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트라프
Σατράπης.
고대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속주를 다스리는 일종의 태수.[1] 고대 페르시아어로 "속주의 보호자"라는 뜻의 "흐샤트라파반(xšaθrapāvan)"을 그리스인들이 "사트라페스"(σατράπης)라고 썼는데 이것이 라틴어로 "사트라페스"(satrapes)로 옮겨졌고, 이를 다시 영어 또는 프랑스어로 "사트라프"(영어: satrap, 프랑스어: satrape)로 옮기게 된 것이다. 사트라프가 다스리는 영역은 "사트라피"라고 한다.
키루스 2세가 메디아, 바빌로니아, 리디아 등 쟁쟁한 강국들을 제압하고 대제국을 건설한 뒤, 지방 통치를 위해 제국을 20개의 속주로 분할한 뒤 태수들을 파견한 것이 그 시초다. 사트라프들의 주 업무는 왕중왕에게 세금을 안정적으로 바치는 것으로, 이를 위해 내정, 사법, 군사, 외교(!) 등 폭넓은 권한을 가져서 해당 지역 안에서는 왕이나 다름없이 통치할 수 있었다.[2] 때로는 한 사람이 두세 곳의 사트라프 자리를 겸직하기도 했다.
하지만 사트라프들도 다른 신하들과 마찬가지로 왕중왕의 노예(bandaka)에 불과했으며, 여러 견제 장치가 마련돼 있었다. 사트라프 주변에는 항상 중앙 정부 직속의 페르시아인 자문관들이 있었으며, "왕의 눈", "왕의 귀"라 불리는 특사나 밀정들이 수시로 드나들며 사트라프들을 감시하고 견제했다. 또한 사트라프가 거느리는 속주 군대 이외에도 주요 요충지나 요새에는 페르시아에서 직접 파견된 정규군이 주둔했다. 그래서 어떤 사트라프는 왕의 칙사가 오자 바닥에 엎드려 칙령을 받았다는 일화도 있다. 또한 아케메네스 왕조는 키루스 2세와 다리우스 1세 이래로 피정복민의 문화나 습속, 구 지배계급의 지배 질서 등을 깨뜨리지 않고 관용적으로 대하도록 하는 방침을 견지했으므로 사트라프들도 이에 따라야 했다.
이론적으로는 이렇지만, 페르시아 역시 사람 사는 사회인데 당연히 FM대로만 굴러갈 리가 없다.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약해지거나 하면 사트라프가 멋대로 노는 경우도 많았고, 사트라프끼리 세력 다툼을 하거나 아예 전면적인 반란을 일으키는 경우도 있었다. 이집트와 바빌론처럼 유서깊은 지역들은 페르시아의 지배에서 벗어나고 싶어 아예 페르시아 지배를 무너뜨리고 독립을 시도하기도 했다. 실제로 다리우스 2세의 아들이자 아나톨리아의 사트라프였던 젊은 키루스[3] 는 형인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를 상대로 그리스 용병대를 동원하여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당하기도 하였다.[4] 아카메네스 왕조의 마지막 제왕이었던 다리우스 3세 또한 박트리아의 사트라프였던 베수스에게 배신으로 살해되었다.
마케도니아 왕국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해 아케메네스 왕조가 무너진 뒤에도 사트라프 제도는 사라지지 않고 존속되었고, 마케도니아인들이 각지의 사트라프로 임명되었다. 이런 마케도니아인 사트라프들은 디아도코이 전쟁 이후 셀레우코스 왕조 시대까지 존속하였다. 셀레우코스 왕조 이후 페르시아를 차지한 파르티아 시대에도 사트라프는 행정 직책으로 남아 있었으나, 파르티아가 아케메네스 왕조만큼 중앙집권화되지 않았던 데다 각지에서 부왕들과 대귀족들이 자치를 했으므로 통치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지는 못했다. 반면 상당한 중앙집권화를 이룬 사산 왕조 시대에는 왕령지와 도시의 책임자로써 다시금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사산 왕조 시대에는 "도시의 보호자"라는 뜻의 샤흐르반(شهربان )이라고 했다.
고대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속주를 다스리는 일종의 태수.[1] 고대 페르시아어로 "속주의 보호자"라는 뜻의 "흐샤트라파반(xšaθrapāvan)"을 그리스인들이 "사트라페스"(σατράπης)라고 썼는데 이것이 라틴어로 "사트라페스"(satrapes)로 옮겨졌고, 이를 다시 영어 또는 프랑스어로 "사트라프"(영어: satrap, 프랑스어: satrape)로 옮기게 된 것이다. 사트라프가 다스리는 영역은 "사트라피"라고 한다.
키루스 2세가 메디아, 바빌로니아, 리디아 등 쟁쟁한 강국들을 제압하고 대제국을 건설한 뒤, 지방 통치를 위해 제국을 20개의 속주로 분할한 뒤 태수들을 파견한 것이 그 시초다. 사트라프들의 주 업무는 왕중왕에게 세금을 안정적으로 바치는 것으로, 이를 위해 내정, 사법, 군사, 외교(!) 등 폭넓은 권한을 가져서 해당 지역 안에서는 왕이나 다름없이 통치할 수 있었다.[2] 때로는 한 사람이 두세 곳의 사트라프 자리를 겸직하기도 했다.
하지만 사트라프들도 다른 신하들과 마찬가지로 왕중왕의 노예(bandaka)에 불과했으며, 여러 견제 장치가 마련돼 있었다. 사트라프 주변에는 항상 중앙 정부 직속의 페르시아인 자문관들이 있었으며, "왕의 눈", "왕의 귀"라 불리는 특사나 밀정들이 수시로 드나들며 사트라프들을 감시하고 견제했다. 또한 사트라프가 거느리는 속주 군대 이외에도 주요 요충지나 요새에는 페르시아에서 직접 파견된 정규군이 주둔했다. 그래서 어떤 사트라프는 왕의 칙사가 오자 바닥에 엎드려 칙령을 받았다는 일화도 있다. 또한 아케메네스 왕조는 키루스 2세와 다리우스 1세 이래로 피정복민의 문화나 습속, 구 지배계급의 지배 질서 등을 깨뜨리지 않고 관용적으로 대하도록 하는 방침을 견지했으므로 사트라프들도 이에 따라야 했다.
이론적으로는 이렇지만, 페르시아 역시 사람 사는 사회인데 당연히 FM대로만 굴러갈 리가 없다.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약해지거나 하면 사트라프가 멋대로 노는 경우도 많았고, 사트라프끼리 세력 다툼을 하거나 아예 전면적인 반란을 일으키는 경우도 있었다. 이집트와 바빌론처럼 유서깊은 지역들은 페르시아의 지배에서 벗어나고 싶어 아예 페르시아 지배를 무너뜨리고 독립을 시도하기도 했다. 실제로 다리우스 2세의 아들이자 아나톨리아의 사트라프였던 젊은 키루스[3] 는 형인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를 상대로 그리스 용병대를 동원하여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당하기도 하였다.[4] 아카메네스 왕조의 마지막 제왕이었던 다리우스 3세 또한 박트리아의 사트라프였던 베수스에게 배신으로 살해되었다.
마케도니아 왕국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해 아케메네스 왕조가 무너진 뒤에도 사트라프 제도는 사라지지 않고 존속되었고, 마케도니아인들이 각지의 사트라프로 임명되었다. 이런 마케도니아인 사트라프들은 디아도코이 전쟁 이후 셀레우코스 왕조 시대까지 존속하였다. 셀레우코스 왕조 이후 페르시아를 차지한 파르티아 시대에도 사트라프는 행정 직책으로 남아 있었으나, 파르티아가 아케메네스 왕조만큼 중앙집권화되지 않았던 데다 각지에서 부왕들과 대귀족들이 자치를 했으므로 통치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지는 못했다. 반면 상당한 중앙집권화를 이룬 사산 왕조 시대에는 왕령지와 도시의 책임자로써 다시금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사산 왕조 시대에는 "도시의 보호자"라는 뜻의 샤흐르반(شهربان )이라고 했다.
[1] 한국어 번역은 통일되어 있지 않다. 학자나 번역자들에 따라 태수(太守), 총독(總督), 지사(知事) 등으로 번역되곤 한다.[2] 그리스와 인접한 소아시아 지역의 사트라프들은 펠로폰네소스 전쟁 당시에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아테네 혹은 스파르타에 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스파르타의 명장인 리산드로스는 소아시아 지역의 사트라프들로부터 지원받은 돈으로 함대를 만들어 아테네 해군을 무찌르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3] 키루스 대왕과 구분하기 위해 흔히 "젊은 키루스(𐎤𐎢𐎽𐎢𐏁)"라 불린다.[4] 당시 그리스 용병이었던 크세노폰이 젊은 키루스의 편에 서서 싸우다가 키루스가 패망한 후 부하들과 함께 온갖 고난 끝에 그리스로 생환한 후 회고록인 아나바시스를 저술한 일화가 특히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