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안 페론
1. 개요
아르헨티나의 29, 40대 대통령.
한국 보수언론에선 단순히 포퓰리즘 정책을 시행해서 경제를 말아먹은 독재자 정도로 알려져 있지만,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아르헨티나 역사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사람이다. 카를로스 메넴[1] 이나 네스토르 키르치네르,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도 페론당 출신이다. 보안 담당은 안테 파벨리치였다.
2. 인물 소개
어머니가 아메리카 원주민인 테우엘체 족 출신이였지만 그 당시 아르헨티나에선 원주민과 원주민-백인 간 혼혈인인 메스티소가 인간 이하로 취급될 정도[2] 로 원주민들을 철저히 홀대했었기 때문에[3] 친가에선 그가 메스티소라는 사실을 숨겼다.[4] 1911년에 군사학교에 입학을 하면서 군인으로써의 생활을 시작했고 이후에 승진 속도는 느렸긴 했지만 착실하게 군인으로써의 길을 걷던 중에 이탈리아 주재 아르헨티나 대사관으로 발령이 나면서 파시스트가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을 지켜보았고 무솔리니에게 영감을 얻게 되었고 이는 페론의 행보에 많은 영향을 주게 되었다. 귀국 후에는 1943년 군사쿠데타에 참여해서 13년간 통치했던 군부독재정권을 뒤엎는데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군사 쿠테타에 참여한 공로로 노동사회복지장관을 역임했고, 공산당 계열의 노조는 탄압했지만 노동정책에서 그 동안 사민주의 세력(급진시민연합, 사회당)도 못 냈던 공적을 남겼다는 평가를 들을 정도로 성과를 내며 엄청난 인기를 누렸고 그 인기를 바탕으로 1945년 부통령직에 올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호헌을 지지하는 쿠데타로 모든 직책을 잃고 야인이 될 위기에 처했으나 그를 지지하는 노동자들의 시위와 에비타의 노력으로 풀려나게 되었다. 시위로 풀려난 페론은 1946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고 장관 재임 당시의 업적을 내세워 52.8%의 득표율로 304명의 선거인단을 확보해 좌파 급진시민연합 후보에게 압승을 거두었다.
대통령 취임에 성공한 페론 노동자의 권리를 더욱 증진시키는 정책을 펼치면서도 동시에 언론의 자유를 제한하는 조치를 취했고 반대파에 대해 탄압을 하였다. 하지만 산업화와 2차 세계대전 종전으로 인한 전후복구로 인한 수요상승, 임금상승, 중산층 확충, 복지확충으로 인한 내수증진으로 아르헨티나의 경제는 호황을 누렸다. 에바 페론의 헌신적인 내조와 여성참정권 부여, 외국계기업의 국영화 정책도 시너지 효과를 일으켰다.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1949년에 헌법을 개정했고 1951년 대통령 선거에서 후안 페론은 63.5%의 득표율을 얻어 급진시민연합 후보에게 압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1950년대 들어 미국과 캐나다,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소련 등 주요국들이 전후복구를 거쳐 공업생산량이 늘어나면서 아르헨티나산 제품의 수요가 크게 줄어 아르헨티나의 경제도 덩달아 침체를 겪기 시작했고 그와 성향과 별개로 나치인사들의 망명을 받아들이면서 나치에게 피해입은 국가들과 마찰을 빚어 경기침체를 심화했다. 그래도 이때까지는 지지율을 유지시킬수 있었지만 에비타가 죽은 이후에 이혼과 매춘을 합법화하면서 가톨릭 교회와 척을 지어 독실한 신도들의 지지도 잃었으며 군부내에서도 반 페론파의 세가 강해지면서 1955년 9월 후안 페론은 페드로 아람브루의 군사 쿠데타로 축출되었고, 해외로 망명가는 신세가 되었다. 이후 새로히 들어선 군사정권은 후안 페론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며 페론주의자들의 출마를 금지시켰고, 페론주의자에 대한 탄압을 자행하였다. 물론 이러한 상황에서 페론주의자들은 군사정부에 대항하려했지만 이는 진압되었다.
후안 페론은 쿠데타 이후로 베네수엘라, 파라과이, 이탈리아, 스페인 등 중남미와 유럽 여러나라를 오가며 생활했고 자서전을 집필하면서 좌파 및 극우파와의 관계도 가지고 노조를 물밑지원하는 방식으로 재기를 노렸다. 또한 1961년 스페인에서 이사벨 페론과 재혼을 했다. 후안 페론은 아람부루 군사정권이 경제정책에 있어서 지극히 무능하다는 점때문에[5] 오래가지 않아 복권의 기회를 잡았다. 1958년 대통령 선거에서 페론주의자에게 그나마 반 페론주의 색체가 덜한 아르투로 프론디시에게 투표하라고 촉구했고, 실제 선거에서도 프론디시가 52.7%로 대승을 거두며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로써 후안 페론이 아르헨티나 유권자들에게 남아있는 영향력이 여전하다는것을 입증했고, 이후로 페론은 프론디시 정권과 전략적인 제휴를 취하며 프론디시를 물밑에서 지원했다. 또한 1950년대에 혼란스러웠던 경제상황이 1960년을 전후하여 정상화되기 시작하면서 페론주의자들은 입지를 굳혔다. 이렇게 후안 페론의 와신상담은 성공하는 듯싶었지만 이는 입지가 좁아진 보수주의자의 가톨릭 교회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프론디시 대통령은 선거에서 페론주의자들의 선거출마 금지를 풀어버렸고. 페론주의자들이 대거 선거에 당선되자, 군부에서 쿠데타를 일으켜서 프론디시가 도중에 실각해버렸다. 또한 신임정부는 군부의 눈치를 볼수밖에 없기때문에 페론이 아르헨티나로 복귀하려는 꿈은 좌절되다시피했다. 이렇게 되어버리자 후안 페론은 1963년 대통령 선거에서 여러 후보들의 후소에도 기권을 호소하며 희망을 버린듯한 행보를 보였고, 1966년의 군부쿠데타로 후안 카를로스 온가니아가 집권하며 이러한 상황은 지속되었다.
그러나 온가니아를 비롯한 군부정권이 경기침체와 야당탄압으로 인해서 지지율이 낮았고 군사독재에 반발하는 정치테러가 횡행하는 등 혼란의 연속이었다. 후안 페론은 이러한 상황속에서 페론주의자들을 후원하며 민주화 시위와 파업에 있어서 자신의 영향력을 동원하였다. 결국 1972년에 알레한드로 아구스틴 라누세 대통령이 페론주의파 및 급진시민연합, 사회당등과 협상을 하며 민주화 조치를 취함과 동시에 페론주의자들의 출마금지를 풀었고 그 동안의 정치혼란과 군사독재에 지친 아르헨티나인들도 후안 페론을 환영하는 움직임을 보였으며 1973년에 걸쳐 치러진 총선에서 친 페론파가 압승을 거두었다. 친 페론파가 집권한 아르헨티나 정부에선 페론의 귀국을 허용했다. 오랜 망명생활에서 벗어난 페론은 노동자 권리 증진과 정치혼란 종식을 공약으로 내걸고 그 해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61.5%라는 압도적인 득표율로 당선되었지만 아미 고령이었던 페론의 건강상태는 이미 상당히 나빴다. 그래서 부인인 이사벨 페론이 대통령직을 대행하는 경우가 많은 반쪽짜리 대통령 신세였고, 결국 대통령에 당선된지 채 일년도 못된 1974년 7월 1일 노환으로 향년 79세의 일기로 눈을 감았다.
3. 페론주의에 관한 평가
흔히 페론주의에 대해서는 대중영합정책으로 인기를 끌었을뿐 오히려 경제를 피폐하게 만들었다는 비판이 있다. 그가 주창했던 페론주의 때문에 매년 20%에 달하는 높은 임금 인상과 과도한 사회보장정책이 아르헨티나의 경제를 파탄냈다는 것이다. 하지만 후안 페론이 실행했던 경제정책이 특별히 이상했던 것은 아니고 당대의 트렌드를 충실히 따른 것이었다. 미국에서도 케인즈주의 경제학을 반영해서 경제정책을 짰고 소련의 계획경제 체제가 성공적으로 잘 돌아가고 있었기에 서구 선진국이든 갓 독립한 제3세계 국가에서도 계획경제 제도를 반영하거나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았다. 후안 페론도 그런 경우이다.
페론이 표퓰리즘으로 나라 말아먹었다고 욕 먹는것에 비해 의외로 80년대까지는 페론주의 정당은 집권기간이 짧았다. 195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는(1973년부터 1976년까지의 공백기를 빼면) 급진시민연합과 반 페론파 성향의 군부가 집권했고, 그나마도 1955년 쿠데타 이후로 페론주의자들의 선거출마가 금지되어있던 상황이었으며, 이후 선거출마금지조치가 풀려서 페론주의자들이 정권을 잡은것도 1973년부터 1976년까지 단 3년 정도에 불과했다. 더군다나 민주화 직후에는 급진시민연합(라디칼당) 소속의 라울 알폰신이 집권했고, 페론당 소속으로 집권한 카를로스 메넴도 대통령 당선 당시에는 페론주의적 공약을 내세우기는 했지만 대통령에 당선되고나서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적극적으로 도입했고 민영화도 대대적으로 단행하여 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아르헨티나가 경제위기에 빠졌을때 더 이상 팔아치울 공기업이 남아있지 않다고 표현될 정도로 철저하게 감행했다.
페론의 업적을 재평가하는 쪽에선 1949년부터 1976년까지 그가 통치하던 시대[6] 에 아르헨티나의 국민총생산은 127%의 성장을 기록했고, 개인소득은 230%의 성장을 기록하였으며 농업국에서 공업국으로의 발전을 도모했다는 측면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1945년 4000달러 정도이던 아르헨티나의 1인당 GDP는 1975년에는 8000달러를 넘었다.
하지만 이 시기에 다른 나라들의 GDP는 아르헨티나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상승했다. 페론이 집권한 1946년에는 아르헨티나 1인당 GDP는 브라질과 일본(2차대전 직후라서)의 세 배가 넘었다. 그러나 1975년에는 브라질의 두 배로 격차가 줄어들고 일본과는 비교할 수 없이 벌어졌다. 1946년까지만 해도 아르헨티나의 1인당 GDP는 OECD 평균에 근접했으나 75년 무렵엔 OECD 평균의 70%정도까지 떨어졌다.
물론 빈민구제가 경제개발보다도 우선시했기 때문에 겉으로 보이는 경제성장은 좀 더뎠어도 후안 페론 치세기간의 아르헨티나는 적어도 빈민율만은 계속 줄어들고 있었다. 후안 페론은 우선 빈부격차부터 줄이고 차후에 경제를 발전시킬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후안 페론이 죽은 지 2년 후 호르헤 비델라가 쿠데타를 일으켜 아르헨티나를 집권한 직후부터 국채를 남발하고 자국의 기업들을 헐값에 처분하는 등 아예 경제를 망치려고 작정한 행보로 인해 아르헨티나는 완전히 몰락하기 시작하였다.[7]
그렇기 때문에 페론의 업적을 긍정적으로 보든 부정적으로 보든 아르헨티나의 경제부진이나 파탄의 책임을 페론에게만 전가하기는 어렵다. 아르헨티나는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경제력이 절정에 달해 프랑스, 독일과도 비슷한 수준이었으나[8] 1929년 미국발 경제 대공황의 직격탄을 맞게된 이후에는 주욱 내리막길이었다. 페론의 영향이 남아있던 1950년대라면 몰라도 1960년대와 1970년대까지의 아르헨티나의 성장부진을 온전히 페론의 영향이라고 보기도 힘들다.
오히려 아르헨티나의 경제부진이나 파탄의 책임은 군부 쿠데타로 권력을 찬탈하다 못해 페론의 정책을 뒤집어보려 했던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에게도 있다. 완전한 자유시장경제를 도입하려 했지만 오히려 부작용만 키워버리면서 차라리 안 건드린것만 못한 수준으로 경제가 무너져 버렸다.
페론주의에 긍정적이거나 또는 중립적으로 생각하는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페론보다는 오히려 페론 실권/사후에 집권한 아르투로 프론디시와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 레오폴도 갈티에리, 라울 알폰신, 카를로스 메넴, 페르난도 델라루아 같은 후임 아르헨티나 전 대통령들의 경제 정책이 오히려 아르헨티나의 경제 악화에 더 악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한다. 이들이 도입하고 실행했던 신자유주의적 정책이 천문학적인 외채와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경제파탄이라는 비참한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또한 1966년부터 1973년까지 7년밖에 안되는 기간에 쿠데타가 무려 세 번이나 일어날 정도로 정치적으로 혼란한 상황이었으니 국가적인 차원에서 경제성장에 에너지를 쏟아붓기가 어려웠고, 1976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비델라 정권부터 외자 도입을 위해 공기업에 외채를 떠안게 하는 조치를 취하면서 현재의 외채 위기가 시작되었다고 본다. 오히려 페론 정권은 외채에 의존하는 경제발전을 경계했으며, 외채 제로를 선언하며 집권하자 마자 바로 영국 은행에 지고 있던 10억 달러의 외채를 갚는 등 자신의 임기동안 외채를 꾸준히 줄이려고 노력했다. 적어도 페론의 기조가 유지됐다면 막대한 외채로 인한 외환위기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아르헨티나의 공업이 농업에 비해 낙후되었고[9] 과거 라틴아메리카의 부국이었던 아르헨티나가 그의 통치를 거친 이후 몰락했다는 주장도 학자들 사이에서 나름 설득력을 얻고 있는지라 그의 평가에 대한 논란은 계속될 것이다.
4. 기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상당수 나치 인사들이 아르헨티나로 도망쳐 오자 그들한테 보호비(?) 명목으로 돈을 받고 그들을 숨겨주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가톨릭과 커넥션이 있는 거 아니냐는 음모론도 존재하지만 가톨릭과도 마찰이 있었기 때문에 설득력은 낮다. 첨언으로 아르헨티나가 나치들을 많이 받아주긴 했지만 또 그게 사상적으로 페론 정권 시절 극우에 기울었다는 증거는 못 된다. 왜냐하면 비슷한 시절이나 반대쪽으로 스페인 내전에서 패배한 스페인 제2공화국 난민들을 비롯한 나머지 유럽 각지의 좌파쪽에 더 가까운 난민,망명객,그리고 홀로코스트를 피해 유럽에서 아메리카로 도망친 유대인과 집시인들도 거리낌 없이 곧잘 받아 주었기 때문이다. 실재로 2차대전 끝난지 얼마 안 된 이후 부에노스 아이레스에는 이미 몇년 전에 정착해 젊은 에르네스토 게바라 같은 아르헨티나 청년들에게 사상적으로 큰 영향력을 발휘하던 스페인 공화파 망명객들과 바로 몇년 전만 해도 저런 좌파 성향의 세력들을 가혹하게 학살, 탄압하다가 전범 재판 피하려고 꽁무니 빠지게 도망친 나치스 전직 친위대원들이 같이 살 정도로 굉장히 이념적으로 다양하던 곳이었다.
페론주의는 단순한 좌파 포퓰리즘이 아니라 오히려 극우 파시즘적 요소와 더 관련이 깊다는 주장도 흔하다. 그래서 위키피디아에서는 페론주의 항목을 '제3의 위치(Third Position)'카테고리에 넣고 있다. 오히려 후안 페론의 1기 집권당시 제1야당(급진시민연합)이 좌파 성향이었고, 페론당이 우파였다. 후안 페론이 1960년대에 좌파와도 관계를 가지면서 2000년대 초반까지의 (통합)페론당의 성향을 보면 성향이 몹시 다양해서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이는 우파에서부터 복지 확대를 주장하는 좌파에 이르기까지 성향이 다양했고, 아르헨티나에서 신자유주의 정책을 적극적으로 도입한 것으로 유명한 카를로스 메넴 전 대통령도 페론당 소속으로 대통령직을 역임했다.
그러나 2000년대 초에 페론당이 재집권한 후 2003년 대선을 앞두고 페론당과 급진시민연합이 핵분열하여서 좌파블록과 중도파블록, 우파블록이 죄다 따로 후보를 낼 지경에 까지 이르렀고, 이 대통령 선거에서 놀랍게도 메넴이 1위를 차지했지만 결선투표에서 참패할 위기에 처하지 사퇴하여 네스토르 키르치네르가 당선되고 아르헨티나 경제도 예상을 깨고 회복세에 접어들면서 좌파 페론주의 정당인 승리를 위한 전선이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2003년 대선을 앞두고 따로 창당된 우파 페론주의 정당들이 승리를 위한 전선에 합류한것도 아니었다. 2015년 비 페론주의 우파로의 정권교체 이후에도 제1야당인 승리를 위한 전선(중도좌파)과 제2야당인 연방 페론주의당(중도우파)이 모두 페론주의 성향의 정당이다.
정리하자면 이 양반이 아르헨티나 근대사에 남긴 족적이 너무 커서 좌파, 우파 양쪽으로 전부 다 페론주의를 주창하는 정당이 있고, 또 같은 좌익이나 우익이라도 페론주의 성향이냐, 비페론주의냐에 따라 성향이 확 갈린다. 아르헨티나 공산당이 대표적으로 좌파 정당으로서 페론주의 성향의 사민주의자, 중도좌파들과 이를 박박 갈았던 경우. 게다가 또 상술했듯이 페론은 권위주의적이고 개인숭배적 성향이 강했다 한들 어쨋든 선거로 당선 된 민주 정치인이었던 반면 페론을 쫒아내고 해먹은 군부는 노골적으로 전국적인 테러를 자행하며 경찰 국가를 만들려 했던 독재자들이었기 때문에 군사 독재를 겪으며 페론주의는 또 나름 야권 민주화 세력 중 하나로 변신하기도 했다. 당장 현대 집권당인 정의당의 청년 조직인페론주의 청년단(Juventud Peronista)만 하더라도 주 사업중 하나가 군사 정권의 희생자 신원 확인과 명예 복권 정도이니 현대 아르헨티나 정치판에서 페론주의는 정말 어떻게 딱히 정의를 내리기 힘들면서도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 유산이다.
5. 창작물에서
뮤지컬 에비타에서 주인공인 아내와 함께 주요 캐릭터로 등장한다. 영화판에서는 조너선 프라이스가 페론을 연기했다.
트로피코 3의 플레이 가능한 실존 아바타 중 하나인데, '''방구쟁이'''에 '''저능아'''라는 엄청난 단점을 가지고 있다(...).
6. 관련 문서
[1] 특히 메넴은 후안 페론과 직접 만남을 가졌고, 1973년 라 리오하 주지사 선거에서도 페론의 후광에 힘입어 당선되기까지도 했다. 물론 대통령 당선후에 신자유주의 정책을 널리 펼치기는 했지만 말이다.[2] 아르헨티나는 현재도 전체 인구의 95%가 백인계인 나라이다. 즉, 아르헨티나에서 메스티소나 원주민들은 사회경제적 지위 뿐만 아니라 수적으로도 철저한 약자인 것이다. 유전적인 검사자료에 의하면 유전적인 형태의 메스티소 인구가 상당수 존재하는것으로 나오지만 유럽계 백인과의 통혼으로 외형적으로 더욱 백인에 가까운 형태가 된데다가 원주민을 탄압하면서 원주민 피를 지닌 메스티소들도 백인의 정체성을 지니게 된 것이다.[3] 볼리비아와 국경을 접한 후후이 주와 살타 주 등 아르헨티나 북부 지역에서는 아메리카 원주민과 메스티소가 더러 보이기는 한다.[4] 다른 남미의 백인계 국가였던 칠레가 백인과 원주민 간 혼혈인인 메스티소를 홀대하지 않았던 것과는 대조적. 그래서인지 멕시코나 과테말라처럼 혼혈인 메스티소도 적지 않은 편이다. 다만 칠레 역시 남부 개척 과정에서 칠레로의 복속을 거부하던 마푸체와 알라카루페 같은 남미 원주민들을 잔인하게 학살한 흑역사가 있었다.[5] 아르헨티나의 고질적인 문제점인 디폴트와 모라토리엄도 사실상 아람부루 정권때 시작되었다. 후안 페론 정권의 잔재를 청산한다고 경제정책을 변경했으나 되려 경상수지 적자가 급속히 커지고 이를 외채 돌려막기로 일관하면서 망해버린 것이다. 물가가 급속히 상승한것은 덤이었다(...)[6] 정확하게는 후안 페론은 1946년부터 1955년까지, 1973년부터 1974년까지 통치했고, 그 사이에는 정권을 잃고 망명중이었다.[7] 더욱 악질적인 것은 그러한 기업들을 매각하여 획득한 외화가 비델라의 개인 비자금으로 쓰였다는 것이다.[8] 이 시기에는 이탈리아, 스페인, 동유럽 국가들을 중심으로 높은 임금을 바라보고 아르헨티나로 이민 온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다. 그 중에는 프랑스와 독일 출신도 있었다.[9] 제조업 등 2차 산업 기반이 존재하는 브라질과는 다른 양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