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중석 축구단
1. 개요
대한중석 축구단은 대한중석의 상동광업소가 있던 강원도 영월군 상동 광산 지역에서 1956년에 창단되었으며, '''대한민국 최초의 실업 축구 선수단'''이다.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에 의해 1960년대 최고의 전성기를 보냈다. 1972년 순수 직장인 동호회처럼 일주일에 2일씩만 축구를 하라는 회사의 방침에 의해 선수들이 반발하면서 사표를 제출하면서 해체되었다.
2. 역사
1952년부터 대한중석 창립시부터 이미 회사 내에 축구단이 존재했으나 직장동호회 수준이었다고 하며, 1956년 실업 축구단을 창단한 이후에도 영월 상동광산 주변의 환경이 열악하여 제대로 된 운동장이 갖춰지지 않은 상황에서 훈련을 하고 훈련 외 근무시간에는 광부들과 함께 채굴 작업에 선수들이 참가하는 열악한 수준을 면치못했다고 한다.
이후 축구에 관심이 많던 박태준이 1964년 대한중석에 부임한 후 회사가 흑자전환 되는 등 안정화되자 이전부터 구상해뒀던 축구팀을 개편ㆍ정비하여 이전과는 전혀 다른 팀으로 만들었다. 먼저 대한중석 축구단 초창기부터 줄곧 팀을 위해 일해온 한홍기 씨를 코치로 선임해 힘을 실어주고, 국가대표 선수였던 함흥철, 김정석, 조윤옥, 석효길, 황종현, 최재모, 김창일, 박수일, 최상철 등 내로라하는 스타급 플레이어들을 영입, 국내 최고급 대우와 체계적인 훈련 스케쥴을 보장해 창단하자마자 명실상부한 국내 최고의 강팀으로 발돋움했다. 이후 1965년과 1966년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를 연거푸 우승했고, 1967년에는 초대 아시안 클럽 챔피언십에 한국 대표로 참가해 셀랑고르 FA와 서울/말레이시아 2연전을 치르기도 하는 등 국제 무대에서도 명성을 떨쳤다.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북한 축구 국가대표팀이 8강에 오르는 대파란을 일으키자, 1967년 2월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형욱의 지시로 창설한 양지 축구단에 대한중석 핵심 전력을 차출당하면서 전력이 급격히 약해졌다. 여기에 금융단 축구팀들의 잇따른 창단으로 인해 선수들이 유출되고, 축구단의 후원자이던 박태준이 1968년 포항제철 사장으로 전임하였으며, 팀의 수장이었던 한홍기 감독은 1970년 청룡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옮겨감에 따라 대한중석 축구단의 존립 기반이 뿌리부터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결국 1972년 경영상 흑자임에도 불구하고 경영합리화라는 명목으로 주 2일만 축구를 하고 나머지 시간은 근무를 하라는 회사의 방침에 선수들이 반발하여 사표를 제출하면서 축구단은 해체되고 말았다.
해체 1년후인 1973년, 포항제철소 1기가 준공되자마자 박태준이 포항제철 축구단를 창단함에 따라 대한중석 축구단의 잔류 멤버와 스탭진, 양지 축구단이 해산되면서 예편한 이회택 등 신진 멤버가 합류해 포항제철 축구단을 구성했다. 감독부터 코치, 선수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멤버구성이 대한중석 축구단과 상동해, 대한중석 축구단을 포항 스틸러스의 전신으로 보기도 한다.
3. 시즌별 개요
4. 홈구장
강원도 영월에 있을 당시에는 축구장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논두렁에서 훈련하는 안습한 시절도 있었으나, 박태준이 부임한 이후인 1966년부터 대한중석 본사가 있던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문래동 내 잔디 구장을 마련하고 그곳을 홈구장으로 사용했다. 해당 구장은 론그라운드와 나이터 시설이 갖추어져 당시로선 최신식 구장이었으며, 기타 제반 시설도 좋았기 때문에 효창구장과 경기가 중첩될시 금융단리그의 경기가 열리기도 했으며, 중석팀이 해체된 이후에도 한국으로 원정을 온 해외 국가대표팀의 연습구장으로 활용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