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고려)

 


'''고려 제6대 대왕
成宗 文懿大王
성종 문의대왕
'''
<colbgcolor=#f9d537><colcolor=#670000> '''묘호'''
'''성종(成宗)'''
'''시호'''
강위장헌문의대왕
(康威章憲文懿大王)[1]
'''절일'''
천추절(千秋節)[2]
'''성씨'''
왕(王)
''''''
치(治)
''''''
온고(溫古)
'''왕후'''
문덕왕후(文德王后), 문화왕후(文和王后)
'''부왕'''
대종(戴宗) 현헌태왕(顯獻太王)
'''모후'''
선의왕후(宣義王后)
'''능호'''
강릉(康陵)
'''사망지'''
고려국(高麗國)
개경(開京)[3] 개성부(開城府)[4]
본궐(本闕) 내천왕사(內天王寺)
'''생몰연도'''
음력
960년 12월 26일 ~ 997년 10월 27일
양력
961년 1월 15일 ~ 997년 11월 29일 (38세)
'''재위기간'''
음력
981년 7월 12일 ~ 997년 10월 27일
양력
981년 8월 14일 ~ 997년 11월 29일 (16년)
1. 소개
3. 생애
4. 업적
4.1. 유교식 예법 도입
4.2. 불교 폐단 개선
4.3. 군대 편제 재편
4.4. 중앙정부 재편성
4.5. 지방제도 개편
4.5.1. 동경 설치
5. 평가
5.1. 후계자 공인
5.2. 친공신 정책
5.3. 개혁의 도로아미타불
5.4. 조선 성종과의 비교
6. 기타
6.1. 능묘
6.2. 가족관계
7. 대중 매체에서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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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고려의 제6대 임금. 묘호는 성종(成宗), 시호는 문의대왕(文懿大王). 휘는 치(治), 자는 온고(溫古). 이름의 한자가 자주 쓰이는 한자였기에 자주 피휘되었고 고려 시대에는 자치통감을 '''자리(理)통감'''이라고 썼던 이유이기도 하다.
태조 신성왕이 호족을 모아 건국하고 광종 대성왕이 대숙청으로 권위를 세웠다면 '''성종 문의왕이 그 권위를 바탕으로 국가 제도의 기틀을 잡았다.''' 이후 성종이 돌봐준 현종 원문왕이 내우외환의 위기에서 고려 중흥의 발판을 마련하고 성종의 제도를 바탕으로 문종 인효왕이 국가를 재부흥시킨다. 다만 성종은 호족을 완전히 무시하지 못했고 그렇기에 북송의 귀족 중심 제도를 모델로 삼아 문벌 귀족의 탄생을 야기한 아쉬운 점이 있다.

2. 묘호시호


공식 묘호는 성종(成宗), 묘호를 달리 불러 성묘(成廟)라고도 했다. 성종은 특이하게 태묘를 도입할 때 제후가 사용하는 5묘제를 따랐지만 선왕들에게 묘호를 바쳐 천자(天子)로 대우했다. 시호는 대부분 고려 국왕이 그렇듯 2가지 버전이 있다.
  • 고려사 성종 세가 총서:
강위장헌문의대왕
(康威章憲文懿大王)
  • 고려사 성종 세가 마지막 조:
양정헌명광효장헌강위문의대왕
(襄定獻明光孝章獻康威文懿大王)
대표 시호는 후계자 목종이 올린 '''문의대왕(文懿大王)'''으로 묘호와 시호를 같이 불러 성종 문의대왕(成宗 文懿大王), 약칭 성종 문의왕(成宗 文懿王)이다. 현종이 세운 현화사비에는 '성종 문의대왕(成宗 文懿大王)'으로 등장하며 시호를 생략한 '성종대왕(成宗大王)'으로도 나온다.

3. 생애


'''고려의 역대 정윤'''
왕유(왕태자 - 정윤)

'''왕치'''

왕송(왕위 후계자)
'''고려의 역대 개령군'''
'''대수'''
'''작호'''
'''이름'''
'''초대'''
'''정윤(正胤) 개령군(開寧君)'''
'''왕치(王治)'''
'''2대'''
개령군(開寧君)
왕송(王誦)
태조와 제4비 신정왕태후 사이의 아들인 왕욱[5]의 아들로 태어났다. 동복 누나로는 둘째 누나 헌정왕후가 있고 동복 동생으로는 선왕인 경종의 아내가 된 헌애왕후가 있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할머니인 황보씨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다. 이미 어릴 적부터 공부를 좋아하고 학문에 능했다고 한다.
경종이 말년에 정사에 뜻을 잃고 향락에 빠져있던 중 병으로 쓰러졌는데 당시 그의 아들이었던 왕송은 아직 젖도 떼지 못한 어린 아이였다. 큰 혼란이 야기될 것을 염려한 경종은 자신의 사촌 동생이고 누이 문덕왕후의 남편이며 아내들의 오빠로서 아들의 외삼촌 겸 고모부 겸 당숙이 되는 성종에게 선위를 하고 붕어했다.
사실 성종에게는 후에 효덕태자라고 불리게 되는 친형이 있었으나 아마 광종사위라는 점이 형을 제치고 왕위에 오를 수 있는 결정적 요인이 아니었을까 싶다. 고려사절요에는 성종은 등극하기 전 정윤(正胤) 작위, 개령군 군호를 받았다고 나와 있으며[6][7] 결국 성종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재위 후 학자 출신의 최승로를 등용해 그의 <시무 28조>를 받아들였다. 서경 장락궁에 가 경종의 아들 왕송을 자신의 후계자로 공인하였다. 이 때 자신의 태자나 정윤으로 봉하지 않고 자신의 군호를 물려주는 특이한 방식을 썼다.
이후 거란의 장수 소손녕(소배압의 아우)의 침입으로 평양 이북을 넘겨줄 뻔 했으나 문신 서희의 정확한 판단과 담판 성공으로 강동 6주를 획득해 위기를 기회로 바꾸어 놓았다. 사실 이 대목은 서희의 개인 활약이 컸다. 서희를 제외한 조정의 대세는 땅을 떼어주자는 것과 항복론 뿐이었다. 이때를 거란의 1차 침입으로 부르며 자세한 것은 여요전쟁서희 문서 참고.
38세라는 젊은 나이에 병으로 붕어했다. 붕어하기 직전 왕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해 대사면을 내리자는 말에 "사람 목숨은 하늘에 달렸는데 그래 봤자 뭐하며 나를 계승할 사람은 무엇을 가지고 새 은혜를 베풀 것이냐."며 거절하였다. 죽기 전 후계자 개령군을 직접 대면해 왕위를 전하였고 내천왕사(內天王寺)[8]로 이동하였다가 붕어하였다. 아들은 없었으며 만 있었다.

4. 업적



4.1. 유교식 예법 도입


성종은 유교에 입각한 정치를 지향했지만 엄연한 국교로 자리매김한 불교 역시 무시하지 않았고 불교와 유교를 접목시켜서 고려에 유교적 제사를 도입했다.
천자와 그 일족의 생일에는 좋은 의미를 담은 명칭을 붙혀 축하하는 관습. 이를 '절일'이라 부르는데 당나라 때 시작된 제도로서 우리 역사상 성종이 처음으로 도입했다.
천자는 유교식 예법[9]을 따라 상제(上帝)와 오방제(五方帝)에게 제사를 지냈다. 이 제사를 '환구', 제단을 '환구단'이라 일컫는다. 하늘이나 천신 숭배 사상은 우리나라에서도 매우 오래 전에 자리잡았던 신앙이었지만 유교 예법을 따른 숭배 방식이 도입된 건 성종 때가 최초였다.
구 왕실 신라도 사직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상세한 기록은 아니었다. 언제 세웠는지 어떻게 세웠는지 등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는 사직은 성종 시기가 최초. 사직은 땅의 신에게 제사지내는 것으로 유교식 제사의 대표급이다.
종묘, 혹 태묘라고 불리는 제사는 유교식 왕실 제사 중 가장 중요한 제사였다. 새 국가를 건국하거나 운영했던 군주들을 추모하고 존중하기 위해 지내는 제사로 천자의 7묘제, 제후의 5묘제가 있다. 성종은 5묘제를 채택했으나 안치된 군주들에게 묘호를 올려 제후와 천자 사이에서 절충하여 어느 정도의 자주성을 지켰다. 고구려, 신라, 발해도 종묘가 있었다는 기록이 전해오지만 신라를 제외하고 기록이 다들 적거나 거의 없는 수준이다.
한국사 최초로 종묘에 군주와 같이 모셔질 배향공신을 선정했다. 초대 태조부터 5대 경종까지 공신을 뽑아 같이 모셨으며 본인이 추존한 부왕 대종은 추존 군주이니 제외되었다.
  • 교(敎) 도입
교(敎)는 제후가 내리는 명령이다. 천자가 내리는 명령은 성(聖), 선(宣)이라고 하는데 고려는 지금까지 성지, 선지를 사용했다. 하지만 성종 대에 교로 내렸는데 희한하게도 성종은 천자가 쓰는 절일, 환구단, 3성 6부, 묘호를 도입해 놓고서는 명령만 낮추었다. 교는 성종이 죽고 목종, 현종 대에 곧바로 폐지되고 천자식으로 회귀했다.

4.2. 불교 폐단 개선


한편 왕건의 훈요 10조에서 포함시킨 '불교 숭상'에 따라 거행해 온 팔관회연등회를 즉위 직후 폐지했다. 일단 성종 개인이 유교적인 성향이 강한 이유도 있었겠지만 사실 이에는 꽤 복잡한 사정이 있는 것이 이들 두 행사가 전국적으로 치르는 거대한 종교 행사인 만큼 한번 지낼 때마다 엄청난 국비가 소모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모든 부담은 백성들에게 전가되는 터라 백성들의 힘겨움 역시 장난이 아니었다. 이러니 이러한 종교 행사보다는 일단 고려의 기틀을 잡는 것을 더욱 우선시했던 것이다. 다만 팔관회와 연등회는 성종 이후에 금방 다시 부활해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계속했다.

4.3. 군대 편제 재편



성종 이전에는 고려의 군대가 이원화되어 있었다. 중앙 정부에서 통제하는 국왕군과 지방의 호족들이 통제하는 사병들로 고려는 이전부터 호족을 통제할 방법을 찾고 있었다. 3대 정종은 거란의 침략을 빌미로 광군을 만들어 30만 대군을 형성했다. 이들은 국왕군 소속이 아닌 지방 호족들의 군사로 채워져 일종의 예비군 형태를 띄었다. 이후에도 광종이 대대적으로 호족을 숙청했고 성종은 이 때를 틈타 2군 6위 체제를 구성한다.
고려는 군대를 크게 경군(京軍)과 외군(外軍)으로 구분했다. 경군은 개경과 주변 지역에 주둔했으며 국왕의 직접 통제를 받는 2군 6위[10], 외군은 각 지역과 각 국경에 주둔하며 국왕이 임명한 관리가 통솔하는 주현군, 주진군이다.
성종의 편제는 고려의 군대 편제에 크게 영향을 미쳤고 그가 구상한 체제는 목종 대까지 거쳐 6위가 완성되고 현종 대에 2군이 설치되어 이를 바탕으로 국왕의 친위대인 견룡군, 순검군, 공학군 등이 추가로 만들어질 수 있게 된다.
외군인 주현군과 주진군은 성종 대에 완성시키지 못했다. 이는 지방 호족들의 힘이 워낙에 강성했기에 사병을 혁파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성종은 이에 절충안으로 절도사를 제정해 각 지역의 호족 사병들로 하여금 절도사의 군단 밑으로 들어가게 해 점진적으로 힘을 빼기로 결심한다. 성종이 조직한 12주 절도사와 그 군단은 다음과 같다.
  • 현 이북 황해도 일대 주:
    • 황주(黃州) 우신책군(右神策軍) 절도사
    • 해주(海州) 천덕군(天德軍) 절도사
  • 대한민국 경기도 일대 주:
    • 양주(楊州) 좌신책군(左神策軍) 절도사[11]
    • 광주(廣州) 봉국군(奉國軍) 절도사
  • 현 대한민국 충청도 일대 주:
    • 충주(忠州) 창화군(昌化軍) 절도사
    • 청주(淸州) 전절군(全節軍) 절도사
    • 공주(公州) 안절군(安節軍) 절도사
  • 현 대한민국 경상도 일대 주:
    • 상주(尙州) 귀덕군(歸德軍) 절도사
    • 진주(晉州) 정해군(定海軍) 절도사
  • 현 대한민국 전라도 일대 주:
    • 전주(全州) 순의군(順義軍) 절도사
    • 나주(羅州) 진해군(鎭海軍) 절도사
    • 승주(昇州) 곤해군(袞海軍) 절도사
이 제도는 호족의 사병을 해체시키지는 못해도 최소한 중앙 정부의 통제하에 둘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고 목종 대에 북방 양계를 제외한 절도사 제도 폐지, 현종 대에 완전 폐지를 통해 주현군과 주진군 제도가 완성되는 것으로 그 사명을 다한다.

4.4. 중앙정부 재편성


고려 초기에는 태조가 신라태봉의 제도를 섞어 만든 6관제를 사용했다. 광평성과 내의성이 있었고 그 밑에 6관이 설치된 모습이었는데 성종은 이를 고쳐 당나라3성 6부제를 변형한 2성 6부제를 도입하였다. 성종이 만든 2성 6부, 중추원-중서문하성 양부 체제는 조금씩 바뀌지만 전체적인 토대를 유지한채로 충렬왕 대까지 이어진다.

4.4.1. 중서문하성상서성


3성 중 중서성, 문하성, 상서성이 최고 기관이었는데, 성종은 중서성과 문하성을 합쳐 중서문하성을 형성해 중서문하성이 최고 기관이 되도록 했다. 상서성을 구성한 6부는 형부, 이부, 병부, 공부, 예부, 호부로써 업무를 나누었다.

4.4.2. 중추원


한언공의 지원을 받아 중추원을 설립했다. 중추원은 추부, 중서문하성은 재부란 별칭을 받아 양부로 묶여 고려의 최고 정부 기관으로 설정하였다.

4.4.3. 품계 재편


신라의 관등이자 신분제인 골품제가 사라지고 고려는 다시 관등을 짜야했다. 건국 군주였던 태조 신성왕은 신라, 태봉의 품계를 가져와 고려만의 품계를 만들었다. '''9품 16등위'''로 총 16단계의 품계가 있었으며, 문관과 무관에 상관없이 모든 관료들에게 적용되었다. 태조가 만든 품계는 명칭이 없었고, 성종 초반까지 정식 관작의 품계로 활용되었다. 삼중대광, 중대광, 대광, 좌승, 대승 등 유명한 고려의 초기 품계들이 바로 이 태조의 품계다.
이후 성종은 북송의 품계[12]를 도입, 15품을 만들어 총 '''15단계'''의 품계를 만든다. 이 품계는 문종 때 더 심화되어 '''29품 품계'''가 완성된다. 이 품계가 바로 '문산계(文散階) 품계'다. 개부의동삼사, 특진, 금자광록대부 등 문산계는 성종 대에 적용되어 원 간섭기에 들어서는 충렬왕 대까지 유지된다.
성종의 문산계 품계는 정1품을 비우고, 종1품 개부의동삼사부터 시작한다. 품계에 맞추어 삼사삼공 직에는 행수법이 적용되는 등 직위에도 여러 변화가 생긴다.
북송의 품계는 문관의 문산계, 무관의 무산계(武散階)로 나뉘어 적용되었다.[13] 고려는 태조 품계 때부터 문무관의 품계에 차이를 두지 않았고, 이는 성종이 문산계를 도입해 개조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즉 문무 양반은 여전히 모두 하나의 품계하에 나뉘었다. 무산계는 말 그대로 형식만 남아 고려가 여진, 탐라 등의 제후들에게 봉하였다.
원래 사용되던 태조의 품계는 향직(鄕職) 품계로 명칭이 정해지고, 정식 품계가 아닌 명예직으로 밀려난다. 하지만 태조가 직접 제작한 품계인만큼 그 존재감은 여전해 강감찬, 서눌, 이자연, 김인존과 같은 재상들과 척준경, 최충헌 등 권신이 봉해졌고, 충렬왕 대에는 다시 정식 품계로 일부가 합쳐지는 등 고려 말까지 전해진다.[14]

4.5. 지방제도 개편


성종은 중앙 정부의 지배력 강화와 더불어 지방 호족의 독립성을 누르기 위해 재위 14년 차인 995년에 대대적인 변혁을 일으켰다. 바로 10도(道)와 12목(牧)의 제정이다.
지방 관제의 최고 단위인 '''도(道)'''는 성종이 도입한 이후 조선 왕조, 대한제국에 이어 대한민국까지 사용하게 된다. 도는 원래 당나라의 제도로 성종이 당제를 수입한 뒤에 신라의 행정 지역 구분에 맞춰 개조한 것으로:
  • 관내(關內)
  • 중원(中原)
  • 하남(河南)
  • 강남(江南)
  • 영남(嶺南)
  • 영동(嶺東)
  • 산남(山南)
  • 해양(海陽)
  • 삭방(朔方)
  • 패서(浿西)
총 10개 도를 만들었다. 10도 아래에 '''목(牧)'''을 두어 절도사를 파견했는데 이는 위 군대 재편과도 연관된다.
12목을 설치함으로써 고려는 지방관 체계의 기틀을 잡았으나 고려 왕조 내내 지방관이 파견된 곳보다 아닌 곳이 많았던만큼 조선 시대의 지방관 체계보다 정교한 것은 아니어서 바둑에서 포석 깔듯 12구역에 걸쳐 임시로 체계를 다진 것에 불과했다. 성종의 치세에도 여전히 호족들의 세력이 강대했기 때문으로 이 지방관들의 권한도 조선의 지방관들과는 비교하기 난처할 정도로 약했다. 조선 시대 지방관들은 해당 지역의 행정권, 사법권, 군령권을 모두 가지고 적극적으로 행사할 수 있었으나 고려의 지방관은 기껏해야 외침이 있을 때 군령권 정도나 발휘하지 행정권이나 사법권은 여전히 지방 토호인 호족들이 쥐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니 제대로 된 징세나 징병이 어려울 수밖에 없었고, 이는 이후 고려가 전란을 겪으면서 큰 부담으로 작용한다. 징병이든 징세든 전국에 걸쳐 공정하게 골고루 시행하지 않고 되는 곳에서만 계속 뽑아먹은 것이다.
그러나 지방 호족들의 불만을 억누르고 지방관 제도의 기반이라도 다졌다는 데에 큰 의의가 있다. 이후 현종이 이 제도를 바탕으로 5도 양계 제도를 완성한다.

4.5.1. 동경 설치


천년왕조 '신라국'은 고려 태조 때 '경주대도독부'로 격하되었다. 비록 없어졌다지만 신라의 영향은 여전히 컸다. 이에 성종 재위 6년(987년), 경주대도독부는 '동경(東京)'으로 승격되어 개경, 서경과 함께 경으로 존재하게 된다. 보한집엔 이 때 동경의 원로들이 기뻐하며 신라를 중국의 주나라, 고려를 한나라로 비유하며 성종을 찬양한 시가 남아있다. 동경은 현종이 다시 격하했다가 복원하고, 신종 때에 또 격하되었다가 고종 때 복원된다. 이후 충렬왕 때 계림부로 격하되어 막을 내린다.
성종의 동경 설치는 구 신라 세력을 우대해 지방세력을 안정시키고자 한 정책이었다.

5. 평가


성종은 평이 극단적으로 다른 군주다. 성종 치세 17년 동안 고려는 그 뼈대가 통째로 교정됐다. 성종이 만든 제도는 충렬왕 대에 관제 격하를 당하기 전까지 개선만 있을 뿐, 전면 부정된 적이 없었으니 그 영향력을 알 수 있다. 고려사 지를 보면 어디서든 성종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성종의 손이 안 닿은 곳이 없을 정도이다. 당장 이 문서의 업적 항목만 봐도 성종의 개혁이 얼마나 넓었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고려는 호족의 국가였다. 아무리 정종 ~ 광종 대에 대숙청이 있었어도 지방호족들의 힘은 막강했다. 성종의 개혁은 결국 신분제를 공고히 하는 부정적 효과도 가져오게 된다.

5.1. 후계자 공인


태조, 혜종, 정종, 광종과는 달리 후계자 문제도 철저했으며 왕족 견제도 부드러운 편이었다. 성종은 본인이 한창 젋을 때 조카 왕송을 서경으로 데려가 자신의 군호를 물려주었다. 아예 대놓고 왕송이 후계자임을 선포한 것으로, 선왕 경종과 친동생 천추태후를 존경하는 의미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고려엔 국왕 사후 내전이 벌어지지 않게 되었다.
안종과 효숙태후가 불륜을 저지르자 안종을 유배시키는 선에서 끝냈고, 둘의 아들인 현종을 살려두어 안종의 곁으로 보냈다. 혜종의 아들 흥화궁군, 정종의 아들 경춘원군이 이름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진 것에 비해 매우 다른 결정이었다.

5.2. 친공신 정책


최승로의 시무 28조를 받아들인 탓에 문벌 귀족 사회를 초래했는데 이는 고려 특유의 문치주의 및 신분 질서가 고착되어 무신정변이 일어나는 간접적 배경이 되었다. 성종이 제정한 노비환천법과 공신 우대책은 이후 부곡민과 음서제 형성에 영향을 주기도.
그러는 동시에 광종노비안검법은 성종의 노비환천법으로 무효화되었다. 노비안검법은 부곡민 체제를 고치기에 적합했지만 성종기에는 이를 틀어막은 경향이 크기 때문에 결국 부곡민은 일종의 농노 형태로 고려 멸망 때까지 남게 되었다. 물론 성종도 노비 환속의 제약을 두어 40세 전후에는 노비환천법이 통하지 않게 했지만 그저 미봉책이었을 뿐이다.
초기 공신들과 후손들은 과거제를 반대했고[15] 관직을 대대로 물려주는 경향이 컸다. 최승로의 시무 28조는 과거제 자체는 비판하지 않았지만 공신 세력을 탄압하는 건 태조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라며 우회적으로 비난했다. 성종은 공신 세력에게 양보를 해줘야했고 이것이 음서제다. 음서제의 강화로 과거제는 효과가 반감되어 이후 이자겸의 전횡을 시작으로 무신 정권기에는 추천으로 사람을 뽑고 과거제 출신 문신들은 어용화된다.
이 원인 중 하나는 광종 대에서 정점을 찍은 왕권이 경종 대의 반동 정치로 왕권이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더해 성종 본인이 직계로 된 것이 아니라 주위 세력의 추대로 왕이 된 것 또한 악재가 되었다.
고려 성종이 국가 체제의 틀을 잡았지만 그 기반이 된 것은 귀족 중심인 북송의 시스템이었다. 중앙 귀족의 힘이 강해진 것 때문에 문치주의가 극도로 강해졌고 거란의 1차 침입에 할지론이 대세가 되는 배경이 되었다. 또한 동시에 중앙 호족의 경쟁 상대였던 지방 호족들을 향리로 굳혀버리기 위한 방법이기도 했는데 여기에 노비환천법과 공신 자손 우대 등으로 중앙 귀족을 강화했으니 왕권이 약해지면 바로 귀족 정치가 열리는 배경이 되었다.

5.3. 개혁의 도로아미타불


거란이 고려에게 1차 침입을 단행하고 중앙군이 무너지는 와중에 전 민관어사 이자백이 문서를 올렸는데, 다음과 같다.

“태조(왕건)께서 나라를 처음 세워 왕통을 드리우셨는데, 오늘날에 이르러 충신이 한 사람도 없어서 갑자기 국토를 경솔하게 >적국에 주고자 하니, 원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옛사람의 시(詩)에서 말하기를, ‘천리의 산하(山河)를 가벼이 한 어린아이, >두 왕조의 문무백관이 초주(焦周)를 한탄하였네.’라고 하였으니, 대개 초주가 촉(蜀)의 대신으로서 후주(後主)에게 영토를 위(魏)>에 바치라고 권하여 오래도록 웃음거리가 되었음을 일컫는 것입니다. 경솔하게 토지를 분할하여 적국에 주어버리는 것이 어찌 >연등회(燃燈會)·팔관회(八關會)·선랑(仙郞) 등 선왕(先王)의 일을 다시 시행하고, 다른 나라의 다른 법을 따르지 않음으로써 >국가를 보존하여 태평한 정치에 이르는 것만 하겠습니까. 만약 옳다고 여기신다면, 마땅히 먼저 천지신명에게 고하시고, 그 후에 >저들과 싸울 것인지 강화할 것인지는 오직 성상께서 결정하시면 됩니다.”

즉, 직역하자면 '''전쟁의 와중에 연등회 팔관회를 개최하고 법따위를 고치는 게 먼저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무슨 정신나간 소리인가 하겠지만, 성종의 개혁과 그로 인한 영향을 봐야 한다. 당시 성종은 지방행정제도를 개편하고 호족의 힘을 약화시키며 중앙군을 키우는 등 중앙집권화를 위해 노력했고, 그 유명한 시무 28조도 그 일환이었다. 당연히 지방세력과 호족들은 반발했지만 왕의 결단력에 유교세력의 지지가 합쳐지자 개혁은 거침없이 진행되었다. 결국 지배층은 왕을 지지해 개혁을 밀어붙인 세력을 화풍파, 불교를 중시 여기며 개혁에 반대하던 기존세력을 토풍파(또는 국풍파)로 분열되었으며 화풍파가 우위를 점하는 구도가 여요전쟁 이전까지 지속되었다. 이렇게 성종의 개혁이 진행되던 와중 거란이 쳐들어왔고, 왕과 화풍파가 열심히 키운 지방군이 '''박살났다.''' 결국 고려의 지방군은 붕괴되고, 더이상 남은 군사가 없어 자신들이 탄압한 지방세력에게 군사를 빌려야 하는 상황이 온 것이다. 이런 와중에 전직 토풍파 출신인 이자백이 위의 문서를 올린 것. 즉, 저 문서의 진짜 의도는: ''':태조 왕건이랑 우리 야당(지방세력)이 같이 뼈 빠지게 고생해서 나라를 만들었는데, 위나라한테 촉나라를 통째로 넘긴 초주 같은 집권 여당 놈들이 거란에게 땅을 내어 주자는 헛소리를 하네? 니네가 지금까지 우리한테 어떻게 했는지 알지? 당장 연등회, 팔관회 폐지한거 취소하고, 너네가 지금까지 중국법 따라 했던 개혁 싹 다 취소해라. 그리고 너(성종)는 우리 다 보는 앞에서 천지신명한테 반성문 써서 보고해라. 그렇게 해야 우리(지방세력)가 군사를 내어 줄지 말지를 생각해 볼게.'''"가 된다.
결국 성종은 이를 받아들여 지방세력의 요구를 전면적으로 받아들였고, 덕분에 개혁의 상당수가 도로아미타불이 된다. 어쨋든 성종이 이것을 받아들이자 토풍파의 당수인 서희[16]가 소손녕과의 강화를 이끌어내 강동 6주를 획득하며 위기를 넘기지만, 이로 인해 팔관회와 연등회가 복구되고, 지방세력의 존재를 인정한 주현-속현 체제가 고려 멸망 때까지 유지된다.

5.4. 조선 성종과의 비교


여러모로 조선 시대의 성종과 흡사한 면이 있다. 묘호가 동일한 점은 유교를 바탕으로 한 정책을 펼쳐 나라의 기틀을 잡았기 때문에 이에 맞춘 시호를 올린 것이지만 그 외에도 아버지가 왕이 아니었으며 위에 형이 있음에도 운 좋게 왕위에 올랐다는 점이나 사망했을 당시의 나이도 같으며(38세) 심지어 사후에 나라 꼴이 막장이 되었다는 것까지 동일하다.[17]
그러나 조선 성종은 조선을 건국하는 데 일등 공신인 신진사대부들에게 족쇄를 채우던 제도를 숱하게 남긴데 반해 고려 성종은 장원이라는 대토지제인 공음전을 가속화시켰고 부곡민 체제를 허물지 않으면서 노비환천법을 실행에 옮기며 문벌귀족, 호족기득권 지배층에게 오히려 힘을 실어줬다는 점에서 차이점이 있다. 또한 고려 성종은 광종이 없앤 장원을 도로 부활시킨데 반해 조선 성종은 공음전보다 더 개혁적인 과전법을 거쳐 직전법을 시행하여 장원을 아예 없앴다는 점에서도 서로 차이점이 있다.

6. 기타


  • 유교적인 정책을 펼쳤다 하여 불교를 탄압한 것으로 오해받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오히려 유교와 불교의 조화를 꾀하는 편이었다. 비록 백성들에게 유교적 사상을 권장하기는 했지만 불교를 억누르는 면모까지 보이지는 않았는데 불교가 이미 수백 년이 넘도록 백성들 사이에서 신봉되어 토착 신앙과 결부될 정도로 뿌리깊게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버지와 태조의 제사를 지낼 때에 유교적인 제사뿐만 아니라 백성들을 시켜 불공을 드리게 했던 기록이 남아 있다.
  • 한편 역대 고려 국왕 중 가장 친유교적인 군주이기도 했는데 이로 인해서인지 누나와 여동생이 유교 예법에 위배되는 일을 저질러 처벌해야 했다. 누나와 여동생 모두 선왕 경종의 왕후였지만 경종 사후에 둘 다 다른 남자들과 정을 통했기 때문. 동생 헌애왕후의 경우는 그녀를 한동안 유폐시킴과 동시에 내연남김치양을 장형으로 다스린 뒤 섬으로 유배보냈고 둘째 누나 헌정왕후의 경우는 사생아를 낳은 후 그 후유증으로 승하했기에 그녀와 사통한 왕건의 8번째 아들이자 자신의 숙부였던 왕욱을 유배보내는 걸로 그쳤다. 그래도 조카이기 때문인지 헌정왕후의 아들은 한동안 궁궐에서 성장했다.
  • 성종이 태묘를 만든 뒤, 태묘의 태조실에 안치한 도자기가 대한민국에 현존하고 있다.

6.1. 능묘


[image]
북한 판문군 진봉리에 남아 있는 성종의 강릉(康陵). 밭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여 있는 게 '''왕릉 맞다.''' 원래는 병풍석과 석축이 있었는데 농지 개발 과정에서 없어지거나 묻혀 버렸다고 한다.
[image]
좀 더 가까이서 찍은 최근 사진. 초라한 상태인건 마찬가지.

6.2. 가족관계


첫번째 왕후는 문덕왕후이다.
두번째 왕후는 문화왕후이다.
문덕왕후는 고려 최초의 재혼한 왕후이며 문화왕후는 고려 최초의 대비이다. 여러모로 고려 왕사에 자취를 남기고 간 셈.
'''작위'''
'''연창궁부인
(延昌宮夫人)'''
'''성씨'''
최씨
'''생몰연도'''
? ~ ?
성종의 3비. 현종의 2비 원화왕후를 낳은 사람이기도 하다. 사위인 현종이 즉위 후에 낙랑군대부인으로 추증하였다.
후에 성종의 딸들은 현종과 혼인했다. 성종의 제2비 문화왕후의 딸은 현종의 제1비 원정왕후이고, 성종의 제3비 연창궁부인의 딸은 현종의 제2비 원화왕후가 되었다. 이 때문에 선왕의 아들이자 성종의 조카인 개령군이 목종으로 즉위했다.

7. 대중 매체에서의 모습


[image]
'''드라마 천추태후에서의 성종'''
드라마 천추태후에서는 김명수가 성종으로 연기했다. 천추태후주인공이며 선역인 탓에, 완전한 악역은 아니지만 주인공과 대립하는 역할. 경종 생전에는 그래도 여동생 천추태후와 함께 고난을 견디는 사이였으나, 신라계 유학파 신료들과 친해지면서 북방계 문신들과 친한 천추태후와 대립하게 된다.
황제로서의 모습은 유교적 이상국가를 건설하려 했으나 현실의 벽에 부딪혀 무너져가는 군주로 나온다. 즉위 이후에는 친중화 정책을 펼쳤다는 기록 때문인지 외왕내제를 폐지하고 중국의 습속을 많이 본따며, 동시에 유교적 이상에 입각한 국가를 만들려 한다. 무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어 농업 생산량을 늘리고 백성의 생활을 돌보는 정책으로 초기에는 호평을 받지만, 이는 거란의 침략 때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원인이 되며, 천추태후가 거란과 싸우다 죽었다는 잘못된 정보[18]를 받고 심적 충격을 받고 본인의 정책에도 회의를 품게 된다.
이후 천추태후가 극적으로 돌아오면서 화해하고 멘탈을 추스르지만, 그의 정책에 반감은 여전했던 천추태후가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먼저 올리려 쿠데타를 일으키자, 이를 진압하는데는 성공하지만 기껏 화해했던 여동생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사실에 또 충격을 받고 완전히 멘탈이 무너져버린다. 이후 문화왕후를 왕후로 맞아들이고 대량원군을 후계자로 낙점하지만, 동시에 마약에 빠져 완전한 폐인이 되어버리고, 날로 건강이 나빠져 오늘내일하는 신세가 된 와중 대량원군을 왕위에 올린다는 교서를 내리려다 강조와 몸싸움을 벌이던 도중 악화된 건강이 도져 사망하고 만다. 이후 교서는 천추태후에 의해 조작되어 목종이 왕위에 오르게 된다.
악역에 가까운 반동인물인 탓에 거의 모든 업적이 드라마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목종이 어린 시절, 그녀와 따로 지내게 만들면서 목종의 정신병이나 성격 이상 등도 정황상 성종 탓인 것처럼 묘사해 버린다. 모든 업적을 천추태후에게 빼앗겨 버린 목종보다는 나을지도 모르지만... 정리하자면 유학자 신료들의 감언이설 + 이간질에 동생과 적대하게 되는 안타까운 군주.
[1] 고려사 성종 총서 기준.[2] 천춘절에서 개칭. 우리나라 사서 기록상 최초의 절일이다.[3] 고려시대 지역단위에서 가장 높은 단위는 경(京)이다. 그래서 수도 개경(開京), 제 2수도 서경(西京), 부수도 동경, 남경이 있었다. 하지만 광종은 도(都)를 도입해 개경을 황도, 서경을 서도로 바꾼다. 도(都)는 성종 때 경(京)으로 돌아온다.[4] 태조 때 개주(州)에서 성종 때 개성부(府)가 됐다가 현종 때 개성부를 삭제해 개경만 남겼다. 후 문종 때 다시 개성부를 설치하고 공양왕 때 경기좌도, 경기우도로 바뀐다.[5] 성종 즉위 후 대종으로 추존.[6] 고려사절요 경종 헌화대왕 출처.[7] 고려사에는 개령군 군호만 나온다.[8] 궁궐 내에 있어서 내(內) 천왕사라고 한 듯하다. 궁궐 안에 있는 제석원도 내제석원이라 했기 때문.[9] 원조는 주나라의 예법이다. 후 유교가 정리한 것.[10] 2군은 응양군, 용호군. 6위는 신호위, 흥위위, 좌우위, 금오위, 천우위, 감문위. 편제의 상하는 응양군이 제일 높고 다음 용호군 > 신호, 흥위, 좌위위 > 금오, 천우, 감문위 순[11] 성종은 개경을 중심으로 남쪽 양주에 좌신책군을, 북쪽 황주에 우신책군을 만들어 수도를 보호했다.[12] 북송은 당제를 도입했다. 즉 당제 → 북송제 → 고려제인 셈.[13] 이는 문,무산계 품계의 원조인 당의 영향과 북송의 문치주의 영향이다.[14] 향직 품계 중 대광(大匡)은 조선 시대의 품계에 들어갈 정도로 오래 간다. 예를 들면 조선의 정1품 품계 대광보국숭록대부.[15] 최승로는 과거제에 대해 이렇게 비판했다. “이로 인해 남북의 용인(庸人·어리석은 사람)이 다투듯이 몰려왔다. 지혜와 재능을 따지지 않고 특별한 대우를 했다. 그런 까닭에 ‘후생(後生)’은 앞을 다투며 관리가 되었으나, ‘구덕(舊德·태조 이래 중용된 공신과 관료층)’은 점차 쇠락하였다."[16] 서희가 토풍파의 당수라는 근거.[17] 고려 성종의 경우에는 사후에 거란의 침략이 있었고 그후 저고여 피살 사건을 빌미로 몽골이 침략해오면서 무려 28년이나 전쟁을 했고, 말기에는 권문세족이 횡포를 부렸다. 그리고 조선 성종의 경우에는 자신의 뒤를 이은 아들이 희대의 폭군이였다.[18] 실제론 요나라군에게 잡혀 끌려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