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비우스 벨리사리우스
Flavius Belisarius
505(?)년 ~ 565년.
고트족계 집안에서 태어나 13세 무렵 일개 사병으로 입대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10년 정도 만에 부대장의 지위에 오를 정도로 두각을 나타냈다.
게다가 그는 다른 이들에게 믿음을 주는 사람이었다고도 하는데, 심지어 장군들과는 앙숙이라고 할 수 있던 환관들조차 니카의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한 그의 공적을 고평가해 벨리사리우스를 원정군 총사령관으로 그를 지지했고, 527년 장군의 직위에 오르며, 530년 로마-페르시아 전쟁의 다라 전투에서 사산조 페르시아의 대군을 막아내는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3년만에 동고트 전선 총사령관에 오를 정도로 황제 역시 그의 능력은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이런 출중한 능력에 어울리게 수많은 전선에서 많은 전공을 세웠다. 그가 해내지 못한 유일한 임무는 당시 동로마 근해에서 날뛰는 고래를 잡는 일 정도였고, 이것도 휘하 부하들의 실수가 문제였지, 그의 실수는 아니었다고 한다.
그의 업적 중 손꼽을 만한 일은 역시 대제의 명을 받들어 '''멸망해버린 서로마 제국의 고토를 회복한 고토 수복 원정'''이다. 그는 턱 없이 높은 이상에 비해 부실한 지원만을 해주는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명령을 받들어 아프리카의 반달 왕국에 1만 5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상륙, 10만 대군을 이끌고 마중나온 반달족의 왕 겔리메르를 단숨에 격파하고 아프리카에 대한 패권을 확립하였다.[1]
참고로 이탈리아 공략전 당시 벨리사리우스만큼이나 뛰어난 명장 나르세스도 함께 했지만, 어째선지 그는 인지도가 한참 모자라다. 하지만 나르세스가 타기나에 전투나 카실리눔 전투에서 보여준 전술적 안목은 벨리사리우스 못지 않았으며, 그의 뒤를 이어 원정대의 총사령관이 되기도 했다. 또한 당시 동고트 왕국 저항군의 지도자였던 토틸라를 쓰러뜨리고, 동고트를 완전히 멸망시킨 것은 바로 나르세스였다.
이런 화려한 업적을 가지고 있음에도 나르세스가 벨리사리우스에 비해 저평가를 받는 이유는 그가 '''환관''', 그것도 권력자들에게 한 힘 쓰는 대단한 환관이었던 탓도 크고, 나르세스가 투입된 시점은 이미 벨리사리우스가 적은 병력만 가지고 '''반달 왕국을 멸망시키고, 동고트를 북이탈리아까지 몰아내 로마까지 수복해서''' 남의 공적에 숟가락 얹기 식으로 투입되었다는 의견도 있었다. 결정적으로 그는 당시 황제의 의심과 반목으로 신뢰를 잃어간 벨리사리우스보다 훨씬 풍부한 지원을 받고 싸운것이 저평가 되는 이유 중 하나. 또 나르세스가 희한하게도 벨리사리우스와 같이 있었을떄는 계속 벨리사리우스와 대립관계를 유지했으며 전략적인 실책도 많이 저질렀다.
이후에는 재차 이탈리아에 상륙하였는데 당시 지원받은 병력은 7천명으로 아프리카 상륙 당시보다도 적었다. 당시 이탈리아 지방에는 동고트 왕국의 15만 병력에 육박하는 세력이 버티고 있었음을 감안해본다면 그야말로 죽여줍쇼하고 간 정도였으나 전형적인 군인타입이었는지 군말 없이 명을 받들고 이탈리아에 상륙, 그야말로 한줌의 병력으로 연전연승하며 이탈리아의 로마까지 수복하는 성과를 거둔다. 이후 열린 휴전협상에서 로마 황제를 믿지 못한 동고트족은 벨리사리우스를 믿고 협상에 임해, 왕국 절반과 왕위를 주기로 제안했다. 물론 벨리사리우스는 왕위를 받는 '''척'''하고 주동자들을 모조리 처형했다.
그러나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그리고 테오도라와는 그다지 사이가 좋질 못했다. 이미 젊어서 황제와 고토수복의 현실성을 두고 입씨름을 벌였고, 로마 정복 이후에도 통치방식을 두고 대판 싸웠다. 덕분에 의심병이 도진 황제는 단 한번도 그에게 제대로 된 병력지원을 해준 일이 없었다.[2] 게다가 동고트 왕국과의 휴전협상에서 그가 왕위를 제안받은 사실은 결정타였다.
이탈리아 원정 종결 뒤, 벨리사리우스는 다시 사산조 페르시아 전선에 투입되어 활약하고, 두 번째 이탈리아 원정도 맡게 되었으나 그의 모반을 두려워한 황제는 거의 병력을 보내주지 않는 지경이었고, 겨우겨우 전선을 유지하던 벨리사리우스는 본인이 지친 탓도 있거니와 지원도 안 해준 주제에 오랜 기간 실적이 나오지 않는다는 비판에 지쳐서 총사령관직을 반납하고 귀국하게 된다. 이후에도 불가르족과의 싸움에서 전공을 세웠으나, 562년 횡령혐의를 받아 재산이 몰수되고 면직되었다. 물론 곧 혐의가 풀려 석방되었지만, 이 당시 몰수 당한 재산 때문에 이탈리아 원정에서 병사들에 밀린 급료를 지불할 능력이 없어 고생하게 된다.
그의 말년에 대해서는 루머가 많은데, 횡령혐의를 받았을 때 황제가 옳다구나 그의 양눈을 뽑아버려 장님이 되어 구걸로 연명하는 거지로 살다가 죽었다는 얘기도 널리 퍼졌다. 위의 관련 그림들은 이 설에 근거하여 옛 부하가 놀라거나 적선해주는 장면들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위의 일로 인해 한차례 면직되었다가 복권한 후 유스티니아누스와 같은 해 병으로 사망했다.
고대 로마와 동로마 전 역사를 통틀어 손꼽히는 뛰어난 장군으로 칭해진다.
벨리사리우스가 율리우스 카이사르,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등의 전 세계 역사를 통틀어 당대 명장이라 칭해지는 인물들과 비견되는 이유는 대략 이와 같다. 정복된 지역을 지키기 위해 떼어놓은 수비병을 제외하면 초기에는 단 1만명의 병력, 후기에는 수천의 병력만으로, 그것도 사실상 아무런 지원도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이탈리아, 발칸 반도, 북아프리카와 스페인 남부 지역을 탈환한것이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게르마니쿠스, 트라야누스, 후의 바실리오스 2세조차 이렇게 적고 부실하며 보급조차 제대로 받기 힘든 이 상황에서 탈환의 목표인 각 지역의 상당 수를 점유하고있던 적국들을 정복하진 못했다.
벨리사리우스와 같은 악조건으로 싸운 인물은 이라클리오스나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빼고는 찾기 힘들다.
다만 그가 정복을 순조롭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반달 왕국은 긴 내전으로 인해 이미 무너지고 있었고, 반달족의 지배에 염증을 느낀 북아프리카인들이 카르타고로 가기까지 스스로 성문을 열어 주었다.
이탈리아 원정에서도 자신의 사병까지 포함해 만명도 되지 않았으나 이탈리아인들의 호응으로 로마까지 순조롭게 갔다. 로마에서는 다시 시민들의 도움을 받아 삼만명의 민병대 지원을 받는다. 다만 일부 이탈리아인들은 언어도 다르고 민족도 다른 동로마인들을 해방자가 아닌 전쟁을 일으키는 불필요한 존재로 여겼다.
실제로 동로마군이 로마시를 방어하는 로마 공방전 때 성문 열쇠를 몰래 가져다 주려다 적발된 사람도 있었다. 이렇듯 고트족과 이탈리아인들은 그렇게 불편한 존재가 아니었으나, 이 전쟁 이후로 고트족들은 이탈리아 토착민들을 불신하는 계기가 됐다. 그전까지의 상대적으로 평화롭던 통치는 끝나고 밀라노시의 시민들이 전부 학살되기까지 한다.
황제와의 반목으로 시련을 겪는등 불행한 삶을 보내기도 했으나, 당대에 벨리사리우스는 고결하고 정의로운 인물로 적군들에게도 명성이 높았었는데, 그의 명성과는 다르게 부인인 안토니나는 당대 최고의 미인이였으나 남편과 달리 고결하지도, 정숙하지도 않은 희대의 난봉꾼이였다.
그럼에도 벨리사리우스가 그녀와 이혼[4] 하지 않았던 이유는 '''안토니나가 황제의 부인인 테오도라 황후의 친구였기 때문'''. 벨리사리우스가 의심병 환자라는 조롱을 들을만큼 조심성이 강한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에게 실각당하거나 암살당하지 않았던 점도 아내인 안토니나와 테오도라 황후의 친분이 크게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안토니나가 양자였던 테오도시우스와의 스캔들에 엮이고[5] 원채 여장부였던 탓에 가정 내에서 제대로 기를 펴지 못하기도 했다. 또한 앞서 언급되었듯이 안토니나는 심각한 바람둥이로 유명했기에 벨리사리우스는 아내를 믿지 못해 전쟁터에 까지 그녀를 데리고 다녔다.
사실 황제와의 반목의 원인중 하나로 제시되는것도 바로 안토니나와 테오도라의 친분때문이라는 설이 있는데, 벨리사리우스가 안토니나와 싸우게 되면 안토니나는 테오도라-유스티니아누스를 통해 남편을 압박할수있었기 때문. 또한 당시 벨리사리우스는 황제 뿐만이 아니라 황후에게도 원정군에 많은 후원을 받았는데, 안토니나의 말 한마디로 이게 모두 끊겨버리는 수가 있었다.
이러한 복합적인 요인으로 인해 벨리사리우스는 세운 공에도 불구하고 조정의 반감을 크게 샀으나, 테오도라의 사망 이후에서야 어느 정도 반감이 누그러지게 되었다.
시오노 나나미는 벨리사리우스에 대해서는 거의 '''마지막 로마인'''으로 띄워주지만, 그와 쌍벽을 이룰만한 명장이었던 나르세스가 대활약한 두 전투에 대해서는 '''연설 따위에 시간 낭비하지 않고 보물을 잔뜩 보여주어 사기를 높였다'''고 축약한다.
다른 로마의 명장들에 비하면 크게 알려진점이나 임팩트는 적으나, 이 엄청난 공적 덕분에 후대에 로마의 잃어버린 영광을 되찾거나, 멸망의 순간까지도 로마를 지키기 위해 싸운 이들에게 붙여지는 칭호인 '''최후의 로마인'''[6] 이란 칭호를 가진 이들 중 하나이다.
[image]
토탈 워: 아틸라의 DLC 캠페인인 마지막 로마인에서는 주인공이자, 로마 제국 원정대 팩션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본편에서의 아틸라처럼 전투에서 장군이 죽더라도 사망처리 되지 않고, 부상으로 그치게 된다.
이때 원정군으로 플레이시 간접적으로나마 벨리사리우스가 겪었을 수많은 고통들을 경험할 수 있으며 성능이 좋은편이 아닌데 수도 적은 병력, 바닥을 드러내는 재정, 유스티니아누스 황제,테오도라 황후와의 갈등으로 인한 수입/사기 패널티 등, 공처가란 것을 반영해서 안토니나 앞에서 무릎 꿇고 그녀의 사적인 요구를 들어줘야 하거나, 테오도라와 안토니나 사이에 끼여서 딜레마에 빠지기도 한다. 동고트에게 왕위를 받은 후 뒷치기로 멸망시킨것을 모티브로 해서인지 고토 수복이 아닌 독립 루트로 서로마 제국을 재건할수도 있다.
물론 그렇게 되면 동로마와의 관계도는 최악이 된다. 그래서 독립 루트로 진행하려면 반달족과 적당히 싸운 후 카르타고까지 점령한 시점에 몰려오는 무어인을 무시하고 아말라순타 구출 임무 또는 교황 체포 및 승리 조건 때문에 언젠가 이탈리아로 가야만 한다. 그 후 이탈리아에서 독립해서 동로마 세력이 최대한 적을 시점에서 독립해야 한다. 안 그러면 동고트족+랑고바르드족+유스티니아누스를 동시에 상대해야 한다.
505(?)년 ~ 565년.
1. 개요
유스티니아누스 1세를 따랐던 동로마 제국의 군단 사령관.그의 훤칠한 키와 당당한 용모는 가히 영웅의 풍모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 관대하고 정의로운 성품으로 그는 백성들의 애정도 잃지 않으면서 병사들의 사랑도 받았다. 병들고 다친 병사는 약과 돈으로 구할 수도 있지만, 사령관의 병문안과 미소로써 더 효율적으로 치유될 수 있다. ······ 군대에서 그가 술에 취한 모습은 아무도 보지 못했다. 고트족이나 반달족의 포로들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자를 그에게 바쳤으나 그는 그들의 매력을 멀리 했고, 안토니나의 남편으로서 부부의 의무를 위반하지 않았다. 그의 무훈을 목격한 사람과 기록한 역사가는 전쟁의 위험 속에서 그가 용감하되 경솔하지 않고, 신중하되 겁먹지 않으며, 상황의 급함에 따라 완급을 조절하는 것을 익히 보았다. '''그는 곤란한 역경 속에서도 희망과 활력을 잃지 않고, 순조로운 흐름 속에서도 겸손하고 신중을 기하는 사람이었다.'''
ㅡ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 제41장
2. 행적
고트족계 집안에서 태어나 13세 무렵 일개 사병으로 입대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10년 정도 만에 부대장의 지위에 오를 정도로 두각을 나타냈다.
게다가 그는 다른 이들에게 믿음을 주는 사람이었다고도 하는데, 심지어 장군들과는 앙숙이라고 할 수 있던 환관들조차 니카의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한 그의 공적을 고평가해 벨리사리우스를 원정군 총사령관으로 그를 지지했고, 527년 장군의 직위에 오르며, 530년 로마-페르시아 전쟁의 다라 전투에서 사산조 페르시아의 대군을 막아내는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3년만에 동고트 전선 총사령관에 오를 정도로 황제 역시 그의 능력은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이런 출중한 능력에 어울리게 수많은 전선에서 많은 전공을 세웠다. 그가 해내지 못한 유일한 임무는 당시 동로마 근해에서 날뛰는 고래를 잡는 일 정도였고, 이것도 휘하 부하들의 실수가 문제였지, 그의 실수는 아니었다고 한다.
그의 업적 중 손꼽을 만한 일은 역시 대제의 명을 받들어 '''멸망해버린 서로마 제국의 고토를 회복한 고토 수복 원정'''이다. 그는 턱 없이 높은 이상에 비해 부실한 지원만을 해주는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명령을 받들어 아프리카의 반달 왕국에 1만 5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상륙, 10만 대군을 이끌고 마중나온 반달족의 왕 겔리메르를 단숨에 격파하고 아프리카에 대한 패권을 확립하였다.[1]
참고로 이탈리아 공략전 당시 벨리사리우스만큼이나 뛰어난 명장 나르세스도 함께 했지만, 어째선지 그는 인지도가 한참 모자라다. 하지만 나르세스가 타기나에 전투나 카실리눔 전투에서 보여준 전술적 안목은 벨리사리우스 못지 않았으며, 그의 뒤를 이어 원정대의 총사령관이 되기도 했다. 또한 당시 동고트 왕국 저항군의 지도자였던 토틸라를 쓰러뜨리고, 동고트를 완전히 멸망시킨 것은 바로 나르세스였다.
이런 화려한 업적을 가지고 있음에도 나르세스가 벨리사리우스에 비해 저평가를 받는 이유는 그가 '''환관''', 그것도 권력자들에게 한 힘 쓰는 대단한 환관이었던 탓도 크고, 나르세스가 투입된 시점은 이미 벨리사리우스가 적은 병력만 가지고 '''반달 왕국을 멸망시키고, 동고트를 북이탈리아까지 몰아내 로마까지 수복해서''' 남의 공적에 숟가락 얹기 식으로 투입되었다는 의견도 있었다. 결정적으로 그는 당시 황제의 의심과 반목으로 신뢰를 잃어간 벨리사리우스보다 훨씬 풍부한 지원을 받고 싸운것이 저평가 되는 이유 중 하나. 또 나르세스가 희한하게도 벨리사리우스와 같이 있었을떄는 계속 벨리사리우스와 대립관계를 유지했으며 전략적인 실책도 많이 저질렀다.
이후에는 재차 이탈리아에 상륙하였는데 당시 지원받은 병력은 7천명으로 아프리카 상륙 당시보다도 적었다. 당시 이탈리아 지방에는 동고트 왕국의 15만 병력에 육박하는 세력이 버티고 있었음을 감안해본다면 그야말로 죽여줍쇼하고 간 정도였으나 전형적인 군인타입이었는지 군말 없이 명을 받들고 이탈리아에 상륙, 그야말로 한줌의 병력으로 연전연승하며 이탈리아의 로마까지 수복하는 성과를 거둔다. 이후 열린 휴전협상에서 로마 황제를 믿지 못한 동고트족은 벨리사리우스를 믿고 협상에 임해, 왕국 절반과 왕위를 주기로 제안했다. 물론 벨리사리우스는 왕위를 받는 '''척'''하고 주동자들을 모조리 처형했다.
그러나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그리고 테오도라와는 그다지 사이가 좋질 못했다. 이미 젊어서 황제와 고토수복의 현실성을 두고 입씨름을 벌였고, 로마 정복 이후에도 통치방식을 두고 대판 싸웠다. 덕분에 의심병이 도진 황제는 단 한번도 그에게 제대로 된 병력지원을 해준 일이 없었다.[2] 게다가 동고트 왕국과의 휴전협상에서 그가 왕위를 제안받은 사실은 결정타였다.
이탈리아 원정 종결 뒤, 벨리사리우스는 다시 사산조 페르시아 전선에 투입되어 활약하고, 두 번째 이탈리아 원정도 맡게 되었으나 그의 모반을 두려워한 황제는 거의 병력을 보내주지 않는 지경이었고, 겨우겨우 전선을 유지하던 벨리사리우스는 본인이 지친 탓도 있거니와 지원도 안 해준 주제에 오랜 기간 실적이 나오지 않는다는 비판에 지쳐서 총사령관직을 반납하고 귀국하게 된다. 이후에도 불가르족과의 싸움에서 전공을 세웠으나, 562년 횡령혐의를 받아 재산이 몰수되고 면직되었다. 물론 곧 혐의가 풀려 석방되었지만, 이 당시 몰수 당한 재산 때문에 이탈리아 원정에서 병사들에 밀린 급료를 지불할 능력이 없어 고생하게 된다.
그의 말년에 대해서는 루머가 많은데, 횡령혐의를 받았을 때 황제가 옳다구나 그의 양눈을 뽑아버려 장님이 되어 구걸로 연명하는 거지로 살다가 죽었다는 얘기도 널리 퍼졌다. 위의 관련 그림들은 이 설에 근거하여 옛 부하가 놀라거나 적선해주는 장면들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위의 일로 인해 한차례 면직되었다가 복권한 후 유스티니아누스와 같은 해 병으로 사망했다.
3. 평가
고대 로마와 동로마 전 역사를 통틀어 손꼽히는 뛰어난 장군으로 칭해진다.
벨리사리우스가 율리우스 카이사르,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등의 전 세계 역사를 통틀어 당대 명장이라 칭해지는 인물들과 비견되는 이유는 대략 이와 같다. 정복된 지역을 지키기 위해 떼어놓은 수비병을 제외하면 초기에는 단 1만명의 병력, 후기에는 수천의 병력만으로, 그것도 사실상 아무런 지원도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이탈리아, 발칸 반도, 북아프리카와 스페인 남부 지역을 탈환한것이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게르마니쿠스, 트라야누스, 후의 바실리오스 2세조차 이렇게 적고 부실하며 보급조차 제대로 받기 힘든 이 상황에서 탈환의 목표인 각 지역의 상당 수를 점유하고있던 적국들을 정복하진 못했다.
벨리사리우스와 같은 악조건으로 싸운 인물은 이라클리오스나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빼고는 찾기 힘들다.
다만 그가 정복을 순조롭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반달 왕국은 긴 내전으로 인해 이미 무너지고 있었고, 반달족의 지배에 염증을 느낀 북아프리카인들이 카르타고로 가기까지 스스로 성문을 열어 주었다.
이탈리아 원정에서도 자신의 사병까지 포함해 만명도 되지 않았으나 이탈리아인들의 호응으로 로마까지 순조롭게 갔다. 로마에서는 다시 시민들의 도움을 받아 삼만명의 민병대 지원을 받는다. 다만 일부 이탈리아인들은 언어도 다르고 민족도 다른 동로마인들을 해방자가 아닌 전쟁을 일으키는 불필요한 존재로 여겼다.
실제로 동로마군이 로마시를 방어하는 로마 공방전 때 성문 열쇠를 몰래 가져다 주려다 적발된 사람도 있었다. 이렇듯 고트족과 이탈리아인들은 그렇게 불편한 존재가 아니었으나, 이 전쟁 이후로 고트족들은 이탈리아 토착민들을 불신하는 계기가 됐다. 그전까지의 상대적으로 평화롭던 통치는 끝나고 밀라노시의 시민들이 전부 학살되기까지 한다.
4. 기타
황제와의 반목으로 시련을 겪는등 불행한 삶을 보내기도 했으나, 당대에 벨리사리우스는 고결하고 정의로운 인물로 적군들에게도 명성이 높았었는데, 그의 명성과는 다르게 부인인 안토니나는 당대 최고의 미인이였으나 남편과 달리 고결하지도, 정숙하지도 않은 희대의 난봉꾼이였다.
그럼에도 벨리사리우스가 그녀와 이혼[4] 하지 않았던 이유는 '''안토니나가 황제의 부인인 테오도라 황후의 친구였기 때문'''. 벨리사리우스가 의심병 환자라는 조롱을 들을만큼 조심성이 강한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에게 실각당하거나 암살당하지 않았던 점도 아내인 안토니나와 테오도라 황후의 친분이 크게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안토니나가 양자였던 테오도시우스와의 스캔들에 엮이고[5] 원채 여장부였던 탓에 가정 내에서 제대로 기를 펴지 못하기도 했다. 또한 앞서 언급되었듯이 안토니나는 심각한 바람둥이로 유명했기에 벨리사리우스는 아내를 믿지 못해 전쟁터에 까지 그녀를 데리고 다녔다.
사실 황제와의 반목의 원인중 하나로 제시되는것도 바로 안토니나와 테오도라의 친분때문이라는 설이 있는데, 벨리사리우스가 안토니나와 싸우게 되면 안토니나는 테오도라-유스티니아누스를 통해 남편을 압박할수있었기 때문. 또한 당시 벨리사리우스는 황제 뿐만이 아니라 황후에게도 원정군에 많은 후원을 받았는데, 안토니나의 말 한마디로 이게 모두 끊겨버리는 수가 있었다.
이러한 복합적인 요인으로 인해 벨리사리우스는 세운 공에도 불구하고 조정의 반감을 크게 샀으나, 테오도라의 사망 이후에서야 어느 정도 반감이 누그러지게 되었다.
5. 대중매체에서
시오노 나나미는 벨리사리우스에 대해서는 거의 '''마지막 로마인'''으로 띄워주지만, 그와 쌍벽을 이룰만한 명장이었던 나르세스가 대활약한 두 전투에 대해서는 '''연설 따위에 시간 낭비하지 않고 보물을 잔뜩 보여주어 사기를 높였다'''고 축약한다.
다른 로마의 명장들에 비하면 크게 알려진점이나 임팩트는 적으나, 이 엄청난 공적 덕분에 후대에 로마의 잃어버린 영광을 되찾거나, 멸망의 순간까지도 로마를 지키기 위해 싸운 이들에게 붙여지는 칭호인 '''최후의 로마인'''[6] 이란 칭호를 가진 이들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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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탈 워: 아틸라의 DLC 캠페인인 마지막 로마인에서는 주인공이자, 로마 제국 원정대 팩션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본편에서의 아틸라처럼 전투에서 장군이 죽더라도 사망처리 되지 않고, 부상으로 그치게 된다.
이때 원정군으로 플레이시 간접적으로나마 벨리사리우스가 겪었을 수많은 고통들을 경험할 수 있으며 성능이 좋은편이 아닌데 수도 적은 병력, 바닥을 드러내는 재정, 유스티니아누스 황제,테오도라 황후와의 갈등으로 인한 수입/사기 패널티 등, 공처가란 것을 반영해서 안토니나 앞에서 무릎 꿇고 그녀의 사적인 요구를 들어줘야 하거나, 테오도라와 안토니나 사이에 끼여서 딜레마에 빠지기도 한다. 동고트에게 왕위를 받은 후 뒷치기로 멸망시킨것을 모티브로 해서인지 고토 수복이 아닌 독립 루트로 서로마 제국을 재건할수도 있다.
물론 그렇게 되면 동로마와의 관계도는 최악이 된다. 그래서 독립 루트로 진행하려면 반달족과 적당히 싸운 후 카르타고까지 점령한 시점에 몰려오는 무어인을 무시하고 아말라순타 구출 임무 또는 교황 체포 및 승리 조건 때문에 언젠가 이탈리아로 가야만 한다. 그 후 이탈리아에서 독립해서 동로마 세력이 최대한 적을 시점에서 독립해야 한다. 안 그러면 동고트족+랑고바르드족+유스티니아누스를 동시에 상대해야 한다.
6. 관련 문서
[1] 여담으로 당시 군량으로 지급된 쉽 비스킷의 다수가 식량 담당자의 횡령으로 벌레가 파먹고 썩어버렸는데 벨리사리우스는 이를 신고 했으나, 유스티니아누스가 담당자를 솜방망이 처벌을 하는 것으로 끝내버렸다. 그리고 이것은 벨리사리우스와 유스티니아누스의 반목의 원인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그 외에도 포에데라티로 동원한 훈족 용병들의 배신, 풍토병으로 고생하는 사병 등 온갖 고난을 겪어야 했다.[2] 물론 이 당시 로마 제국을 강타한 '유스티니아누스 역병' 즉 흑사병의 영향이 매우 심각했음은 감안해야 한다. 또, 이 시기에 대해 기록한 비잔티움 역사가 프로코피우스에 의하면 536년쯤에 “연중 내내 태양이 달처럼 빛을 잃고 있다”라는 언급이 있다. 그러고 나서는 기근과 역병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나오는데 최근 과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저 기록의 내용은 그 당시 범지구적으로 벌어진 화산 폭발들(엘살바도르, 아이슬란드 등)의 파장인 것으로 역사 시대 중에서 가장 추운 시기가 6세기 중반이었다고 한다.[3] 이 그림은 다비드의 초기 작품임에도 다비드의 걸출한 실력을 나타내는 그림으로 평가받지만, 동시에 젊은 작가의 미숙함이 표현되어 있다. 놀라는 로마 병사 좌우의 바닥 각도가 잘 맞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큰 단점은 아니지만 말이다.[4] 로마 제국에서는 부인이나 남편이 불륜을 저지르면 간통죄를 근거로 이혼이 가능했다.[5] 프로코피우스의 비사에 따르면 안토니나는 북아프리카 원정 때 벨리사리우스가 두 사람의 불륜 현장을 목격하자 창고의 물건을 보러 왔다고 거짓말을 했고, 벨리사리우스는 그 일을 덮었다고 한다. 물론 야사인 만큼 신빙성은 그다지 크지 않다. 프로코피우스의 비사부터가 당대의 노골적인 가십과 루머에 기초하고 있다.[6]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 플라비우스 스틸리코, 아우렐리우스 암브로시우스등이 대표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