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라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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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플라비우스 벨리사리우스가 이끄는 동로마 제국군이 사산조 페르시아의 대군을 격파한 전투. 이 전투의 승리로 이후 동로마 제국은 동방 전선을 유리하게 재편했으며,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서로마 고토 수복 전쟁을 위한 숨고르기에 들어갈 수 있었다.
2. 배경
아나스타시우스 1세는 페르시아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 다라에 거대한 요새도시, 아나스타시오폴리스를 세웠다. 이후 후임 황제들의 보강을 거친 다라 요새는 높이 20미터가 넘는 거대한 성벽과 해자, 세 개의 언덕을 걸친 강력한 방어력과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동로마 행정을 담당하는 주요 도시로 성장했다. 메소포타미아 총독이 이 곳에 거주했으며, 상시 수만의 병력이 요새를 지켰다.
그러나 사산 왕조는 이 요새의 건설이 이전 황제들과 맺은 국경의 요새신축 금지조약에 어긋난다고 주장하며 계속해서 압박을 걸어왔고, 요새를 둘러싼 수많은 국지전이 발생했다. 그러나 527년 이후, 이베리아[1] 의 종교분쟁에 개입한 사산왕조의 카바드 1세는 결국 다라 요새를 파괴하기 위한 대규모 군대를 파견한다. 불사 부대를 포함한 4만의 페르시아군이 샤한샤의 명령에 따라 다라를 향해 진군했고, 이후 니시비스에서 1만의 후속 부대가 보급품과 함께 출발했다.
22세때 로마 제국 동방군 총사령관 시타스의 부사령관으로 부임한 플라비우스 벨리사리우스는 25세가 되던 530년 경, 시타스의 후임으로 동방군 총사령관[2] 에 임명되었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300여 명의 훈족 보조병과 헤룰리족 기병대, 그리고 수천여 명의 중기병 부켈라이리[3] 를 이끌고 다라 요새로 향했다.
다라의 아나스타시오폴리스 요새에는 이미 그가 몇 년 동안 지휘했던 동방군의 병력 1~2만여 명이 배치되어 있었고, 그가 중앙군과 함께 도착하자 로마군의 군세는 총 2만 5천에 이르렀다.
페르시아군은 그들의 2배가 넘는 상태였다. 평범한 사령관들이라면 높은 벽을 낀 채로 수성전을 준비했을 테지만, 벨리사리우스는 회전에 응하기로 한다.
3. 전개
3.1. 전투 1일차
이날 사산 왕조의 육군 사령관이었던 페로제스와 부사령관 바레스마나스가 이끄는 4만 명의 페르시아군 본대가 다라에 도착했다. 이들은 1만 명의 최정예 중기병대인 자예단을 중심으로 중기병과 궁기병이 중심이 된 병력이었으며, 농민 출신 징집병으로 이루어진 보병대는 기병의 보조를 맡았다.
페르시아군은 도착하자마자 중기병대를 로마군 좌익에 돌격시켰으나, 부켈라이리의 반격으로 공격은 돈좌되었다. 양측은 큰 피해 없이 물러났으며, 이후 그날 내내 직접적인 전투는 없이 대치했다고 로마 역사가 프로코피우스는 기록했다.
대치가 지속되자 페르시아군의 대전사 한 명이 전열에서 나와 벨리사리우스에게 결투를 신청하며 도발했는데, 이를 무시한 벨리사리우스는 자신이 직접 나서는 대신 자신이 데리고 다니던 안드레아스라는 목욕탕 청소 노예에게 무기를 들려 보냈다.
놀랍게도 안드레아스는 페르시아 대전사와의 결투에서 손쉽게 중무장한 전사를 죽여버렸다. 이에 격분한 다른 페르시아군 기사가 그에게 달려들었지만, 안드레아스는 그 기사의 목까지 따버렸다.[4] 로마 노예가 두 명의 대전사를 이겨버리자 페르시아군의 사기는 크게 떨어졌고, 페로제스는 숙영지인 아모디우스로 퇴각했다.
그날 밤, 벨리사리우스는 페로제스에게 평화협정을 원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페로제스는 이 편지를 통해 병력이 적은 로마군이 승산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줄 알고 오히려 승리에 대한 확신을 굳혔다.평화란 가장 큰 축복이다. 이는 모든 사람들이 아는 바이며, 가장 이성이 부족한 사람마저도 이를 인정할 것이다. 그러므로 좋은 장수는 전투의 와중에서도 평화를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 <벨리사리우스>
3.2. 전투 2일차
아르메니아 지역과 바스푸라칸 지역의 사트라프인 피티악세스[주의] 가 니시비스에서 1만의 지원군을 이끌고고 페르시아 진영에 도착했다.
페로제스는 피티악세스와 그의 지원군에게 우익을, 자신이 중앙을 담당하고, 좌익에는 외눈의 바레스마나스에게 1만의 자예단을 맡겨 총공격을 감행했다.
먼저 양군은 궁병대를 이끌고 사격전을 벌였다. 양측 모두 사상자가 속출했지만, 결정적인 피해를 줄 수는 없었다. 이후 로마군 좌익에 피티악세스가 이끄는 페르시아군 우익이 돌격했는데, 이들은 분투 끝에 로마군의 참호진을 뚫어내고 진영으로 난입하는데 성공했다. 벨리사리우스는 이 상황에서 언덕 뒤에 숨겨놓은 헤룰리족 병력과 훈족 족장인 수니카스가 이끄는 훈족 기병대를 보내 좌익을 지원했다. 피티악세스의 페르시아군은 참호를 돌파하면서 돌격력을 잃었고, 큰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이 순간, 바레스마나스가 이끄는 1만의 자예단들이 기습적으로 참호룰 부수고 로마군 우익을 돌파했다. 벨리사리우스는 부켈라이리를 이끌고 돌격하는 적을 차단하기 위한 반격을 가했다. 돌파에 성공한 와중에 진영의 측면에서 튀어나온 부켈라이리에게 공격 당한 바레스마나스는 5천여 명의 불사 부대와 고립되었으며, 나머지 5천은 전열을 수습한 로마군에게 가로막혀 그들을 도울 수 없게 되었다. 양측 중기병들의 난전이 한창일 때, 좌익을 정리하고 합류한 수니카스의 훈족 기병들이 벨리사리우스를 지원하자 페르시아군은 붕괴되기 시작했다.
수니카스는 기수들과 함께 전장을 지휘하던 바레스마나스를 발견하고 혼자서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기수 두 명과 바레스마나스를 전사시켰고, 지휘부를 잃은 페르시아군은 무질서하게 패주하기 시작했다.
페로제스는 전군에게 후퇴 명령을 내렸고, 그나마 피해가 적은 중앙을 이끌고 질서있게 퇴각하기 시작했다. 벨리사리우스와 로마군은 기세를 몰아 수 마일을 추격했지만, 그날은 날씨가 45°C까지 올랐던 데다가 후퇴하는 페르시아군의 전열이 온존했기 때문에 반격을 염려한 벨리사리우스는 추격을 멈췄다.
4. 결과
이는 벨리사리우스가 커리어를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거둔 대규모 승전이었다. 이전까지는 페르시아군에게 많은 패배를 겪었던 데다, 이긴 전투에도 최선임 지휘관이 아니었던 벨리사리우스가 로마 전역에서 이름을 빛낸 사건이었다.
페르시아와의 전쟁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바로 1년 뒤인 531년에 재침공한 페르시아군은 칼리니쿰 전투에서 이번에는 무리하게 추격을 감행한[5] 벨리사리우스의 군대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많은 병력을 온존한 벨리사리우스는 역공으로 페르시아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기 때문에 페르시아군은 목표인 안티오키아를 함략을 이루지 못했다.
이후 그의 재능을 알아본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벨리사리우스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소환했으며, 니카의 반란을 진압한 뒤, 서로마 제국의 고토 수복을 위해 그를 출격시켰다.
[1] 스페인이 아닌 아나톨리아 반도 동부를 칭하는 말[2] 마기스테르 밀리툼 오리엔탈리스(Magister Militum Orientalis)[3] 이들은 귀족이나 황족, 황제들의 가신 기병으로 편성되었지만 황제의 명령 없이는 함부로 출정할 수 없었다.[4] 검투 경기는 6세기 초에 종결되었으므로, 검투사 노예는 아니었다. 벨리사리우스가 따로 전사 출신의 노예를 사서 열심히 훈련시켰을것이라는 설이 있다.[주의] 인명이 아닌 이 지역의 지방관을 뜻하는 단어다.[5] 벨리사리우스는 추격을 반대했지만, 열정이 넘치던 신병들과 가산왕조의 지원군이 이를 반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