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비안검법

 

奴婢按檢法
1. 설명
2. 내용
3. 호족의 반응


1. 설명


고려 초기 광종양인이었다가 억울하게[1] 노비가 된 사람을 풀어주는 법이다.

2. 내용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은 수많은 호족들에게 왕씨 성을 내려주거나(사성정책), 혼인을 통해 자신의 사돈으로 만드는 등 적극적인 호족 포섭 정책을 통해 후삼국을 통일시킬 수 있었다. 문제는 이게 딱 통일된 그 때까지만 좋았다는 것. 29명의 부인들에게서 25명이라는 많은 수의 아들을 두었던 만큼 당장 왕건 본인의 말년 무렵부터 후계 구도를 놓고 호족들 간에 다툼이 일어났고, 태조의 적장자였음에도 상대적으로 세가 약했던 외가 탓에 간신히 태조의 뒤를 이을 수 있었던 혜종왕규의 난에서 보듯 재위기간 내내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에도 급급하다가 요절하고 만다.[2] 혜종의 뒤를 이은 정종 역시 호족들의 기득권을 뒤흔들기 위하여 북벌을 기치로 내걸어 서경 천도를 시도했지만 급사 크리.[3] 그렇지만 정종의 뒤를 이은 동생 광종 역시 포기하지 않고 호족들을 억제하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하였다.[4] 그리고 이러한 시도 중 하나로 등장한게 바로 노비안검법.
이 당시 호족은 후삼국끼리 싸우는 와중에 포로가 되었거나 빚을 갚지 못한 것과 같은 이유로 양인에서 노비로 전락한 사람들을 많이 데리고 있었다. 당시 관념상 노비는 당연히 재산으로, 호족의 경제적·군사적 기반으로 자리잡았고, 이는 필시 왕권을 위협하는 것이므로 왕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눌러야 할 것들이었다. 물론 이런 속마음을 대놓고 명분으로 삼을 수는 없었기에 광종이 내건 명분은 '''"신라-고려의 왕조 교체기를 통하여 혼란했던 사회적 신분 질서를 바로잡는다"'''였다. 이를 통해 호족의 세력을 뿌리부터 흔들 수 있었던 것은 물론이요, 양인 계층으로 포섭된 해방 노비들은 세금을 내게 됐으므로 그야말로 일석이조.

3. 호족의 반응


당연히 호족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아닌 게 아니라 광종의 부인 대목왕후 황보씨[5]까지도 이 법에 반대했을 지경이니... 그렇지만 광종의 의지가 너무나 굳건했던 탓에 끝내 폐지되지 않았으나, 이후 30년쯤 지난 성종최승로[6]의 건의(시무 28조)를 받아들여 노비환천법을 제정, 양인이 된 자들을 다시 노비로 돌려 버린다...

[1] 가령 전쟁 포로출신이라던가 빚을 갚지 못해서라던가...[2] 오늘날 사학계에서는 호족들에 의한 혜종의 암살설이 꽤나 진지하게 연구되고 있다.[3] 정종이 죽을 때 벼락이 치는 등 여러모로 시해가 의심가는 정황이 있다.[4] 교과서에도 나올 과거제라던가 관직별로 옷색깔을 나누게 했다던가 등등...[5] 광종의 '''이복여동생'''이다. 황보씨는 외가 쪽 성으로, 겉보기에라도 다른 집안으로 보이게 하려는 왕건의 꼼수다.[6] 최승로광종에 대해 꽤 비판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