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스타시우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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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2.1. 황제 즉위 이전
2.2. 순탄치 않았던 황제 즉위
2.3. 아나스타시우스 개혁
2.4. 아나스타시우스 전쟁[1]
2.5. 국방력 강화
2.6. 비탈리아누스의 반란
2.7. 사망
3. 여담
4. 참고자료

라틴어: Anastasius I Dicorus (Flavius Anastasius Augustus)
그리스어: Ἀναστάσιος Α´ Δίκορος

1. 개요


''' 유스티니아누스 시대의 번영을 가능하게 한 명군. ''' 대외 군사적 업적 없이[2] 내정만으로 명군으로 평가받는 흔치 않은 임금이다.
동로마 제국의 59대 황제 (재위 491년 4월 11일 ~ 518년 7월 9일). 아나스타시우스 개혁이라 일컬어지는 체제 개편으로 정부 조직을 확립하였으며, 풍족한 국고를 남겨 이후 유스티니아누스 1세 때의 재정복 원정에 필요한 예산을 확보해 둔 명군이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동로마사에 대한 관심 부재[3]로 그간 잘 알려지지 않아 왔다.

2. 생애



2.1. 황제 즉위 이전


플라비우스 아나스타시우스는 430년경 디라키움[4]일리리아인 혈통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모친은 아리우스파 기독교도였고 콘스탄티누스 왕조와 혈연적으로 관련이 있었다.[5]
청년시절 그는 에피루스 노바 속주의 재무관을 지내며 재정 관리 능력으로 호평을 받았다고 한다.

2.2. 순탄치 않았던 황제 즉위


황제 제노가 491년에 죽자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는 정통 로마인 황제를 원하는 여론이 일었다.[6] 이에 원로원과 제노의 황후 아리아드네는 전 황제의 동생 롱기누스 대신에 에피루스 지방에서 명망이 높았던 환갑의 노인 아나스타시우스를 황제로 택하고 그의 황후가 되었다. 이렇게 황녀가 정통성을 갖고서 군주로서의 남편을 택군(擇君)하는 제위계승 메카니즘은 전대 테오도시우스 왕조의 풀케리아와 후대 마케도니아 왕조조이에게서도 똑같이 나타났다. 하지만 여제까지 오른 것은 조이뿐인데, 이는 마케도니아 왕조의 통치기간이 테오도시우스 왕조나 레오 왕조와는 달리 당시 기준으로 150년이 넘었을 정도로 오래되어서 정통성 내지는 통치정당성을 더욱 높게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갑작스레 황제가 된 아나스타시우스는 정통 교회의 빈축을 샀는데,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의 입장에서는 독실한 단성론 신자였던 그는 이단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아나스타시우스는 교회와의 협상을 통해 총대주교가 제시한, 황제로서는 칼케돈 공의회를 따른다는 조건을 받아들여 종교 문제를 일단락 시켰다.
하지만 넘어야 할 산이 있었으니, 바로 청색당[7]이었다. 정통 교리를 지지하던 청색당은 듣보잡 출신에 단성론 신자인 자를 황제로 앉힐 수 없다고 반발하였다. 그들은 아나스타시우스가 교회와의 협약을 맺은 후에도 종종 불온적 기세를 보였고, 이는 512년의 대규모 반란으로 이어졌다.
신임 황제에 대한 마지막 걸림돌은 바로 제국의 신흥 세력의 본거지이자 전임 황제를 배출한 지역인 이사우리아[8]였다. 아나스타시우스 즉위 이듬해인 492년, 전임 황제 제노의 동생 롱기누스는 고향으로 돌아가 반란을 일으켰다. 새 황제에게는 다행히 스키타이 출신 장군 요한네스가 쿼타히아에서 반란군을 격파하였고 요한네스 깁부스 가 이끈 제국군은 493년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이사우리아인들은 494년부터 산간의 요새에 틀어박혀 해상으로 안티오키아에서 보급을 받으며 제국군의 공세를 버텼으나, 497년에 스키타이의 요한네스 군에게 함락되어 주동자들이 타르수스의 성문에 효수되었다. 제노의 동생 롱기누스는 498년에 요한네스 깁부스에게 사로잡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압송되었고, 아나스타시우스 황제는 히드포룸에서 포로들에게 절을 받으며 개선식을 치렀고 승리의 기념으로 황궁에 칼케 문 건설을 명하였다. 승장인 스카타이의 요한네스와 깁부스는 각각 498년과 499년에 황제와 함께 집정관이 되는 영예를 누렸다.

2.3. 아나스타시우스 개혁


납세의 기준을 현물이 아닌 화폐로 통일하여 제국에게 재정적 여유를 안겨주었다. 또한, 기존의 불안정한 구리 합금 경화는 순수한 동전인 폴리스로 교체되었다. 화폐 사용 확대와 부패에 대한 강력한 처벌로 중간 관리들의 착복이 줄어들었고 그로 인하여 농민의 부담을 줄여주면서도 동시에 국가의 세수도 증가하는 일석이조의 효과가 나타났다.
정부의 재정적 여유가 생기자 황제는 군인들의 급여를 올릴 수 있었고 그러자 많은 제국민들이 자원 입대하여 아나스타시우스 1세는 이전의 황제들과 달리 충성심이 불투명한 외래 종족 출신 용병들에 의존하지 않게 되었다. 아나스타시우스부터 티베리우스 2세까지 100년 가까이 황제는 일단 즉위하고 나서는 친정(親征)하는 일이 전혀 없이 문민 황제로서 통치했으며, 황제 본인이 총사령관으로서 전장에 직접 다시 나서기 시작한 것은 마우리키우스였다. 따라서 이 때를 군부에 대한 문민통제의 회복으로 보는 학자도 있는데, Anthony Kaldellis의 'Byzantine Republic'은 아나스타시우스 1세의 재위기에 높은 비중을 두어 책의 시간순서상 시작점을 그 때로 잡았다.

2.4. 아나스타시우스 전쟁[9]


사산 제국의 샤한샤 카바드 1세는 498/9년에 동쪽의 유목 세력인 백훈족 (에프탈) 용병의 도움을 받아 즉위하였기에 그 빚을 갚을 재원 마련의 방편으로 과세에 예민해져 있었는데, 마침 곡창지대인 메소포타미아티그리스 강이 진로를 바꾸며 남부 수메르 지방에 홍수나 나며 기근이 들었다. 이에 페르시아 조정은 사신을 파견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아나스타시우스 1세는 내전이 끝난지 얼마 되지 않은 점을 들며 거절하였다. 이에 카바드 1세는 60여 년간 동안 이어진 동로마 제국과의 평화를 깨기로 하였다.
502년 가을, 이란 군대는 유프라테스 강을 넘어 침략에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았던 테오도시오폴리스[10]를 함락시켰고 겨울에 아미다[11]를 포위하였다. 정규군이 부재한 상태에서 시민들은 필사적으로 저항, 세달을 버텼으나 결국 503년 초에 항복하였다. 이후 카바드 1세의 주력군은 오스로네[12]로 진출하여 에데사를 포위하였지만 아미다가 벌어준 시간 동안 준비를 마친 수비대에게 격퇴되었다. 한편, 동로마군도 주력군의 부재를 틈타 이란으로부터 아미다를 탈환하려 도시를 포위하였지만 역시 격퇴되었다.
그러나 동로마군은 재차 도시를 공격하여 504년에 결국 아미다를 탈환하였고, 그해에 캅카스훈족아르메니아로 쳐들어오자, 양국은 휴전에 합의하였다. 그러나 상호 간의 불신의 늪이 깊어 휴전 협상은 지지부진하게 진행되었고, 506년 초엽에는 동로마 측이 이란 사신들을 의심하여 억류한 후 이란 측이 전쟁을 불사하겠다고 하자 풀어주는 일까지 있었다. 그러다 결국 그해 11월, 니시비스에서 양측이 7년간의 휴전에 합의하였다. 후대의 역사가 프로코피우스에 의하면 동로마 측이 배상금을 지불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한다.

2.5. 국방력 강화


아나스타시우스 1세는 제국의 각각 동과 서의 관문이라 할 수 있는 디라키움다라에 대규모 요새를 건설하여 서방 세력과 사산 왕조의 위협에 맞섰다. 이에 사산 왕조는 상호 간 국경 요새 신축을 금한다는 422년의 협정에 대한 위반이라고 항의했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은 황제는 507-508년에 사산 왕조 측 니시비스에 견줄 만한 다라 요새의 완공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507년부터 512년까지 트라키아 반도[13]에 56km에 달하는 장벽을 쌓고, 아나스타시우스 성벽(Anastasian Wall)이라고 명명하였다.[14]

2.6. 비탈리아누스의 반란


이사우리아 반란 진압, 이란과의 전쟁 종결, 그리고 재정 개혁에 의한 민중의 지지를 얻게된 80대의 아나스타시우스 1세는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즉위 시에 교회와 맺은 약속 (정통파 존중)에 도전해 보기로 하여 512년 말에 평소에 자신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보이던 칼케돈 주교를 파면하고 측근인 단성론자를 주교로 임명하였다.
이에 녹색당이 격하게 반발하였고 이듬해인 513년, 그에 공감했고 칼케돈 정통파였던 트라키아의 군사령관(Magister Miletum per Thraciam) 비탈리아누스가 반란을 일으켰다. 순식간에 현재의 불가리아 일대가 정통파 반군의 손에 떨어졌고, 황제군은 연전연패 하였다. 이에 아나스타시우스 1세는 그를 발칸 반도 방면 사령관으로 임명하며 협상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고, 515년 여름에 단성론 도입을 포기한다고 선언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탈리아누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하였는데, 해군 제독 마리누스에게 격퇴되었고, 민중들도 황제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여 단합하였다.
마찬가지로 재정관리를 빡세게 해서 각계각층의 불만을 샀으며, 여러 반란을 겪었다는 공통점이 있었던 마우리키우스와 비교할 경우 분명히 아나스타시우스가 훨씬 불리했지만 이미 노년의 나이에 즉위하고도 27년이나 재위하면서 천수를 누렸다. 먼저 즉위 시점에서 나이가 43세로 적절했던(539년생, 582년 즉위) 마우리키우스와 달리 즉위 시점에서 이미 나이가 60세로 당시 기준으로는 이미 세상을 떠났거나 떠날 날을 기다릴 정도로 매우 많았고(431년생, 491년 즉위) 비탈리아누스에게 쿠데타를 당했던 510년대 당시에는 무려 '''80대'''였다. 또한 장군 출신이라 본인이 군 지휘능력을 보유하고 있어서 발칸 전선 방위라는 군사적 업적을 세울 수 있었으며 여차하면 반란을 친히 진압할 수 있었던 마우리키우스와 달리 아나스타시우스는 군무와 연이 없는 순수 문관 출신이었다. 한편, 정통 칼케돈파여서 종교계와의 마찰요소가 훨씬 적었던 마우리키우스와 달리 단성론을 믿어서 총대주교를 위시한 종교계 및 수도 시민들과의 갈등 소지가 컸고 실제로 갈등도 여럿 있었다. 마지막으로, 전임자 티베리우스 2세에게 확실하게 후임자로 지명을 받았던 마우리키우스와 달리, 아나스타시우스는 전임자에 의한 계승이 아니라 선대 황후 아리아드네의 일종의 택군(擇君)에 의한 추대로 즉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년에 권좌를 30년 가까이 유지해 내면서 자리보전만 하지 않고 나름의 업적을 세웠던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이 연장선상에서, 군무와 별 연이 없는 스스로를 550년 전쯤의 그 폼페이우스와 동일시하는 프로파간다를 본인 직속 Panegyrists를 통해 전파했던 점은 좋게 말하면 정치적으로 능수능란하고 나쁘게 말하면 철판 깔고 뻔뻔했던(...) 점이기도 하다. 이 점은 Brian Croke의 2008년작 'Poetry and Propaganda: Anastasius I as Pompey'라는 논문에서 제시되어 있는 한편, 당시 5세기 말 6세기 초만 해도 (서로마가 이미 멸망하고 나서임에도 불구하고) 흔히 그리스적 성향이 종래의 라틴적인 성향을 대부분 대체한 것으로 여겨지는 동로마가 라틴적인 고대 로마에서 그리 떨어져 있지 않고 꽤나 밀접했음을 알 수 있다.

2.7. 사망


노령의 황제는 자식이 없었고 3명의 조카가 있었다. 루머에 따르면 임박한 죽음을 예감한 황제는 궁정에 의자 3개를 비치하고 그중 하나에 황제의 인감을 숨겨 놓은 후 조카들을 궁정으로 불러 자리에 앉게 하였다. 그러나 한 의자에 조카 둘이 함께 앉았고 인감이 있던 곳에는 아무도 앉지 않았다. 숙질간 왕위계승의 이벤트에 대한 일화라는 점에서는 조선명종선조 사이에 있었던 일화를 연상할 만 하다. 아들의 부재로 조카에게 계승시켜야 했고,또 그 조카의 수까지 같은 3명이라는 것이 공통점. 하지만 조선에선 결국 그 조카 중 셋째이자 막내인 하성군이 선조로 즉위했던 것에 반해, (동)로마에선 조카 셋 다 물먹었다는 것이 차이점이다.(...) 이 셋 중 한 명인 히파티우스는 니카 반란에서 유스티니아누스를 대신할 새 황제로 추대되었다가 죽었다. 적극적으로 반란을 도모한 것은 전혀 아니고 오히려 반란군에 의해서 끌려나온 것인데다가(영어 위키백과 등에서는 'reluctant'라고 나온다), 유스티누스-유스티니아누스 시대 내내 황제들과 관계가 좋았어서 유스티니아누스는 목숨은 살려주려고 했지만 테오도라가 일단 추대되었으면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처단해야 한다는 점을 관철시켜서 결국 처형되었다.
실망한 아나스타시우스 1세는 후계 문제를 신의 뜻에 맡기기로 하였고 다음 날 아침에 처음으로 자신의 침실에 들어온 사람에게 황제위를 물려주기로 하였다. 다음 날 아침, 근위대장 유스티누스가 방에 들어온 것을 본 황제는 그를 제위 계승자로 선포하였다. 노쇠한 황제는 518년 7월 9일경에 사망하였고, 유스티누스 1세가 황제로 즉위하였다. 국고에는 제국의 3년치 예산에 해당하는 2300만 노미스마[15]가 들어있었다.

3. 여담


아나스타시우스는 두 눈동자의 색이 한쪽은 검정, 다른 하나는 푸른색인 다른 오드아이였고, 이 때문에 후에 디코루스(Dicorus, 그리스어: Δίκορος)라 불리게 되었다.


또한 이때에도 여전히 종래 다신교 시절의 황제숭배가 잔존했던 것을, 'The Roman Imperial cult Emperor Anastasius I'이라는 외국 책의 존재를 통해 알 수 있다.

4. 참고자료


  • 워렌 트레드골드: <비잔틴 제국의 역사>
  • 게오르크 오스트로고르스키: <비잔티움 제국사>
  • 존 줄리어스 노리치: <비잔티움 연대기>
[1] 영어 위키백과: Anastasian War - 페르시아와의 오랜만의 전쟁이었던 데다가, 그전에는 대부분 1~2년으로 단기간으로 끝났는데, 이때는 4년간이나 지속되었다. 또한 사이의 완충지대인 아르메니아를 끼고 싸운 것도 아니었고, 전장도 아나톨리아 동부 ~ 북 메소포타미아 ~ 시리아로 상당히 넓었다. 그래서 그런지 특정 장소의 이름 대신 황제의 이름이 붙은 것으로 보인다.[2] 내부반란진압은 여럿 있었지만 그걸 명군으로 평가할 만한 업적이라고 보기에는 어렵고, 또 소위 Anastasian war라는 전쟁이 페르시아와 있었지만, 현상유지로 끝났다.[3] 삼국지연의에서 오장원에서의 제갈량의 사후(234년) '''분량이 급격히 줄어드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다. 실제 역사적으로는 그 234년은 삼국지에 나오는 시대인 후한 말(180년대) ~ 오멸망전사마염삼국통일(280년)의 딱 중간 정도가 됨에도 불구하고. [4]알바니아두러스 [5] 그녀는 콘스탄티우스 2세에게 숙청당한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조카 콘스탄티누스 갈루스의 딸 아나스타시아의 아들 갈루스의 손자였다. 즉 콘스탄티우스 1세의 6대손인 것이고, 그 아들인 아나스타시우스는 7대손인 것이다. 콘스탄티우스가 250년생이고 아나스타시우스가 430년 안팎으로 태어났다하니 180년의 차이인데 7대손이라 하면 대강 말이 된다. [6] 제노 문서에 나오듯 그는 소아시아 중남부 이사우리아 지방의 산악 부족 출신의, 로마인 입장에서는 야만인 출신의 황제였다. 475년에 제노가 시민 봉기에 의하여 폐위당한 것도 그의 출신이 한몫했다.[7] 히드포룸의 녹색당과 청색당과의 관계는 니카의 반란 문서 참고[8] 아나톨리아 반도 중남부에 위치한 이 지역은 제국 내에서 상당히 낙후된 곳이었는데, 5세기 들어 테오도시우스 2세레오 1세가 일종의 이이제이로 군부의 게르만 출신 장군들을 견제하기 위해 이 지역 출신을 우대하여 신흥 세력으로 성장하였고, 결국 그 지역 출신의 황제인 제노까지 탄생하게 된 것이다. 다만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들은 이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었다.[9] 영어 위키백과: Anastasian War - 페르시아와의 오랜만의 전쟁이었던 데다가, 그전에는 대부분 1~2년으로 단기간으로 끝났는데, 이때는 4년간이나 지속되었다. 또한 사이의 완충지대인 아르메니아를 끼고 싸운 것도 아니었고, 전장도 아나톨리아 동부 ~ 북 메소포타미아 ~ 시리아로 상당히 넓었다. 그래서 그런지 특정 장소의 이름 대신 황제의 이름이 붙은 것으로 보인다.[10] 현 터키의 에르주름 [11]터키디야르바크르 [12] 메소포타미아 북부, 동로마령[13] 현 터키의 유럽 영토의 동부. 흑해에게 해 사이의 남북 50여km의 반도. 에디르네이스탄불 사이, 즉 당시 (동)로마의 수도권이다! 즉 수도권 방위용.[14] 5세기 후반인 469년(레오 1세 트라키안의 치세) 과 478년(제노#s-2의 치세)에 축조된 목축을 대대적으로 보강한 것이다[15] 황금 320,000 파운드 혹은 황금 14만 5천 k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