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양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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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노나라의 23대 군주. 노성공의 아들. 희야, 노소공, 노정공의 아버지. 그는 노성공이 죽은 뒤 노후가 되었는데, 이때 그의 나이는 3살이라 여전히 삼환(三桓)이 실권을 장악했다.
2. 재위 기간
노양공 원년(기원전 572년), 진(晉)나라의 진여공이 난서(欒書)에 의해 살해당하고 공손주가 진도공으로 즉위했다.[1][2]
노양공 4년(기원전 569년), 노양공은 진나라로 가서 진도공을 찾았다.
노양공 5년(기원전 568년), 계손행보가 죽으니 그는 계문자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 뒤는 아들 계무자가 이었다.
노양공 9년(기원전 564년), 진도공과 함께 정나라를 치고 위(衛)나라에서 성인식을 치뤘다.[3] 그리고 계무자가 그것을 도왔다.
노양공 11년(기원전 562년), 삼환씨가 삼군을 나눠 가졌다.[4]
노양공 12년(기원전 561년), 진나라에 입조했다.
노양공 16년(기원전 557년), 진도공이 죽고 진평공이 즉위했다.
노양공 21년(기원전 552년), 노양공은 진평공을 알현했다.
노양공 22년(기원전 551년), 유가의 창시자인 공자(孔子)가 탄생했다.
노양공 29년(기원전 544년), 오나라의 연릉 계자가 노나라에서 주나라의 음악에 대해 묻고 그 뜻을 알아차리니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였다.
노양공31년(기원전 542년), 노양공이 죽고 희야(姬野)가 즉위했다.
[1] 진여공이 서동을 총애해 그의 말을 듣고 6경을 견제하려다가 이런 참변을 당한 것이다.[2] 진도공이 어려서 삼환씨에게 좌지우지된 노나라 꼴이 날 수도 있었지만 나이에 비해 총명해서 그런 참사는 벌어지지 않았고, 그것은 진경공 때 가서 노골화된다.[3] 이 당시면 10대 초중반에 성인식을 치룬다.[4] 군주만이 삼군을 총지휘할 수 있는데, 이리 나눠 가졌다는 것은 노나라의 군주의 권력이 여전히 미약함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