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안니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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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안니스 1세 쿠르쿠아스 치미스키스 / Ιωάννης Α΄ Κουρκούας Τσιμισκής'''
1. 개요
2. 생애
2.1. 황제 즉위 이전
2.2. 즉위 과정
2.3. 황제 요안니스 1세
2.3.1. 내치
2.3.2. 외치
2.3.3. 사망


1. 개요


동로마 제국 마케도니아 왕조의 8대 황제. 전임 황제 니키포로스 2세와 더불어 마케도니아 왕조의 팽창기를 상징하는 인물.

2. 생애



2.1. 황제 즉위 이전


요안니스는 925년경 아르메니아 태생의 가문인 쿠르쿠아스 가문의 자제로 태어났다. 치미스키스(Tzimiskes)는 그의 별명으로, 학자들은 그의 별명이 아르메니아어로 '붉은 부츠'라는 뜻의 Chmushkik에서 유래했거나 아르메니아어로 '짧은 키'를 뜻하는 단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측한다. 그의 어머니는 니키포로스 2세의 여동생이었다. 그는 성인이 되자마자 군인이 되어 아르메니아 테마의 군사 총독으로 부임했다.
당대 역사가들은 그를 "용기 있고 나무랄 데 없는 기사"라고 평가한다. 그는 전장에서 용맹하고 친절하고 관대한 성품을 갖췄으며 성실하고 지성을 갖춘 위풍당당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또한 그는 갈색이 섞인 금발과 붉은 수염, 인상적인 파란 눈을 가진 미남이었고 키는 작았지만 아주 민첩하고 힘이 셌다고 한다. 그는 말을 매우 잘 다뤘고 활을 쏘고 창을 다루는 솜씨도 대단했다. 그리고 여자를 다루는 솜씨가 탁월했고 쾌락을 추구했으며 포도주를 즐겨 마셨다고 한다.
요안니스는 마리아 스크레이나와 결혼함으로서 명망 높은 스크레로스 가문과 인연을 맺었다. 하지만 마리아에 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으며, 그녀는 요안니스가 제위에 오르기 전에 죽었고 아이도 없었다.

2.2. 즉위 과정


963년, 요안니스는 상관이자 외삼촌인 니키포로스 2세를 추대해 황제 즉위를 이끌어냈다. 그는 니키포로스 2세 치하에서 사라센과 싸워 숱한 전공을 세웠다. 하지만 니키포로스는 명성이 날로 높아지는 그를 경계해 965년 말에 꼬투리를 잡아 그를 해임하고 고향으로 돌려보내려 했다. 하지만 테오파노 황후가 처벌이 너무 과하다고 설득하자, 아내에게 약했던 니키포로스는 그 말에 따라 요안니스를 용서했다. 다만 칼케돈에 있는 그의 집에만 머물고 콘스탄티노플에 올 때는 별도로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조건을 걸었다. 그러나 그는 테오파노 황후가 요안니스와 불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은 까맣게 몰랐다.
요안니스는 몰래 황궁의 외딴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는 테오파노 황후와 만나 정을 나누다가 마침내 황제를 암살하자는 음모를 꾸몄다. 969년 12월 11일, 요안니스는 수십 명의 음모가들을 이끌고 황후의 협력에 힘입어 니키포로스가 머물던 부콜레온 요새에 침입해 황제의 침실에 난입했다. 그 후 그와 수십 명의 음모가들은 니키포로스 2세를 잔혹하게 짓밟고 칼로 난자해 살해했다.
요안니스는 음모를 성공한 뒤 테오파노 황후와 결혼해 새 황제가 되려고 했지만 폴리에욱투스 총대주교가 막아섰다. 총대주교는 테오파노 황후를 먼 곳으로 보내고 다시는 콘스탄티노플에 오지 못하도록 해야만 요안니스의 대관식을 치를 수 있다고 못박았다. 사실 요안니스는 테오파노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았고 그녀를 단지 자신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 여겼다. 그는 총대주교의 요구에 승낙하고 황후를 황실의 쓰레기 처리장으로 사용되던 마르마라 해의 프로티 섬으로 추방했다. [1] 하지만 총대주교는 이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요안니스에게 공개적으로 참회하고 전임 황제 암살에 연루된 공범자들을 모두 기소하라고 요구했으며 니키포로스 황제의 교회를 억압하는 모든 법령을 폐기하라고 요구했다.
요안니스는 이 모든 조건을 선뜻 수락하고 969년 크리스마스에 대관식을 치르고 로마노스 2세의 아들 바실리오스 2세와 공동 황제가 되었다. 한편, 니키포로스 2세의 동생 레온 포카스는 형이 잔혹하게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듣자 역쿠데타를 기도했다가 실패한 뒤 맏아들 니키포로스와 함께 소피아 대성당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곧 신분과 관직과 재산을 모두 빼앗기고 레스보스로 유배되었다. 레온 포카스의 둘째 아들 바르다스는 흑해 연안의 오지인 폰투스의 아마세이아로 보내졌다.

2.3. 황제 요안니스 1세



2.3.1. 내치


요안니스 1세는 백성들에게 관대한 인물이었다. 그는 폴리에욱토스 총대주교의 요청을 받아들여 개인 재산을 백성들에게 나눠줬고 자신의 재산 대부분을 연이어 닥친 흉년으로 고통을 겪고 있던 백성들에게 나눠줬다. 특히 기근이 몹시 심했던 트라키아의 농촌들이 많은 혜택을 입었다. 또한 그는 보스포루스 맞은 편의 크리소폴리스에 노소코미움이라는 나환자 병원을 지었다. 그는 정기적으로 그곳을 방문하면서 환자들을 격려해주고 때로는 상처를 손수 씻어주기도 했다고 한다. 한편, 그는 토지 겸병을 일삼는 봉건 귀족들로부터 자영농을 보호하는 정책을 일괄적으로 밀어붙였다. 이에 반발하는 무리들이 반란을 일으켰지만, 그는 이 반란을 신속하게 진압해 사태가 악화되는 걸 미연에 방지했다.

2.3.2. 외치


전임 황제 니키포로스 2세는 동로마 제국의 큰 적인 불가리아를 견제하기 위해 키예프 루스에게 발칸 진출을 용인했다. 이에 키예프 루스는 남하하여 불가리아에게 큰 타격을 입혔지만, 곧 동로마 제국을 위협했다. 요안니스는 재위 초기 키예프 루스의 위협에 맞서 싸워야 했다. 요안니스는 콘스탄티노플로 진군하는 키예프 대공 스뱌토슬라프 1세에게 협상하려 애썼다. 그가 제국의 영토에서 떠나 준다면, 전에 니키포로스 2세가 불가리아를 공격하라고 할 때 주겠다고 해놓고 지불하지 않은 돈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스뱌토슬라프 1세는 콧방귀를 뀌며 거부했고, 이제 전쟁은 불가피했다. 요안니스는 자신의 입지가 아직 확고하지 않아서 수도를 떠날 수 없어 죽은 아내 마리아의 오빠인 바르다스 스클레루스와 환관 페트루스 포카스에게 지휘권을 맡겼다.
당시 스뱌토슬라프 1세가 이끌고 온 군대의 규모는 당대 기록에 따르면 30만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건 터무니 없는 수치라는 게 학계의 정설이며 대략 5만 명 정도 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들을 상대할 제국군의 규모는 1만 2천 명 가량이었다. 바르다스 스클레루스는 970년 제국군을 이끌고 아드리아노플로 진군한 후 적이 다가오자 천천히 퇴각하면서 마치 싸우기를 두려워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는 한편, 그는 요안니스 알라카스 파트리키우스에게 기병대를 맡겨 적을 유인하는 미끼로 삼았다. 키예프군이 기세를 올려 추격에 나서자, 기병대는 퇴각 속도를 높혔다. 키예프군은 정신없이 그들을 추격하다가 그만 제국군의 매복에 걸려들었다. 이후 벌어진 전투에서, 키예프군은 일방적으로 학살당했고 스뱌토슬라프 1세는 잔여 병력을 수습해 불가리아로 퇴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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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1년 초봄, 요안니스는 친히 군대를 이끌고 불가리아로 진군해 키예프군을 완전히 몰아내려 했다. 이때 니키포로스 2세의 조카 바르다스 포카스가 유배지에서 탈출해 카이사레아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황제를 참칭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여기에 레스보스에 유배되어 있던 레온 포카스와 그의 맏아들이 현지 주교를 통해 바르다스의 반란 소식을 트라키아에 퍼트리고 반군이 곧 도착할 테니 모두들 제위 찬탈자에 맞서 봉기하자고 선동한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요안니스는 즉각 신속하게 대응했다. 레온 포카스의 지시를 받고 선동하고 있던 주교는 체포되어 모든 것을 털어놨고, 요안니스는 레온과 그의 아들을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가 이내 눈을 멀게 한 후 영원히 추방해버리라고 지시했다가 다시 마음을 돌려 눈을 멀게 하지 말고 단지 유배만 보내라고 명령했다.
이후 요안니스는 바르다스에게 사자를 보내 항복하면 목숨과 재산을 보전해주겠다고 알렸다. 그러나 바르다스는 거부하고 수천의 병력을 거느린 채 수도를 향해 진군했다. 이에 요안니스는 바르다스 스클레루스를 파견해 이들을 진압하게 했다. 다만 요안니스는 내전을 원치 않아 스클레루스에게 가능한 피를 보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면서 항복하는 자에게는 아무런 벌을 내리지 말고 명예와 경제적 보수도 주겠다는 제안을 하라고 명령했다. 스클레루스는 그 명에 따라 반군을 회유했고, 반란군은 매일 밤 진영에서 몰래 빠져나와 스클레루스에게 투항했다. 결국 바르다스 포카스는 자신의 병력이 수백명 밖에 남지 않자 야음을 틈타 가족과 함께 티로포이온 요새로 대피했다. 그러나 스클레루스가 티로포이온 요새를 포위하자, 바르다스 포카스는 모든 사람의 목숨을 살려준다는 조건하에 항복했다. 요안니스는 바르다스 포카스의 목숨을 살려주는 데 동의하고 그의 머리카락을 삭발한 후 가족과 함께 키오스 섬으로 보냈다.
971년 가을, 요안니스는 불안한 황권을 안정시키기 위해 수녀원에 있던 로마노스 2세의 딸 테오도라와 결혼했다. 또한 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1세의 아들 오토와 요안니스 가문의 여식인 테오파노와 결혼시킴으로서 니키포로스 2세의 외교적 삽질로 인해 발생한 신성 로마 제국과 로마 제국 간의 전쟁을 종식시켰다. 이렇게 해서 기반을 탄탄히 다진 뒤, 요안니스는 972년 군대를 이끌고 불가리아에 아직도 남아 있던 키예프 대공 스뱌토슬라프 1세를 상대하러 진군했다. 이후 키에프군과 제국군은 골지마 캄지야에서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그 결과 키예프군은 괴멸되었고 생존자들은 프레슬라프 도시로 도망쳤다.
요안니스는 프레슬라프를 포위하고 공격을 개시해 도시를 함락시키고 살육을 자행했다. 키예프군은 불에 타 죽거나 달아나다가 칼을 맞고 죽었고 불가리아의 전 차르인 보리스 2세를 체포했다. 스뱌토슬라프 1세는 불가리아의 주요 항구인 드리스트라에 피신했다가 제국이 쳐들어오자 맞서 싸웠다. 그러나 석달에 걸친 포위 끝에 보급품이 떨어지자, 스뱌토슬라프는 마지막 공격에 모든 것을 걸기로 결심하고 972년 7월 24일에 남은 병력을 이끌고 성문 밖으로 나와 필사적으로 싸웠다. 그러나 도저히 포위망을 뚫지 못하자, 스뱌토슬라프는 강화를 요청했다. 이후 그는 불가리아에서 물러나고 불가리아에 온 이후 사로잡은 포로들을 모두 송환하고 크리미아의 동로마 제국의 도시인 케르손을 다시는 공격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이후 스뱌토슬라프 1세는 키예프로 돌아가다가 973년 초에 페체네그족에게 습격당해 살해되었고 그의 두개골은 페체네그족 족장의 술잔으로 사용되었다.
요안니스는 콘스탄티노플에서 개선식을 거행한 뒤 불가리아의 보리스 2세를 폐위하고 동부 불가리아를 다시 제국의 영토로 편입시켰다.또한 불가리아 총대주교청은 폐지되었고 그 휘하 교구들은 다시 콘스탄티노플 세계 총대주교청에 귀속되었다. 요안니스는 보리스에게 동로마의 명예 마기스테르라는 관직을 줬지만 보리스의 동생 로마노스는 거세되었다. 그러나 서부 불가리아는 제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났고 사무엘 코메토풀루스가 불가리아 제국을 수립하고 제국에 맞서 싸우게 된다.
한편, 이슬람의 파티마 왕조는 973년 7월 아미다 성벽 앞에서 현지의 동로마 제국군을 괴멸시켰다. 이 소식을 접한 요안니스는 동방으로 진격해 대대적으로 복수하기로 했다. 그런데 974년 봄, 아르메니아 귀족들이 일치단결하여 제국에 반기를 들고 아쇼트 3세를 왕중왕으로 추대했다는 급보가 전해졌다. 요안니스는 일단 아르메니아는 내버려두고 파티마 왕조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그는 아쇼트 3세에게 사절을 보내 그의 제위를 인정해주고 제국의 동맹이 되기를 바란다고 알렸다. 이에 아쇼트 3세는 선뜻 동의하고 정예병 1만 명을 내줬다.
요안니스는 974년 군대를 이끌고 남쪽의 아미다와 마르티로폴리스를 공략한 후 이렇다 할 저항을 받지 않은 채 메소포타미아의 평원지대에 이르렀다. 이후 그는 바그다드를 지나쳐 안티오크로 가서 안티오크의 겨울 주둔지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그 후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가서 서방의 교황과 총대주교 간의 갈등을 수습한 후 975년 동방으로 돌아간 요안니스는 안티오키아를 출발해 에메사로 가서 싸우지도 않고 항복을 얻어냈고 바알베크, 다마스쿠스, 티베리아스, 카이사레아, 베이루트, 비블로스까지 정벌했다. 이후 예루살렘까지 진격하려 했지만 파티마 왕조군이 철저하게 방비하자 포기했다. 이로서 요안니스는 이라클리오스 황제 이래 동로마 제국의 역대 황제가 밟아본 적이 없던 팔레스타인, 시리아, 레바논의 대부분을 동로마 제국의 영토로 귀속시켰다.

2.3.3. 사망


975년 말, 요안니스는 동방 원정을 마친 후 콘스탄티노플로 귀환했다. 그러나 그는 중병에 걸려 거의 죽어가고 있었다. 당대 기록은 시종장 바실리오스가 황제를 독살했다고 주장한다. 기록에 따르면, 황제는 귀환 도중 아나톨리아를 지나칠 때 그 일대의 질 좋은 토지의 소유자가 바실리오스라는 걸 듣고 크게 화를 내면서 돌아가는 대로 당장 시종장을 불러 해명을 듣겠다고 엄포했다고 한다. 바실리오스는 이 말을 전해듣고 사람을 시켜 황제가 먹는 음식에 독을 타게 했다. 이후 황제는 사지를 거의 움직일 수 없고 눈에서는 피가 흐르고 목과 어깨는 온통 고름투성이가 되는 증상에 걸렸다. 이에 황제는 어떻게든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가려 애썼다. 가까스로 보스포루스까지 도착하긴 했지만 황제는 더이상 가지 못하고 976년 1월 10일 51살의 나이로 재위 6년 만에 붕어했다.
이렇듯 당대 기록들은 바실리오스가 요안니스를 독살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후대의 일부 학자들은 이 기록의 신빙성에 의문을 표하고 있다. 독살되었다고 보기엔 효력이 늦게 발동되면서도 그토록 강력한 효과를 지닌 신비로운 독약의 정체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장티푸스, 말라리아, 이질 등의 치명적인 질병에 감염되어 죽었다고 보는 게 이치에 맞다고 본다.

[1] 테오파노는 몇 개월 후 프로티 섬에서 탈출해 소피아 대성당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시종장 바실리우스는 그녀를 강제로 끌어내서 더 먼 아르메니아의 유배지로 보냈다. 다만 요안니스를 마지막으로 보게 해달라는 그녀의 간청을 받아들여줬다. 요안니스는 테오파노와 만나는 데 동의했지만, 그 때문에 테오파노에게 온갖 욕설과 악담을 들어야 했다. 테오파노는 그후 바실리우스에게 화살을 돌려 그를 몇차례 때린 후 수행원들의 제지를 받아 끌려 나갔다. 이후 그녀는 아르메니아의 유배지로 보내졌고 976년에 요안니스 1세가 사망한 이후에 풀려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