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종(고려)

 


'''고려 제4대 황제
광종 | 光宗'''
[image]
광종이 안장된 헌릉
<colbgcolor=#f9d537><colcolor=#670000> '''묘호'''
'''광종(光宗)'''
'''시호'''
홍도선열평세대성대왕
(弘道宣烈平世大成大王)[1]
'''출생'''
925년
고려
'''사망'''
975년 7월 4일 (음력 5월 23일 / 49-50세)
고려 황도[2] 개주(開州)[3] 본궐(本闕) 정침[4]
'''능호'''
헌릉(憲陵)
'''재위'''
'''고려 제4대 황제'''
949년 4월 13일 ~ 975년 7월 4일 (26년 88일)
(음력 949년 3월 13일 ~ 975년 5월 23일)
'''연호'''
광덕(光德, 949년 4월 ~ 952년)
준풍(峻豊, 960년 ~ 96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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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9d537><colcolor=#670000> '''본관'''
'''개성 왕씨'''(開城王氏)
'''휘'''
소(昭))
'''자'''
일화(日華)
'''신장'''
188cm
'''부왕'''
태조(太祖)
'''모후'''
신명순성왕태후(神明順成王太后)
'''왕후'''
대목왕후(大穆王后)
'''왕태자-정윤'''[41]
왕주(王伷)

1. 개요
3. 즉위 전
4. 즉위 후
4.1. 국가 기틀 확립
4.1.1. 노비안검법을 통한 호족세력의 약화
4.1.3. 공복 제정
4.1.4. 외교
4.2. 왕권 강화
4.2.2. 수도 제도 개편
4.2.3. 귀화인 우대 정책
4.2.5. 불교 통합
5. 평가
6. 왕릉
7. 가족 관계
8. 기타
9. 미디어믹스
9.1. 드라마
9.2. 게임
9.3. 만화
10. 둘러보기(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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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 왕조의 제4대 왕. 왕권을 강화하고 이후 고려 국왕들의 통치기반을 다졌으며, 과거제와 노비안검법을 실시하는 등 고려 왕조의 기틀을 잡았으나, 동시에 호족을 숙청하고 재위기간 동안 공포체제를 이루어서 폭군이라고 평가받기도 한다.
묘호는 광종(光宗), 시호는 대성대왕(大成大王), 휘는 소(昭). 자는 일화(日華). 태조의 넷째 아들로 신명순성왕태후의 소생으로, 왕건과 신명순성왕태후 사이에서 태어난 남매들 중 셋째다.[5]
광종은 집권 초반부에는 호족 세력들과의 융화를 추구하는 행보를 보이다가 중반부부터는 노비안검법, 과거 제도 시행, 고려의 변두리로 취급받았던 세력들을 중용하는 등의 방법들을 통하여 호족의 힘을 철저히 누르는 한편 모든 권력을 왕에게로 집중시키는 전제화 정책들을 밀어붙였다. 그리고 후반부에는 아예 무차별적인 숙청을 통해 고려를 그야말로 임금에게 맞서거나 임금에게 조금이라도 의심을 산 사람은 누구도 무탈할 수 없는 공포의 시대로 만들어버렸다.
그러나 태조 왕건의 뒤를 이은 이 모두 짧은 재위로 인하여 이렇다 할 성과를 내놓지 못한 상황에서 광종이 20년 넘는 재위기 동안 고려의 체제를 정비하고 조정의 기틀을 다잡았다는 호평이 대부분이다. 개국 이래 2대, 3대 군주가 국가의 기틀을 다지듯, 고려는 4대 임금인 광종이 그러한 기틀을 다졌다고 봐도 무방한 것.[6]

2. 묘호시호, 존호


공식 묘호는 광종(光宗), 묘호를 달리 불러 광묘(光廟)라고도 불렸다.
시호는 두가지 버전이 있다.
  • 고려사 광종 총서: 홍도선열평세대성대왕(弘道宣烈平世大成大王)
  • 고려사 광종 세가 마지막 조: 강혜의효숙헌평세선열대성대왕(康惠懿孝肅憲平世宣烈大成大王)
고려 역대 군주들의 시호 중 가장 중요한건 처음 올려진 두 글자다. 그래서 광종의 묘호와 시호를 같이 부를 땐 왕태자 - 정윤이었던 경종이 올린 대성(大成)만 불러 광종 대성대왕(光宗 大成大王), 줄여서 광종 대성왕(光宗 大成王)이다.
존호는 군주가 생전 사용한 칭호를 이른다.[7] 광종의 존호는 기록에 보이지 않는다. '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비'와 '퇴화군대사종(退火郡大寺鐘)'에 '황제(皇帝)'란 군주호가 있어 단편적으론 광종의 존호를 엿볼 수 있다. 광종의 황제 존호는 이몽유의 '문경봉암사정진대사원오탑비'에도 '오황(吾皇)'으로 등장한다. '보원사법인국사보승탑비'에선 '옥황(玉皇)'으로 불렸으며 광종의 나이는 '제령(帝齡)', 얼굴은 '천안(天顔)'으로 표현됐다.

3. 즉위 전


'''등극한 태조 신성대왕(太祖 神聖大王)의 아들'''
'''2대'''
'''3대'''
'''4대'''
혜종 의공대왕
정종 문명대왕
광종 대성대왕
본명은 왕소(王昭[8]). 925년, 태조 왕건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위의 형들 중 이복 형이자 첫째 형인 왕무(王武)는 태조 사후 즉위한 혜종이다.
광종에게는 모후인 신명순성왕태후 유씨에게서 난 동복 형이 둘 있었는데, 이중 맏형이 태자(太子) 왕태(王泰), 둘째 형이 고려 3대 왕인 정종 왕요(王堯)다. 왕태는 생몰년도가 불명하나, 정황상 요절한 것으로 추측된다. 밑으로는 문원대왕이란 시호를 받은 왕정과 이름을 알 수 없는 증통국사라는 동복 동생이 있었다.
혜종 2년에 세워진 징효대사비에는 왕요군과 함께 왕소군이라고 나오기에 왕자 시절에는 왕소군이라 불린 것으로 추정되며,[9] ??대왕, 필영대왕과 함께 나오기에 이들도 동생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용모가 상당히 수려하였다고 하며, 키 역시 상당히 훤칠한 편으로 약 188cm'''였다고 한다. 지금도 180cm가 넘는다고 하면 꽤 큰 키로 여기는데, 고려시대의 기준이라면 완전히 거인이었던 셈.
본래는 신명순성왕태후의 아들로 형처럼 충청도가 연고지여야 했지만, 아들을 잃은 신주원부인 강씨信州院夫人 康氏의 양자가 되면서 사뭇 달라졌다. 신주원부인 강씨는 신주 강씨로 패서 계열의 호족 세력이었으며, 패서호족 신정왕태후 황보씨(황주 황보씨)의 딸이자 자신의 이복 여동생인 대목왕후 황보씨와 결혼한다. 정종은 충주와 함께 충청도를 양분하던 청주 세력을 끌어들이기 위해 당시 청주 지역의 대호족이었던 김긍률의 딸[10]인 청주남원부인 김씨淸州南院夫人 金氏와 결혼해 충청도를 묶으려 했는데, 그를 떠올리면 쉬울 것이다.
당시 패서호족과 고구려계의 위상은 남달랐었고, 광종은 이들을 자기 편으로 포섭하면서 사실상 패서호족과 한 배를 타게 된다.
넷째인 탓에 본래라면 즉위 가능성이 거의 없었지만, 바로 위의 동복 형인 정종이 이복 형인 혜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지 4년만에 붕어(27세)하며 그에게 왕위를 넘겼고, 949년 3월 13일에 고려 4대 임금으로 즉위한다. 이때의 나이가 25세였다.

4. 즉위 후



4.1. 국가 기틀 확립


광종은 고려 초기 여러 세력들이 왕권 다툼을 벌이는 혼란 속에 집권하여 왕권 강화를 시도했으며 이를 위해 여러 가지 정책을 펼치면서 고려 왕조의 기반을 단단히 다진 임금이다. 불교를 장려하고 민심 안정책을 시행하였으며 당시의 지배층인 호족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 수단을 강구하였다.

4.1.1. 노비안검법을 통한 호족세력의 약화


우선 광종은 호족들의 세력 기반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호족들이 소유한 노비들 중 원래 양인이었지만 강제 및 불법적으로 노비가 된 자들을 다시 양인으로 해방시키는 이른바 '''노비안검법'''을 전면적으로 펼쳤다.
이 때 고려의 중심부를 이루던 수많은 호족들은 후삼국 사이의 전쟁 와중에 포로가 되었거나 빚을 지고 이를 갚지 못한 것 등의 이유로 양인에서 노비가 된 사람들을 많이 거느렸었다. 당시의 관념상 노비는 당연히 재산 취급을 받았는데 이들은 단순한 소유물을 넘어서 소작농 겸 사병 역할까지 했었음으로 호족들의 중요한 경제적, 군사적 기반이 되기도 했다. 이는 왕권을 위협하는 요소로써 당연히 임금인 광종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없애야 할 것들이었다.
물론 이런 속내를 대놓고 보일 수는 없었기 때문에 광종은 '신라-고려의 왕조 교체기를 통하여 혼란했던 사회적 신분 질서를 바로잡는다'는 명분을 내세워 정책 실시를 밀어붙였다. 이를 통해 호족들의 군사력 및 경제력을 약화시킴으로써 그들의 세력을 뿌리채 흔들 수 있었던 것은 물론, 양인 계층으로 면천된 해방 노비들은 세금을 내면서 군역의 의무까지 지게 되어 왕실의 재정을 확충하고 군사력을 증강시킬 수 있었으니 그야말로 일석이조의 효과를 가져온 정책이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4.1.2. 과거제 실시


충선왕이 “우리나라(고려)의 문물 수준이 중국과 대등하다고 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 라고 묻자 이제현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광종 이후 문교(文敎)를 닦아 서울에 국학(國學·국자감), 지방에 향교와 학당을 세워 학교에서 글 읽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렸습니다. 문물이 중국과 다를 바 없다는 말은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고려사』 권110 이제현 열전'''

그러는 동시에 광종은 중국의 마지막 오대 왕조인 후주 출신으로서 고려에 사신으로 방문했던 쌍기를 귀화시킨 뒤 전격 발탁하였고 쌍기의 제안을 받아들여 958년(광종 9년)에 호족들의 직위 세습을 막고자 이미 중국에서 시행되고 있었던 '''과거제를 한반도 역사상 최초로 실시하였다.'''[11]
중국에서 과거 제도가 최초로 정착된 수나라당나라가 그랬듯이 귀족적 관료제의 특성을 벗어나지는 못했지만[12], 그럼에도 과거제 실시는 의미가 상당히 크다고 할 수 있다. 고려 이전 신라 하대의 원성왕독서삼품과가 시행되기는 했었지만 진골 귀족들의 반발이 너무 심한 탓에 하급 관리에 제한되어 실시하였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광종의 과거제 도입은 한반도에 관료제 국가를 확립하는 결정적 요소로 작용하였으며 958년 도입된 과거제는 이후 900년 넘게 실시되다가 1894년 조선의 갑오개혁 때 폐지된다.
한국사 최초의 과거 시험 장소는 개경 본궐의 위봉루(威鳳樓) 앞 구정이었다.

4.1.3. 공복 제정


한편 960년 3월에 신하의 공복(公服)을 제정하였다. 보라색 > 붉은색 > 연한 붉은색 > 초록색 순으로 정했다. 이는 국왕이 직접 백관의 의복을 제한함으로써 조정의 기강을 다잡고 후삼국 통일 이후 엉망이 된 조정 내 서열을 바로 세우기 위함이었다. 공복 뿐 아니라 신분증을 넣고 다니는 어대(魚袋)에도 제한을 두어 조정 내 위계를 명확히 했다.
고려사 여복지 서문에 따르면 고려가 개국된 뒤 새로운 공복 제도를 만들지 않고 신라의 의복 제도를 그대로 가져다 썼다고 한다. 문제는 신라의 의복 제도는 골품제라는 신분제에 맞추어져 있고 새로운 국가 지도층인 호족들은 골품제에 맞춰 입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고려도 새로운 신분제를 사용했음으로 신라의 의복 제도는 고려와 정말 맞지 않는 상극이었을 것이다. 이미 태봉 때부터 신하들은 의복제도를 씹고 각양각색의 옷을 입고 조정에 나타나서 태봉 조정은 '''패션쇼 파티장'''[13]이 된 상태였다. 고려 초기에도 약간 정리 노력은 했지만 공복이 제정돼 있지 않는 이상 패션쇼를 벗어날 방법은 없었다. 광종은 공복을 제정함으로써 패션쇼를 금지하고 대대적인 기풍 정화 운동을 펼친다.
광종의 공복 제정은 고려 왕조가 새로운 질서를 만들고 고려 국왕이 주도하는 조정이 되도록 한 것이다. 그리하여 나중에 고려가 실정에 맞춰 의복 제도를 고칠 수 있게 해주는 좋은 선례가 되었다. 또한 공복 제정을 통해 '''호족들의 사치를 제한하는 효과'''도 있었다. 사실 광종의 공복 제정은 호족의 사치를 제한하는 효과를 노리고 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호족들은 공복 제정에 거세게 저항했으나 광종이 공포정치를 시행하고, 이 와중에 '''호족 대숙청'''을 감행해서 공복 제정에 저항하던 호족들은 버로우 탔다.

4.1.4. 외교


북송과의 외교 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해 송나라의 연호인 건덕을 사용했다. 2개의 연호 가운데 광덕은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어 이견이 없지만 청주시 용두사지 철당간일본의 조련사 동종에서 확인되는 준풍은 이게 독자적 연호인지 당시 송나라에서 쓰던 연호[14]피휘인지 논란이 분분하다.
이후 960년에 문화적, 경제적 목적을 가진 고려는 군사적인 목적을 가진 북송과 윈-윈 통교를 시작했으며 연호와 칭호는 송나라의 것을 따랐다. 또한 정안국을 형제의 나라로 부르면서 이들과 연합해 요나라를 공격하는 등 요나라에 대한 강경책을 펼쳤다. 이는 태조 왕건의 만부교 사건과 더불어 요나라와의 전쟁이 일어나는 한 원인이 되었고 후대 왕인 성종과 현종은 요나라와 길고 긴 전쟁을 치러야했다.

4.2. 왕권 강화



4.2.1. 칭제건원


광덕(光德)이나 준풍(峻豊) 등 '''독자적인 연호를 제정해 사용하고 한국사 역대 군주 중 최초로 공식적으로 스스로를 황제라고 칭하면서 자주 의식을 표방했다'''. 이전에도 신라나 발해의 다른 임금 대에도 비공식적으로 임금을 '''황왕''', '''황상'''이라 칭하는 등 소극적으로 칭제건원을 했지만 광종처럼 노골적으로 황제국임을 선포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칭제건원 이후 북송거란이 외교상으로 격한 항의를 해왔고 위의 외교 항목에서 언급했듯 북송과의 외교 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해 공식적으로 칭제를 포기하고 송나라의 연호인 건덕을 사용했다.
그러나 이때 이후로 고려는 광종뿐만 아니라 원 간섭기 이전까지 비공식적으로 임금을 황상이나 성상이라 부르며 소극적인 칭제를 꾸준히 했으며, 최강대국인 거란과 송나라를 제외한 다른 나라들과의 외교에서는 고려 국왕을 '''해동천자'''라 표현하는 등 사실상 칭제했다.[15]
당시 광종을 퇴화군 대사종(退火郡大寺鐘)에선 '금상 황제(今上 皇帝)', 『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비』에서 '우리 황제 폐하(我皇帝陛下)"라고 칭하며 황제 사용을 유지한 것을 확인할 수 있고, 이후 국제 정세 속에 고려는 남번(탐라), 북번(여진)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다른 금석에서 고려 국왕을 "황"으로 표현했음을 알 수 있다.

4.2.2. 수도 제도 개편


고려사 세가에 따르면 광종은 재위 11년(960년)에 개경을 황도(皇都), 서경은 서도(西都)로 개칭한다. 이는 국가의 두 수도를 높여 자신의 권위를 중국 황제와 맞먹게 할려는 의도였다.
유교적 예법에 따른 수도 구분은 천자는 경(京)과 부(府)를[16], 제후는 부(府)만 설치한다[17]. 고려는 경(京)과 주(州)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광종은 도(都)를 도입하여 그보다도 높힌 수도 제도를 사용한다.
이 제도는 도(都)가 경으로 돌아왔어도[18] 개경은 상도(上都), 서경은 웅도(雄都) 등으로 불리는 등 자주 쓰이는 별칭으로 여전히 남았고 이후 고종이 강화도로 천도할 때도 영향을 주어 새로운 수도가 '강도(江都)'로 명명된다.

4.2.3. 귀화인 우대 정책


개혁 과정에서 쌍기를 비롯한 귀화인 세력을 우대해 호족들의 재산을 강제로 몰수한 뒤 쌍기에게 주기도 했는데 이걸 두고 광종에게 '내 집도 바칠 테니 그냥 쌍기에게 주라'면서 비아냥이 담긴 직언을 올린 서필이라는 신하가 있었다고 한다. 광종은 서필의 주청에 담긴 비아냥을 알아듣고 화가 났지만 그의 말에 느낀 바가 있어 특별 대우를 줄였다고 전해진다.[19][20]
쌍기의 아버지 쌍철은 아들이 고려에서 귀빈 대우를 받자 본인도 고려 사람으로 귀화해 고관 자리에 올랐다. 호족들을 견제한 광종의 모습을 생각해보면 다분히 의도적인 처우라고 할 수 있겠다. 결국 이러한 처우는 국내 관료들의 불만을 사게 된 원인이 되어 광종 사후 최승로의 <5조 정적평>, 이제현의 <사략>에서 그를 비판하는 주된 원인이 되었다.
광종은 나라의 학자들 또한 기존 호족들과 연관이 있다 생각해서인지 국내 기반이 취약해 덜 위험한 귀화인들을 선호한 듯 하다. 고려 성종 때 활약한 최승로는 광종의 귀화인 우대 정책과 호족 숙청을 대놓고 깠지만 국내 학자 출신 관료들이 득세하도록 길을 열어준 게 광종이라는 것은 아이러니다.

4.2.4. 숙청의 군주


왕소: 이 나라의 수많은 노비들을 호족의 사사로운 물건이 아닌 황제의 백성들로 귀속시키고, 능력에 따라 인재를 뽑아 호족 공신이 아닌 이 나라를 위한, 황제를 위한 사람들로 대전을 가득 채워서 한 나라가 미래로 나아갈 길을 제시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이 나라 고려의, 지존이 해야할 일이야.

왕욱: 호족들을 다 죽여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황제의 손에 피를 묻히시겠다고요? 그것이 지금 이 나라 고려에서 가능한 일이라 생각하십니까?

왕소: 그 방법밖에 길이 없다면... 가야지. 그것이 길이라면 가야지! 가고! 또 가야지! 그것이 바로 이 세상에 칼이 필요한 이유인 것이고, 그것이 바로! 한 나라의 역사에 '''피의 군주'''가 필요한 이유인 것이다...!!

-

- 빛나거나 미치거나 7화 中

광종은 재위 초반까지는 그래도 호족들의 세력을 존중해주면서 공존하는 형태로 국정을 이끌었지만 재위 중반부터는 자신의 의욕적인 왕권 강화 정책에 대해 분노한 호족들의 반발과 그들의 암살 위협에 철저히 대응하기 위해 반대파는 물론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는 사람들을 말 그대로 다 죽이거나 잡아 가두는 공포 정치로 국정을 이끌었다.
대표적으로 자신의 후원 세력이었던 평주박수경 일가를 숙청하여 끝내 몰락시킨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당시 박수경은 고려 태조 때부터 공적을 세웠으며 광종의 옹립에도 큰 공을 세우는 등 고려 최강의 권신으로 떠오른 인물이었는데 이 박수경의 세 아들이 역모를 꾸미자 광종이 그들을 제압하여 하옥시키고 동시에 그 세력도 전부 없앴다. 그리고 이 소식을 들은 박수경은 울화병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게 고려사에 남아있는 기록이다.
하지만 광종이 박수경 세력에게 반란 혐의를 뒤집어 씌워 토사구팽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꽤 많고 실제 이들이 광종을 상대로 반기를 들었다가 실패해 도리어 광종으로 하여금 정당하게 자신들을 숙청할 명분을 준 꼴이 된 것이라고 여기는 견해도 더러 있는 편이다. 무엇이 사실이든 박수경 입장에서는 자신은 오래 전부터 광종의 최대 군사적 후원자로서 광종을 임금으로 만드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웠는데 그 대가가 처절한 몰락이었던 셈.

而况惠宗之克全兄弟, 定宗之能保邦家, 若論恩義, 可謂重也. '''兩朝皆唯有一子, 亦不使保其性命, 非但不報其德,''' 亦復深結其寃.

더욱이 혜종이 형제를 온전히 할 수 있던 것과 정종이 나라를 잘 지킬 수 있었던 것은 그 은혜와 의리가 두텁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 두 임금의 조정에는 오직 외아들만이 있었는데, 광종이 그들의 생명을 보존해 주지 않았으니,''' 그들의 덕을 갚지 않은 것일 뿐만 아니라 곧 다시 그들의 원한을 깊게 맺게 한 것입니다.

'''『고려사』 권93 최승로 열전'''

"일찍이 혜종, 정종, 광종이 서로 왕위를 이은 초기에는 모든 일이 안정되지 않은 시기여서 개경과 서경의 문무관료가 절반이나 살상되었습니다. 광종 말년에는 세상이 어지럽고 참언이 일어나 무릇 형장에 끌려간 사람들은 대부분 죄가 없었고, 오래된 공신들과 장군들이 거의 죽임을 당했습니다. 경종이 즉위할 당시 옛신하 가운데 살아남은 사람은 40여명에 불과했습니다."

'''『고려사』 권93 최승로 열전'''

특히 광종은 호족뿐 아니라 왕족들에게도 무자비한 모습을 보였다. 자신의 이복동생인 효은태자를 사사한 것이 바로 그 실사례. 당시 효은태자는 왕건과 고려 개국공신 유금필의 딸인 동양원부인 사이의 아들인데, 기록에 따르면 인성이 매우 좋지 않고 무뢰배들과 어울러 다녔다고 한다. 그 탓에 원성이 자자했으며 결국 역모를 꾸미다가 그 일당과 함께 사사된다.
그렇지만 유금필 집안은 자체적으로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한 군벌이었던 점과 더불어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에도 비춰 보면 효은태자 또한 광종에게 잠재적인 정적으로 분류되어 억울하게 숙청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가 인간 쓰레기였고 파멸을 자초했다는 식의 기록은 광종 측의 일방적인 왜곡이자 폄훼일 수도 있는 것이다.
심지어는 형인 혜종정종의 아들들로 광종 본인에게는 조카에 해당하는 흥화군과 경춘원군도 이들이 역모를 꾀한다는 참소를 듣고 처형했다. 심지어 자신의 아들조차 의심해서 걸핏하면 핍박하고 야단쳤다고 전한다. 조선태종영조를 합친 케이스라고도 볼 수 있다. 그 때문인지 경종은 왕위에 오른 후 아버지 광종이 추진했던 것과 정반대의 정책을 추진하는 모습을 보여주다가 복수법이라는 치명적인 실책을 저지르기도 했다.[21]
다만, 광종과 대립각을 세우다가 숙청된 호족 집단들은 이미 후삼국시대고려 초기 자신의 지역과 왕에 이합집산을 해 그야말로 믿을 수 없는 자들이었다. 실제로 왕건만부교 사건을 일으킨 것도 호족들의 무분별한 합종연횡이합집산을 멈추기 위함이었고 혜종정종의 짧은 재위 기간이나 혜종 시절에 일어난 의문의 암살 미수 사건들과 혜종의 이해되지 않는 죽음만 봐도 호족들은 왕에게도 위험한 존재들이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알 수 있다. 당장에 노비안검법과거제를 시행했을 때에도 반대했는데 공신이라고 떠들어대는 자들이 정작 노비를 떳떳하게 모은 것이었는지, 과거제에 붙을만큼 실무 능력 역시 검증되었는지도 의문이었다.
특히 당시 고려의 호족 세력들이 조선 초반 이방원이 숙청한 신하들보다 더 믿을 수 없는 게 적어도 정도전노비 문제에 대해서 나름 떳떳하고 과거제를 통해 들어온 검증된 인재였으며 정도전의 최대 정적이었던 태종도 위선보다는 위악을 행했던 인물이었다. 민무질, 민무구 두 형제도 문제가 많았으나 저 호족들보다는 한결 낫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최승로이제현 두 학자의 혹평은 간혹 유체이탈식으로 말을 막 던지는 경향이 종종 있어서 액면 그대로를 믿으면 곤란하다. 특히 이제현의 경우는 무신정권을 향해 왕을 누른다고 했으면서, 정작 왕권을 확립하는데 성공한 광종을 향해선 피의 군주라고 지탄하기도 했다.[22][23] 호족 연합체는 그 태생부터 일관성이고 나발이고 던진 집단들 중 하나였다. 적어도 이방원이 숙청한 정도전과, 정도전이 숙청한 이숭인 같은 신진사대부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믿을 수 없는 집단들이었다. 삼국지에 나오는 후한 말기 군벌들과 같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나마 후한 왕조는 400년의 정통성이 있었지만, 고려호족 출신인 태조 왕건이 정통성 없는 후고구려를 찬탈한 뒤 후백제신라를 흡수한데다가 분열된 후삼국을 통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기 때문에 자칫하다간 또다시 분열될 가능성이 있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고려 개국 초 수백에 이르던 호족들이 광종의 재위 기간 동안 숙청으로 인해 초토화되어 불과 수십여 명 밖에 남지 않았다고 전한다. 얼마만큼의 호족이 광종에 의해 쓸려나갔는지는 고려를 다루는 역사 기록들 중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게 거의 없어서 확실하게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성종 때 최승로가 '태조를 모시던 구신이 '''40여'''명밖에 남지 않았다'는 발언을 한 대목을 보면, 숙청 과정에서 호족 세력들이 전체적으로 엄청난 타격을 입었던 건 분명해 보인다.

4.2.5. 불교 통합


광종도 정작 호족들을 싸그리 쓸어버린 이후에는 뭔가 죄의식이라도 느꼈는지 절을 세우고 그들을 위한 제를 자주 드렸다고 기록에 나온다. 그런데 잦은 불사로 인해 이 당시 승려를 자처한 땡추들의 횡포가 극심했다고도 '''전해진다.''' 물론 한국 유학자건 중국 유학자건 원래 글쓰는 유학자는 불교가 조금이라도 세속화되면 죽일 기세로 물어뜯곤 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실상은 최후의 최후까지 광종이 호족들을 견제하려는 수단으로''' 절 건설에 대한 모든 것을 왕실에서 지원하고 죄다 개경을 둘러싸는 형식으로 만들어 승려 세력들로 하여금 '''왕에게 충성을 다하도록''' 만들었다. 이 사원들은 훗날 희종과 함께 최충헌을 없애려 했다가 실패해 최충헌에게 승려들이 전부 몰살당하고, 사원들도 죄다 철폐되면서 고려 불교의 성격 또한 교종 중심에서 선종 중심으로 바뀌는 원인 중의 하나가 된다.
사찰을 대규모로 건립한 부분도 알고보면 무서운 부분인데, 이게 바로 대각국사 의천보다 무려 백 여년 앞선 불교의 종파 간 통합 시도였다는 것. 광종은 교종인 귀법사의 균여[24]를 중심으로 '화엄종'[25]을 통합하게끔 하고서는 의통과 제관을 중국으로 보내 천태종을 후원하고 법상종[26]까지 포함한 넓은 범위의 교종 통합을 시도하였다.
여기에 또 중국에서 '''법안종'''[27]을 들여와서 선종과 합치고, 이걸 다시 앞의 교종과 통합해 불교의 완전한 교선일치를 꿈꾸었다. 하지만 광종이 붕어한 이후 법안종이 쇠퇴하면서 이 시도는 결국 물 말아먹고 끝난 셈이 되었다. 제국의 아침에서는 이 과정을 좀 더 극적으로 그리고 있다. 그리고 이걸 그대로 따라한 인물이 바로 의천이었다. 의천의 선•교종간 통합은 불교사에서만 주로 언급하지만, 고려 문종의 아들이었던 의천의 주요한 목적은 바로 왕권 강화와도 관련이 있었다.
한편으로는 천태종에 간접적으로 기여한 인물이기도 한데, 당시 중국은 천태종이 남아 있기는 했지만 회창법난(842년 ~ 845년 당나라 무종의 불교 말살 정책)으로 엄청난 손실을 입어 중국 본토에 불교 전적들이 많이 부족했다. 그러나 광종이 중국의 요청으로 고려에 남아 있던 천태종 관련 서적들을 중국에 보내는 동시에 천태종 승려 제관을 중국으로 보냈고, 제관이 중국에서 살다 죽으면서 그가 남긴 유작 <천태사교의>는 한중일 삼국의 천태학 교과서가 되었다.

5. 평가


태조 왕건이 세운 고려는 엄밀히 말해 겉모습만 국가였지, 혼란스러웠던 후삼국 말기 이합집산을 거듭하던 호족 연맹체의 연장선상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호족 연합 정권이 우리가 아는 본격적인 국가 고려로 탈바꿈된 것은 온전히 광종이 이뤄낸 빛나는 업적이었다.
광종이 고려 왕실을 피바다로 만들었다며 비판받는 부분은 '지나치다고 여겨지는' 호족과의 대립, 숙청 부분인데 광종에 대한 비판적 평가들은 당연하게도 모두 그 숙청의 피해자인 공신들의 후손, 대호족이나 신권을 강조한 유학자들에 의해서 나왔다는 것도 꽤 유념할 필요가 있다.
대표적으로 성종 때 최승로의 시무 28조에선 태조와 함께 가장 자주 거론되는 임금이 광종인데 참소를 믿고 사람들의 목숨을 함부로 빼앗았으며 궁실을 크게 증축하고 사치스러웠는가 하면 특정 집단을 편애했고 불교를 지나치게 숭상하는 동시에 (노비안검법으로) 귀천의 구분도 없어졌고, 궁궐에 호위병을 필요 이상으로 많이 뒀다는 등 온갖 핑계를 대며 그가 거론될 때마다 모진 비판을 가했다. 시무 28조에서 지적하는 고려 사회의 폐단은 곧 최승로가 개인적으로 바라본 광종의 폐단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 시무책 앞에 있는 긍정적인 평가는 시무 28조 앞에 실린 5조 치적평 초반에 좀 있는 정도이고, 나머진 전부 부정적인 내용 투성이다.
창업 군주의 아들이었지만 장남이 아니었다는 점, 왕위에 오른 뒤 정적들을 냉혹하게 숙청했다는 점이 똑같은 태종(조선)과 비교되는 경우도 있으나, 자세히 보면 사정이 꽤 다르다. 정몽주를 제외하면 태종이 상대해야 했던 자들은 정도전 일파에서 심온 가문에 이르기까지 대부분 공신과 외척이라는 존재로서 후대의 왕실에 대한 잠재적 위협이었을 뿐 조선에 반기를 들거나 왕실을 우습게 여긴 것도 아니고 딱히 태종과 추잡한 이권 다툼 따위로 죽을둥 살둥 대립했던 것도 아니며[28] 심지어 태종에게 충성했거나 혹은 심온처럼 천성이 그런 욕심 자체가 없었던 자들이었다.
반면에 광종은 전국 각지에 깔려있는 호족들, 즉 자신의 동네에서는 왕 노릇하며 중앙의 왕실을 우습게 여기고 왕에게 반항하기를 예사로 하는 그 호족들, 항상 자신들 입맛에 맞는 임금으로 갈아치우려고 자기네들끼리 공작을 펼치거나 왕위에 오른 의 형들을 요절하게 만든 바로 그 호족들을 모조리 박살내고 왕권을 굳게 세워야 했기 때문에 훨씬 더 과격한 방식으로 숙청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점은 충분히 감안해야 할 것이다.
게다가 이미 사병 혁파 정책으로 군세를 거느리는 것만으로도 반역, 혹은 도발이라고 아예 못을 박아뒀던 이방원과는 달리, 이 시기 고려호족들은 맘대로 사병까지 거느리고 있었고[29] 이러한 조건을 바탕으로 얼마든지 딴 마음을 먹을 수 있었다. 호족 연합 정권에 가까웠던 고려 초기의 이런 특수성을 감안하면, 고려를 '정상적인' 왕권 국가로 나아가게 하기 위해선 한 나라의 기득권층을 또 한 번 뿌리째 들어내야 했기 때문에 광종은 이방원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많은 피를 손에 묻힐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단적으로 태조의 후비(后妃)[30]는 29명이나 되었고 이들은 대부분 호족 집안의 딸들이었다. 자연히 광종이 없애거나 견제해야 할 외척들만 해도 이방원보다 훨씬 많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이들은 결코 믿을 만한 자들이 아니었다.
또한 당시 고려의 유학자들이나 조선 왕조 유학자들은 광종을 맹렬히 비난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유학자들이 자신의 능력을 증명할 수 있는 기반인 과거 제도의 첫 시행자가 광종이었다. 고려 왕조는 물론이고 후대 조선 왕조까지의 명백한 근간이 되는 제도를 처음으로 들여온 왕이라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이방원이 한 일은 남아있는 약간의 불안요소를 확실히 쳐내서 내정을 확실히 안정화시킨 것이였다면 광종은 사실상의 내전 상태를 종식시킨 것이었다. 사실 그나마도 광종이 이 때 호족들을 확실히 박살내지 않았다면 다음 왕인 경종이 광종이 했을 일을 대신 수행해야 했을 것이다. 한 마디로 광종이 아니더라도 언젠가 한번은 제대로 서열 정리를 위한 피바람이 불어야 했고 그것이 그것을 추진할 의욕도 능력도 있고 시기도 알맞았던 광종 본인이 직접 주도한 것이었다.
비판이라면 지나친 숙청으로 인해 아들 경종에게 심적인 부담이 지워졌다는 것인데, 이는 명나라 주원장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겠다. 허나 숙청을 하지 않았다면 어차피 경종은 왕이 되기도 전에 살해당하거나 갈아치워질 수 있는 불안한 정국이었던 터, 결국 광종의 숙청 덕분에 다음 대의 성종현종이 일을 제대로 할 수있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아들 마음 고생시켰기로는 광종에게 뒤지지 않는 주원장[31]보다는 나을지도 모른다.[32]
다만 자신의 아들까지 죽이려고 했던 점은 확실히 도가 지나치긴 했다. 경종이 유약해진 것의 절반은 광종 탓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 성종과 현종은 분명 광종의 덕을 봤지만,[33] 정작 아들인 경종이 '''무고를 당한 자의 가족이 사사로이 복수를 할 수 있도록 한''' 법을 제정한 것은 광종 시기 지나친 숙청의 여파로 보는 견해가 많다. 물론 하도 정신나간 법이라 금방 없애긴 했지만.
사실 광종이 숙청을 단행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이 근본적으로 아버지 왕건의 과실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상황이 많이 꼬여버린 것도 있지만 그 왕건이 1비 신혜왕후 유씨가 낳은 자식을 태자로 세울 수 있었다면 이 정도의 분란까지는 겪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신혜왕후가 자식도 없는 상황에서 사실상 힘을 잃은 바람에 위협거리도 안 되는 집안 출신 2비의 아들이 적장자가 되어버린 상태에서 3비4비는 알짜배기 대호족 출신이고 5비는 신라 진골 귀족 출신, 6비는 1비가 죽었다고 해서 장인인 유천궁의 가문에 다시 장가들어 얻은 왕후였으니... 결과적으로 혜종은 왕건의 실책으로 불안감 속에서 아무 것도 못하고 죽었으며 정종부터 본격적으로 숙청에 들어가 광종 대에 들어서야 마무리를 짓게 된다.
다만 대상을 가리고 숙청을 했던 태종과 달리 광종은 자신의 외가와 친조카, 동생들까지 모조리 풍비박산 내버려 왕을 지지해주는 근왕 세력까지 남김 없이 숙청해버렸다. 게다가 아들까지 의심해 아들인 경종은 전시과를 시행하는 등의 치적을 남겼지만 말년에 아버지에게 받은 학대 때문에 고생을 해야만 했다. 또한 요나라를 선제공격하여 요나라와 적대관계가 되었는데 후대 왕인 성종과 현종 등이 요나라와 대대적인 전쟁을 치러야 했다.

6. 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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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특급시 송악산 기슭에 남아 있는 광종의 헌릉.
광종의 능호는 헌릉(憲陵)이다. 공교롭게도 그와 많은 면에서 비슷한 조선 태종의 능호도 헌릉이다. 다만 한자는 다른데 광종의 헌릉은 법 헌(憲)자를 쓰고, 태종의 헌릉은 바칠 헌(獻)자를 쓴다.
2009년에 북한에 남아 있는 고려 왕릉의 모습이 일부 공개되었는데 헌릉은 2009년의 모습이 드러나지 않았다. 북한의 고려 왕릉 보존 상태로 보아 저 사진보다 많이 훼손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최근들어서 다시 정비된 헌릉이 다시 공개되었는데 석물들이 많이 사라져 초라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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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가족 관계


  • 대목왕후 황보씨
    • 장남 경종
    • 차남 효화태자孝和太子[34]
    • 천추전부인千秋殿夫人 아지阿志[35]
    • 보화궁부인寶華宮夫人
    • 문덕왕후 유씨
  • 후궁 경화궁부인 임씨慶和宮夫人 林氏 - 진천 임씨(鎭川 林氏), 혜종의화왕후 임씨의 딸[36]
  • 후궁 현비 김씨賢妃 金氏 - 궁인 출신으로 1029년 11월 현비로 추증되었다.

8. 기타


  • '정관정요(貞觀政要)'라는 책을 애독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 책은 역시 중국 역사상 최고의 명군 중 한 명으로 꼽히고 있는 당나라의 2대 황제 태종이 신하들과 나눈 대화를 엮은 책으로서 동양 제왕학(帝王學)의 교과서로 여겨지는 저서이다. 태종 이세민 역시 권력 때문에 자기 손에 형제들의 피를 묻혀야 했지만 특유의 카리스마로 국가 초기 기틀을 다잡았다는 명군이었다는 평가(정관지치, 貞觀之治)를 받는다. 역사적으로 광종이 자신과 비슷한 군주의 언행을 탐독했다는 게 실로 흥미로운 부분.

이세민과 시호가 똑같은 후대 왕조세 번째 임금과도 겹치는 부분이 많다. 우선 건국자의 친아들이라는 점, 형에게서 왕위를 물려받았다는 점, 나라와 중앙집권 체제의 기반을 완성시켰다는 점, 마지막으로 왕권 강화라는 목표 아래 자신을 도운 공신들은 물론 핏줄로 엮인 사람들을 희생시키는 일에도 주저함이 없었다는 점이다. 다만 광종은 무차별적이고 광범위한 숙청을 단행했지만, 조선 태종은 정확히 목표물을 찍어서 제거하는 제한적인 방식의 숙청을 단행했다는 점이 다르다.
  • 고려사 악지 속악 부분엔 광종 대의 일화가 하나 남아있다. 속악은 우리 가락, 우리 말로 지어진 노래를 의미한다.[37]
  • 언젠가 한국에서 비파 하나가 중국 강남 지역까지 흘러갔다고 한다. 그 비파 뒷면엔 한자로 노래가 적혀 있었는데 중국인들 중 아무도 가사 해석을 못했다고 한다. 어느날 광종의 외교관 '장진공'이 사신으로 중국 강남에 갔는데 중국인들이 마침 이 비파를 꺼내 해석을 부탁했다고 한다. 장진공은 바로 해석을 끝내 한시로 내용을 설명하니 이 노래가 바로 '한송정(寒松亭)'이다. 누군가가 비파 뒤에 한송정을 기록했는데 한자를 우리 식으로 쓴 이두로 내용을 써서 중국인들이 해석을 못한 것이다. 한송정은 현 강원도 강릉시에 있는 정자이다. 경포대 근처에 있던 걸로 보인다.

9. 미디어믹스


미디어 매체에서 상대적으로 덜 다뤄지는 경향이 있는 고려 초기의 임금들 중에서는 미디어 매체에서 가장 많이 출연한 군주다. 그뿐만 아니라 현대의 미디어 매체에서는 고려의 창건자이자 아버지인 왕건보다도 더 많이 창작물의 주역으로 등장하는 편.

9.1. 드라마


  • 태조 왕건에서는 어린 시절 모습으로 가끔 나오며 시기가 시기라 비중은 없으나 나레이션에서 광종에 대해 간략히 설명해준다.

  • 태조 왕건 이후를 다룬 제국의 아침에서는 주인공이다. 부자가 연속으로 같은 방송사에서 방영하는 사극 주인공이 된 사례. 김상중이 열연했다.
캐릭터는 주인공답게 매우 비범한 인물로 그려지는데, 왕이 되기 전과 후의 인물상이 매우 다르게 그려지는, 한국 사극 사상 손꼽을 정도로 독특한 캐릭터이기도 하다. 왕이 되기 이전에는 뛰어난 통찰력과 더불어 능력도 능력이지만, 인자한 성품이 특히 강조되었는데, 광증에 시달리는 혜종과 숙부 왕식렴에게 휘둘리며 자신을 핍박하는 정종 두 형에게도 매우 깍듯히 대하는가 하면[38] 동시에 백성들을 깊이 생각하고 왕식렴의 무리한 서경 천도에 반대하며 고생하는 역부들을 가산을 털고 같은 밥을 먹으며 보살피는 모습을 보면 왕이 된다면 당연히 성군이 될 것이라 누구나 생각할 정도다.[39] 그러나 임금 자리에 오른 이후에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과감한 개혁과 호족 견제 정책들을 펴나가며, 이 와중에 반발하는 호족들은 엄청난 포스를 앞세워 찍어누르고, 평주 세력의 반란으로 죽을 뻔한 위기를 겪은 막판에는 제대로 흑화하여 역모와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자들은 모조리 쓸어버리는 폭군에 버금가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를 두고 왕이 되기 전에는 세종이 될 줄 알았는데 왕이 되니 태종이 되더라는 반응도 있었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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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왕건과 달리 이 드라마는 그다지 흥행하지는 못했으나[40] 김상중의 열연은 매우 출중했기에 2002년KBS 연기대상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 2009년작 천추태후에서는 회상으로만 나왔다. 역사 속의 대숙청을 벌이는 것은 같지만 그 와중에 의심병과 편집증적인 증세가 도져서 끝내는 자신의 이복 동생들인 대종과 선의왕후마저 처형했으며 심지어 아들에 대한 의심병마저 커진 탓에 위협하다가 그를 보호하는 자신의 아내 대목왕후를 손수 살해하기까지 하는 패륜을 저지르는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천추태후라는 드라마 자체가 역사 왜곡 투성이라는 것을 감안해보면 당연히 실제 광종의 모습은 결코 아니다. 한편 장성한 경종이 과장된 면이 많지만 어쨌든 극중에서 막나가면서 화를 내고 비아냥거리면서 그 유명한 풍악을 울려라라고 외치는 등 주색만 탐닉하게 되는데 제국의 아침 드라마와 천추태후 회상 장면에서 광종이 당시 태자인 경종을 어떻게 대했는지 보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가 가는 측면이 있다.

  • MBC 드라마 빛나거나 미치거나에서는 장혁이 연기했다. 특히 '빛나거나 미치거나'라는 드라마 제목이 고려의 기틀을 완비한 빛나는(光) 군주임과 동시에 수많은 사람들을 미치광이처럼(狂) 처형해버린 군주라는 양면성을 가진 광종을 잘 빗댄 제목이라는 호평이 있었다. 다만 드라마에서는 왕소의 왕자 시절만 다룰 뿐, 광종으로 즉위한 뒤의 행보는 다루지 않았다. 하지만 작품 후반 분위기를 보면 원래 역사와 마찬가지로 피바람이 불어닥칠 것은 확실히 보인다.
  • SBS 드라마 달의 연인에서는 이준기가 연기했다. 어린 시절 어머니 신명순성왕후 유씨가 정치적인 이유로 새 후비를 들이려는 왕건에게 협박을 하다가 실수로 왕소에게 상처를 내고 얼굴의 흉터를 가리기 위해 가면을 쓰고 버림 받은 왕자나 다름없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됐다는 내용의 설정이 있다. 위 사진은 8화에서 나온 이미지로, 왕소가 해수를 돌아보며 지은 미소가 훗날 광종이 된 왕소의 싸늘한 냉소로 바뀌는 연출 장면은 시청자들로부터 호평을 받았으며 광종이 실제 혼인한 혜종의 딸 황주가 황보씨를 제외한 1명의 현비 김씨의 자세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궁인 출신이였다는 점을 보아 현비 김씨를 각색한 것이 해수일 거라 추측. 실제 이후 정치적 행보도 원작옹정제 저리가라의 대숙청을 하는 등 실제 역사를 그대로 따라가게 된다.

9.2. 게임


태조 왕건 : 제국의 아침에서는 정규 캠페인 외에 패치로 추가된 '제국' 캠페인의 주인공으로 등장했는데, 해당 캠페인에서 아버지와 유닛 스킨을 공유했다(...).

9.3. 만화


  • 네이버 웹툰 문아가 광종 연간을 무대로 전개되는데, 작중의 시대적 배경은 광종 7년(956년)이다. 작중에 실제로 등장하며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조. 기록으로도 꽤나 수려한 외모를 지녔다고 한다.
  • 맹꽁이 서당 고려편에서 광종을 다룬 에피소드에서는 호족들의 저승사자라고 나오는데, 표지부터 살벌하게 눈을 희번뜩하는 광종 앞에 한 호족이 벌벌 떨면서 "죽어줄께, 살려줍쇼~"라고 빌고, 다른 호족은 죽어서 묻힌 모습이 나왔다.

10. 둘러보기(계보)


고려의 역대 국왕
3대 정종 왕요

4대 광종 왕소

칭제건원
고려의 역대 황제
칭제건원

초대 광종 왕소

칭왕
고려의 역대 국왕
3대 정종 왕요

4대 광종 왕소(칭왕)

5대 경종 왕주
한반도의 국가 원수
정종 왕요

광종 왕소

경종 왕주

[1] 고려사 광종 총서 기준.[2] 皇都. 고려시대 지역단위에서 가장 높은 단위는 경(京)이었다. 그래서 수도 개경(開京), 제2수도 서경(西京), 부수도 동경, 남경이 있었다. 하지만 광종은 도(都)를 도입해 개경을 황도, 서경을 서도로 바꾼다. 도(都)는 성종 때 폐지되어 경(京)으로 돌아오지만, 고종 때 현 인천시 강화군으로 천도하면서 당시 양광도 강화현을 강도(江都) 강화군으로 바꾸며 다시 부활했다.[3] 태조 때 개주(州)에서 성종 때 개성부(府)가 됐다가 현종 때 개성부를 삭제해 개경만 남겼다. 후 문종 때 다시 개성부를 설치하고 공양왕 때 경기좌도, 경기우도로 바뀐다.[4] 正寢. 정침은 임금이 먹고 자고 쉬는 용도의 전각을 통틀어서 부르는 말이다. 만월대의 어떤 전각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다.[5] 첫째 자식의 이름은 '왕태'인데 어렸을 때 세상을 떠난 듯하다. 둘째는 전대 임금이었던 정종 왕요이다.[6] 광종보다 앞선 국왕이였던 혜종과 정종은 광종의 형제였고 재위 기간도 짧았기 때문에 광종을 실질적으로 고려의 2대 내지 3대 왕으로 볼 수 있다.[7] 예를 들면 먼 후손 충렬왕이 아들 충선왕에게 양위하며 받은 존호 광문선덕태상왕 같은 호칭.[8] 밝을'소'[9] 왕요군은 정종으로 추정된다.[10] 정종의 장인인 동시에 혜종의 장인이기도 한 호족이다. 광종대 이후 후손 관련 기록이 전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광종의 숙청기 때 묶여 제거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11] 쌍기는 최초의 과거시험 때 그것을 주관하는 지공거가 되었다.[12] 이전까지 한반도 사회는 귀족들이 관직을 독점하고 세습하는 사회였기에 순수하게 과거만으로 관리를 뽑으면 그에 따른 반발이 심했고 때문에 귀족의 특권이라 할 수 있는 음서제가 함께 도입되었다. 그런데 고위 관직은 음서제 출신자들만 진출할 수 있는 등 차별이 있었기 때문에 나중에는 과거제가 유명무실해진다. 이런 관행은 결국 조선에 가서야 뒤집어진다. 물론 정치적 야망이 있는 귀족의 경우 음서로 관리생활을 하면서 과거시험을 통해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고 출세의 지름길로 이용했다.[13]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도 공복 자체는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고려사 및 삼국사기에 나온 대로 패션쇼를 드라마에서 할 수는 없었을 테니...[14] 건륭의 건은 왕건, 륭은 왕건 아버지 왕륭의 휘.[15] 이러한 관행은 원 간섭기 이후 공민왕 대에 다시 생겨나려 했지만 명나라와 본격적인 관계를 맺으며 사라졌고, 대한제국이 생기면서 다시 황제 호칭이 등장했다.[16] 예를 들면 고려의 개경 개성부.[17] 예를 들면 조선 왕조의 한성부.[18] 성종 문의대왕은 '황도 개주'였던 수도제를 '개경 개성부'로 바꾸어 정석적인 천자식 수도제를 완성한다.[19] 서필이 유력 호족이었고 광종에 반감을 드러내기 위해 한 말이라면 광종도 그대로 숙청했겠지만 서필이 호족이기는하나 유력한 집안 출신도 아니고 하급 관료 출신의 대쪽 같은 성격에 그의 언행 하나하나가 촌철살인의 직언이 대부분이라 광종도 그의 말은 귀담아 들은 것으로 보인다.[20] 사실 후에 서필이 유신성과 함께 나란히 광종의 배향공신에 오른 것을 보면 광종의 최측근이었을 것이다. 당장 광종이 펼친 개혁 정책에 찬성하기도 했다.[21] 다만 나중에 경종도 복수법의 폐단을 알고는 즉시 복수법을 폐지한 다음 이를 추진한 호족 출신의 재상 왕선을 유배보내고 복수법을 악용한 자들을 처벌하면서 이를 폐지시켰다.[22] 이제현은 순수하게 '너무 많은 신하들을 의심하고 죽이다니 인주(仁主)가 할 짓이 아니다'라는 입장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제현은 기본적으로 유학자였던 만큼 이런 패도적인 정책에 대해 유가적 입장에서 비판할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23] 익재 이제현은 그를 평하기를 '과거를 설치하여 선비를 뽑은 일은, 광종이 본래 문(文)의 전아함을 가지고 풍속을 변화시키려 했던 뜻을 보았음이 있고서 쌍기 역시 그 뜻을 받들어 따라서 그 아름다움을 이루었으니, 도움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고 했다. 즉, 이제현도 인정할 것은 인정했다. 본시 과거제도도 호족들에게 유리할 수 밖에 없는 게, 당장 서희의 아버지 서필부터 호족 출신이었고, 과거 시험도 본시 계급이 호족이 아니면 붙기가 힘들 만큼 어려웠고, 과거 시험 중 가장 어렵다는 문과를 중심으로 과거제를 짰다. 또한 본시 호족들 중엔 파평 윤씨부터 시작해 호족이 된 경주 김씨까지 모두 고려조는 물론 조선조 문무대신들의 조상들이 숱하게 많다.[24] 균여전의 그 균여가 맞다. 고려 초기의 고승으로, 화엄교리의 거장이었다고 한다. 또한 불교 이외의 학문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특히 향가에 익숙해 <보현십원가(普賢十願歌)>를 지음으로써 국문학 사상 큰 업적을 남겼다.[25] 신라 때부터 왕권을 옹호하는 성격이 강한 종파로 유명했다.[26] 고려 초기 문벌 귀족들의 지원을 많이 받은 종파.[27] 선종 중심으로 교종을 시도한 종파.[28] 이방원과 전주 이씨 종친들이 정도전에게 반발한 것은 표면상 사병 혁파 이전에 왕을 허수아비로 만드는 신권주의 때문이었다.[29] 알다시피 이 사병들의 원천은 그들이 불법적으로 노비로 삼은 이들이었다. 광종이 이러한 거센 정치적 반발을 감수하면서까지 양인 출신 노비들을 다시 본 신분으로 되돌린 것도 호족의 경제력 뿐 아니라 사병 집단 자체를 아예 없애려는 목적이 컸다.[30] 황제 또는 국왕의 정실과 후궁을 통틀어 일컫는 말.[31] 다른 군주라면 몰라도 주원장의 경우엔 왕조 시대 정치적 숙청을 용인하는 현대에서조차 지나치다는 비판을 받는다. 벼슬에 뜻이 없는 명망 있는 선비들까지 국가의 일에 참여하지 않는 불충이라며 처벌하고, 하루가 멀다하고 신하들을 괴롭히고 이유도 없이 떼거지로 죽여대는 군주의 행태는 왠만한 폭군 뺨칠 정도였다. 게다가 사람을 마구 죽인 광종이나 적당한 숙청으로 마무리한 조선 태종은 숙청을 해도 주원장만큼 도가 지나친 잔혹성을 보이며 별의별 끔찍한 고문으로 신하들을 능욕하다시피 죽이지는 않았다. 따라서 본문의 예로선 전혀 적합하지 않다. 차라리 본문에선 한고조 유방을 드는게 더 맞는 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나마 유방은 반란 일으킨 자들을 제외하면 여후가 죽였지 자신이 공신들을 죽이지는 않았지만.[32] 그나마 경종은 자신의 아들인 목종에게 왕위를 물려줬지만, 명나라의 2대 황제인 건문제는 넷째 작은 아버지인 영락제가 일으킨 정난의 변에 의해 황제 자리에서 쫒겨나고 죽음을 맞이했다.[33] 사실 현종은 여요전쟁으로 인해 몽진하던 도중에도 지역 호족들의 소규모 반란을 마주했다.[34] 955년 이후에 태어났으며, 사적에 그 이름이 실전되었으며 후손도 없었다고 한다. 경종이 왕태자로 책봉되던 965년은 광종의 공포정치로 인해 많은 호족들과 왕족들이 죽임을 당했는데, 특히 일부 호족들 중에는 왕족을 등에 업고 반란을 일으키려는 자들도 나타났다. 따라서 경종 역시 광종으로부터 의심의 눈초리를 받으며 지내야 했지만, 효화태자가 요절해서 대안이 없었기 때문에 살려두었다는 견해도 있다. 실제 역사적으로 권력다툼 때문에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거나 아들이 아버지를 죽인 일은 찾아보면 꽤 많다. 고려시대만 봐도 충선왕이 자기 태자를 죽이고 충숙왕을 즉위시킨 이력이 있다.[35] 숙부 문원대왕과 문혜왕후 류씨(文惠王后 柳氏)의 아들 천추전군千秋殿君과 사촌혼을 했으며, 천추전군은 요절했다. 이후 천추전은 천추태후에게 상속된 것으로 추정된다.[36] 혜종이 왕위에 앉아있었을 때 광종에게 시집갔다. 뒷배가 약했던 혜종이 자기 지지기반을 확보하기 위한 행동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광종은 혼인한 이후 자신의 조카이자 처남이 된 흥화군을 처형시켰으며, 이에 따라 왕녀였음에도 대목왕후에게 밀려 왕후가 되지 못했던 듯 보인다.[37] 고려에서 한자로 만든 노래도 속악에 포함된다. 풍입송이 대표적이다.[38] 아이러니하게도 혜종을 시해하는 일에 기꺼이 동참하는 모습을 보였다.[39] 이 일로 인해 서경은 이후 개경과 함께 광종의 양대 친위 세력이 된다.[40] 시청률은 태조 왕건 버프 탓인지 꽤 높았지만 화제성 면에서 아쉬운 성과를 거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