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코

 


'''포스코 '''
'''POSCO'''('''PO'''hang Iron & '''S'''teel '''CO'''mpany)
[image]
'''정식명칭 '''
유한회사 포스코
'''영문명칭 '''
Posco Co., Ltd.
'''설립연도 '''
1968년 4월 1일
'''설립자 '''
박태준
'''대표이사 '''
최정우, 장인화
'''국가 '''

'''업종명 '''
제철업
'''기업규모 '''
대기업
'''상장여부 '''
상장기업
'''상장시장 '''
유가증권시장 (1988년 ~ 현재)
뉴욕증권거래소 (1994년 ~ 현재)
런던증권거래소 (1995년 ~ 2015년)
도쿄증권거래소 (2005년 ~ 2015년)
'''종목코드 '''
005490(KRX), PKX(NYSE), PIDD(LSE), 5412(TYO)
'''본사 '''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동해안로 6261 (괴동동)
'''웹사이트 '''
공식 홈페이지 노조 홈페이지
'''시가총액 '''
21조 3,171억원 (2020.11.24)
'''자본금 '''
4,824억 3백만원 (2019)
'''매출액 '''
30조 3천억원 (2019)
'''영업이익 '''
2조 5,863억원 (2019)
'''당기순이익 '''
1조 1,757억원 (2019)
'''직원 수 '''
17,553명 (2020.09.30)
1. 개요
2. 지배구조
3. 연혁
3.1. 창업 및 포항제철소 건설
3.2. 광양제철소 건설
3.3. 이후 현재까지
3.3.1. 대략적인 개관
3.3.2. 2018년 ~
3.3.3. 광양제철소 폭발 사고
3.3.4. 리튬 호수 매입
4. 역대 슬로건
5. 역대 임원
5.1. 명예회장
5.2. 대표이사 회장
5.3. 부회장
5.4. 대표이사 사장
5.5. 대표이사 부사장
6. 특징 및 여담
6.1. 오너가 없는 기업
6.4. 초대 회장
6.5. 비판
6.6. 교육
6.7. 직원 복지
6.8. 노동조합
6.9. 광고
6.11. 기타
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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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포스코그룹의 모기업이자 철강업체이다.

2. 지배구조


주주명
지분율
국민연금공단
12.19%
블랙록
5.23%
포항공과대학교
2.27%[1]

3. 연혁



3.1. 창업 및 포항제철소 건설


[image][2]

포항종합제철공장 착공식

포항종합제철 제2기 설비공사 준공식 및 화입식

포항종합제철, 제 3기 설비확장공사 준공식

포항종합제철, 제 4기 설비 준공식
박정희 대통령은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준비하고 있던 중 기초산업으로 철강 산업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 경제사정으로 볼 때 국내자금으로 종합제철소를 짓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1인당 국민소득이 채 100달러에도 미치지 못했으며, 제철소 건설을 위해 주식을 공모했지만, 목표액 33억 원의 0.4%인 1,300만 원만 모였을 뿐이었다. 종합제철소 건설 계획은 다들 무모한 일이라며 반대를 했고 미국, 일본 등 선진국에서는 이를 두고 과시용 사업이라며 비웃기도 했다.
종합제철소 건립이 본격적으로 추진된 것은 1965년이었다. 그 해 5월 박정희 대통령은 미국 피츠버그 철강단지를 방문해 제철소 건립에 대한 의지를 더욱 더 다지게 되었고 미국의 제철소 건설 기술 용역회사인 코퍼스(Koppers Co. Inc)의 포이(F. Foy) 회장을 만나 이 의견을 피력하였다. 포이 회장은 국제제철차관단을 만들어 종합제철소 건설자금을 조달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하였다.
부지 선정에서도 잡음이 있었는데, 당시 경제기획원 경제협력국장이었던 황병태[3] 등의 에 의하면 당시 대한중석 사장이던 박태준이 종합제철추진단장으로 사업계획을 짜고 있었는데 제철소 후보지는 충남 서천(비인)[4], 경남 울산[5][6], 삼천포[7] 등 3곳이었고, 포항은 후보에도 없었다고 한다. 그 당시에도 자기고향 챙기기는 여전해서 충남 출신인 공화당 김종필 의장과 김용태 원내총무(현재의 원내대표격)가 서천을 밀고, 이후락 대통령비서실장이 울산을 밀고, 박정희의 대구사범학교 동창 서정귀[8]가 삼천포를 밀고 있었다.[9] 큰 돈이 들어가는 사업인 만큼 박정희는 세 부지를 둘러보고 신중히 결정할 수밖에 없었는데 황병태만 있는 자리에서 슬쩍 물어보고 포항에 대한 설명[10]을 들은 후 연극을 하자고 했다고 한다. 이후 열흘쯤 후 경제동향 보고회 자리에서 뜬금없이 황병태를 찾은 후 제철소 부지 설명을 요구하고 포항 이야기를 하게 하더니 즉석에서 포항으로 낙점했다고 한다.[11]
종합제철소 건설은 시작부터 장애물이 많은 상황이었다. 세계은행은 채산성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으며, 국내외의 많은 기관이나 회사들도 마찬가지로 제철소 건설을 회의적이라 보았다. 그러나 산업화 초입에 들어선 입장에서 철강의 자체생산은 필수불가결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제철소 건설을 성사시켜야 했었다고 한다.
1969년 1월 하순 하와이. 박태준은 와이키키 해변을 걷고 있었다. 종합제철소 건설에 쓸 자금 조달을 위해 미국 워싱턴까지 날아갔지만 믿었던 국제제철차관단(KISA)의 프레드 포이 대표에게 퇴짜를 맞았다. 세계 철강업계와 금융기관들은 이름조차 낯선 후진국 대한민국에다 종합제철소를 짓는 것이 성공할 수도 없고, 필요하지도 않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박태준은 쏜살같이 콘도로 돌아와 박정희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미국에서 협상은 실패했지만 마지막 방법이 있습니다. 대일 청구권 자금을 전용(轉用)하는 것입니다.

일본이 식민지배 기간 끼친 각종 피해에 대한 보상청구로 받기로 한 무상 3억달러, 유상 2억달러의 자금 중 농수산 지원 용도로 사용하기로 한 자금을 제철소 건설로 돌려서 활용하자는 이야기였다.
이 말을 들은 박정희 대통령은

기막힌 아이디어군. 대일 청구권 자금이 1억달러는 남아 있을 거야. 일본 정부는 임자가 설득해

당시 정치권은 농수산 지원 용도로 쓰일 자금을 전용하는 데 반대했다. 국회의원의 80%가 농촌 출신이었기 때문. 하지만 박정희와 박태준은 국가의 농수산업 대신 제철소를 선택했다. [영남일보를 통해 본 현대사] <7> 구미공단·포항제철 건설
일본에 건너가 야하타 제철의 이나야마 사장과 신일본제철의 나가노 시게오 사장, 일본강관의 아카사카 다케시 사장 등 철강산업의 주역들을 만나 일일이 설득해 일본정부는 제철기술을 제공하기로 했고, 신일본제철의 기술로 지어지게 합의를 보게 되었다. 1968년 4월 1일 회사를 설립하고 1970년부터 건설에 들어간다. 이 때 박태준 회장은 첫 삽을 뜰 때 “실패하면 역사와 국민 앞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짓는 것이다. 그때는 우리 모두 우향우해 영일만에 몸을 던져야 할 것”이라고 했다.
예정보다 일정을 1개월 앞당긴 1973년 6월 9일 마침내 용광로에서 첫 쇳물이 흘러나왔는데 이는 경부고속도로 건설비용의 3배에 해당하는 1205억원의 자금을 쏟아부은 결과물이었다. 조업 첫해인 1973년 포항제철은 매출액 1억달러, 순이익 1200만달러(약 46억원)를 달성했다. 이로써 포항제철은 세계 철강 역사에서 제철소를 가동한 첫해부터 이익을 낸 유일한 기업이 됐다. 하지만 아직 국제규모에 크게 밀리는 기업이라 확장이 절실했고 제철소 4기가 완성될 때까지 13년이 걸렸다.
1978년, 중국의 최고실세로 떠오른 덩샤오핑(鄧小平)이 신일본제철을 방문해 중국에 포항제철 같은 제철소를 지어달라고 요청했는데 (토법고로삽질을 경험한지 얼마 안된 시점이라 부러움이 이루 말할 수 없었을 듯) 이나야마 신일본제철 회장은 “제철소는 돈과 기술로만 짓는게 아니라 사람이 짓습니다. 박태준 같은 사람이 없으면 포항제철과 같은 제철소는 지을 수 없습니다. 포항제철은 기적입니다.”라고 정중하게 거절한 일화가 있다.

3.2. 광양제철소 건설



1987년 광양제철소 1기 준공식

1988년 광양제철소 2기 준공

1990년 광양제철소 3기 준공

1992년 광양제철소 4기 준공
'''현대차그룹'''의 현대제철과의 치열한 경합 끝에 포항제철 측이 제2제철소 사업권을 갖게 되었고[12], 지리적인 영향을 다각도로 종합해서 전두환 정권 때 광양만에 있는 금호도가 제2제철소 부지로 결정되었다. 다른 후보지[13]울진은 너무 북쪽에 있어 안보 위협이 문제가 되고, 서산시·태안군의 아산만은 수심이 얕고 조수 간만의 차가 크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반면 광양만은 수심이 깊고 조수간만의 차도 그다지 크지 않았을 뿐더러 전라도에 있다는 점에서 균형발전에도 들어맞아 높은 점수를 받았다.
실제로는 광양만이 최적의 입지인데도 아산으로 하라는 압박이 있었다고 한다. 부지가 광양만으로 정해진 이후에도 포철 고위직들이 "호남인데..."라며 난색을 표하면서 광양만에서도 경상도 쪽인 하동군에 짓자는 말을 했으나, 박태준 회장이 직권으로 광양으로 결정했다고 한다.[14] 이러한 이야기들이 보여주듯이 '''박태준이라는 상식과 합리적인 사고를 갖춘 유력자가 없었다면, 광양제철소는 없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한발 더 나아가자면 여수국가산업단지까지 말이다.[15] 부지조성작업을 거쳐 1985년 시작된 광양제철소 건설은 1992년 4기 공사가 완결됨으로써 포스코는 조강생산 2,080만 톤(연간)을 달성하게 되었다.
[image]
제철소 부지가 굉장히 크다. 대지 넓이가 무려 '''2,080만㎡'''(630만평)[16]로 세계 최대 규모의 제철소이며 대한민국 기업이 운영하고 있는 생산공장 중 단일부지로는 제일 넓다.[17] 1992년 제철소가 세워진 이후에도 잦은 간척 사업이 이뤄지면서 넓이가 더 넓어졌다. 여의도 면적의 7배에 달하며 기초자치단체서울 성동구의 경우 면적이 1,684만㎡ 정도인 것을 볼 때 일개 제철소 규모가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철소 견학을 가 보면 공장 안내를 해주는 간부직원이 "포항제철소는 주조부터 압연까지의 공정이 U자 형태로 돌아나오게 배치되어 있지만, 광양제철소는 그보다 뒤에 지은지라 신기술이 적용되었고 부지도 훨씬 넓어서 용광로 주물부터 압연까지 전체 공정이 일자형으로 설계되어 있다"고 설명해주는 것을 들을 수 있다. 제철소 뒤에 있는 금호동 사원 주택단지까지 합치면 조그마한 신도시[18]라 불릴 정도. 실제 제철소와 광양 시내는 교량으로 연결된 또 다른 도시처럼 구성되어 있다.
여담으로 이 광양제철소가 들어선 광양만 지역은 본래 어업, 특히 김 양식이 대단히 발달한 지역이었다. 마침 김(金)과 철을 뜻하는 한자가 같아서 호사가들이 이에 대한 말을 많이 하는 편. 광양제철소 한켠에 이를 기념하는 비석이 남아 있으며 현지 어민들은 이주 보상금 및 제철소 취업의 우선권 등의 보상을 받고 광영동 등에 이주했다.

3.3. 이후 현재까지



3.3.1. 대략적인 개관


이후 포스코는 1993년 김영삼 정부의 세무조사로 박태준 회장이 일본으로 떠나는 등[19] 체제가 흔들리면서 부진을 겪을 뻔 했으나 다행히 위기를 모면했다. 박태준 회장은 1997년경 재보선으로 복귀했고 DJP연합으로 정권교체를 이루고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면서 기업은 다시 안정되었다. 그 사이 1994년에는 뉴욕증권거래소, 1995년에는 런던증권거래소에 각각 상장되는 등 기업가치를 높였으며, 외환위기 이후 2000년에는 정부지분을 완전 매각함으로써 '''민영기업'''으로 거듭나게 되었다.[20] 2002년에는 공식 회사명을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에서 "포스코"로 변경[21]하였고, 덩달아 CI도 변경했다.
[image] [image]
2007년에는 차세대 제선 공법인 파이넥스 상용화 설비를 준공하여 운영 중이며, 인도베트남을 중심으로 해외 사업을 진행 중이다.
포스코의 경우 외부에서 그룹 회장이 온 경우는 단 한 번, 김영삼 정부 시절 박태준 사단을 퇴출하고 김영삼 전 대통령이 임명한 김만제 전 회장 뿐이다.[22] 이외에는 모두 포스코 내부 인사가 임명되었는데, 특히 이구택 전 회장은 포스코 공채 1기이다. 하지만 공기업에서 출발한 기업이니만큼, 여전히 정부의 입김에서 자유롭지는 못한 편이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박태준 사단은 대거 복귀하였는데 김대중 정부 시기 5대 유상부 회장은 노무현 정부 출범 이후 6대 이구택 회장에게 자리를 내주고 이구택 회장은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7대 정준양 회장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회장 교체 과정에서 모두 정치권 개입이 있었다는 잡음이 있었다. 그리고 정준양 회장도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사퇴(...)했고 후임으로 권오준 회장이 취임했다. 그리고 권오준 역시 문재인 정부 성립 11달 만에 사임하며 그 전통(?)을 이어갔다.

3.3.2. 2018년 ~


'''7년만에 최고 수익을 갱신했다.''' 오랜 적자 속에서 나온 흑자로 포항시, 광양시의 경제가 좋아질 것으로 보고있다.이후 새로 취임한 회장의 현장경영의 원칙 따라 중요 부서가 광양과 포항으로 이동된다. 서울로 가지고 갔던 전 회장과는 다른 행보이다.
철강업계 '10일 조업중지'에 "사실상 운영중단 처분" 초비상(종합2보)
철강업계, '10일 조업중지'에 강력 반발
철강업계, 지자체 조업정지 10일 처분에 "문 닫으라는 얘기냐"
'10일 조업정지' 선고한 지자체…논란 확산
2019년, 충청남도, 전라남도, 경상북도 등 여러 지자체에서 포스코와 경쟁사인 현대제철의 제철소 핵심 설비인 고로(용광로)에 대해 10일 조업정지 처분을 내렸다. 이에 업계는 철강산업 전반적으로 천문학적인 손실이 날 위기에 처했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경쟁사인 현대제철은 이번 조치로 보수 비용을 제외하고도 8000억원의 손실을 예상했다. 환경단체들은 "포스코와 현대제철이 제철과정에서 생긴 오염물질을 저감시설 없이 블리더[23]를 통해 공기 중에 배출해왔다"며 민원을 제기했고, 지자체는 대기환경보전법을 적용해 행정처분을 결정했다.
하지만, 블리더 말고는 대체제가 없기 때문에 산업 특성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한국철강협회는 "고로 안전밸브 개방은 전 세계 제철소가 지난 100년 이상 적용해온 안전 프로세스"라며 "조업정지 이후 고로를 재가동한다 해도 현재로선 기술적 대안이 없다"고 했다. 협회는 세계철강협회(WSA)에 문의한 결과, "안전밸브를 열어 배출되는 소량의 잔여가스를 완전히 제거할 수 있는 해결 방안은 없다"는 답변을 받았다고 전했다.
또 환경단체와 지자체는 법령 위반의 근거로 대기환경보전법 제31조 2항을 들었는데, 여기서는 방지 시설을 거치지 않고 오염물질을 배출할 수 있는 공기조절 장치를 설치하는 행위를 금하고 있다. 다만 ‘화재나 폭발 등의 사고를 예방할 필요가 있어 시·도지사가 인정하는 경우’라는 예외조항이 있는데 블리더는 화재나 폭발 등의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시설로, 정확히 이 예외조항에 해당한다.
그리고 10일 조업정지 처분이 실질적으로는 10일 동안 공장을 멈추는 정도가 아니라, 연간 400만 톤의 쇳물을 생산하는 고로가 멈추면 쇳물이 굳어져 복구 작업에만 3개월 이상이 걸린다.
비슷한 시기에, 중국의 스테인리스강 제조업체 칭산(靑山)철강이 한국에 대규모 냉연공장 건설을 추진하면서 # 이번 조치가 궁극적으로 중국에 국내 철강 시장을 내어 주는 상황을 초래한다는 우려도 제기되었다.
한대정 민주노총 포스코 지회장도 해당 조치에 대해 "블리더는 노내 압력을 정상상태인 2.3~2.7 Bar(기압 단위)로 조절하는 안전밸브로, 노내 압력이 급격히 올라갈 경우, 안전사고 예방을 위해 자동 또는 주기적으로 열어 철광석과 코크스를 녹일 때 사용하는 석탄에서 나오는 일부 일산화탄소와 압력을 맞추기 위해 주입하는 수증기를 배출한다. 고로에서 배출되는 이들 물질은 평소에는 회수해 발전소의 전력 생산 자원으로 보내지고 있어 고의로 오염물질을 대기에 내보낼 이유가 전혀 없다. 다만 밸브가 자동으로 열리면 의도하지 않는 상태에서 오염물질이 대기로 배출되는 문제는 있지만, 주변 환경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하다"고 밝히고 이 문제를 정치 쟁점화하지 말고 노사정 대화를 통해 해결할 것을 촉구했다.
조업정지 처분에 대해 경쟁사인 현대제철은 2019년 6월 7일 국민권익위원회 산하 중앙행정심판위원회에 집행정지와 행정심판을 청구하였으며, 이후 조업정지 처분에 이르게 된 데 대해 ''지자체 및 지역 환경 단체들과 소통이 부족했다"고 사과하면서도 "철강 산업은 국가 기간산업이며 자동차, 조선, 건설 등 경제 중심 산업들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만큼 제철소가 정상적으로 운영되는 가운데 우리가 미흡한 점을 보완해 나갈 수 있도록 해 달라"고 호소했다.
그 결과 6월 10일, 중앙행정심판위원회는 현대제철의 집행정지 신청에 대해 인용 결정을 내렸다. 이에 따라 7월 15일부터 10일간 내려질 예정이었던 고로 조업정지 행정처분은 보류됐다. 또한 향후 3~5개월 뒤에 열릴 행정심판도 현대제철의 손을 들어준다면, 조업정지 10일 행정처분은 없던 일이 된다. 포스코 역시 같은 행정처분을 받았으므로 동일한 혜택을 볼 가능성이 있다.

3.3.3. 광양제철소 폭발 사고


2019년 12월 24일, 전라남도 광양시에 소재한 포스코 광양제철소 내부의 폐열 자가발전시설의 가동을 시험하던 중 돌연 폭발하여, 5명이 크고 작은 부상을 입는 등 인명피해가 발생하였으며, 폐열 자가발전시설 전체가 '''형체를 간신히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완전히 파괴될 정도'''의 엄청난 폭발이 발생했다. 이 폭발음은 무려 직선거리로만 10km 넘게 떨어진 '''전라남도 여수시'''에서도 확인될 만큼 엄청나게 컸으며, 광양시 일대에 매우 짙은 연기가 퍼져 나갔다. 화재를 진압하기 위하여 광양소방서 측에서 소방대응 제 4단계로 격상하여 진화 작업을 서둘렀으며, 사고로부터 20여분 뒤, 큰불이 진압되었다는 기사가 나왔다. 이 여파로 1m 크기의 쇳조각이 이순신대교로 날아와 다리 난간이 찌그러지고 40분 가량 대교 출입이 통제되기도 했다. #1 #2 #3

2020년 11월 24일 16시 2분경 또 다시 폭발 사고가 일어나 근로자 3명이 사망했다.[24] 20여분 만에 자체 진화를 완료 했으나 2명은 현장에서 심정지 상태로 발견되었고 나머지 1명은 출동한 소방관들의 수색으로 2시간 만에 발견되었다. #1 #2 #3 #4
정확한 사고 원인은 규명중에 있지만 광양제철소 측은 당시 1고로 부대설비인 산소 배관 설비에서 필요한 산소를 공급하기 위해 배관을 여는 작업을 하는중 균열로 고압 산소가 강하게 새면서 화재로 추정되는 사고가 발생하였다고 주장한다. 완진 이후에도 추가 폭발 위험을 우려해 현장을 통제했으며 신고 시각이 16시 45분경으로 40분 정도의 공백이 존재하여 이에 대해서도 조사중이다.

3.3.4. 리튬 호수 매입


2018년에 2억 8000만 달러(약 3120억 원)를 주고 매입한 아르헨티나의 소금 평원 옴브레 무에르토 호수에 전기차 약 3억 7000만대 분량의 리튬 1350만톤이 묻혀 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는 당초 예상 매장량인 220만 톤보다 6배 이상 증가한 것으로, 이는 세계 최대 규모이다. 이 염호 확보로 인해 포스코는 세계 최초로 이차전지소재 일괄공급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이 소식이 발표되자 마자 포스코의 주가가 전일 대비 15000원(5.5%) 이상 뛰는 등 앞으로의 전망에 호조세가 보이는 중이다.

4. 역대 슬로건


  • 우리의 기업/우리의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는 포항제철 (1991~1992)
  • 다음 세대의 번영을 생각하는 포항제철 (1992~1993)
  • 신한국 건설에 앞장서는 포항제철 (1993)
  • 통신보국시대를 준비하는 포항제철 (1993)
  • 세계제일의 철강기업 (1995~1998)
  • 믿음직한 국민의 기업 (1998)
  • 철강으로 나라사랑 (1998~1999)
  • 소리없이 세상을 움직입니다 (2000~2011)
  • 아는 만큼 가까워집니다 (2012)
  • 세상의 베이스가 되다 (2013)
  • 위대함을 향해 갑니다 (2014)
  • Unlimit the Limit (2018)
  • The Power of With (2019~ )

5. 역대 임원



5.1. 명예회장



5.2. 대표이사 회장


현재 총 9명의 역대 회장 중 7명이 본사 사원 출신이다.
  • 박태준 (1981 ~ 1992)
  • 황경로 (1992 ~ 1993)[25]
  • 정명식 (1993 ~ 1994)[26]
  • 김만제 (1994 ~ 1998)[27]
  • 유상부 (1998 ~ 2003)
  • 이구택 (2003 ~ 2009)[28]
  • 정준양 (2009 ~ 2014)
  • 권오준 (2014 ~ 2018)
  • 최정우 (2018 ~ )

5.3. 부회장


  • 황경로 (1990 ~ 1992)
  • 정명식 (1992 ~ 1993)

5.4. 대표이사 사장


  • 박태준 (1968 ~ 1981)
  • 고준식 (1981 ~ 1985)
  • 안병화 (1985 ~ 1987)
  • 정명식 (1987 ~ 1992)
  • 박덕표 (1992 ~ 1993)
  • 조말수 (1993 ~ 1994)
  • 김종진 (1994 ~ 1998)[29]
  • 이구택 (1998 ~ 2003)
  • 강창오 (2003 ~ 2006)
  • 윤석만 (2006 ~ 2009)
  • 이윤 (2006 ~ 2008)
  • 정준양 (2007 ~ 2009)
  • 이동희 (2009 ~ 2010)
  • 최종태 (2009 ~ 2012)
  • 박한용 (2012 ~ 2013)
  • 권오준 (2012 ~ 2014)
  • 김준식, 박기홍 (2013 ~ 2014)
  • 김진일 (2014 ~ 2017)
  • 황은연 (2016)
  • 오인환 (2017 ~ 2018)
  • 최정우 (2017 ~ 2018)
  • 장인화 (2018 ~ )

5.5. 대표이사 부사장


  • 정준양 (2006~2007)

6. 특징 및 여담



6.1. 오너가 없는 기업


다른 대기업들과는 달리 초대 회장인 박태준은 자기 후손들에게 회장 자리를 물려주지 않았고 사원 출신들에게 회장직을 넘겼다. 비록 포스코가 공기업으로 시작되었으며 박태준에게 회장직을 승계할 수 있을 정도의 의결권이 없었던 점은 고려해야겠으나, 애초에 과거 포스코에서 상당한 양의 주식을 박태준에게 주려고 했는데 거절했다는 이야기가 있었으므로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다. 비슷한 방식을 취하는 대기업으로는 KT, 일본 NTT 및 NEC 등이 있으며, 중견기업까지 보면 유일한 박사로 유명한 유한양행이 있다.
2021년 1월 25일 기준 포스코의 주요 주주는 자사주 12.81%, 국민연금공단 11.75%, BlackRock Fund Advisors 5.23% 등이다.
그리고 포항공대를 설립하면서 학교재단에 335만주를 기부하였다.

6.2. 조직문화


포스코는 수직적인 문화를 가진 기업이다. 일단 박태준 명예회장을 위시한 창립멤버 대부분이 군인 출신이고, 제조업 중에서도 건설업과 더불어 현장이 가장 위험한 철강산업이기 때문에 수직적이고 일사불란한 문화가 강한 편에 속한다. 한마디로 군대 분위기가 강하다. 그래서인지 부사관, 장교 출신들을 그래도 조금 더 좋게 바라보는 시선이 있다. 회사 자체로는 이러한 분위기를 타파하겠다고 많은 노력을 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기대하지 않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다.
그리고 포스코 부지 내에서 속도위반이나 안전보호구 미착용 등 안전수칙 위반으로 적발된다면 협력사의 경우에는 협력사의 대표이사가 출근시간에 출근길에 나와서 전 직원들을 상대로 사과와 안전 다짐을 하기도 하고 부지 내에서 흡연이 3번 적발될 경우 이유 불문하고 포스코 출입문을 영구적으로 통과하지 못하는 등 상당히 강도가 강한 통제가 많다.
이렇게 포스코 내부적으로는 안전에 굉장히 신경을 쓰고 상황에 따라선 고압적으로 보일 정도로 강조를 하고 있지만 경쟁사인 현대제철과 함께 매년 중대 산업재해가 끊이질 않는 것을 보면 제철소 현장이 얼마나 위험하고 왜이렇게 안전에 대해서는 이러한 태도로 나오는지 간접적으로라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6.3. 연봉


포스코의 대졸 신입사원 연봉은 세전 5,200만원 정도(2016)이며, 다른 계열사도 비슷하다. 포스코 생산기술직 사원의 경우 상주근무와 교대근무로 나눠지는데 정비직이나 공장 상주 근무자는 초봉이 4,000 중후반 수준이고 교대근무자는 5000 초중반 정도 된다. 그리고 저기에 보통은 한달에 한두번씩 O.T가 있어서 이보다는 조금 더 많이 받는다. 굴뚝산업인 제철산업의 향후 미래가 그리 밝지는 않지만 회사 자체는 구조조정이 어느정도 마무리되기도 했고 고근속 근로자들의 대량 퇴직 시기가 몇년 남지 않아 가만히 놔둬도 자연 감소가 이뤄지기때문에 특별한 일이 없다면 구조조정이 일어나진 않는다.
2020년 3분기 전자공시 기준으로 평균 근속연수 19.1년[30], 평균연봉은 7,700만원 수준이다.[31]현재 빠른 속도로 세대 교체가 이뤄지고 있기때문에 지속적으로 높아지거나 할 가능은 적다. 물론 저 액수에 다른 대기업들도 매한가지겠지만 복지포인트, 자녀 대학 등록금을 포함한 학자금 전액이 지원 등 회사 차원에서 복지혜택이 있기 때문에 실질 평균 소득은 이보다 높다.
경쟁사인 현대제철지회에 따르면 생산직 교대 기준 근속연수3년차 7,000만원이상이다. 이정도로 차이나는 이유가 현대제철은 현대차그룹답게 강성노조라 현장직의 목소리가 포스코에 비해 힘이 있고 초봉과 상여 등 복지의 경우 현대차그룹을 따라가다보니 압도적인 수준이고 대기업중에서 유일하게 그로스상여제도를 도입했기때문이다. 이는 연봉이 월등하게 높은 이유가 되는데 이때문에 과거 포스코 출신들이 현대제철로 많이 넘어갔고 이는 포스코에서도 상당한 골칫거리였다. 현재는 포스코의 임금 상승률이 현대제철보다 높아 근속이 어느정도 쌓이면 급여 차이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격차를 줄일수있고 현대제철에 비해 포스코는 매달 급여액이 어느정도 일정해서 예산을 짜는데 상대적으편하다고는하나 포스코 10년차가 넘으면 그제서야 서로 격차를 줄일수있긴하다 서로 간의 장단점이 있고 두 회사는 서로 인재 이탈을 우려하여 제재를 가하고있고 요즘은 과거에 비해 환승이 많이 줄어든 편이다.

6.4. 초대 회장


초대 회장이었던 박태준은 경제에 관해 생판 모르는 군인이었음에도 적자투성이인 대한중석[32]을 맡아 1년 만에 흑자 전환시켰으며, 이후 포항제철의 초대 사장으로 임명된다. 포스코의 성장에 있어 박태준 회장의 역할은 절대적이었는데, 몇 가지 예를 들어보면 대일청구권 자금을 전용하여 제철소 설립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도 하였고, 이후 정치계에 진입하는 대신 포스코에 대해 간섭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전두환으로부터 받아내기도 하였으며, 92년 포스코 양대 제철소의 완공 이후 자신의 역할이 끝났다면서 회장직을 사퇴하였다. 정치인으로서의 박태준의 역할을 차치하고서라도, 기업인으로서 박태준은 큰 업적을 세웠다고 볼 수 있다. 역시 군 출신에 사업가이자 일본/정치의 막후에 있었던 세지마 류조도 자기보다 수완이 뛰어나다고 칭찬한 적이 있다.

6.5. 비판


박태준 회장의 말따마나 '''선조들의 피로 만들어진 회사'''[33]라고 밝혔듯 포스코 자체가 한일협정으로 일본 정부에게서 받은 대일청구권 자금 중 상당부분에 해당되는 거액을 전용하여 만들어진 회사인데, 대성공한 이후에도 당시 피해자들에게는 한푼도 낼 수 없다고 맞섰고, 그 결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가 이후 포스코에 소송을 거는 등 꾸준한 잡음이 발생하고 있다.
다만 법원에서 계속해서 포스코가 배상해야 할 의무가 없다는 판결을 내는 이유와 사실관계를 정확하게 짚고 넘어가자면 박태준 명예회장이 포스코를 창립할 당시 정부를 통해 유용한 1억 1948만 달러는 포스코의 민영화 완료 후 3조 8899억원이라는 액수로 정부에 반환한 상태이다. 문제는 4조에 가까운 거액이 정부에 반환된 이후에 정부에서 어디에 얼마를 썼는지 사용처는 불분명하다.[34] 그리고 2020년 현재까지도 대일청구권 자금을 유용한 기업,은행,공공기관들 중 도의적으로 기금을 출연한 곳도 포스코가 유일하다.
포스코 스스로에게는 일본 기업들처럼 나라의 강제징용 제도를 직접 이용하여 금전적인 이득을 보았다는 사실은 없다. 40여년이 지나서는 롯데그룹이 징병제를 직접적으로 이용하여 금전적인 이득을 취하려는 시도를 하는 등[35] 포스코를 뛰어넘는 짓거리를 저지른 사례도 있었고, 50여년이 지나서는 국방부가 직접 민간기업을 위하여 군인을 징발하는 등 롯데와는 차원이 다른 사례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하여 이들 사례가 포스코에게 결코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비록 롯데의 시도 및 민간기업을 위한 국방부의 장병 징발이 포스코의 설립 배경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사안이라고 해도, 대일청구권 자금을 전용(轉用)하여 설립되었다는 사실은, 설사 포스코가 망해도 변치 않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는 롯데가 징병제를 써먹는 데에 성공했다고 하여도 이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6.6. 교육


포스코의 교육지원은 포스코교육재단을 중심으로 한 초·중·고등학교 교육과 포항공과대학교·포항산업과학연구원(RIST)·포항가속기연구소 등 고등교육·연구로 나뉠 수 있으며, 이 역시 상당히 혁신적인 역할을 하였다.
포스코교육재단은 산하에 4개 고등학교, 2개 중학교, 4개 초등학교와 몇 개의 유치원 및 어린이집을 운영하고 있는데, 직원들이 자녀 교육에 신경쓰지 않고 마음 편히 일할 수 있도록 설립했다는 특징이 있다. 초등학교의 경우 특별활동에 상당히 많은 투자를 해 왔으며 많은 분야의 대회에서 수상을 하고 있으며, 중학교 역시 이의 연장선상에 운영되고 있다. 포항제철고광양제철고자율형 사립고로 운영되며[36] 포항제철공업고등학교는 전문계 고등학교 중에는 매우 잘나가는 학교이다. 지금은 마이스터고등학교로 지정되었다. 여기 졸업하면 어떻게든 포스코 관련된 회사는 보내준다고 보면 된다 [37] 학생들의 소질을 최대한 계발해 주자는 것이 이 교육재단의 목표였는데, 7~80년대에 이런 목표를 세웠다는 사실이 특기할 만하다.
포항제철고나 포철공고 모두 경북권에서는 알아주는 일반계/전문계 고등학교이고, 광양제철고 역시 90년대 초반부터 매년 서울대 진학생을 5명 안팎으로 배출하는 학교였다.[38] 광양제철고는 현재 매년 10명 안팎의 서울대 진학생을 배출하는 학교로 거듭났다. 문제는 포항이나 광양이나 학구열을 비롯한 치맛바람이 쎄다는 것(...) 따라서 과외[39]를 비롯한 각종 선행학습이 지나친 편이다. 이는 부모들 간의 경쟁의식이 상당히 강하기 때문이다. 각 학교가 위치한 직원주택단지는 부모간의 학력이나 소득, 지위의 차가 거의 없기 때문에 자녀들의 학교 성적이 부모들의 자존심에 정말 큰 영향을 미쳤다.
2015년에는 송도국제도시인천포스코고등학교를 개교하였다.[40]
포항공과대학교(POSTECH)는 박태준의 '''이공계 연구중심대학''' 구상 계획에 따라 설립된 학교로, 2010년 영국 THE 선정 세계 28위 대학[41]으로 선정되는 등 우수한 평가를 받고 있다. 포항공과대학교 캠퍼스에 있는 방사광가속기는 90년대에 국내 최초로 지어진 가속기 시설이며, 국내 과학 기술 연구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포항공대와 가속기의 건설에 관한 박태준과 김호길 포항공대 초대 총장의 일화를 찾아보면 상당한 대인배스러움에 흠좀무..할 것이다. 또한 포항공과대학교 캠퍼스 내에 위치한 포항산업과학연구원(RIST)은 포스코, 포스텍과의 산학연 협동을 위해 포스코가 전액 출연하여 설립한 민간연구기관이다.

6.7. 직원 복지


지금에 와서야 기업들이 직원 복지에 신경을 많이 써서 과거와는 달리 그리 특별하지 않은 평범한 수준이 되었지만 과거 포스코는 직원 복지 면에서 상당한 편이었다. 다른 회사들과는 차별화된 복지 정책이 주택 정책인데, 회사가 주택을 공급하여 분양함으로써 직원들이 주택 걱정을 하지 않도록 힘쓴 바 있다. 포항제철 건립 초창기인 1960년대 직원주택과 학교 건설을 시작함으로써 쓸데 없는데 돈 쓴다고 욕을 엄청나게 먹었으나, 지금 와서 보면 상당히 진보적인 생각이 아닐 수 없다. 한국에서 1980년대 후반 이후의 울산 현대그룹 계열사들과 함께 몇 안되는 성공적인 포드주의의 사례로 손꼽히고 있다.
포항과 광양 양쪽 모두에 주택단지를 대규모로 조성하면서 당시 기준으로 주변 주민들이 질투할 정도로 괜찮은 주거단지를 마련하였다. 포항이나 광양의 주택단지를 보면 동시기에 지어진 다른 주택단지들에 비해 엄청난 녹지비율과 체육시설을 자랑하고 있다. 포항 효곡동 주택단지의 경우 '''경상북도 지곡시'''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로 포항 시가지와는 차원이 다른 주거환경을 보여준다. 심지어 포항에는 미관상 안 좋다고 (...) 전선을 모두 매립해서 전봇대가 하나도 없다. 그리고 주택 관리의 경우에도 직원들에게 매각한 이후로도 포스코 O&M 등 시설관리 계열사 측에서 주택관리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다만 그렇게 모여사는 탓인지, 기묘한 우월의식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단지 내의 사람들은 밖의 사람들보다 준법의식이 높고, 아이들은 밖과는 달리 비행청소년이 적다...라는 것 등등.[42][43] 광양의 경우 건물의 노후화, 구조 문제도 있지만 결정적으로 단지가 공장지역 바로 옆에 있는데다가 저 바다건너에는 국내 최대규모 여수화학단지가 떡하니 버티고 있어 공기가 매우 나쁘다. 자녀 교육 문제만 아니라면 그곳에서 살고 싶지 않다는 직원들이 굉장히 많은데, 자녀들을 포스코교육재단 산하 학교에 보내려면 포스코에서 조성한 주거 단지에 거주해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자녀들이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44]만 있고 그 이후로는 다들 금호동에서 탈출하려고 한다.[45]
그리고 난방비가 상당히 싸게 먹히는 편인데, 제철소에서 냉각수로 사용된 중온수를 이용하여 온돌식 난방을 하기 때문에 한겨울에 펑펑 난방을 하고 온수를 사용해도 난방비가 비교적 적게 들고, 단지 내에서의 전화는 회사 내선처럼 연결되어 있어 무료이기 때문에 전화비도 적게 든다. '''심지어 포항지역 주택단지와 광양지역 주택단지간의 전화도 내선으로 취급된다.''' 다만 생활비 자체는 물가가 비싸서 다소 많이 나오는 편이다.
사내 복지 기금으로 지원되는 복지는 크게 생활비 대출(1500만원 한도), 주택 대출(지역마다 차등), 자녀 학자금, 복지포인트, 명절 상여금, 경조사 지원이 있다.
자녀 학자금 지원에 대해서는 기존에는 한도가 없고 자녀 수에만 제한이 있었다가 자녀 2명에 8,000만원 한도로 바꿨었는데 최근에는 저출산 해결 등을 이유로 개정돼서 자녀 수는 제한이 없고 2자녀 이하일 경우 8,000만원, 3자녀 1억 2,000만원, 4자녀 이상일 때 1억 6,000만원 한도 내에 실비 지원해주는 방향으로 바꿨다.
복지 포인트의 경우 연 99만원에서 2020년 119만원 지급, 명절 상여금의 경우 60만원에서 100만원으로 상향된 바 있다.

6.8. 노동조합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의 영향 덕에 1988년 처음으로 한국노총 금속노련 소속 노조가 결성돼 조합원만 18,000여 명을 자랑했으나, 사측은 안기부 등 공권력을 동원해 이를 탄압했다. 1991년 노조 간부의 금품수수 비리 혐의로 사실상 와해돼 힘을 잃어 조합원이 10여 명으로 줄었고, 이로써 한국노총에서 제명당한 채 휴면노조화되어 노경위원회가 노사 교섭기구 노릇을 했다.[46] 그러나 2011년 6월 복수노조제가 통과돼도 실제 설립까지는 7년을 기다려야 했다.
이곳도 제철회사인지라 위험한 현장이 매우 많고 실제로 사망사고, 영구 상해 사고도 빈번히 발생하는 등 근무 환경이 가혹하기로 유명했으며, 1997년 삼미종합특수강 일부 공장 인수 후 신설법인 포스코특수강을 세웠음에도 일부 구 삼미 시절 노동자들을 고용승계하지 않아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언론의 지탄을 받고 노조를 설립하게 된 삼성에 비하면 무노조 문제가 그닥 조명을 받지 못해서 포스코의 노조 설립은 여전히 요원해보였으나, 2018년에야 금속노조 포스코지부가 창설되었다. 뒤이어 기존 휴면노조도 한국노총 금속노련에 재가입해 정식 출범했다.
2006년 당시 포항건설노조에게 본사가 점거된 초유의 사태도 겪은터라, 노조에 대한 인식이 좋을 리가 없었던 이유도 있다.
2018년 12월 12일 포스코에서는 노조위원장과 간부 2명을 해고하고 간부 2명에게는 정직이라는 중징계를 내리는 처분을 하였다. 노조에서는 포스코의 노조 와해 공작이라고 주장하고 있어서 갈등이 예상되지만 설립된지 얼마 안된 곳인지라 결속력이 많이 부족하기 때문에 제대로된 목소리를 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 이로써 민주노총은 교섭권을 잃게 되었고 한국노총이 단독으로 교섭권을 얻게 되면서 사측과 임금, 단체협상을 주도하게 되었다.

6.9. 광고


포스코는 주력 업종이 'B2B(기업간 거래)'성격을 가진 기업으로서, 일반 소비자와 직접 거래할 일이 거의 없다. 때문에 기업 이미지 광고에 주력하고 있는데, 좀처럼 국내에서는 보기 힘든, 수준 높은 광고를 여러차례 선보인 바 있다.
참조

2011 대구 세계육상선수권대회 전광판 광고

5달러 자전거 광고

I AM #STEELSTRONG 광고

포스코 2018 평창 동계올림픽2018 평창 동계패럴림픽 광고

숫자로 보는 포스코 광고

포스코 창립 50주년 기념 광고

6.10. 축구




프로축구단 2개를 거느리고 있으며, 한 프로 종목에 1사 2구단은 여기가 유일하다. 현대 두 팀은 이름만 같지 각각 현대자동차와 현대중공업이 맡고 있으며, 둘을 잇는 지주회사가 없기에 1사 2구단이 아니다.[47] 또한 야구나 배구 등지에서는 메이저리그가 신디케이트와 위성구단에 데인 것을 본받아 한 회사가 한 팀의 지분을 갖고 있으면 같은 리그에서 뛰는 다른 팀의 지분을 소유하는 게[48] 사실상 금지된다.
자세한 이야기는 포스코 설립자 박태준#s-4.1 참조

6.11. 기타


  • 정준양 회장 시절부터 강제적인 금연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또한 다이어트 정책도 실시하고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해 회사 안팎으로 회장을 비난하는 말들이 많다. 물론 금연자들은 쌍수 들고 환영하고, 다이어트의 경우에도 회사에서 전적으로 지원해주긴 하지만... 무엇이든 너무 밀어붙이면 좋은 반응만은 나오지 못하는 것은 당연지사. 그리고 현재는 유야무야된 정책이다. 물론 현재까지도 모든 사업장 및 사무소는 금연구역으로 지정되어있고 흡연 적발 시 처벌도 받지만 과거처럼 불시에 흡연 여부를 검사[49]한다던지 입사 전, 입사 후 정기 신체 검사 시 흡연 검사를 한다던지는 하지 않는다.
  • 다른 회사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이 회사는 생산기술직과 사무직 가릴 것 없이 이것저것 다 잘하는 만능형 인재를 매우 선호한다. 거기에 기본적으로 요구하는 스펙이 다른 회사보다 높은 편이다. 문과 기준 오픽 IM3 이상 혹은 이에 준하는 어학점수를 필수적으로 요구하고(포스코 직원 말로는 "철강은 기본적으로 외국에서 원료를 사 와서 완제품을 외국에 팔아먹는 것이다" 라고 하니...) 학점도 3점대 후반 이상이든지 이 이하라면 철강 관련 대회 수상경력이 있는 고스펙이어야 합격할 수 있을 정도로 입사에 필요한 스펙이 매우 높은 편이지만 이에 끝나지 않고 "사회봉사 경력" 역시 필요하다. 만약 포스코 입사를 노리고 있다면 생산직, 사무직 가리지 않고 vms나 1365 등에 등록이 되어 증명이 가능한 봉사활동을 최소 100시간 이상 하는 것을 목표로 잡고 채우는 것이 권장되고 공고에는 안써놓지만 추후 증명서류 제출 시 공고가 나온 날까지 3년 이내만 인정해준다고 되어있다.
  • 제철소 자체가 국가중요시설('가급' 국가보안시설)이다 보니 한때 네이버 지도나 카카오 지도와 같은 국내 지도에는 군부대에 준하게 표시된 적이 있었으며[50] 로드뷰는 현재도 전부 모자이크 처리되어 나온다. 전쟁물자를 생산하는 중요한 시설이므로 대한민국 해군에서 1함대 예하 방어전대를 편성하여 방어한다. 그만큼 보안도 까다롭다. 사전에 출입등록은 필수요, 당일 제철소내 작업이 있다면 신청서에 반입하는 물자를 빠짐없이 기록해야 한다. 출입증을 받으면 각 게이트에 있는 보안요원이 신청서에 적인 물자대로 있는지 차량 트렁크까지 검사하고, 신청서에 있는 물자와 일치하면 통과시킨다. 작업을 마치고 나올 때는 내부에서 승인 없이 반출하는 물자가 있는지 다시 검사한다. 그리고 제철소내 상세지도를 가지고 있다면 함부로 꺼내지 말 것. 괜히 꺼냈다가는 오해받기 쉽다.
  • 제철소가 위치한 두 지역 사원 주택단지의 선거 표심이 각자 다르다. 포항 제철동과 지곡동에서는 영남 표심과는 반대로 민주당 계열 정당 득표율이 가장 높게 나오고, 광양 금호동에서는 역시 호남 표심과는 반대로 보수 계열 정당 득표율이 호남지역에서 가장 많이 나온다. 위에 나온 이야기처럼 전국 각지에서 온 포스코 직원들의 영향이 끼친 것이다. 다만 효곡동에서 보수 계열 정당 표가 다소 낮은 것은 포항공대 교수나 학생들 같은 젊은 사람들이 유입됐기 때문이다.
  • 2018년에 포스코가 '포스코 50년사'라는 사사(社史, 회사의 역사책)를 발간하려고 하면서 박정희 전 대통령과 박태준 전 포스코 명예회장 관련 내용을 대폭 삭제, 수정시킬 것이라는 얘기가 나오는 바람에 논란이 되었다. 관련 매일신문 사설[51]

7. 관련 문서



[1] 약 198만 주. 학교 설립 당시 335만 주가 출연되었다.[2] 창립 시부터 2002년 공식적인 회사명을 포스코로 바꾸기 전까지 사용되던 로고로, '''P'''ohang '''I'''ron & '''S'''teel Company에서 P, I, S를 조합한 로고이다. 다만 워드마크는 1994년 이후 것이다.[3] 경북 예천 출신으로 경제기획원 운영차관보, 한국외대 총장, 주 중국 대사, 통일민주당 부총재 등을 지냈으며 노태우 정권기에 서울 강남 지역구 국회의원으로, 김영삼 정권 말기 문경·예천 지역구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다.[4] 서해안의 중간쯤에 위치해 있으므로 종합제철소 건립에 따른 파급효과가 전국적으로 골고루 미칠 것을 내세웠다고 한다. 반면, 약점으로는 바다의 수심이 얕아 화물선의 출입이 자유롭지 않다는 점이 지적되었다.[5] 이미 다른 공장들이 들어서고 있었으므로 제철소가 추가로 들어선다면 경제적인 상승효과를 낼 것이라는 장점을 어필하였다고 한다. 약점으로 이미 다른 공장들이 들어서기 시작한 상태여서 대단위 부지를 필요로 하는 종합제철 사업에서는 터를 잡기가 곤란하고 정유, 비료공장과 같은 기간산업체들과 한데 있어야 한다는 위험부담도 존재했다고 한다.[6] 당시는 광역시가 아니라 경상남도 울산시였다.[7] 현재의 사천시로 기존의 항만 시설을 확장하는 식으로 제철공장 부지를 마련할 경우 개발비용이 적게 들어간다는 것을 앞세웠다고 한다. 약점으로 연관공장이나 야적장을 마련할 만한 배후지가 부족하다는 것이 지적되었다.[8] 1958년에서 1961년까지 통영 지역구 민의원으로 활동했고, 재무부 정무차관도 역임했다.[9] 사실 이렇게 따지면 TK출신 박정희와 황병태가 TK챙기기를 했다고 볼 여지도 있다. 뭐 결과적으로야 성공했지만..[10] 6·25 당시 미8군 사령관으로 작전을 지휘했던 밴플리트 장군이 육군대장으로 예편한 뒤 웨스팅하우스의 고문을 맡으면서 미국 기업 대표들로 방한 투자단을 구성해 종합제철소 예비조사를 실시한 후 포항을 추천했다고 한다. 또한, 포항 바다가 깊어 추가로 준설을 하지 않아도 10만 톤급의 화물선이 드나들 수 있었던 데다 배후지도 넓었다는 장점을 들었다.[11] 예정에 없던 이야기라 김종필 의장은 다른 일정으로 참석하지 않았고 장기영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박충훈 상공부 장관, 구태회 공화당 정책의장도 뻥쪘다고 한다. 국장급이 상급자인 부총리도 모르게 질러버린 거라..[12] 현대는 이후 인천제철과 한보철강 을 인수한 뒤 현대제철을 출범시킴으로써 일관제철소를 갖게 된다.[13] 추가적으로 삼천포도 있었다.[14] 국영기업 고위직들에게서 이런 말이 나올 정도인 걸 보면 당시에 호남에 대한 지역차별이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15] 이 부지선정을 두고, 포항제철소 설립시부터 포스코 측과 합작관계를 맺어 온 일본 기업인 도멘(동양면화: 원래 미쓰이물산의 레이온사업부였다가 훗날 종합상사로 독립) 서울지사장이었던 모모세 타다시는 자서전에서 "하동 쪽으로 붙여 지으려는 것에 대해 내가 반대 의견을 낸 적 있다"라고 써놓았는데, 판단은 각자 알아서...[16] 서울 도봉구의 면적과 비슷하다.[17] 포항 포스코 부지 넓이는 약 1,200만㎡, 울산 현대중공업 공장 넓이는 약 500만㎡로 알려져 있다.[18] 공기질은 영...[19] 심지어 박태준 명예회장 라인인 황경로 회장을 대신하여 새로 선임된 정명식 회장과 조말수 사장은 나름의 개혁을 시도했고 박태준 색채 지우기를 시도했으나 결과적으로 자기들끼리 내분을 일으키며 1994년초에 동반 경질되었다.[20] 지분율만 따지고 보면 포스코는 외국계 기업이다.[21] 이전에도 대내외적으로 POSCO라는 명칭은 사용되긴 했다.[22] 1994~1998년 재임. 전두환 정부에서 재무부 장관,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을 지냈다.[23] 고로/용광로 최상부에 설치하는 안전 밸브로, 압력이 비정상적으로 올라갈 때 가스를 배출해 설비 가동을 안정시키고 작업자의 안전을 보호한다. 제철, 제강 산업에서는 없어서는 안되는 필수 설비로 분류된다.[24] 포스코 직원 A씨(40) 협력업체 직원 B씨 (32) C씨 (53) [25] 박태준의 군 선배로 동부그룹에서 고위 임원을 지내고 다시 포스코 부회장으로 복귀한 케이스.[26] 포스코 사장, 부회장 출신. 원래 박태준의 심복이었으나 정권교체 이후에는 반 박태준 행보에 함께 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조말수 사장과의 갈등으로 사임했다.[27] 첫 외부인 대표이사 회장.[28] 공채 1기 출신 회장.[29] 배우 이상엽의 외조부로, 단, 김종진 사장의 초반임기는 등기이사 신분이 아닌 그냥 '사장'이었다. 전임사장인 조말수와 전임회장인 정명식의 갈등관계를 본 김만제 회장의 조치였다고 전해진다. 퇴임 후 동국제강 대표를 맡다가 2001년 헬기 추락사고로 순직함.[30] 남자 근로자만 본다면 20.0년이다.[31] 다만 2019년 결산 공시 기준으로는 9700만원으로 나와있으니 평균 연봉에 대해서는 취사선택 바람[32] 지금의 대구텍[33] 박태준 회장의 말의 의미는 포항제철은 선조들의 피로 만들어진 회사이기 때문에 '''회사일에서 사적인 욕심을 부리거나 자기 이익을 위해 꿍꿍이를 꾸미지 말라'''는 뜻으로 한 얘기다.[34] 2006년 시민연대에서 대일청구권 자금을 전용한 모든 기업 및 공공기관에 답변요구서를 제출했는데 이때 포스코, 한국도로공사, 코레일, 수자원 공사는 반환 완료라는 답을 했고 다른 기관, 기업들에는 답을 받지 못하였다.[35] 롯데월드타워를 짓기 위해 활주로 이전 공사를 해야 했다. 그런데 이 때 롯데는 '현역병은 인건비가 사실상 공짜이니 서로 좋은 것 아니냐'며 '''아예 대놓고''' 공군 현역병을 활주로 공사에 직접 써먹으려고 시도했다가 공군 수뇌부에게 걸려 크게 털린 바 있었다.[36] 이 두 학교가 자율형 사립고등학교를 신청한 이유 중 하나는 '''직원 자녀들을 확실하게 받아주기 위해서'''이다.포항은 60%를, 광양은 70%를 포스코 및 계열사, 협력사 자녀로 뽑는 전형이 따로 있다.[37] 그리고 이것도 옛말인 게, 2010년 이후부터는 포스코에서 군대 때문에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사람은 잘 안뽑기 시작하면서 현재는 탑클래스 그룹을 제외하면 추천서는 구경도 못한다.[38] 당시 광양의 경우 워낙 촌이었기 때문에 공부 좀 한다는 학생들은 모두 순천고·순천여고로 유학가는 형편이었다.[39] 포항의 경우 포항제철고를 비롯한 지곡단지가 포항공과대학교 바로 옆에 위치하여 과외교사 공급이 매우 용이하다. 아예 포스텍 수학과 졸업하고 눌러앉아 학원교사하는 경우도 있다.[40] 포스코건설, 포스코인터네셔널 등 송도국제도시에 위치한 포스코 계열사들의 자녀들이 많이 재학 중이다. 학교 부지가 포항-광양 두 제철고교보다 많이 협소하다.[41] 영국 타임'지'가 아닌 The Times Higher Education 이라는 영국의 고등교육전문지이다.[42] 사실 일부 고위 임원급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생산직 직원들 역시 일반 시민들과 다를 바 없는 성장배경과 학력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직원들의 연봉이 도시 서비스 산업의 기반이 되는 탓에 이러한 우월의식이 존재한다. 여튼 이 때문에 지역의 일반 주민들은 단지 주민들을 '''질시'''하는 경향이 강했다. 질투가 아니다.[43] '아이들이 비행청소년이 적다'는 21세기에 이르기 전 까진 반 즈음 맞는 말이었다. 외부와 단절 되어있고 사립학교에서 부모 환경이 사실상 같다시피 한 아이들만 모여있다보니 문제가 별로 일어나지 않았다. ('내가 가진 건 너도 갖고 있다'보니 성격 차이를 제외하곤 갈등 요소가 없었다. 무엇보다 그땐 제철소 단지 밖에 나가도 학생들이 갈 곳이 없었으니...) 하지만, 인터넷의 보급 및 단지 외 광양 지역과의 교류가 쉬워지면서 지금은 다 똑같다.[44] 자녀가 공부를 굉장히 잘하거나 아니면 반대로 상위 60%에도 못 들어서 못가는 경우는 그보다 일찍 나간다.[45] 광양지역의 경우 원래 현재와 같이 공장 바로 옆에 단지를 조성하지 않고 현 광양읍 근처에 조성할 계획이었다고 하지만, 그놈의 보상 문제 때문에...[46] 2000년 '포항제철노동조합정상화추진위원회' 결성 후 2003년 및 2004년에 포항과 광양제철소에서 각각 노조 정상화 시도를 했으나 강제해산 또는 참여율 저조로 인한 자진해산을 겪었다. 반면 하청업체의 경우 노동조합이 존재하고 2006년에 '금속노조 광양지역지회(현 포스코 사내하청지회)'를 결성했으나, 사측은 계약해지, 한국노총 가입 유도 등으로 거듭 탄압했다.[47] 물론 이들은 범 현대가라 하여 서로 인척 관계의 기업이긴 하다. 현대산업개발부산 아이파크까지 범 현대가 출신 프로축구단은 현재 3개이다.[48] 같은 종목이라도 성별이 다르면 허용된다. 일례로 현대차는 V-리그에 천안 현대캐피탈과 수원 현대건설 두 팀이 있지만, 서로 대결할 리 없는 남녀 배구단이라 문제 삼지 않는다.[49] 소변검사, 혈액검사, 회사 근처 흡연자 촬영 등[50] 다만 군부대처럼 온통 숲칠(...)을 하지는 않고 일부 민감시설을 적당히 블러 처리한 정도. 참고지만 현대제철 당진제철소의 경우 보다 북쪽에 있어서 그런지 부지 면적이 그리 넓진 않아서 그런진 몰라도 대부분의 시설이 숲으로 처리되어있다. 그리고 카카오 지도의 경우 일정 비율 이상 확대하면 숲으로 바뀐다.[51] 이미 25주년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