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종(고려 3대)

 


'''고려 제3대 대왕
정종 | 定宗'''
[image]
정종이 안장된 안릉
<colbgcolor=#f9d537><colcolor=#670000> '''묘호'''
'''정종(定宗)'''
'''시호'''
지덕장경정숙문명대왕
(至德章敬正肅文明大王)[1]
'''출생'''
923년
고려
'''사망'''
949년 4월 13일 (음력 3월 13일 / 25-26세)
고려 개경 개주[2] 본궐 제석원(帝釋院)[3]
'''능호'''
안릉(安陵)
'''재위'''
'''고려 제3대 대왕'''
945년 10월 23일 ~ 949년 4월 13일 (3년 6개월)
(음력 945년 9월 15일 ~ 949년 3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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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9d537><colcolor=#670000> '''본관'''
'''개성 왕씨'''(開城王氏)
'''휘'''
요(堯))
'''자'''
천의(天義)
'''부왕'''
태조(太祖)
'''모후'''
신명순성왕후(神明順成王后)
'''왕후'''
문공왕후(文恭王后), 문성왕후(文成王后)

1. 개요
2. 묘호와 시호
3. 생애
3.1. 즉위 전
3.1.1. 혜종의 패배 원인
3.2. 즉위 후
3.2.1. 철혈 통치의 시작
3.2.2. 피의 숙청
3.2.3. 서경 천도 시도
3.2.4. 광군 편성
3.3. 이른 붕어
3.4. 음모론
3.4.1. 정종은 광종이 시해했다?
3.4.2. 왕규의 난은 정종이 조작했다?
4. 평가
5. 가족
6. 대중 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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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의 제3대 임금. 묘호는 정종(定宗), 시호는 문명대왕(文明大王). 휘는 요(堯). 자는 천의(天義). 태조 신성왕의 셋째 아들.
왕의 이름이므로 '요 임금 요(堯)' 자는 고려가 망할 때까지 피휘에 따라 사용이 금지되었다. 이 글자 대신 삼국유사 고조선 기사에서의 예와 같이 '높을 고(高)' 자를 사용했다.
고려에서 태어난 첫번째 임금[4]으로 23살에 즉위해 27살에 죽은 청년군주로 강력한 뒷배경을 바탕으로 호족 대숙청을 시작한 임금이다. 허나 왕실 vs 호족 간의 대립이 지속되며 건강이 악화됐고, 결국 동생 광종에게 자리를 넘겨주고 최후를 맞았다.

2. 묘호와 시호


동생 광종 왕소가 올린 공식 묘호는 정종(定宗)이다. 묘호를 달리 불러 정묘(定廟)라고도 불렸다. 묘호의 발음이 제 10대 국왕 정종(靖宗)과 같아 종종 헷갈려 한다.
시호는 다수 고려국왕들이 그렇듯 두 가지가 있다.
  • 고려사 정종 세가 총서:
지덕장경정숙문명대왕(至德章敬正肅文明大王)
  • 고려사 정종 세가 마지막 조:
장원간경영인정숙장경문명대왕(莊元簡敬令仁正肅章敬文明大王)
대표시호는 동생이 올린 문명대왕(文明大王). 그래서 약칭은 정종 문명대왕(定宗 文明大王), 더 줄여서 정종 문명왕(定宗 文明王)이다.

3. 생애


'''등극한 태조 신성대왕(太祖 神聖大王)의 아들'''
'''2대'''
'''3대'''
'''4대'''
혜종 의공대왕
정종 문명대왕
광종 대성대왕

3.1. 즉위 전


태조의 3남이지만 둘째 형인 왕태가 요절했기 때문에 사실상 차남의 대우를 받았다. 후에 즉위하는 광종의 동복 둘째 형으로 다소 유약한 면이 있었던 이복 맏형 혜종과 달리 야심이 많고 강인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왕요는 이름과 자부터 강한 권력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 티가 난다. 이름은 위 개요에서 말했듯 무려 ''''堯'''', 유교권에서 불가침의 영역인 이름이다. 자는 '天義'로 '하늘의 정의', '하늘의 의로움'이란 뜻이다.
당대 강력한 호족이었던 충주의 호족 유긍달의 딸인 신명순성왕후 유씨의 소생으로 형 혜종과는 달리 탄탄한 권력 기반을 갖추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처가가 후백제의 왕실이었고[5], 동복 누이인 낙랑공주가 경순왕에게 시집을 가서 전체적인 세력 기반만 놓고 보면 형인 혜종을 압도할 정도로 막강핶다.
이복 형인 혜종이 이른 나이에 붕어하자 종실 세력의 거두였던 왕식렴 세력의 지지를 얻어 즉위했다. 왕실 종친인데다 혜종의 어린 시절부터 그를 지켜봤을 왕식렴이 혜종을 지지하지 않았던 것은 그만큼 혜종의 지지 세력이 미약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흥화궁군이라는 혜종의 맏아들이 있었음에도 왕요가 왕위에 오른 것은 그만큼 왕요의 세력이 막강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겠다.
왕요의 배후 세력을 종합하면:
  • 태조의 사실상 차남이란 혈통.
  • 어머니와 충주 호족.
  • 누이와 처남과 구 왕실.
  • 작은아버지 왕식렴과 서경 세력.
  • 처가와 구 백제 세력.
솔직히 이 정도의 세력을 가진 왕요를 혜종이 통제할 수 있을 가능성은 거의 0에 가깝다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혹시나는 역시나였다. 혜종이 붕어하자 그 뒤를 이은 건 모두나 예상했듯 왕요였다.
형 혜종 재위 1년에 세워진 현 대한민국 강원도 영월군에 있는 징효대사탑비엔 '왕요군(王堯君)'으로 등장한다.[6] 왕자 시절, 별 다른 작호를 받진 않은 듯 하다.

3.1.1. 혜종의 패배 원인


혜종은 사실 쓸 수 있는 카드가 별로 없었다. 애시당초 박술희, 왕규와 같은 친위 세력을 제외하고는 지지 기반이 없던 혜종과 달리 어머니, 장인, 누이 그뿐만 아니라 왕식렴 등 막강한 지지 세력을 구축한 왕요와는 전혀 비교가 되지 않는다.
측근이라고 할 수 있는 왕규는 초반에 무리하게 왕요, 왕소 형제를 제거하려 했다가 혜종의 반대에 부딪친다. 그뿐만 아니라 박술희는 왕규와 첨예하게 대립하는 등 혜종의 세력은 하나로 뭉쳐도 될까 말까인데도 분열을 거듭했다.
혜종은 외가인 나주 오씨 가문이 왕건의 다른 자제들의 가문에 비해 한미한 편인지라 지지 기반이 미약한 상태에서 왕위에 올라 늘 불안에 떨어야 했다. 심지어 자신을 암살하려 한 자객을 체포하고도 취조하기는 커녕 책임조차 묻지 못했다.[7]
반면 정종은 이미 배후에 든든한 지지 기반을 갖추고 즉위했던만큼 자신감과 야망이 컸던 점에서 의욕적으로 왕권 강화를 추진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정종은 혜종이 즉위하던 시절에 왕규에게 역적이라고 찍히고도 무사할 정도로 그 기반과 세력이 강성하였다.

3.2. 즉위 후



3.2.1. 철혈 통치의 시작


정종은 즉위한 이래로 붕어할 때까지 정적들의 힘을 억누르고 호족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려고 하는 등 왕권 강화와 중앙 집권 체제의 정착을 위한 개혁에 힘썼으나 어째서인지 그 결과는 대개 안습함으로 점철되어 있다.

3.2.2. 피의 숙청


정종은 즉위 이후 개국공신인 박술희를 살해한 죄와 반역을 꾀한 죄 등을 물어서 왕규 일파를 제거하는 것을 시작으로 자신의 뜻에 걸림돌이 될 수 있고 자신에게 위협이 될 만한 정적들을 제거하는데 주력하였다.
정적 처리 과정에서 왕규가 세력을 모아 반란을 꾀했고 이를 진압할 때 지나칠 정도로 인명을 살상하여 개경 세력들과의 사이가 나빠졌고, 무엇보다 개경 백성들의 불만을 사서 민심도 악화되고 만다. 이 사건으로 연루되어 목숨을 잃은 자만 300명이었다고.
재위 1년차인 946년, 사찰에 곡식을 시주하고 직접 걸어가서 개국사(開國寺)[8]에 불사리를 봉안하기도 하였는데 아마 개인적인 죄책감을 씻기 위한 행위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3.2.3. 서경 천도 시도



947년(재위 2년) 서경에 왕성(王城)을 쌓기 시작했다.
정종은 이미 민심이 떠나간 개경에서는 더이상 자신의 뜻을 펼치기가 힘들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아예 개경을 뜨려고 수도를 서경(西京)[9]으로 천도할 것을 계획하게 된다. 천도 계획 시점에서는 개경의 지기가 나빠져 나라의 도읍으로 삼기 힘들다는 점과 서경으로 천도하는 것이 고구려의 옛 영토 회복에 유리하다는 점을 구실로 삼았다.
또한 서경이 풍수지리적으로 길지로 꼽힌다는 점도 서경 천도 계획의 이유 중 하나가 되었눈데 이는 왕건훈요십조에서 "서경은 우리나라 지맥의 근본이 되고 대업을 만 대에 전할 땅이니..."라고 이야기할만큼 서경이 풍수지리적으로 매우 좋은 땅이라는 것으로 이러한 풍수지리적 이점을 근거로 서경 천도를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서경에 새 궁궐을 짓는 공사 과정에서 장정들을 계속 뽑아 부역에 동원하게 되자 서경 백성들조차 왕에게 반감을 품기 시작했다. 심지어 개경의 백성을 서경으로 강제 이주시켜 서경 시내를 채우니 개경 백성들은 더욱 반감을 가지게 되었다.
결국 서경 천도 계획은 민심을 얻기는 커녕 왕에 대한 반대 세력과 불만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불러오고 말았던 것이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종 붕어 직전까지 서경 천도가 진행된 것을 보면 당시 호족들과 신하들조차 정종의 의지를 꺾을만한 힘을 가지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3.2.4. 광군 편성



최언위의 아들 최광윤[10]유학을 갔다 거란에게 잡혔다. 허나 광윤의 재능을 높게 산 거란은 광윤에게 벼슬을 주었는데 광윤은 거란에서 일하던 중 거란이 고려를 침공하려는 것을 알아차리고 몰래 편지를 보내와 알린다. 이에 정종은 재위 2년(947년)에 광군사(光軍司)를 설치해 30만 광군을 편성, 병력을 모았다.[11]
광군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국가의 상비군이 아닌 농민들로 이루어진 예비군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며 호족들이 통솔하는 지방군 역할을 했었다. 당시 고려는 중앙정부에서 통제하는 중앙군과 지방호족들이 통제하는 사병이 나뉘어져 있었다. 정종은 광군 편성을 통해 호족들의 사병을 중앙정부의 통제 하에 두고자 했다. 광군은 산만한 군대의 지휘권을 통합해 국왕이 가져 왕권 강화를 위함이기도 했으며 이는 후대의 성종 문의왕이 경군(京軍)[12]과 외군(外軍)[13]을 정해 군권을 통합하고 현종 원문왕이 광군을 국왕군으로 통합시키는 것으로 드러난다.
광군은 현종 원문왕, 문종 인효왕 대에도 사면 기광군(四面 奇光軍), 유음 기광군(有蔭 奇光軍)이란 이름으로 크게 축소되어 남아있었는데, 광군이 호족들의 사병 출신이었기에 시간이 지났어도 흔적이 남아있는 것이다. 잔존한 광군은 기광군(奇光軍)이란 명칭으로 바뀌어 동서남북 사면에 배치되었다. 그리하여 사면 기광군으로 불렸고 특수부대 역할을 하게 되었다. 기광군은 원 호족 사병이어서 특별대우를 받아 음전을 조금씩 가졌다. 그래서 유음(음전이 있는) 기광군이라고도 불렸다.

3.3. 이른 붕어


이런저런 개혁이 연이어서 실패하자 정종은 마음이 약해졌는지 즉위 과정에서 인명을 지나치게 살상한 것에 대해 죄의식을 느끼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
재위 3년차인 948년 9월에 동여진 대광(東女眞 大匡)[14]이 와서 특산물과 말 700여 마리를 바쳤다. 정종은 당시 본궐의 정전(正殿)인 천덕전(天德殿)에서 그를 맞이하여 , 면포, 비단 등을 하사했다.
이렇게 조공품과 하사품을 교환하던 중 갑작스레 천둥번개가 치며 비가 내렸다. 정종의 신하들과 물품들이 번개에 맞고 천덕전의 서쪽 부분이 번개에 맞으니 정종은 크게 놀랐고, 당장 편전인 중광전(重光殿)[15]으로 옮겨갔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정종은 그만 큰 충격을 받아 병에 걸리고 말았다.
게다가 그 와중에 자신의 후원자였던 왕식렴이 사망하자 상심이 커져 병이 더욱 악화되었고, 결국 재위 4년만인 949년 3월 13일에 27세의 젊은 나이로 붕어하는 비운을 맞았다.
정종은 죽기 전, 자신의 동생 왕소를 불러 선양한 뒤 내제석원에 머물다가 사망하였다.
그 최후마저도 안습하기 그지 없어 정종이 떠난 후 서경 천도 계획이 취소되자 부역에 시달린 백성들이 기뻐하며 환호하기까지 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3.4. 음모론


다만 전술한 기록들과는 달리 이전부터 혜종과는 왕위를 두고 대립하던 관계였던지라 혜종이 사실 병으로 붕어한 것이 아니라 시해당했고 그 배후에 정종이 있다는 설까지 생겨나는 등 정종을 둘러싼 많은 음모론이 학계에서 제기되고 있다.

3.4.1. 정종은 광종이 시해했다?


정종의 요절과 관련해서 후에 광종이 되는 친동생 왕소와의 대립 끝에 시해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외가는 같았을 지언정 정종의 후견인이 왕식렴 등 서경 세력이었던 반면 광종의 뒷배경은 처가인 황주 황보씨였고 이들이 연계되어 서로 갈등을 빚었다고 보는 설이다. 정확히는 아내의 외가, 광종의 아내 대목왕후 황보씨는 왕건과 신정왕후 황보씨 사이의 딸로 외가의 성을 따랐다.
실제 후에 광종은 태조의 4비 신정왕후 황보씨 소생 아우인 왕욱의 아들, 즉 자신의 조카인 성종을 사위로 삼기도 했다.[16]
아들 경춘원군(慶春院君)이 있었지만, 너무 어려서 훈요 10조 3번 조항에 따라 동생 왕소가 광종으로 대를 이었다. 경춘원군은 이후 전대 혜종의 아들 흥화군(興化君)과 함께 광종에 의해 숙청되어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다.

3.4.2. 왕규의 난은 정종이 조작했다?


알려진 사서의 기록과는 달리 박술희를 암살한 것도 그이고 반란의 주동자로 알려졌던 왕규를 처형한 뒤 그에게 모든 죄를 덮어 씌웠다는 가설이 존재한다.
비록 왕규가 혜종 대에 반역을 꾀하고 박술희를 모함하여 유배보낸 후 왕명을 사칭하여 유배지에 머물던 그를 살해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으나 이를 곧이 곧대로 믿기는 힘들다. 왕규와 박술희 모두 선왕인 태조의 유지를 받들어 혜종을 모시던 고명대신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박술희는 몰라도 왕규는 조금 애매하다. 왕규는 혜종에게 왕요와 왕소를 죽이자고 간했으나, 혜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뿐만 아니라 왕소에게 딸을 시집 보내는 등 왕규의 뜻과는 다른 태도를 취했다.[17] 그리고 나중에 혜종이 병에 들자, 박술희와 왕규는 100여 명의 호위병들을 이끌고 서로 대치하는 등 대립이 극에 달했다. 아무래도 왕소와 왕요의 처리 건을 두고 대립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왕규와 박술희는 태조로부터 혜종을 보필하도록 당부까지 받은 처지였던 이들이라 특별한 문제가 있지 않는 이상 불화를 일으킬 사이도 아니었다. 그러나 고려사 박술희 열전에는 혜종이 병에 들자 백여명에 호위를 이끌고 왕규와 대립했다고 적혀있다.
왕규는 왕소와 왕요를 제거하고자 했는데 박술희는 이에 대해 반대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혜종도 마찬가지라서 왕소에게 딸을 시집보냈다. 사실상 왕규와 뜻을 달리한 것이다.
결국 두 사람은 정치적으로 서로 부족한 부분들을 보완해주는 정치적 동반자에 가까운 관계였으며 단지 그 방식에 양자간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박술희는 후삼국 통일에 군공을 세울 정도로 녹록치 않은 인물이었지만 친위 무장의 성격이 강했기에 정치적 기반이 부족했고, 광주의 호족 출신인 왕규는 왕씨 성을 하사받고 대중 외교의 중책을 맡을 정도로 왕건이 총애했던 인물이지만 기본적으로 문신이었기에 군사적 기반이 없었다.
때문에 왕규가 굳이 박술희와 혜종에게 위해를 끼칠 일이 없었다는 설도 있다. 혜종 사후 박술희는 정종이 역모를 의심해 귀양 보내자 왕규는 왕명을 사칭해 박술희를 유배지에서 암살하고 곧바로 왕요를 노렸지만, 이미 기다리고 있던 왕식렴과 왕요에게 당하고 만다.
이런 점에서 왕규는 박술희의 죽음을[18] 왕요 탓으로 돌리고 박술희의 군사력을 흡수해 공격하려는 무리수를 두다 망한 것으로 보인다. 애당초 혜종 및 박술희와는 달리 왕규는 대놓고 왕소와 왕요를 없앨 것을 간하는 등 그들을 타겟으로 삼고 있었기에 왕요의 즉위는 사실상 왕규에게 사형선고나 다름 없기도 했다.

4. 평가


생각해보면 혜종이 붕어한 뒤 그의 세력 박술희, 왕규까지 연달아 제압하고 임금이 되었건만 아이러니하게도 혜종과 똑같이 동생 때문에 환장하다가 허망하게 요절하는 비운을 맞고야 말았다.
왕위에 즉위하자마자 동생인 광종 왕소가 적잖이 자신의 권력에 위협이 되었다. 그를 제압하자니 기반이 만만치 않아 그조차 쉽지 않았던 것. 게다가 왕규까지 반란을 일으키고 앉았으니. 결국 정종이 각종 반란을 때려잡고 왕권에 위협이 될 만한 요소를 박살내려고 별의 별 짓을 다했으나, 허망하게 요절하면서 광종이 그 덕을 봤다. 정종의 후견인이던 왕식렴도 비슷한 시기에 사망했으니 광종은 참 덕을 잘본 듯하다.
그래서인지 광종에게 비판적이었던 최승로는 비슷하게 피의 숙청을 한 정종에게는 우호적이었다. 아래에는 정종의 대한 최승로의 평가다.

정종께서는 왕자였을 때부터 훌륭한 명성이 있었습니다. 혜종께서 병석에 누워 오래 동안 회복되지 않자 재신 왕규 등이 몰래 모의하여 왕실을 넘보았습니다. 정종께서 이를 먼저 알아차리시고 은밀히 서도(西都)의 충성스럽고 절의가 있는 장군[19]

과 함께 계책을 정하여 대비하셨습니다. 내란이 일어나려 하자 호위하는 군사가 많이 도착했으므로 간악한 계략은 실패로 돌아가고 흉악한 무리들은 죽음을 맞았습니다. 이는 비록 천명에 따랐다고는 하나 사람의 계책도 있었으니 어찌 뛰어나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태조로부터 지금까지 38년 간 왕위가 끊어지지 않았던 것은 역시 정종의 힘이었습니다.

정종께서는 임금의 형제로 왕위를 이어받아 밤낮으로 노력하여 나라 다스리는 도리를 구하셨습니다. 때로는 촛불을 밝혀들고 조정의 선비를 접견하셨고, 또 어떤 때는 정사에 바빠서 늦게 식사하면서 모든 정사를 듣고 결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즉위한 초기에 사람들이 모두 서로 기뻐하였습니다. 그런데 도참을 그릇되게 믿게 되자 도읍을 옮기로 결정하셨습니다. 게다가 천성이 굳세시어 고집을 굽히지 않으셨고, 급박하게 백성들을 징발하여 역사(役事)를 일으키고 사람들을 수고롭게 하니, 비록 임금의 생각이 옳다고 해도 사람들의 마음은 이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원망과 비방이 이로 인해 일어났고 재난이 그림자와 메아리처럼 재빨리 응하여 서경으로 도읍을 옮기지도 못하고 임금의 자리를 영원히 떠나게 되었으니 참으로 통탄할 만합니다.

고려 왕씨가 계속 왕위를 이어나갈 수 있는 힘은 광종이 아니라 정종의 공이라고 평하고 있다. 비록 요절하고 무리한 서경 천도를 벌여 민심의 이반을 불러오기는 했지만 보통 인물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5. 가족


정종은 아내왕후 두 명, 부인 한 명을 두었다. 자식아들 하나, 하나를 두었다.
첫번째 왕후는 문공왕후. 문서 참조. 두번째 왕후는 문성왕후. 문서 참조.

아들 경춘원군은 후백제견훤의 외손녀 문성왕후의 아들이다. 정종의 부인은 모두 견훤의 딸인 국대부인과 박영규의 딸이다.
경춘원군이 왕위를 이었다면 대대로 견훤의 피가 이어질 수도 있었지만 무산됐다. 정종이 27세에 요절했으니 경춘원군의 나이는 잘해봐야 10세 전후일테니...
설사 경춘원군이 왕위를 물려받았어도 고려 헌종처럼 숙부에게 눌려지내거나 심할 경우 폐위되버렸을지도 모른다. 물론 왕위에 오른다는 가정 전제 하에서.

'''시호'''
'''청주남원부인(淸州南院夫人)'''
'''본관'''
청주 김씨(淸州 金氏)
'''생몰연도'''
? ~ ?
지금의 충청도 지역 출신 대호족 김긍률의 딸이다. 혜종 또한 김긍률의 딸과 결혼했는데 정종은 청주의 지지를 받고자 한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광종의 승...

6. 대중 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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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제국의 아침에서는 최재성[20]이, MBC 빛나거나 미치거나 에서는 류승수가,SBS 달의 연인 - 보보경심 려에서는 홍종현이 맡았다.
보통 사극에서 광종을 주인공으로 삼는 경우가 많아 찌질이나 폭군 혹은 악역을 맡는다. 최근에 왕규의 난이 새롭게 해석 되면서 더욱 악역 같지만, 후에 최승로의 평가처럼 반대파를 숙청해 고려를 일시적으로나마 안정화시켰고 밤잠을 거르며 인재들을 만나 나랏일에 열중이었다는 평과 비록 흐지부지됐지만 거란 침공 대비를 위한 30만 광군 편성등 여러 모로 능력은 꽤 준수했던 임금이다. 그리고 실권을 왕식렴이 가지고 있던 탓에 그의 힘에 밀렸다고 하는 견해도 있는데 실상 그랬다는 기록은 별로 없다. 물론 최승로는 그가 미신을 믿어 무리수를 뒀다고 비판도 했다.
[1] 고려사 정종 총서 기준.[2] 태조 때 개주(州)에서 성종 때 개성부(府)가 됐다가 현종 때 행정지역을 삭제해 개경만 남겼다. 후 문종 때 다시 개성부를 설치하고 공양왕 때 경기좌도, 우도로 나눈다.[3] 고려 정궁 후원에 있었던 사찰. 919년에 창건되었다.[4] 초대 태조는 신라, 제2대 혜종은 태봉 출신이다.[5] 박영규와 견훤의 딸 사이에서 태어난 두 딸이 문성왕후와 문공왕후이다. 그 중 문성왕후와의 사이에서 경춘원군을 두었다.[6] 동생은 '왕소군(王昭君)'으로 등장. 뿐만 아니라 청단궁주, XX대왕, 필영대왕 같은 왕족에 왕규, 왕순식의 두 아들 등 수 많은 인물이 나온다.[7] 아마도 배후 세력이 밝혀지더라도 혜종 입장에서는 힘이 미약했기에 함부로 쳐낼 수 없었을 것이다.[8] 태조 왕건이 직접 세운 사찰 중 하나로 교종 계열이었다. 태조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으며 위치는 황성#s-2(皇城) 근처에 있었다.[9] 고려의 제 2수도로 행정 단위는 평양대도호부 → 서경 → 평양부 순으로 바뀌었다. 바로 지금의 평양시이다.[10] 최항(배향공신)의 아버지.[11] 광군사는 명칭이 광군도감(光軍都監)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광군사로 돌아온다.[12] 국왕이 직접 통솔하는 2군 6위.[13] 국왕이 임명한 무관이 통솔하는 주현군(住縣軍)과 주진군(住鎭軍).[14] 대광은 고려의 고위 향직 품계이다. 고려 국민이 아닌 동여진 사람이 대광 품계를 받은 이유는 그가 고려의 제후로 취급되어 고려의 관작을 받았기 때문. 대광급 품계를 받은 걸 보면 이 여진인은 나름 높은 지위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15] 중광전, 후 강안전(康安殿)으로 바뀌는 이 전각은 고려본궐에서 가장 중용된 편전이었다. 자신의 형 혜종이 죽은 곳이기도 하다.[16] 자신의 맏딸인 문덕왕후 유씨를 성종에게 재가시켰다. 문덕왕후 유씨는 이미 왕족 인물이었던 홍덕원군 왕규에게 시집을 가 딸 한명을 낳았으나 이후 성종과 재혼했다. 여담으로 문덕왕후 유씨가 낳은 딸은 후에 목종의 왕비가 되었다.[17] 다만 이에 대해선 자신의 딸을 왕소에게 출가시켜 그와 동복형인 왕요를 서로 분열시키려 한 것이 아니냐는 견해도 있다. 혜종의 뒷배경이 미약했고 심지어 당대에도 혜종을 노리는 여러 번의 암살시도가 있었다는 것을 감안해보면 생존을 위해 왕소와 왕요 사이를 갈라놓으려 한 것으로 풀이해볼 수 있는 셈.[18] 실제로 박술희를 왕명을 사칭해 암살했든, 아니었든.[19] 오늘날 매체에서 최종 보스로 나오는 왕식렴일 것인데 어떻게 참으로 아이러니하다.[20] 이후 같은 작가가 집필한 드라마 야인시대에서는 마루오까 경부 역할로,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한반도 역사상 최악의 졸장 역할로 출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