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울 알폰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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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úl Ricardo Alfonsín'''
아르헨티나의 민주화를 위해 노력한 정치인으로, 제49대 아르헨티나 대통령을 역임했다.
라울 알폰신은 1927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주에서 태어났다. 라플라타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했으며 이후 변호사가 되었다. 급진시민연합이라는 정당에 들어가 부에노스 아이레스 주 국회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알폰신이 주의원으로서 승승장구를 달리고 있었던 1976년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 로베르토 비올라, 레오폴도 갈티에리 등 일단의 극우 군인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군사 독재 정권을 수립하였고, 정권을 장악한 아르헨티나 군부는 더러운 전쟁이라는 폭압적인 독재 정치를 이어갔다. 알폰신은 이런 군사 독재에 맞서 반독재 운동을 벌이다 당시 집권 군사 정권의 감시를 받기까지 했다.
한편 알폰신이 군사 정권의 감시를 받던 1982년 아르헨티나 군사 정권은 자신들이 저지른 폭정을 감추고 외채폭증으로 인해 경제도 덩달아 개판이 된 상황에서 집권 군사 정권에 대한 자국민들의 불만을 입막음하기 위해 영국령 포클랜드 제도를 침공하여 포클랜드 전쟁을 감행했다. 그러나 전쟁은 개전 75일만에 영국의 승리로 돌아갔고 그 결과 포클랜드 침공을 주도했던 당시 갈티에리 대통령은 레이날도 비뇨네 장군에게 대통령직을 넘겨주고 패전의 책임을 지고 대통령직에서 사임했다. 그러나 비뇨네 역시 국내의 반발과 여러 반정부 세력들의 공격과 강력한 저항에 밀려 더 이상 통치하지 못했고[1] 이듬해인 1983년 권력을 민간인에게 돌려줄수 밖에 없었다. 전쟁 1년만에 민주화 달성(...)
그리고 1983년 10월 치뤄진 민주적 대통령 선거에서 알폰신은 대선후보 출마를 권유받아 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하여 임기 6년의 민선 대통령에 당선되어 오랜만에 군인이 아닌 민간인 출신의 대통령이 탄생했다.
한편 대통령 취임 전날 비뇨네 대통령은 당선자 신분의 알폰신에게 군사정권 집권기 당시 자신들이 저지른 인권유린과 살인 등을 문제삼지 않을 것을 요구했다. 이에 알폰신은 비뇨네의 요구를 수락하는 척 했으나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이러한 비뇨네의 요구를 철회하였다.
아르헨티나 민주 정부의 첫 대통령이 된 알폰신은 과거 집권기 군부 정권의 악행을 단죄하고자 강력한 과거 청산을 실시했다. 그 결과 비델라, 비올라, 갈티에리, 오스카르 생장, 비뇨네 등 당시 군사 정권기 당시 인권유린과 살인 등을 저지른 군사 정권 출신 인사들을 체포하여 재판소에 세웠고 외교문제에 있어서도 브라질과의 적대적 관계를 청산하였고 그 동안 아르헨티나가 백호주의 정책을 내세워 멀리하던 페루, 볼리비아, 에콰도르, 콜롬비아, 칠레, 베네수엘라 등 기타 남미 국가들과의 친선 강화에 주력했다.
이렇게 대통령으로서 정책을 의욕적으로 이끌던 알폰신이었지만 정작 경제 문제에 있어선 실패하다시피했다. 알폰신 취임 초 아르헨티나 국내에선 알폰신이 민주화도 성과를 거두었으니 경제문제에 있어서도 큰 성과를 거둘 것이란 의견들이 많았다. 실제로 알폰신도 집권기 여러 경제 개혁 정책들을 내놓았다. 그러나 이러한 알폰신의 경제 개혁 정책들은 상당 부분이 실현 불가능한 정책들이었다. 군사독재기에 이사벨 데 페론을 쫓아낸 뒤에 인플레를 잡겠다며 경제개방정책을 대대적으로 펼쳤고 외국으로부터 빚을 대거 꾸어왔는데 일단 초기에는 외국자본이 대거 물려와서 성공할 듯 보였지만 정작 동시기 세계경제가 그리 잘나갔던 시기가 아니라 수출은 지지부진했고 거기에다가 1980년에 미국에서 인플레를 잡겠다며 이자율을 크게 올리는 바람에 헬게이트가 열렸다. 그 이후에도 이자율이 낮아졌고 정권이 교체되었지만 이미 외채는 겉잡을 수 없이 불어나서 이미 갚을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리고 말았던 것. 이 시기에 상당수 동구권 국가들이나 제3세계 국가,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이 외채 문제로 경제위기에 시달렸는데 동시기에 경상수지 흑자를 낸 국가들도 외채 문제 때문에 이자 갚기에도 급급했던 상황이었고 아르헨티나도 이 문제에서 예외는 아니었던 차였다.
그래도 집권 초기에 화폐개혁을 단행하면서 아우스트랄이라는 신 화폐를 도입, 경제 면에서 물가상승률을 어느정도 낮추고 경제성장률도 높이는 성과를 거두는 듯 했지만 1986년에 일부 기업들이 상품부족으로 부도처리되는 사건이 벌어지며 신뢰도가 떨어지기 시작했고, 아무리 화폐개혁을 했다 해도 외채가 하루 아침에 탕감되는 것도 아니지라, 1987년 하반기를 기점으로 상황이 크게 악화, 물가가 치솟기 시작하면서 사태는 악화되었고 전국적으로 알폰신 정부의 경제 정책을 규탄하는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더욱이 악화되어 가는 실업 문제에 있어 알폰신 정부는 소극적으로 대응하였고, 물가상승률은 네자릿수대를 기록해서 아예 충분한 지폐를 구하기 힘들 정도가 되다 보니까 국민들의 인기를 잃고 말았고[2] 알폰신 정부가 집권 초 추진했던 군사 정권에 대한 과거 청산 역시 군부의 불만을 사 알폰신을 축출하려는 쿠데타 시도까지 벌어졌다.
알폰신은 나름 획기적인 경제정책이라며 아우스트랄 프로젝트를 짜고 여러 방면으로 노력했으나 이미 호르헤 비델라가 너무 심하게 경제를 망쳐놓아 회생이 불가능한 지경까지 도달했고 그래서 아무리 노력해도 안되는 것이었다. 일단 비델라가 기업이란 기업은 전부 처분해버렸으니 국가가 기업에 손댈 수도 없고 외자를 너무 유치해버렸으니 그게 죄다 빚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알폰신은 정말 눈물겨운 발악을 했지만 그러기엔 비델라가 싸놓은 똥이 너무 거대했다. 이건 상식적으로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고 막말로 얘기하자면 아르헨티나는 외국의 원조 없이는 운영이 안되는 나라로 전락하고 말았다.
결국 국민들의 반감과 경제 사정의 악화로 인해 알폰신은 임기를 수개월 남기고 1989년 7월 8일 대통령직에서 사임하였고 조기 대선이 치러졌으며, 이 선거에서 급진시민연합 후보가 패배하고 페론당의 카를로스 메넴이 당선되었다. 그는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급진시민연합 총재직을 맡아오다 2001년 정계에서 은퇴했다. 은퇴 후 정치와 거리를 두며 자택에서 말년을 보내다 2009년 3월 31일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사망일로부터 3일 동안을 국가 애도 기간으로 공표했으며 수많은 인파가 장례 행렬을 지켜보며 애도하는 가운데 유해는 부에노스아이레스 레콜라타 묘지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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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콜라타 묘지에 있는 알폰신의 묘역.
아르헨티나에서는 군사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고 처음으로 민주정부를 수립했고 독재자와 군부를 청산했지만 금융위기를 막지 못했다는 점에서 하나회 청산의 업적과 IMF 위기의 부정적 유산이 공존하는 김영삼 대통령과 비슷한 평가를 받는 대통령이기도 하다.
그래도 경제고 국력이고 다 박살나버리고 강대국의 지위마져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르헨티나의 민주주의가 그럭저럭 정상적으로 굴러가게 만든 인물이기 때문에 아르헨티나 국민들도 그 점은 인정한다. 당장 비슷한 시기 윗동네와 옆동네의 독재자가 어떤 인간인지를 생각해본다면 더욱 그렇다.
'''Raúl Ricardo Alfonsín'''
1. 소개
아르헨티나의 민주화를 위해 노력한 정치인으로, 제49대 아르헨티나 대통령을 역임했다.
2. 정계 진출
라울 알폰신은 1927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주에서 태어났다. 라플라타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했으며 이후 변호사가 되었다. 급진시민연합이라는 정당에 들어가 부에노스 아이레스 주 국회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알폰신이 주의원으로서 승승장구를 달리고 있었던 1976년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 로베르토 비올라, 레오폴도 갈티에리 등 일단의 극우 군인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군사 독재 정권을 수립하였고, 정권을 장악한 아르헨티나 군부는 더러운 전쟁이라는 폭압적인 독재 정치를 이어갔다. 알폰신은 이런 군사 독재에 맞서 반독재 운동을 벌이다 당시 집권 군사 정권의 감시를 받기까지 했다.
3. 대선 승리
한편 알폰신이 군사 정권의 감시를 받던 1982년 아르헨티나 군사 정권은 자신들이 저지른 폭정을 감추고 외채폭증으로 인해 경제도 덩달아 개판이 된 상황에서 집권 군사 정권에 대한 자국민들의 불만을 입막음하기 위해 영국령 포클랜드 제도를 침공하여 포클랜드 전쟁을 감행했다. 그러나 전쟁은 개전 75일만에 영국의 승리로 돌아갔고 그 결과 포클랜드 침공을 주도했던 당시 갈티에리 대통령은 레이날도 비뇨네 장군에게 대통령직을 넘겨주고 패전의 책임을 지고 대통령직에서 사임했다. 그러나 비뇨네 역시 국내의 반발과 여러 반정부 세력들의 공격과 강력한 저항에 밀려 더 이상 통치하지 못했고[1] 이듬해인 1983년 권력을 민간인에게 돌려줄수 밖에 없었다. 전쟁 1년만에 민주화 달성(...)
그리고 1983년 10월 치뤄진 민주적 대통령 선거에서 알폰신은 대선후보 출마를 권유받아 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하여 임기 6년의 민선 대통령에 당선되어 오랜만에 군인이 아닌 민간인 출신의 대통령이 탄생했다.
한편 대통령 취임 전날 비뇨네 대통령은 당선자 신분의 알폰신에게 군사정권 집권기 당시 자신들이 저지른 인권유린과 살인 등을 문제삼지 않을 것을 요구했다. 이에 알폰신은 비뇨네의 요구를 수락하는 척 했으나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이러한 비뇨네의 요구를 철회하였다.
4. 대통령 재임
4.1. 군부 독재 청산과 민주화
아르헨티나 민주 정부의 첫 대통령이 된 알폰신은 과거 집권기 군부 정권의 악행을 단죄하고자 강력한 과거 청산을 실시했다. 그 결과 비델라, 비올라, 갈티에리, 오스카르 생장, 비뇨네 등 당시 군사 정권기 당시 인권유린과 살인 등을 저지른 군사 정권 출신 인사들을 체포하여 재판소에 세웠고 외교문제에 있어서도 브라질과의 적대적 관계를 청산하였고 그 동안 아르헨티나가 백호주의 정책을 내세워 멀리하던 페루, 볼리비아, 에콰도르, 콜롬비아, 칠레, 베네수엘라 등 기타 남미 국가들과의 친선 강화에 주력했다.
4.2. 실패한 경제 정책
이렇게 대통령으로서 정책을 의욕적으로 이끌던 알폰신이었지만 정작 경제 문제에 있어선 실패하다시피했다. 알폰신 취임 초 아르헨티나 국내에선 알폰신이 민주화도 성과를 거두었으니 경제문제에 있어서도 큰 성과를 거둘 것이란 의견들이 많았다. 실제로 알폰신도 집권기 여러 경제 개혁 정책들을 내놓았다. 그러나 이러한 알폰신의 경제 개혁 정책들은 상당 부분이 실현 불가능한 정책들이었다. 군사독재기에 이사벨 데 페론을 쫓아낸 뒤에 인플레를 잡겠다며 경제개방정책을 대대적으로 펼쳤고 외국으로부터 빚을 대거 꾸어왔는데 일단 초기에는 외국자본이 대거 물려와서 성공할 듯 보였지만 정작 동시기 세계경제가 그리 잘나갔던 시기가 아니라 수출은 지지부진했고 거기에다가 1980년에 미국에서 인플레를 잡겠다며 이자율을 크게 올리는 바람에 헬게이트가 열렸다. 그 이후에도 이자율이 낮아졌고 정권이 교체되었지만 이미 외채는 겉잡을 수 없이 불어나서 이미 갚을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리고 말았던 것. 이 시기에 상당수 동구권 국가들이나 제3세계 국가,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이 외채 문제로 경제위기에 시달렸는데 동시기에 경상수지 흑자를 낸 국가들도 외채 문제 때문에 이자 갚기에도 급급했던 상황이었고 아르헨티나도 이 문제에서 예외는 아니었던 차였다.
그래도 집권 초기에 화폐개혁을 단행하면서 아우스트랄이라는 신 화폐를 도입, 경제 면에서 물가상승률을 어느정도 낮추고 경제성장률도 높이는 성과를 거두는 듯 했지만 1986년에 일부 기업들이 상품부족으로 부도처리되는 사건이 벌어지며 신뢰도가 떨어지기 시작했고, 아무리 화폐개혁을 했다 해도 외채가 하루 아침에 탕감되는 것도 아니지라, 1987년 하반기를 기점으로 상황이 크게 악화, 물가가 치솟기 시작하면서 사태는 악화되었고 전국적으로 알폰신 정부의 경제 정책을 규탄하는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더욱이 악화되어 가는 실업 문제에 있어 알폰신 정부는 소극적으로 대응하였고, 물가상승률은 네자릿수대를 기록해서 아예 충분한 지폐를 구하기 힘들 정도가 되다 보니까 국민들의 인기를 잃고 말았고[2] 알폰신 정부가 집권 초 추진했던 군사 정권에 대한 과거 청산 역시 군부의 불만을 사 알폰신을 축출하려는 쿠데타 시도까지 벌어졌다.
알폰신은 나름 획기적인 경제정책이라며 아우스트랄 프로젝트를 짜고 여러 방면으로 노력했으나 이미 호르헤 비델라가 너무 심하게 경제를 망쳐놓아 회생이 불가능한 지경까지 도달했고 그래서 아무리 노력해도 안되는 것이었다. 일단 비델라가 기업이란 기업은 전부 처분해버렸으니 국가가 기업에 손댈 수도 없고 외자를 너무 유치해버렸으니 그게 죄다 빚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알폰신은 정말 눈물겨운 발악을 했지만 그러기엔 비델라가 싸놓은 똥이 너무 거대했다. 이건 상식적으로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고 막말로 얘기하자면 아르헨티나는 외국의 원조 없이는 운영이 안되는 나라로 전락하고 말았다.
결국 국민들의 반감과 경제 사정의 악화로 인해 알폰신은 임기를 수개월 남기고 1989년 7월 8일 대통령직에서 사임하였고 조기 대선이 치러졌으며, 이 선거에서 급진시민연합 후보가 패배하고 페론당의 카를로스 메넴이 당선되었다. 그는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급진시민연합 총재직을 맡아오다 2001년 정계에서 은퇴했다. 은퇴 후 정치와 거리를 두며 자택에서 말년을 보내다 2009년 3월 31일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사망일로부터 3일 동안을 국가 애도 기간으로 공표했으며 수많은 인파가 장례 행렬을 지켜보며 애도하는 가운데 유해는 부에노스아이레스 레콜라타 묘지에 안장되었다.
[image]
레콜라타 묘지에 있는 알폰신의 묘역.
5. 평가
아르헨티나에서는 군사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고 처음으로 민주정부를 수립했고 독재자와 군부를 청산했지만 금융위기를 막지 못했다는 점에서 하나회 청산의 업적과 IMF 위기의 부정적 유산이 공존하는 김영삼 대통령과 비슷한 평가를 받는 대통령이기도 하다.
그래도 경제고 국력이고 다 박살나버리고 강대국의 지위마져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르헨티나의 민주주의가 그럭저럭 정상적으로 굴러가게 만든 인물이기 때문에 아르헨티나 국민들도 그 점은 인정한다. 당장 비슷한 시기 윗동네와 옆동네의 독재자가 어떤 인간인지를 생각해본다면 더욱 그렇다.
[1] 특히 군부 내부에서는 무리한 전쟁을 요구하는 군 내부의 간부들과 극우정치인들 에게 실망을 한 나머지 젊은 장교들을 중심으로 독재정권에 등을 돌리게될수 밖에 없었다.[2] 다만 이후로도 실업문제는 나아지기는 커녕 악화되어왔는데 카를로스 메넴 정부 때 민영화 정책으로 구조조정이 일상화되어서 실업자들이 크게 불어났기 때문이다(1995년 메넴이 재선에 성공했을 무렵에 이미 실업률이 18%에 달하던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1990년대 중후반의 불황과 97년부터 2002년까지 이어진 외채문제로 인한 경제난으로 실업률은 더욱 치솟아서 20%대로 오르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실업률이 그나마 줄어든건 2000년대 중반에 와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