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키포로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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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니키포로스 2세(Νικηφόρος Β΄)'''
'''휘'''
니키포로스 포카스(Νικηφόρος Φωκᾶς)
'''생몰년도'''
912년 ~ 969년 12월 11일
'''재위 기간'''
963년 8월 16일 ~ 969년 12월 11일
1. 소개
2. 즉위 이전
2.1. 배경
2.2. 초기 생애
2.3. 정복 활동
2.3.1. 배경
2.3.2. 킬리키아 수복
2.3.3. 크레타 탈환
2.4. 후기 경력
3. 황제로 즉위한 니키포로스 포카스
3.1. 동방 전쟁 : 사라센인의 저승사자
3.2. 서방 전쟁 : 외교 실책으로 제국의 국력을 낭비하다
3.3. 모두가 싫어하는 황제
4. 황제의 최후
5. 참고 문헌과 자료


1.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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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기에서의 묘사
1961년에 그리스에서 크레타 탈환 1000주년 기념으로 만든 니키포로스 우표
서기 963년부터 969년까지 재위한 동로마 제국 제94대 황제. 황제로 즉위하기 전에는 제국 최고의 명장으로서 외적들을 물리치고 크레타 섬을 되찾아 수많은 인민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황제로 집권한 후에는 외교적으로 여러 실책을 저질렀다. 수도원에 섵불리 세금을 메기다가 종교계의 반감을 샀으며, 그 밖에도 여러 세금 인상 등의 실정과 거듭되는 전쟁으로 신망을 잃었고 결국 조카에게 살해당했다.

2. 즉위 이전



2.1. 배경


포카스(Phokas)는 9세기 후반 등장한 카파도키아의 유력한 군인 가문이었다. 포카스 가문은 9세기 후반 주요 군관구장과 중앙군 총사령관(Domestic of Schools)을 역임한 대(大) 니키포로스 포카스를 시작으로 그 아들인 레온과 대(大) 바르다스, 그리고 대 바르다스의 아들인 니키포로스, 레온, 콘스탄티노스에 이르기까지 제국군의 수많은 장성들을 배출하였다. 이들은 마케도니아 왕조의 비호 아래 중앙군 총사령관과 동부 전선의 주요 관구장으로 복무하면서 군대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콘스탄티노스 7세 재위 초기, 포카스 가문과 대립 관계였던 로마노스 1세 등 라카피노스 일족이 제국의 실권을 차지하자 잠시 영향력을 상실하는 일도 있었으나, 콘스탄티노스 7세가 실권을 되찾으면서 영향력을 회복하였다.

2.2. 초기 생애


니키포로스 2세는 위에서 언급한 대 바르다스의 장남 니키포로스다. 어머니는 아나톨리아의 또 다른 유력 군인 가문인 말레이노스(Maleinos)의 일원이었다. 젊은 시절 스테파노(Stephano)와 결혼했으나 스테파노는 니키포로스가 명성을 얻기 전 죽었다. 스테파노와의 사이에서 바르다스라는 아들을 두었지만 바르다스도 모친과 마찬가지로 요절하였다. 스테파노가 사망하자 죽을 때까지 금욕하기로 맹세했다.
니키포로스는 이른 나이에 군대에 입대했다. 그의 뛰어난 자질은 그의 친구와 적 모두 인정했다. 그는 엄청난 힘과 냉철하고 두려움 없는 태도, 기회를 포착할 줄 아는 안목을 지닌 탁월한 군인이었고 휘하 병사들을 잘 배려한 탓에 그를 따르고 존경하는 병사들이 많았다. 군대 바깥에서는 오로지 종교에 관심을 집중했고 수도사처럼 검소하게 생활하면서 성직자들과 대화하고 서신을 주고받았다.
콘스탄티노스 7세가 라카피노스 가문으로부터 실권을 되찾은 945년, 포카스 가문은 다시 국방의 일선에 복귀하였다. 이는 포카스 가문이 콘스탄티노스 7세의 실권 회복을 조력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자연스럽게 니키포로스도 요직에 보임되었다. 니키포로스는 동부군의 최고 요직 중 하나인 아나톨리콘 군관구장으로 임명되었다. 동시에 아버지인 대 바르다스는 중앙군 총사령관에, 동생들인 레온과 콘스탄티노스는 마찬가지로 요직인 각각 카파도키아와 셀레브키아의 군관구장으로 임명되었다.
955년 노인이며[1], 최근 여러 차례의 전투에서 패전을 기록한 아버지를 대신하여 중앙군 총사령관에 제수되었다. 이 해는 기록적인 해라고 볼 수 있는데, 제국이 공격적인 대외 정복 활동을 본격적으로 개시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니키포로스 포카스가 있었다.

2.3. 정복 활동



2.3.1. 배경


제국은 9세기 후반부터 이슬람 세계와의 접경지대인 아르메니아 일대에서 수백 년 전 상실한 영토에 대한 공세를 개시하였다. 지속적이고 강경한 원정이 이어졌고, 그 결과 934년 멜리티니(Melitene)를 수복할 수 있었다. 멜리티니는 유프라테스 강 상류에 위치한 요새로, 유프라테스 강 상류 유역과 북부 시리아, 나아가 타우로스 산맥 전역을 관제할 수 있는 입지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멜리티니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인지한 제국 정부는 멜리티니 일대를 강화하였다. 지역의 이슬람 인구는 추방되거나, 노예화되거나, 강제 개종을 당하거나, 징병되어 제국의 다른 지역으로 전출되었다. 이슬람 인구가 떠난 자리는 그리스인, 아르메니아인, 기독교도 시리아, 아랍인 등이 식민되었고, 멜리티니 자체는 견고하게 요새화되었다. 멜리티니 정복 이후에도 동방 원정은 계속되었다. 936년에는 사모사타(Samosata)가, 940년에는 아르사모사타(Arsamosata)가, 949년에는 테오도시우폴리(Theoudosiopolis)가 점령되었다. 제국의 영역은 유프라테스 강 상류 전역과 서아르메니아 일대로 확장되었다. 이를 저지하기 위해 알레포의 토후(Emir)이자, 함단(Hamdan) 왕조의 군주인 사이프 알 다울라(Sayf al-Dawla)가 제국에 맞서 상당한 수준의 성공을 거두기도 했으나(함단 전쟁), 950년대에도 여전히 유프라테스 상류에서 제국군을 축출하는 데는 실패한 상황이었다.
그 결과, 부유하고 유력한 이슬람 도시들이 밀집한 킬리키아 평원 일대는 이제 동로마 제국의 위협을 두 방면에서 맞닥뜨리게 되었다. 이전에는 타우로스 산맥을 횡단하는 좁은 협로인 킬리키아 관문, 단 한 곳에서만 위협을 받았다면 이제는 타우로스 산맥을 우회할 수 있는 유프라테스 강 상류 유역에서의 위협까지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킬리키아는 7세기 중반 이슬람 제국에 정복된 이후 이슬람 세력의 대(對) 동로마 제국 전선의 전초기지로 기능했다. 특히 아바스 왕조타르소스(Tarsos)를 중심으로 아다니(Adane), 예르마니키아(Germanikeia), 모프수에스티아(Mopsuestia), 아다타(Adata) 등의 도시들을 동로마 제국의 시리아 공격을 막는 방벽이자 킬리키아 관문을 통해 제국령 아나톨리아를 약탈하는 전초기지로 구축했다. 킬리키아에는 이슬람 세계 전역에서 대(對) 기독교 전선에 투신하기를 원하는 무슬림 전사들이 몰려들어 영지를 하사받고, 마찬가지로 이슬람 세계 전역에서 기부금의 형태로 유입되는 막대한 자금을 보조 받았다. 이와 같은 전폭적 지원의 배후에는 아바스 왕조가 있었다.
알레포의 군주인 사이프 알 다울라가 북부 시리아를 확보, 킬리키아 도시들을 복속시킴으로써 바그다드의 칼리프가 킬리키아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자 상황은 바뀌었다. 이슬람 세계의 중심에서 유입되는 병력이나 기부금이 크게 감소했다. 자연스럽게 킬리키아 도시들은 호전적인 성향을 버리고, 보다 실용적인 것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전쟁보다는 제국과의 무역을 원했고, 평화를 원했다. 이와 같은 반응은 킬리키아의 도시들은 물론, 안티오히아에서도 나타난 것이었다. 심지어 이들은 제국 측의 접근에도 우호적이었다. 그러나 이 도시들은 제국과의 관계를 쉽게 개선할 수 없었다. 통제가 다소 느슨하기는 하나 명목상 그들의 주군인 사이프 알 다울라는 여전히 제국에 호전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함단 왕조의 통제를 함부로 벗어나기도 곤란했다. 어쨌거나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도시들의 자주성을 지켜주는 것은 사이프였다.
함단 왕조의 사이프 알 다울라는 자신의 토후국을 이슬람 세계의 정치적 불안정으로부터 건사하기 위해 동로마 제국과의 성전(聖戰)을 이용하였다. '아바스 왕조의 수호자이자 검'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을 이끌어나가는 모습은 사이프에게 상당한 명성을 안겨주었다. 사이프는 지속적으로 킬리키아와 북부 메소포타미아로 진출하는 제국군에 대항하였으며, 제국 영토로 대군을 이끌고 약탈 행진을 벌이기도 하였다. 작은 토후국의 군주치고 사이프의 분전은 나름 효과적이었다. 비록 제국 영토에 직접적인 타격을 안기지는 못하고 아다타와 예르마니키아 등 킬리키아의 도시들이 제국군의 약탈에 노출되기는 하였으나, 사이프는 일련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에 동로마 제국은 앞서 언급했듯 955년 중앙군 총사령관을 대 바르다스에서 니키포로스 포카스로 교체하였다.

2.3.2. 킬리키아 수복



2.3.3. 크레타 탈환


959년, 니키포로스와 동생 레온 포카스는 황제 로마노스 2세의 명령을 받들어 각각 동부와 서부 군대에 배치되었다. 960년, 니키포로스는 크레타를 정벌하기 위해 2만 7천명의 해군 및 선원들을 징집하고 5만 명의 군대를 태우기 위한 308척의 함대를 소집했다. 장관 요세프 브링가스의 권고에 따라, 니키포로스는 이슬람교도인 크레타 섬의 에미레트가 이 원정을 감독하게 했다. 니키포로스는 7월 13일에 성공적으로 그의 함대를 크레타에 상륙시켰고 아랍군의 반격을 격파했다.
그는 곧 크레타 최대의 도시 칸닥스 요새를 9개월 동안 포위 공격했다. 이 끈질긴 포위 공격 끝에, 칸닥스는 마침내 961년 3월 6일 함락되었고 요새에 피난 가 있던 여자들은 모두 윤간당하고 아이들은 모조리 살해당했다.[2] 이로서 크레타 섬을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탈환하는 데 성공한 니키포로스는 콘스탄티노플로 당당하게 돌아왔다. 그러나 로마노스 2세와 환관 요세포스 브링가스는 그를 위협적인 존재로 여기고 개선식을 치뤄주지 않고 원형 경기장에서 시민들에게 갈채와 환영을 받는 것만 허용했다.

2.4. 후기 경력


니키포로스는 잘 갖춰진 그의 군단과 함께 제국의 동방 영토로 진군해 동생 레온 포카스와 함께 킬리키아로 진군했다. 962년 2월, 그는 아나자르보스를 점령했고 3월에 킬리키아의 성곽 도시 55개를 되찾았다. 그후 부활절에 잠시 휴식을 취한 그의 군대는 알렉산드레타 근처의 시리아 성문을 통과하여 도상의 촌락들을 불태우고 약탈했다.
몇달 뒤, 그들은 알레포를 포위하여 알레포의 궁전 알할라바를 약탈해 보물을 모조리 턴 뒤 궁궐을 불태웠다. 또한 군대는 알레포 시를 습격해 아랍 역사가들의 표현에 따르면 "지칠 때까지 살육을 멈추지 않았다." 이때 니키포로스는 39만 디나르의 은, 낙타 2천 마리, 노새 1400마리, 수많은 아랍산 종마들을 획득했다.

3. 황제로 즉위한 니키포로스 포카스


963년 3월 15일, 로마노스 2세가 26세의 젊은 나이에 급사했다. 근대와 현대의 역사가들은 젊은 황제가 과도한 음주와 무분별한 성샐활을 보내다가 건강을 망친 것으로 판단하지만, 어떤 이들은 황후 테오파노가 그를 독살했다고 의심한다. 테오파노는 지성적이고 야심이 많은 여성으로서 악명이 높았고 후기의 역사가들은 그녀를 목표 달성을 위해서라면 무자비한 여성으로 묘사했다. 하지만 그녀가 정말로 남편을 독살했음을 입증할 단서는 없다.
로마노스 2세는 그의 두 아들 바실리오스와 콘스탄티노스를 공동 황제로 선정했다. 로마노스 2세가 죽었을 때, 바실리오스는 5살이었고 콘스탄티노스는 겨우 3살이었으므로 테오파노는 섭정으로 지목되었다. 그러나 테오파노는 혼자서 지배할 수 없었고 로마노스의 수석 참사관이자 환관 요세프 브랑가스와 함께 힘을 합쳐야 했다. 브랑가스는 자신의 권위를 지키고자 했으며 니키포로스의 힘을 줄이려고 노력했다. 브랑가스는 니키포로스가 군대와 귀족의 지지를 받아 왕좌를 주장할까봐 두려워했다.
브링가스는 뒤늦은 개선식을 벌이며 백성들의 찬사를 받는 니키포로스를 제거하기 위해 황궁으로 불러들여 죽이려 했다.그러나 니키포로스는 이 환관의 의도를 눈치채고 소피아 대성당에 가서 자신을 죽이려는 음모가 있다고 고발했다. 이에 시민들은 들고 일어났고 결국 브링가스는 원로원이 자신의 동의도 없이 니키포로스를 사령관에 유임시키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후 아나톨리아로 돌아간 니키포로스는 테오파노와 밀약[3]을 맺고 킬리키아 원정에 대비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군대를 소집한 뒤 콘스탄티노플로 진군했다.
이에 브링가스는 니키포로스의 부하 로마노스 쿠르쿠아스와 요안니스 치미스케스에게 서신을 보내 그들의 상관을 배신하는 대가로 각각 동방과 서방의 최고 사령관직을 주겠다고 제의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이 서신을 니키포로스에게 보이며 결단을 촉구했고, 결국 니키포로스는 963년 7월 2일 카이사레아에서 황제를 자칭했다. 그후 그는 콘스탄티노플에 자신을 공동 황제로 받아들이라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자 브링가스는 콘스탄티노플의 수비를 강화하고 니키포로스의 아버지 브랜다스를 인질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이 들고 일어나 브랜다스를 잡으려는 이들을 공격해 죽여버렸고, 결국 니키포로스는 콘스탄티노플에 무혈 입성해 제국의 황제로 떠받들어졌다.

3.1. 동방 전쟁 : 사라센인의 저승사자


니키포로스는 964년 4만의 군대를 일으켜 965년 여름에 키프로스를 점령했다. 또한 킬리키아의 정복을 본격적으로 감행하여 타르수스를 포위해 2주일만인 8월 16일에 공략하고 트리폴리로 진군하면서 주변의 대부분의 요새를 공략했다. 또한 알레포를 보호령으로 삼았고 안티오키아에서 알렉산드레타로 가는 길에 있는 바드라드 요새에 1500명의 병사들을 배치했다. 이렇듯 니키포로스는 황제 즉위 후에도 아랍인들에 대한 일방적인 공세를 지속해 "사란센인의 저승사자"라는 별칭이 부여되었다.

3.2. 서방 전쟁 : 외교 실책으로 제국의 국력을 낭비하다


동방에서 연이은 승리를 거둔 것에 자만해진 탓일까? 그는 서방과의 외교를 그르치는 바람에 위기를 초래한다. 965년 초, 불가리아는 일찍이 제국과 맺은 조약에 따라 제국의 공물을 받기 위해 대사를 파견했다. 그러나 니키포로스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대사 앞에서 불가리아 백성들을 혐오스럽고 더러운 거지 민족이라고 비난하고 불가리아 왕은 짐승 가죽 옷이나 입는다고 욕한 뒤 내쫓았다. 그후 니키포로스는 군대를 일으켜 불가리아 변방으로 쳐들어가 국경 요새 몇 곳을 함락시켰다. 이러한 그의 행보는 당장엔 제국의 위세를 드러내는 데 성공했지만 향후 수십년간 제국이 불가리아의 침략으로 몸살을 앓게 만든 근시안적인 정책이었다.
니키포로스는 뒤이어 시칠리아에서도 문제를 일으켰다. 962년 이슬람군이 시칠리아 섬의 로마 요새들 중 하나인 토르미나 시를 점령했다. 이에 시칠리아에 있는 마지막 주요 로마 요새인 로메타는 니키포로스 황제에게 구원을 호소했다. 니키포로스는 곧 4만여 명에 달하는 대군을 일으켜 시칠리아로 파견했다. 그러나 로마군은 해상 전투에서 대패했고 로메타는 곧 이슬람 군대에게 함락되어 시칠리아 전역이 이슬람군의 수중에 넘어가고 말았다. 그후 967년, 니키포로스는 파티마와 시칠리아에서의 적대 행위를 종식하는 목적하에 평화 협정을 체결했다. 당시 파티마는 이집트를 침공할 준비를 하고 있었고 동로마 제국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의 관계가 악화되고 있어서 시칠리아에서 다툴 여력이 없었기에 평화 협정 체결이 가능했다.
한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1세는 남부 이탈리아에 대한 자신의 영유권을 확보하기위해 크레모나 주교 리우트프란트를 콘스탄티노플로 파견했다. 그러나 니키포로스는 오토가 감히 황제를 칭한 것에 열받은 데다 남부 이탈리아를 멋대로 넘보는 것도 화가 났기에 사신을 제대로 대접하지 않고 급기야 억류하기까지 했다. 그후 양측은 수차례 무력 충돌을 벌였으나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4]

3.3. 모두가 싫어하는 황제


니키포로스의 인기는 주로 그의 정복 전쟁에 바탕을 두었다. 그래서 니키포로스는 군대에 할당한 막대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엄격한 경제 정책을 실행했다. 그는 성직자의 면책권을 축소시키고 고행 처분을 자주 내렸으며 새로운 수도원의 설립을 금지했다. 또한 제국의 중앙 집권 제도를 추진하는 동시에 세금을 과도하게 부과해 대중의 인기를 잃었고 곳곳에서 폭동이 발발했다. 또한 니키포로스는 신학적인 문제에서 교회와 마찰을 빛었다. 그는 교회가 사라센인과의 전투에서 죽은 병사들을 순교자의 위치로 높이기를 바랐다. 그러나 교회는 이 요구에 난색을 보였고 황제가 성직 서임권을 행사하는 것에 불만을 품었다.
그러던 967년 부활절에 대형 참사가 터졌다. 이날 아르메니아 경비병과 트라키아 선원들 간의 다툼이 있었는데 이것이 대규모 폭동으로 번져 수십명이 부상당했고 일부는 치명상을 입었다. 그리고 그날 오후 원형 경기장에서 부활절 경주가 시작되려 할 때 황제가 자신의 불쾌함을 표시하기 위해 관중 가운데서 아무나 골라 죽이려 한다는 소문이 떠돌았고 시민들은 불안에 몸을 떨었다. 그리고 휴식 시간에 그는 무장 병사들에게 경기장으로 내려가라는 신호를 보냈다. 병사들이 돌연 경기장에 내려가는 걸 본 시민들은 소문대로 황제가 자신들을 죽이려 한다고 판단해 앞다퉈 달아났다.
그 결과 아비규환이 일어났다. 수천 명의 군중들이 출구로 몰리다가 발에 깔려 죽임을 당했다. 그러다가 시민들은 경기장의 병사들이 가만히 있고 황제도 황제석에 차분하게 앉아있다는 걸 깨달아 비로소 평온을 되찾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니키포로스가 이 사태의 책임이 있다고 비난했다.
두달 후인 예수 승천 대축일에 니키포로스는 성모 성당에서 아침 기도를 마친 뒤 거리를 지나가던 중 부활절 때 가족을 잃은 것에 격노한 군중들에게 포위되었다. 하지만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눈길을 앞에 고정시킨 채 군중 사이를 뚫고 지나갔다. 이튿날 아침엔 어느 모녀가 황궁 근처의 저택 지붕 위에서 황제를 향해 벽돌을 던졌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화형에 처해졌다.
이렇듯 백성들의 미움을 한 몸에 받게 되자 황제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는 황궁의 담을 튼튼히 보강하라는 명을 내리고 가족과 함께 부콜레온의 요새에 틀어박힌 채 나오지 않았다. 그는 병적으로 종교에 빠져들었고 침대에서 잠을 자지 않고 침실 한 귀퉁이에 깔아 놓은 표범 가죽 위에서 잤다. 이렇듯 공포에 몸을 떨던 그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었으니......

4. 황제의 최후


니키포로스가 인기를 잃고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있을 무렵, 황후 테오파노는 황제의 부하이자 외조카이며 빼어난 미남이었던 요안니스 치미스키스와 사랑에 빠졌다. 니키포로스는 황후가 자신의 옛 동료와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지만 요안니스가 위협적인 존재라고 판단해 965년 말에 군대 사령관직을 박탈하고 아나톨리아의 자기 영지로 돌려보냈다. 이에 테오파노 황후는 남편에게 요안니스에 대한 처벌이 과하다고 설득했고 니키포로스는 이에 흔들려서 요안니스를 불려들었지만 대신 칼케돈에 있는 그의 집에만 머물고 콘스탄티노플에 올 때는 별도로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조건을 걸었다.
그후 요안니스는 한밤 중에 해협을 건너 황궁의 외딴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는 테오파노 황후와 만나 정을 나누었다. 그후 두 사람은 니키포로스를 죽이자는 음모를 꾸몄다. 이 음모에는 지난날 안티오키아를 포위 공격하다가 황명에 불순종했다는 이유로 해임당한 미카일 부르체스도 포함되었다. 그 후 음모가들은 여자로 변장하고 옷 안에 칼을 숨긴 채 황후를 만나러 온 척하면서 황궁의 규방으로 들어갔다. 황후는 그들을 여러 작은 방에 분산시키고 신호가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게 했다.
969년 12월 11일, 날씨가 몹시 춥고 눈이 많이 내리며 바람이 거세게 몰아치는 날이었다. 음모가들은 황궁을 떠나 보스포루스를 건너 황제가 있는 요새로 가려 했지만 폭풍이 워낙 거세 건너기가 쉽지 않았다. 요안니스는 친구 세 명과 함께 칼케돈에서 배를 타고 죽을 고생을 하며 해협을 건너 밤 11시에 요새 바로 앞에 도착했다. 이윽고 황후 처소의 창문에서 밧줄 하나가 소리없이 내려오자, 음모자들은 한 명씩 차례로 밧줄을 타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고 대기하고 있던 환관 한 명이 황제의 침실로 안내했다.
음모가들이 방 안으로 들이닥치자, 바닥에서 표범 가죽을 깔고 자고 있던 니키포로스는 인기척에 잠을 깨고 일어나려 했다. 그 순간 레온 발란테스라는 자가 그를 칼로 찔렀다. 이 칼은 니키포로스의 얼굴을 스쳤고 황제는 피투성이가 된 채 비명을 지르고 큰 소리로 성모 마리아에게 도움을 청하며 침대 발치로 기어갔다. 그러나 요안니스 치미스키스는 그를 침대 바깥으로 끌어내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 후 음모가들은 황제의 부정과 배은망덕을 비난하고 그의 몸을 무자비하게 걷어차면서 머리털과 수염을 잡아뜯었다. 이윽고 한 사람이 황제의 턱을 부수었고 다른 사람은 칼집으로 그의 앞니를 후려쳤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길고 굽은 칼이 황제의 목숨을 끊었다. 그 후 자객들은 니키포로스의 머리를 잘라 경비병들이 저항할 의지를 상실하게 만들고 시신을 창문 아래에 내던졌다. 이리하여 크레타 탈환의 영웅이자 사라센인의 저승사자였던 니키포로스는 아내와 외조카의 배신으로 처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그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었다고 한다.
"니키포로스여, 그대는 모든 것을 정복했으나 여자만은 정복하지 못하였도다."

5. 참고 문헌과 자료


  • 워렌 트레드골드 : <비잔틴 제국의 역사>
  • 게오르크 오스트로고르스키 : <비잔티움 제국사>
  • 존 줄리어스 노리치 : <비잔티움 연대기>

[1] 878년생으로, 968년 90세의 나이로 사망[2] 사실 크레타가 애초에 이슬람 세력에게 함락당할 때도 같은 일이 있었긴 했지만. 게다가 포위가 이렇게 오래 지속되는데 항복하지 않아 점령군도 고생을 많이 해서 바짝 약이 올라 있었고 때문에 살해를 말리려던 니키포로스의 명령은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3] 바실리우스와 콘스탄티누스의 권리를 보호해주는 대신 그 자신도 공동 황제가 된다는 약속이었다.[4] 당시 리우트프란트가 남긴 기록은 중요한 사료로 취급되고 있으나, 당시 그가 당한 박대 때문인지 동로마의 풍습을 야만적이라고 비하하는 내용으로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