 사실 당대 아르헨티나의 경제가 살아났다하더라도 채무액이 위낙에 어마어마했던지라 대놓고 갚을 능력은 없었기도 한데다가(...) 아르헨티나 채권을 1/4값으로 되돌려주는 것과 마찬가지이다보니까 1990년대에 고이율에 혹해서 아르헨티나 채권에 투자했던 사람들 입장에서 아예 못 받는 것보다 낫지만 어쨌든 손해를 보는 건 보는 거기에 욕나오는 상황인 건 마찬가지이기는 했다. 거기에다가 아르헨티나 역사를 제대로 공부하지 않은 채로 재생산되는 편견의 영향으로 영미권 언론에서 그다지 좋게 나오기 힘들었던 것.[9] 4년씩 나누어서 대통령직을 맡게 되면 레임덕에서도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되면서도 상당한 장기 집권을 할 수 있다는 판단을 했기 때문에 부인에게 대권을 넘겨주었다. 하지만 네스토르가 일찍 죽고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가 2013년 중간선거에서 패배한 후에 레임덕에 시달리고 이후로도 지지율을 뚜렸하게 올리지 못한 채 퇴임하여 현실화되었다.[10] 정확히 말하자면 2008년에는 6.8%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고 2010년과 2011년에는 각각 9.8%, 6.5%의 성장률을 기록했지만 그 이후로는 저 성장세에 빠진다. 물론 2009년에 0.9%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한건 분명 선방한 것이기는 하지만 2012년부터 2015년까지는 미국 헤지펀드와 소송에 걸려서 불가피한 면도 없지는 않지만 일단 본인 스스로 못해서 까먹은 건 맞다(...).[11] 사실 우고 차베스가 5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으니 차베스가 좀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뜨기는 했지만 차베스는 44세에 대통령이 되었고 그 이후로도 14년을 장기집권했던데다가 남미은행 설립등 국제적으로 중요한 일들은 많이 주도해놓았기에 네스트로 키르치네르보다 존재감이 강할수밖에 없다.[12] 물론 네스트로 키르치네르는 정통 사회주의자라기보다는 룰라쪽 노선에 좀더 가까웠기는 했지만 행보를 보았을때 간보기를 하는 경향이 강하기는 했다. 사실 이는 정통적으로 브라질과 아르헨티나가 경쟁관계에 있는 국가로써 국민적인 감정이 그리 좋지 않기 때문에 무턱대고 연합을 하는 노선을 추진하기에는 다소 껄그러운 면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13] 사실 두알데 입장에서는 네스토르에게 도움을 줬겄만 자신을 배신(?)하고 경제회복의 성과도 네스토르가 죄다 챙겨먹은것도 모자라서 구태 청산 명목으로 자신을 배제하기까지 했으니 고까울수밖에 없기는 하다. [14] 마크리 와서도 네스토르와 페르난데스가 비리에 연류되었다는 얘기를 종종 꺼내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