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티노스 7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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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5년에 제작된 조각상. 왼쪽이 콘스탄티노스 7세이고 오른쪽이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리스어 Κωνσταντῖνος Ζ΄ Πορφυρογέννητος, Kōnstantinos VII Porphyrogennētos
생몰 : 905년 5월 17일 / 18일 ~ 959년 11월 9일
재위 기간 : 913년 6월 6일 ~ 959년 11월 9일
1. 개요
2. 생애
2.1. 초기
2.2. 니콜라오스 총대주교의 전횡
2.3. 어머니의 섭정
2.4. 로마노스 1세와 아들들
2.5. 마침내 단독 황제가 되다
2.6. 황제 콘스탄티노스 7세
2.6.1. 내치
2.6.2. 외치
2.7. 사망
3. 참고 자료


1. 개요


동로마 제국의 황제. 레온 6세와 조이 카르보노프시나의 아들. 913년 6월에 7살의 나이로 즉위해 니콜라오스 총대주교와 어머니의 섭정을 받다가 920년 로마노스 1세와 공동 황제가 되었다. 이후 장인 로마노스 1세와 그의 아들들에게 밀려 명목뿐인 황제로 전락했으나 945년에 단독 황제가 되어 959년까지 제국을 통치했다.

2. 생애



2.1. 초기


콘스탄티노스는 906년 5월 17일 레온 6세의 4번째 아내인 조이 카르보노프시나의 품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제국의 유명한 해군 제독 이메리오스 장군의 조카 딸이었다. 당시 레온 6세는 후계자 생산을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었지만 사혼은 정교회에서 매우 중대한 죄악으로 간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놓고 결혼하지 못하고 조이를 정부로 삼고 황궁의 비밀 장소에서 아이를 낳게 했다. 아이는 이듬해 1월에 세례 성사와 견진 성사를 받아 콘스탄티노스라는 이름을 받았고, 레온 6세가 조이와의 결혼식을 강행해 황후로 삼은 후 908년 5월에 이를 공식화한 뒤 아들을 공동 황제로 삼으면서 완전한 후계자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레온 6세가 사망한 뒤 동생 알렉산드로스 2세가 즉위했을 때, 그는 위기에 몰렸다. 형을 매우 싫어했던 알렉산드로스는 조이 황후를 유폐보내고 콘스탄티노스를 거세하려고 했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로 복귀했고 역시 조이 황태후를 싫어하긴 했지만 그래도 황위 계승자를 거세할 수는 없다고 판단한 니콜라오스 총대주교가 결사 반대한 덕분에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했다. 그 후 알렉산드로스는 913년 6월 6일에 사망했고 콘스탄티노스는 비로소 단독 황제가 되었다. 하지만 이 때 나이가 겨우 7살이었기 때문에 알렉산드로스가 죽기 전에 임명한 섭정단이 그를 대신해 제국을 통치했다.

2.2. 니콜라오스 총대주교의 전횡


콘스탄티노스가 즉위하고 섭정단이 통치를 대리하게 되었지만, 막상 황제의 어머니이자 아우구스타인 조이 황태후는 섭정단에 끼지 못했다. 이에 그녀는 강력히 항의했지만, 섭정단의 대표 니콜라오스 총대주교는 그녀를 체포해 삭발한 후 페트리움의 성 에우페미아 수녀원에 추방해버렸다. 그리고 그녀의 이름도 안나 수녀라는 소박한 이름으로 바꿔 부르게 했다. 이후 군사 장관인 콘스탄티노스 두카스[1]가 니콜라오스 총대주교와 밀약을 맺고 쿠데타를 기도했다. 그는 트라키아의 주둔지에서 동쪽으로 행군하여 밤중에 소수의 병력만 거느리고 수도에 들어왔다. 그가 보기에 궁전의 대문은 내통자들에 의해 활짝 열려 있을 테니 이 정도 병력이면 충분했다. 그러나 섭정단의 한 사람인 마기스테르 요안니스 엘라다스는 그가 올 것을 예상하고 민병대를 급히 모집하고 대기하고 있다가 두카스 일행이 오자 급습했다. 두카스는 전투 도중 자신의 아들인 그리고리오스를 비롯한 병사 몇 명이 죽자 달아나려 했지만 그가 탄 말이 젖은 포도 위에 미끄러졌다. 그가 땅바닥에 쓰러지자, 수비병 한 명이 한 칼에 그의 머리를 베었다.
하지만 니콜라오스 총대주교는 자신이 두카스와 음모를 꾸몄다는 것을 부인했고 두카스와 연루된 혐의가 있는 모든 이들을 가혹하게 다뤘다. 많은 이들이 처형되었고 그들의 시신은 장대에 꽂혀 보스포러스 해협아시아 쪽 해안에 전시되었다. 매질과 실명의 형벌을 당한 사람도 많았고 하기아 소피아로 피신한 사람들도 끌고 나와 삭발시키고 수도원으로 추방했다. 두카스의 아내는 가문이 소유한 파플라고니아의 외딴 영지로 유배되었고 두카스의 또 다른 아들은 거세형을 당했다. 섭정단이 너무 무자비하지 않냐고 항의할 때에야 그는 비로소 유혈극을 중단했다.
두카스의 정변이 일어난 지 두달 후, 불가리아 국왕 시메온이 대군을 이끌고 콘스탄티노플을 침공했다. 그의 군대는 마르마라 해에서 황금뿔 만의 상류 구역까지 이어지는 육로 성벽을 따라 세운 진지의 길이가 6km에 달할 만큼 거대했다. 그는 수도로 이르는 육로를 차단하고 주변 촌락들을 철저하게 파괴하겠다고 으름장 놓으면서 햅도몬 궁전을 장악한 뒤 전령을 보내 협상할 의사가 있음을 통지했다. 이에 니콜라오스는 시메온의 두 아들을 수도로 초청해 콘스탄티노스가 참석한 가운데 블라케르나이 궁전에서 성대한 연회를 열었다. 이후 그는 비밀리에 헵도몬 궁전에 가서 시메온을 찾아가 은밀히 논의했다. 시메온은 그동안 밀린 공물을 보내라고 요구했고 콘스탄티노스와 자신의 딸을 결혼시킬 것을 제안했다. 니콜라오스가 이 제안을 받아들이자, 시메온은 불가리아로 철수했다.
그러나 니콜라오스가 자신들과 의논도 없이 시메온과 그런 밀약을 맺었다는 것을 알게 된 섭정단은 분노했다. 가뜩이나 조이 황태후를 유페보내고 두카스 사태를 잔혹하게 처리한 것만으로도 분개할 일인데 시메온의 딸을 황제와 결혼시키는 중차대한 일을 자기 멋대로 처리했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더구나 시메온은 황제의 장인이 된 후 장차 공동 황제로 즉위할 속셈이었다. 만약 이 일이 성사된다면 불가리아 국왕이 제위까지 얻게 되므로 제국은 불가리아에게 넘어가고 말 것이다. 이런 상황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섭정단은 914년 2월 정변을 일으켜 니콜라오스를 실각시키고 수도원에 유폐되었던 조이 황태후를 복귀시켜 섭정을 맡게 했다. 또한 황후의 옛 친구들과 조언자들 역시 원직에 복귀했다. 이후 니콜라오스는 정치 문제에 절대로 뛰어들지 않겠다는 약속을 걸고 총대주교직을 유지했다.

2.3. 어머니의 섭정


우여곡절 끝에 섭정을 맡게 된 조이 황태후는 먼저 아쇼트를 아르메니아의 왕으로 즉위시키고 그를 콘스탄티노플로 초청하여 아르메니아로 원정 가는 문제를 논의했다. 이듬해 봄, 아쇼트는 제국군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갔다.페르시아아미르 유수프는 완강하게 저항했지만 중과부적으로 밀렸고, 아르메니아의 서부 전체와 동부 대부분이 아쇼트의 수중에 들어왔다. 이후로도 4년 간 더 전쟁이 벌어졌지만, 대체로 아쇼트가 아르메니아에서 우세를 확보했고 조이는 첫번째 원정을 승리로 장식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또한 제국군은 타르소스에서 쳐들어온 사라센군을 격파했고 남이탈리아의 랑고바르디아 테마에서 사라센군을 궤멸시켰다.
915년 9월, 시메온은 니콜라오스 총대주교가 실각하고 조이 황태후가 섭정을 맡게 되었으며 자기 딸과 콘스탄티노스 황제를 결혼시키는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접하자 대군을 이끌고 아드리아노플로 진군해 손쉽게 현지 총독의 항복을 받아냈다. 그러나 조이 황태후가 도시를 수복하기 위해 대군을 파견했다는 급보를 접하자, 이렇게 빨리 맞대응할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던 시메온은 황급히 철수했다. 이후 시메온은 2년 동안 테살리아와 이피로스의 크고 작은 도시들을 수시로 공략했다.
그러다가 917년에 시메온의 군대가 트라키아로 돌아가자, 조이 황태후는 선제 공격을 하기로 결심했다. 크리미아 케르손의 군사 총독 요안니스 보가스는 황태후의 밀명을 받들어 한때 시메온의 동맹 세력이었던 페체네그족을 매수하여 북쪽에서 불가리아를 침공하게 했다. 동로마 함대는 페체네그족을 다뉴브 강 건너편으로 수송해줄 것이며, 그동안 제국 육군은 콘스탄티노플에서 진군할 것이다. 그러면 대규모 협공에 걸려든 시메온은 강화를 제의하는 것 외에 대안이 없을 터였다.
그런데 사단이 일어났다. 함대 지휘관 로마노스 레카피노스는 요안니스 보가스와 만나자마자 서로 자신의 권한이 우월하다며 심한 말다툼을 벌였다. 그러더니 로마노스가 군대 수송을 거부해버렸다! 이로 인해 페체네그족은 자신들을 수송할 제국 함대가 오기를 기다리다가 지쳐 고향으로 돌아가버렸다. 한편 레온 포카스가 이끄는 육군은 수도를 떠나 흑해 연안을 따라 행군했다. 이들은 불가리아로 진입했다가 8월 20일 새벽에 앙키알로스 항구의 외곽에 진지를 차렸다. 시메온은 이들을 기습해 무자비하게 살육했다. 이날 제국군은 거의 전멸했고 레온 포카스를 비롯한 소수의 병사들만이 가까스로 콘스탄티노플로 귀환했다.
재앙의 소식이 수도로 전해지자, 조이 황태후는 로마노스 레카피노스를 공식 심문에 회부하여 실명형을 선고했다. 하지만 그의 친구들이 중재에 나서 준 덕분에, 로마노스는 간신히 처벌을 면제받았다. 그해 겨울, 시메온이 군대를 이끌고 동부 트라키아를 유린하고 콘스탄티노플 성벽까지 밀어닥치자, 조이 황태후는 다시 레온 포카스에게 군대를 맡겼다. 그러나 그의 군대는 카사시르타이의 서쪽 외곽에서 또다시 시메온에게 완패했다. 하지만 시메온은 콘스탄티노플 성벽을 넘을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불가리아로 철수했다.
한편, 조이 황태후는 두 차례의 참패로 자신의 입지가 위태로워지자 자신과 아들을 지켜줄 후견인을 모색했다. 그녀는 레온 포카스를 황궁으로 불려들어 조언자로 삼았지만 황제의 가정 교사 테오도로스는 레온이 적임자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로마노스 레카피노스에게 보호를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다. 이에 로마노스는 어린 황제를 받들어 모시겠다고 선언하고 함대를 이끌고 콘스탄티노플로 진군했다. 황태후는 그에게 함대를 해산하라고 명령했지만 로마노스는 황태후가 보낸 시종장을 체포했다. 이에 황태후가 해명을 요구하는 사절을 보냈지만, 그들은 돌맹이 세례를 맞고 쫓겨났다.
사안이 심각해지자, 황태후는 부콜레온에서 각료 회의를 소집했다. 그러나 대신들은 그녀에게 등을 돌렸고, 결국 그녀는 아들이 "어머니의 섭정을 끝내고 니콜라오스 총대주교와 옛 섭정단원인 마기스테르 스테파노스에게 공동 섭정을 맡기겠다고 연설하는 걸 지켜봐야 했다. 이튿날 아침 한 무리의 병사들이 조이 황태후를 성 에우페미아 수녀원으로 호송하러 찾아왔다. 하지만 콘스탄티노스가 눈물을 흘리며 호소하자 병사들은 마음이 흔들렸고, 그 덕분에 그녀는 권력만 잃은 채 황궁의 규방에 머물 수 있었다.

2.4. 로마노스 1세와 아들들


919년 3월 25일, 로마노스 레카피노스는 함대를 이끌고 부콜레온으로 와서 해상 대문을 통해 황궁에 들어가 제국의 정권을 장악했다고 선언했다. 한달 후, 그는 자신의 아름다운 딸 헬레나와 콘스탄티노스의 결혼식을 하기아 소피아에서 치르고 그 자신은 바실레오파토르가 됨으로써 황제의 후견인이 되었다. 레온 포카스는 이 소식을 듣고 자신의 근거지인 크리소폴리스에서 반기를 들었다. 그는 제위를 찬탈하려는 바실레오파토르의 손아귀에서 어린 황제를 구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이에 로마노스는 사제창녀를 비밀 첩자로 활용하여 황제의 위조 서명이 있는 문서를 널리 퍼트리게 했다. 그 내용은 콘스탄티노스가 장인에게 전권을 위임했으며, 레온 포카스는 반역자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사제는 곧 체포되었으나 창녀는 임무를 잘 완수해 레온의 병사 수백명이 무기를 내려놓게 만들었다. 레온은 거사가 실패했다는 걸 깨닫고 도망치려 했다가 비티니아의 어느 마을에서 붙잡혀 두 눈을 뽑히고 쇠사슬에 묶인 채 콘스탄티노플로 끌려왔다. 이 가련한 반역자는 그 후 사람들의 조롱비웃음을 받으며 노새를 타고 광장을 돌았다.
920년 여름, 로마노스는 니콜라오스 총대주교의 협조하에 콘스탄티노플에서 교회 회의를 소집했다. 이 회의에서 결혼에 관한 최종적으로 수정된 교회법이 포함된 '토무스 우니오니스(Tomus Unionis)'가 발표되었다. 그 내용에 따르면, 재혼은 완전히 합법적이고 삼혼도 나이 마흔 살 미만의 아이 없는 홀아비의 경우 회개하는 조건 하에 허락되지만 사혼은 어떤 상황에서도 금지되며 사혼을 한 사람은 그 배우자와 영구히 결별할 때까지 파문에 처하는 형벌을 받는다. 이 법은 소급 적용되지 않았지만 레온 6세의 삼혼과 사혼은 훨씬 강도 높은 비난을 받았고 콘스탄티노스의 위상은 훼손되었다.
한달 후, 조이 황태후는 로마노스를 독살하려 했다는 혐의로 기소되었다. 그녀는 다시 머리를 삭발당하고 성 에우페미아 수녀원에 유폐되었다. 그리고 로마노스를 초청했던 테오도로스도 동생 시메온과 함께 체포되어 아나톨리아 북서부로 유배되었다. 이제 콘스탄티노스의 아군은 없었다. 콘스탄티노스는 자신의 15번째 생일 며칠 뒤에 로마노스를 부황제로 임명했고 석달 뒤인 920년 12월 17일에 로마노스의 머리에 황제 관을 씌워줬다. 이로서 로마노스 레카피노스는 로마노스 1세로서 제위에 등극했다.
이제 콘스탄티노스의 운명은 조만간 끝나는 듯했다. 로마노스가 마음만 먹는다면 이 어린 황제를 죽여버리는 건 문제도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로마노스는 그에게 손을 대지 않고 이름 뿐인 황제로서 목숨을 부지하는 걸 허용했다. 그리고 그의 아내이자 로마노스의 딸인 엘레니는 콘스탄티노스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콘스탄티노스의 생명을 부지할 수 있다면 기꺼이 앞장설 각오를 다졌다. 콘스탄티노스는 이 덕분에 무탈하게 성장했다. 그는 몸이 약한 대신 정신력이 뛰어났고 예술적이고 지적인 분야에서의 관심 폭이 넓었다. 그는 그림에 재능이 있었으며, 하루에도 몇 시간씩 동로마 궁정 예법을 지켜봤다. 그는 이 시기에 <궁정 예법>(Περὶ τῆς Βασιλείου Τάξεως)이라는 책을 저술했는데, 이 서적은 현재까지도 매우 귀중한 사료다.
또한 콘스탄티노스는 자신을 내세우지 않았다. 921년 5월 로마노스가 맏아들인 흐리스토포로스 레카피노스를 공동 지배자로 내세웠을 때, 925년 로마노스가 다른 아들 두명을 황제로 만들면서 총 다섯 명의 황제가 공존하는 상황을 연출했을 때, 심지어 927년 로마노스가 흐리스토포로스를 서열 2위로 올리고 콘스탄티노스 본인을 서열 3위로 밀어냈을 때에도, 콘스탄티노스는 항의의 말 한 마디 하지 않았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 아무런 불평 없이 유순하게 자신의 의무를 수행함으로서 로마노스의 경계심을 자극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그는 속으로 이러한 굴욕을 가슴 깊이 새겼고 '로마노스 패거리들'의 야만성을 혐오했다.

2.5. 마침내 단독 황제가 되다


943년, 요안니스 쿠르쿠아스 장군이 이끄는 동로마 제국군이 에데사를 포위했다. 요안니스는 에데사 주민들에게 강화를 제의하고 모든 포로들을 돌려보내면서 그 대가로 그리스도의 초상[2]을 요구했다. 에데사 주민들은 비록 무슬림이었지만 예수를 위대한 예언자의 한 사람으로 여기고 있어서 초상을 귀한 유물로 여기고 있었기에 그의 요구에 난감해했다. 그들은 칼리프에게 직접 문의하겠다면서 칼리프의 지침을 받을 때까지 공격을 유보해 달라고 부탁했다.
944년 봄, 에데사 주민들은 칼리프에게서 "그대들을 구할 방법이 딱히 없으니 그리스도의 초상을 저들에게 넘겨라."는 답신을 받았다. 이에 주민들은 성대한 의식을 거행한 뒤 초상을 요안니스에게 넘겨줬고, 요안니스는 곧바로 엄중한 호위를 붙여 그것을 콘스탄티노플로 보냈다. 8월 초, 그 초상은 보스포루스의 아시아 쪽 해안에 도착했고 대기하고 있던 시종장 테오파네스가 직접 그것을 로마노스 황제에게 보냈다. 8월 15일, 그리스도의 초상은 금문을 통해 수도에 당당히 입성했다. 이 당시 로마노스는 몸이 아파 참석하지 못했고 흐리스토포로스는 931년에 사망했기 때문에, 나머지 세 황제가 총대주교와 함께 그리스도의 초상을 영접했다.
이 때 두 가지 사건이 벌어졌다. 하나는 로마노스의 두 아들 황제들은 천에 남겨진 그리스도의 초상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콘스탄티노스만이 분명하게 알아본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연도에 모인 군중 가운데에서 한 미친 사람이 느닷없이 뛰어나와 다음과 같이 외친 것이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여, 영광과 축복을 받으라! 그리고 콘스탄티노스여, 제위를 받으라!"

이 무렵, 로마노스는 70대의 노인이었으며 수도사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며 국정에서 손을 떼고 신앙에 깊이 빠졌다. 또한 그는 두 아들 스테파노스 레카피노스와 콘스탄티노스 레카피노스가 부도덕하고 방탕한 생활로 악명이 높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이에 그는 콘스탄티노스가 그의 두 아들들보다 선임 황제임을 분명히 못박는 유언장을 작성하고 이를 공개하기로 결심했다. 그러자 두 아들들은 아버지를 막기로 결심했다. 944년 12월 20일, 두 형제는 추종자들을 거느리고 황궁으로 들어가 황제를 끌어내 프로티의 어느 작은 수도원에 감금하고 머리를 삭발시켰다.
이후 두 형제는 콘스탄티노스를 제거하려 했지만, 여론이 콘스탄티노스를 열렬히 지지한다는 걸 깨닫자 어쩔 수 없이 콘스탄티노스를 공식적으로 선황제로 인정했다. 콘스탄티노스의 아내이자 로마노스의 딸인 헬레나는 남편에게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촉구했다. 콘스탄티노스는 아내의 설득에 마침내 결단을 내리고 945년 1월 27일 두 공동 황제를 체포해 머리를 삭발한 후 아버지가 있는 프로티로 추방했다. 이후 콘스탄티노스는 두 형제를 격리시켜야 한다고 판단하고 각기 다른 수도원으로 보냈다. 그리고 얼마 후, 두 형제는 사망했다.[3] 이렇게 해서 콘스탄티노스는 25년 만에 단독 황제로 등극했다.

2.6. 황제 콘스탄티노스 7세



2.6.1. 내치


콘스탄티노스는 황제에 오른 뒤 자신의 아들을 공동 황제인 로마노스 2세로 임명했다. 그는 자신의 아들이 장차 단독 황제가 되어 제국을 다스릴 때 도움이 되기 위해 952년에 통치의 기술에 관한 실용적인 교과서를 편찬했다. 그는 이 책의 제목을 '내 아들 로마노스에게'(Πρὸς τὸν ἴδιον υἱὸν Ρωμανόν)라고 지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제국의 행정에 관하여>(De Administrando Imperio)라는 제목으로 알려져 있다. 이 책은 황제가 제국의 변방을 둘러싼 각 지역을 점령하고 있는 여러 야만족에 관해 서술한다. 콘스탄티노스는 이 책에서 자신이 바라보는 세계적 상황에 관한 상세한 평가, 장차 소년을 인도하기 위한 여러 가지 조언들을 덧붙였다. 특히 이 책에선 슬라브족과 튀르크족, 페체네그족에 대한 귀중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그는 본능적으로 전쟁을 싫어했고 절대적으로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전쟁을 가급적 하지 않았다. 그는 <제국의 평화에 관하여>에서 야만족에게 다양한 종류의 선물을 보내고 인질을 받아내 평화를 가급적 확보하라고 조언했다. 또한 황제는 <테마 제도에 관하여>(Περὶ τῶν θεμάτων)를 저술해 동로마 제국 여러 테마의 기원과 발달에 대해 서술함으로서 차기 황제들의 제국 운영에 도움이 되도록 했다.
콘스탄티노스는 열정적인 수집가로서, 책과 원고 만이 아니라 온갖 종류의 예술품을 수집했다. 또한 그는 그림 그리기를 즐겼고 모자이크 작가와 에나멜 기술자, 작가와 학자, 금 세공인, 은 세공인, 보석 세공인 등을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그는 과식과 과음을 즐겼지만 주정뱅이는 아니었고 유능하고 양심적인 행정가였다. 그는 인재를 발탁하는 솜씨가 뛰어나 육군, 해군, 교회, 행정, 학술게에 두루 적임자를 임명했다. 또한 고등 교육 제도를 개발하는 데도 주력했고 사법 제도의 운영에 큰 관심을 기울여 빈민에 대한 사회적 학대를 조사하고 장기수의 수형 문제에 관해서 직접 검토했다. 또한 그는 유머 감각이 풍부했고 각계 각층의 사람들에게 친절했으며 결코 화를 내는 법이 없었다.
콘스탄티노스는 비록 로마노스 1세를 혐오했지만 로마노스 1세의 정책을 바꾸지 않고 계승했다. 로마노스 1세가 제정한 입법의 방향은 주로 소규모 자영농에 바탕을 둔 민병대를 오래전부터 토지 겸병을 하고 있던 부유한 봉건 귀족들로부터 보호하는 데 있었다. 콘스탄티노스는 이 정책을 계승해 자영농 보호 정책을 추진했다. 947년, 그는 '힘센 자'들이 겸병한 모든 토지를 무상으로 농민들에게 반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또한 군인이 생계를 유지하고 군사 장비를 마련하는 데 필요한 재산은 양도할 수 없다는 법령, 소규모 자영 농지의 판매는 처음 결정을 내린 이후 40년이 지날 때까지는 절대적인 것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법령을 반포했다. 그 결과, 토지를 가진 농민들의 생활은 이전보다 상당히 나아졌다.

2.6.2. 외치


949년, 콘스탄티노스는 크레타 정벌을 위해 100척의 함대를 파견했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그래도 949년에서 952년에 걸친 동방 전선에서 킬리키아 일대를 수복했으나, 953년에 함단 왕조의 사이프 알 다울라에게 역습을 받아 게르마니케아를 상실했다. 그러나 제국군은 포기하지 않고 958년에서 959년까지 유능한 장군인 니키포로스 포카스요안니스 치미스케스의 지휘를 받으며 사모사타 등지를 점령하고 유프라테스 강까지 진격하며 실지 회복에 성공했다.
957년, 키예프 루스의 섭정 올가 대공녀가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했다. 그녀는 몇 차례 성대한 영접을 받은 뒤 소피아 대성당에서 총대주교에게 세례 성사와 견진 성사를 받고 대모 역할을 한 엘레니 황후와 같은 이름을 채택했다. 일설에는 콘스탄티노스가 올가에게 반했지만 올가가 황제에게 자신의 대부가 되어 줄 것을 요구해 위기에서 벗어났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전설일 뿐이며 신빙성이 부족하다. 올가의 개종은 훗날 러시아가 정교회를 국교로 삼는 밑바탕이 된다.

2.7. 사망


956년, 콘스탄티노스는 환관 수도사 폴리에욱토스를 총대주교에 임명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총대주교에 임명된 뒤 분란을 유발시켰다. 시종장 바실리오스를 탐관오리라고 공개적으로 비난하는가 하면, 레온 6세의 네 번째 결혼 문제를 다시 제기하더니 레온 6세의 결혼을 승인해준 에우테미오스 총대주교의 이름을 딥티코스[4]에 등재하라고 요구했다. 콘스탄티노스는 내심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는 걸 원했지만 이제와서 모든 사안을 다시 끄집어 내는 걸 원하지 않았다, 폴리에욱토스의 행동으로 시끄러워지자, 콘스탄티노스는 더는 참지 못하고 959년 9월 아시아로 건너가 키지쿠스의 주교를 만나 총대주교를 몰아낼 방법을 논의했다.
그후 그는 부르사로가서 그곳의 유명한 온천 목욕으로 고질적인 열병을 치료하고자 했다. 그러나 아무런 효험이 없자, 그는 도시에서 35km 쯤 떨어진 미시아의 올림푸스 산 기슭에 있는 수도원으로 갔다. 그러나 그의 병세는 이 무렵에 호전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고, 그는 황급히 수도로 돌아온 후 959년 11월 9일 황후 엘레니, 다섯 명의 황녀, 그리고 아들 로마노스 2세가 지켜보는 가운데 54살의 나이로 붕어했다.

3. 참고 자료


  • 워렌 트레드골드 : <비잔틴 제국의 역사>
  • 게오르크 오스트로고르스키 : <비잔티움 제국사>
  • 존 줄리어스 노리치 : <비잔티움 연대기>
[1] 레온 6세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다마스쿠스로 망명가서 죽은 안드로니쿠스 두카스의 아들이다.[2] 당시 에데사는 두 가지 보물로 유명했다. 하나는 아브가르 1세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에데사로 와서 치료해달라고 초청했을 때 예수가 보낸 답신이었고, 또 하나는 예수의 초상이 기적적으로 남겨진 천이었다.[3] 스테파노스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로마노스의 아들 콘스탄티노스는 간수를 살해하고 탈출을 기도했다가 감옥 경비병들의 칼을 맞고 죽었다.[4] 정교회에서 사용하는 세계 정교회 독립 교회 주교들의 명단이다. 성찬 예배 중에 보제가 큰소리로 낭송하는데, 세계 각지 여러 정교회들과 영적으로 연대하고 기억한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