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광복군정부

 

1. 개요
2. 상세


1. 개요


大韓光復軍政府
1914년 이상설을 정도령으로 하여[1]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 수립한 망명 정부. '''한국 광복군과는 다르다!'''

2. 상세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1911년에 조직된 권업회(勸業會)는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해 독자적으로 사관학교를 설립했다. 러일전쟁 패배 이후 러시아 내에 반일감정이 팽배하던 상황을 이용하여 러시아로부터 광복군 주둔지를 조차하는 한편, 광복군 양성을 위한 비밀결사인 양군호와 해도호라는 이름의 비밀결사를 조직한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1914년에 이르면 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심으로 연해주 지역에 훈련받은 병력을 대략 '''수천여 명''' 확보한 것으로 여겨진다. 게다가 1914년은 러일전쟁이 발발한지 10년이 되던 해로 이 시기 러시아에서는 러일전쟁의 패배를 설욕하겠다는 분위기가 팽배하여 러시아와 일본 사이의 재충돌설이 나돌았다. 이러한 소문에 고무된 권업회는 시베리아와 남만주 일대에 퍼져 있는 독립운동 단체 및 그들 수하의 무장단체를 모아 독립전쟁을 주도하기 위한 목적으로 '''대한광복군정부'''를 수립한다.[2] 수립년도는 1914년으로 3.1 운동 5년 전이며, 최초의 국외 임시정부라는 역사적 의의가 있다.
대한광복군정부의 지휘 하에 있던 광복군의 규모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당시 조선총독부의 문서에 따르면, 위에 언급된 1914년 당시 '''3만 명'''의 시베리아 병력을 제외하고도 중국 영토였던 만주에서 수천 명, 미주에서도 855명의 한인이 훈련받고 있었다고 한다.[3] 대한광복군정부는 이들을 중심으로 국외의 모든 독립운동을 주도하면서 '''본격적인 독립전쟁을 준비하였지...만...''' 1914년 8월에 세계가 1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로 빠져들어가자 '''러일전쟁 10년만에 러시아 제국은 일본제국과 동맹관계'''가 되고,[4] 이에 따라 러시아 내에서 한인들의 정치·사회활동은 금지된다.[5] 결정타는 이 해 9월 대한광복군정부의 건립 모체가 된 권업회가 해산당하고 만 것. 이에 '''대한광복군정부는 설립 1년도 안되어 크게 타격받고 더 이상 활동을 지속할 수 없어 해체되었다.'''

[1] 제2대 정도령으로는 이동휘가 선임되었다.[2] 또한 이 해는 조선인들이 연해주로 이주한 지 정확히 50주년이 되는 해였고, 이에 따른 기념식을 통해 동포들로부터 많은 지원, 특히 군자금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도 정부 수립을 이끈 동력 중 하나였다.[3] 이들은 군사훈련을 받아 확실히 무장투쟁에 동원 가능한 인력이었으며, 훈련받지 않았지만 무기는 구비하고 사용법을 익힌 이들은 '''수십여 만에 이르렀다 한다.'''[4] 독일이 동맹국 중 리더인데, 연합국은 지정학적으로 독일의 좌우에 해당하는 영국과 러시아가 있었다. 이때만 해도 일본은 아시아에 거대 식민지가 없는 독일보다 이미 열강들의 점령지인 영국의 인도, 미국의 필리핀을 인정하고 그들과 동맹관계를 유지하여 조선의 지배를 인정받고자 했다. 특히 영일동맹으로 영국과 동맹관계를 유지하던 중 유럽의 1차세계대전으로 어제의 적 러시아와 동맹관계가 형성된 것. 여담으로 30년 뒤 2차세계대전 때 일본은 아시아 전역으로 식민지를 넓히려 했기에, 기존의 식민지 지배국인 영국, 미국과 충돌하고 독일과 동맹을 맺게 된다.[5] 러시아 내 독립운동이 원활하게 된 것은 러시아 제국이 무너지고, 적백내전소련이 건국되어 연해주에 공산주의 이념이 자리잡게 된 1920년 중반 이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