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오후루 허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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鈕祜祿 和珅(뉴호록 화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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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0년 ~ 1799년
1. 개요
2. 생애
2.1. 승승장구 하던 시기
2.2. 권력의 정점에 오르자 흑화하다.
2.3. 몰락
3. 여담


1. 개요


한자를 한국식으로 읽어 '뉴호록 화신' 또는 중국식 발음을 따라 '니오후루 허션'이라 표기한다. 자는 치제(致齊). 본명은 선보(善保), 성은 니오후루씨(鈕祜祿氏)이며, 만주 정홍기 이갑라 사람으로 대대로 관료를 지낸 집안이다. 흔히 역사상 탐관오리이자 간신으로만 알려졌지만 외모가 준수하고 능력도 뛰어났던 인물이다.
본 항목이 '니오후루 허션'이란 이름으로 개설되었지만, 우리말 학술논문들이 대부분 '화신'이라고 표기하므로 이하로는 '화신'이라고 적는다.

2. 생애



2.1. 승승장구 하던 시기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조실부모하여 갖은 고생을 겪었다. 화신은 머리가 영민하고 외모가 준수하며 아부를 잘했다. 특히 10세에 만주족 관리 자제들의 학습 장소인 함안궁관학에 합격했으며 만주어, 한어, 몽골어, 티베트어 등 4가지 언어에 능통했을 뿐만 아니라 유가 경전에도 통달하여 오성흠(1729~1803), 오성란(?~1810) 등 스승들에게 총애를 받았을 정도였다. 건륭 34년(1769) 화신은 진사에 급제하지 못했지만 절세의 미남으로 건륭제의 총애를 받아 문생원의 자격으로 삼등경기도위의 작위를 물려 받았다가 건륭 37년(1772) 3등 시위/점간처(비밀첩보기관)시위가 된 때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건륭 40년(1775) 건청문시위, 어전시위, 정람기만주부도통, 건륭 41년(1776)에는 호부 우시랑, 임시파견 군기대신을 거쳐 호부상서, 의정대신의 자리까지 올랐다.
건륭제가 순행에 나갔을 때 일이다. 관리가 상주문을 올렸는데 어떤 지방의 부고에 비축해 놓은 전곡을 몽땅 털렸다는 얘기였다. 진노한 건륭제는 시위들에게 이런 글을 내렸다.
"호랑이와 들소가 우리에서 뛰쳐나오고 귀갑과 보옥이 궤 안에서 망가졌다면 누구의 잘못이겠느냐?"
평소에 황제를 몸으로 보위하는 일만 했던 시위들은 황제가 내린 문장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무척 당황했다. 하지만 화신은 황제의 속마음을 꿰뚫어보고 이렇게 대답했다.
"만세께 아롸옵니다. 호랑이와 들소가 우리에서 뛰쳐나오고 귀갑과 보옥이 망가졌다면 그것들을 관리하는 자는 자신의 과오를 변명할 수 없사옵니다."
건륭제가 내린 글은 원래 논어, 계씨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계강자가 전유를 정벌하려고 하자 공자는 계강자의 가신 염유와 자로가 주군을 잘못 보필한 과오가 있음을 지적한 부분이다. 송나라 때 학자 형병(932~1010)이 이 구절에 주소를 달았다. "이는 국가의 재물을 맡아서 지키는 자의 잘못을 지적한 글이다. 군주에게 부족한 점이 있으면 그를 보필하는 신하의 과오임을 비유한다." 화신은 논어 주소의 내용도 완벽하게 암기한 덕분에 건륭제의 느닷없는 질문에 정곡을 찌르는 대답을 할 수 있었다. 시위들은 모두 무식한 줄만 알았던 건륭제는 그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더구나 민주족 제일의 미남이라는 찬사를 듣는 그에게 호감을 느꼈다.
또 건륭제가 맹자를 읽고 있을 때 일이다. 날이 어두워지자 주소가 잘 보이지 않았다. 건륭제는 화신에게 등불을 밝히게 했다. 화신은 그에게 어느 부분을 읽고 계시냐고 물었다. 그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화신은 그가 읽다만 나머지 부분을 한 글자도 빼놓지 않고 줄줄이 암기하여 그를 기쁘게 했다.[1]
건륭 45년(1780)에 화신은 어명을 받고 운남성으로 가서 운귀총독 이시요(?~1788)의 독직 사건과 하급 관리들의 부패를 적발하여 이를 2개월 만에 말끔하게 일소하여 황제에게 더욱 신임을 받았다. 또 지방 관아의 적폐를 청산하는 시책을 올렸는데, 건륭제가 이를 칭찬하면서 화신에게 호부상서를 제수했다. 당시 호부상서는 청나라에서 국가의 재정을 총괄하는 막중한 직책이다. 이때부터 화신은 재부를 움켜쥐기 시작했다.
이후에도 화신은 무관직으로 상남기 만주 도통, 정백기 만주 도통, 상황기 만주 도통, 보군통령, 문관 직으로 내무부대신, 어전 대신, 의정 대신, 정백기 영시위 내대신, 정황기 영시위 내대신, 군기 대신, 영반 군기 대신, 협판 대학사, 문화전 대학사, 호부 상서, 이부 상서, 이번원 상서, 학직으로 전시독권관, 일강기기주관, 사고 전서관 정총재, 석경관 정총재, 국사관 정총재, 한림원 장원 학사, 재정직으로 숭문문 세무 감독, 궁중 내직으로 태의원, 어약방 사무 등 수많은 관직을 맡았고 작위는 태자태보, 백작, 공작에 이르렀다.
이때만 해도 화신은 탐관오리가 아니라, 건륭제 치세를 이끌어 나간 3대 명신으로 꼽혔다.
참고로 건륭 45년(1780), 서른한 살에 이미 권력의 정점에 있던 화신을 박지원이 열하에서 우연히 목격했다고 열하일기에 기록하였다. 박지원은 화신이 맑고 날카로우나 경망스럽고 덕이 없게 생겼다고 평했다.

2.2. 권력의 정점에 오르자 흑화하다.


건륭제는 늙을수록 젊었을 때와 달리 신하들의 간언을 멀리하고 자신을 십전노인(十全老人)[2]이라 칭하며 자만에 빠졌다. 이를 잘 파악하여 화신은 물불을 가리지 않고 건륭제에게 아부했다. 무엇보다 화신은 건륭제가 강희제옹정제보다도 더 위대한 황제라고 끊임없이 추켜세웠고, 건륭제의 생모 숭경황태후(1692~1777)가 사망하여 국상을 치를 때 화신은 여러 날 동안 침식을 끊고 어머니를 잃은 듯이 통곡하여 건륭제에게 환심을 샀다.
건륭제는 재위기간 중 여섯 차례 순행했다. 백성의 삶을 보살피기 위하여 남방을 순행한다는 목적이었지만 사실은 남방의 절경을 마음껏 즐기고 가는 곳마다 호화로운 연회를 베풀어 황제의 위세를 과시할 의도였다. 그런데 순행할 때마다 막대한 자금과 인력이 필요했기에, 건륭제가 국고를 비축한 재화를 쓰면 황제가 국고를 탕진한다는 비난을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화신은 조정 대신들의 비난을 받지 않고 황제의 사치 욕구를 마음껏 충족시켜 줄 방법을 모색한 끝에 건륭 45년(1780)에 의죄은이라는 희한한 제도를 만들었다. 이는 관리가 뇌물을 받거나 잘못을 저질렀을 때 내무부에 은자를 상납하면 금액에 따라 죄를 경감해 주는 제도이다. 이것이 시행되자 부패한 관리들은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당시 내무부에 들어온 은자는 조정의 조세수입이 아니었기 때문에 언제든지 황제를 위해 쓸 수 있었다. 화신의 수완에 감탄한 건륭제는 별도의 수입에 대만족했다. 하지만 부패한 관리들이 상납한 은자는 결국 백성의 고혈을 짜내 마련한 것이었다.[3] 결국 이 제도는 건륭 후반기에 이르러 청나라에 관리들의 부패가 독버섯처럼 퍼지는 원흉이 되었다.
화신에게는 풍신은덕(豐紳殷德 1775~1810)이라는 유일한 아들이 있었다. 아들의 이름은 건륭제가 하사했다. 건륭제는 열 번째 공주이자 막내딸인 고륜화효공주(固倫和孝公主 1775~1823)를 가장 총애했다. 사실 고륜(固倫)은 청나라에서 황제의 정실부인인 황후가 낳은 공주에게만 하사하는 칭호이다. 화효공주의 생모는 비빈에 책봉되었으므로 화효공주에게는 화석(和碩)이라는 칭호를 내려야 청나라 황실의 법도에 맞았다. 하지만 건륭제는 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고륜'이란 칭호를 하사했다.[4]
무엇보다 건륭제가 65세(건륭 40년)에 얻은 딸이라 화효공주를 매우 예뻐했다. 더구나 화효공주는 자신을 빼어 닮고 영특했을 뿐만 아니라 무예도 뛰어났다. 하루는 공주가 남장을 하고 부친과 함께 사냥을 나가 달리는 사슴을 화살 단 한 발로 명중시켰다. 건륭제는 그 모습을 보고 기뻐하며 "네가 황자였다면 짐은 너를 황태자로 책봉했을 것이다."라고 공주를 칭찬했다. 고륜화효공주는 부친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성장했다. 화효공주가 세 살일 적(건륭 42년, 1777)에 건륭제는 마음속으로 화신의 아들 풍신은덕을 배필로 결정했다.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딸을 화신의 집안에 시집보냄으로써 그에 대한 변함없는 총애를 보여주고 싶었다.
건륭 54년(1789) 풍신은덕과 고륜화효공주는 열다섯 살 나이에 성대한 혼인 예식을 치르고 부부가 되었다. 이로써 건륭제와 화신은 나이 차이가 39세나 되는데도 사돈 관계가 되었다. 시위에서 출발하여 조정의 중추기관을 장악하고 마침내 황제의 사돈이 된 화신은 천하에 무서울 것이 없었다. 청나라에서 그를 건들 사람은 황제뿐이었다. 황제의 총애뿐만 아니라 공주를 며느리로 둔 화신 입장에서는 더는 무서울 게 없었다.[5]
건륭 58년(1793) 청나라를 방문한 영국 사절단장 매카트니는 "많은 중국인들은 화신을 두 번째 황제라고 몰래 칭한다." 하고 토로 했을 정도로 화신은 실제로 황제에 버금가는 권력을 행사했다. 하지만 절대 권력은 반드시 부패하기 마련이다. 특히 이때부터 화신은 재물에 집착하여 매관매직, 뇌물수수, 이권개입, 금품갈취 등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재물을 닥치는 대로 긁어 모았다. 게다가 자신의 비리를 고발하거나 치부가 적힌 상소문은 건륭제가 못 보도록 빼돌리고 대신들을 포섭하여 자신을 탄핵하지 못하도록 술수도 썼다. 나중에는 숭문문 세무 감독 등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뇌물을 모으는 등의 엄청난 횡포를 부렸다.
또한 영국의 동인도 회사와 밀무역을 하여 엄청난 은화를 벌어들었다. 광동 지방에서 무역을 하는 서양상인들은 그에게 뇌물을 바치지 않으면 되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저택 앞은 언제나 허신을 배알하러 온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루었다. 젊었을 적 건륭제는 부패를 엄단했지만, 입 안의 혀처럼 구는 화신이 부리는 전횡에 대해서는 알아도 모르는 척했다. 화신이 건륭제가 원하는 일이면 모든 것을 해결해주었기 때문이었다.

2.3. 몰락


그러나 화신의 권력도 오래가지 못했다. 특히 건륭제 사후에야 비로소 화신의 상상을 초월하는 부정축재와 비리가 낱낱이 밝혀졌다. 가경 4년(1799) 건륭제가 사망하여 비로소 가경제가 실권을 잡자, 새 황제는 눈엣가시였던 화신을 건륭제의 장의도감(황제의 국상을 책임지는 직위)으로 두었다 파직시킨 뒤, 스무 가지 죄목을 들어 체포하여 가산을 모두 몰수했다. 가경제는 그를 능지처참하려 했으나 이복누이 고륜화효공주(화신의 며느리)의 간청을 받아들여 스스로 목을 매 자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결국 화신은 제 뜻과 상관없이 목을 매달아 자결했다.
화신의 몰수된 재산은 어마어마했는데 그 재산은 청나라의 '''15년간 재정 수입의 총액'''과 맞먹을 정도로 많았다고 한다. 청대의 화폐는 은이었으며, 은과 금의 교환비 역시 당시에는 지역마다 크게 달랐기 때문에[6] 현대 가치로 환산한다면, 계산의 기준에 따라 다르겠지만 포보스 기사에서는 화신의 재산을 1320억 달러로 추산했다.
가경제는 화신에게서 몰수한 재산을 자신의 내탕금으로 꿀꺽 삼켰다. 이 때문에 민간에서 "화신이 넘어지니 가경이 배부르다."(和珅跌倒,嘉慶吃飽) 하는 말까지 나왔다. 현대에서는 화신이 황제의 금고 관리인이라고 추정한다.

3. 여담


건륭제의 부마가 된 화신의 장남 풍신은덕은 화신이 실각할 때 파직당했으나, 백련교도의 난 진압을 계기로 복직에 성공했다. 그러나 오래 살지는 못하고 가경 15년(1810) 서른여섯 살에 질병으로 사망했다. 아내 고륜화효공주는 이후 십여 년을 더 살다가 도광 3년(1823) 마흔아홉 살에 사망했다.
[1] 생원과가 이렇게 경전 암기를 평가하는 시험으로 이방원처럼 여러 사람이 이렇게 경전 암기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화신이 특별하게 보였던 것은 만주인들은 이러한 유학 소양이 없더라도 가문의 도움을 받아서 고위직에 나아갈 수 있었음에도 그가 유학적 소양을 갖추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것과 별개로 중원 입관 이후의 청나라 황족들은 기본적으로 고급교육을 받았기에 한족 왕조 황족들 못지 않게 유학 같은 학문에서 소양을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2] 열 번 원정을 나가 모두 승리한 늙은이라는 뜻이다.[3] 상납한 금액에 따라 죄를 경감하기에 많이 바칠수록 죄도 경감되거나 사면받을 확률이 높아지기에, 벼슬아치들에게 사면을 받고 싶다면 앞다투어 백성들의 고혈을 쥐어짜라고 권장하는 격이다.[4] 건륭제는 건륭 35년(1770)에도 7번째 공주인 영귀비 위가씨(훗날의 효의순황후) 소생 화정공주(和靜公主)에게 고륜 칭호를 내린 적이 있다.[5] 단, 건륭 60년(1795) 고산패자(固山贝子: 황족 애신각라씨만 봉작되는 작위)에 진봉되고, 다음해에 사망하면서 가용군왕(嘉勇郡王)으로 추봉되어 (황제를 제외하고) 청나라 시기를 통틀어서 최고의 지위에 오른 부찰 복강안은 제외하고 말이다.[6] 특히 중국은 금의 가치가 타 지역에 비해 낮고 은의 가치가 높아서, 유럽 지역에서 40~50배 정도이던 교환비가 중국에서는 10배 정도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