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밍고 타라스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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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라스카'''
타라스코니는 아틀란타 클럽에서 유스 생활을 하였는데 처음 포지션은 아웃사이드-라이트였다. 그는 부푼 꿈을 안고 보카 주니어스로 이적했지만 같은 포지션에 팀의 스타인 페드로 칼로미노가 이미 자리를 꿰차고 있었다. 그로 인해 그는 어쩔 수 없이 포지션을 중앙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지만 이 결정이 팀과 그를 모두 살리는 신의 한 수였다.
그는 보카에서 멈출 수 없는 공격수였으며 11시즌 동안 193골을 기록하여 마르틴 팔레르모(228골), 로베르토 체로(221골), 프란시스코 바라요(194골)에 이어 지금까지 팀 내 역대 득점 랭킹 4위에 올라있다.[4] 처음에는 칼로미노와 가라시니와 호흡을 맞추었고 다음에는 체로와 바라요와 호흡을 맞추며 보카 주니어스의 초기 전성기를 이끌었다.
1930년 리그에서는 타라스코니가 절정의 활약을 보인 해였다. 그의 활약에 힘입어 보카 주니어스는 35경기 중 29승을 챙겼으며 팀 득점은 113골로 3점을 넘겼다.
또한 그의 득점기록으로는 비록 중단되기는 했지만 반필드를 상대로 5골을 넣은 적도 있었으며, 14회의 해트 트릭과 3회의 4골 경기가 있다.
1932년 정들었던 보카를 떠난 타라스코니는 다음 시즌 뉴웰스 올드 보이스에 입단하였다. 하지만 거기서는 2경기 출전에 그치고 말았다. 실망한 그는 산 마르틴으로 팀을 옮겼고 그 곳에서 16골을 기록하며 다시 한 번 득점왕을 차지하였다. 타라스코니는 1936년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에서의 8경기를 끝으로 은퇴하였다.
타라스코니는 3차례의 코파 아메리카와 1차례의 올림픽에 참가하였다. 데뷔는 1922년에 했지만 처음 메이저 대회의 참가는 1924년의 코파 아메리카였다. 비록 골을 기록하지는 못했지만 아르헨티나의 준우승에 기여하였다. 그 이후의 2번의 코파 아메리카에 참가하여 한 차례 우승을 차지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의 국가대표팀 리즈 시절은 1928년 올림픽이었는데 3경기 연속 해트 트릭을 터뜨리며 도합 11골을 기록하며 득점왕에 올랐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시합이었던 라이벌 우루과이와의 결승전에서 침묵을 지키며 우승을 시키는데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1929년 대회에까지 소집은 되었지만 경기에는 출전하지 못했고 그 해에 있었던 우루과이와의 친선 경기가 그의 마지막 A매치가 되고 말았다.
성을 줄여 쓴 타라스카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주목할만한 슈팅을 가진 강력한 스트라이커로 명성을 떨쳤다. 또한 골 감각이 좋은 선수여서 상대 수비수들에게 큰 부담이 되었다.
'''타라스카'''
1. 생애
1.1. 클럽
1.1.1. CA 보카 주니어스
타라스코니는 아틀란타 클럽에서 유스 생활을 하였는데 처음 포지션은 아웃사이드-라이트였다. 그는 부푼 꿈을 안고 보카 주니어스로 이적했지만 같은 포지션에 팀의 스타인 페드로 칼로미노가 이미 자리를 꿰차고 있었다. 그로 인해 그는 어쩔 수 없이 포지션을 중앙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지만 이 결정이 팀과 그를 모두 살리는 신의 한 수였다.
그는 보카에서 멈출 수 없는 공격수였으며 11시즌 동안 193골을 기록하여 마르틴 팔레르모(228골), 로베르토 체로(221골), 프란시스코 바라요(194골)에 이어 지금까지 팀 내 역대 득점 랭킹 4위에 올라있다.[4] 처음에는 칼로미노와 가라시니와 호흡을 맞추었고 다음에는 체로와 바라요와 호흡을 맞추며 보카 주니어스의 초기 전성기를 이끌었다.
1930년 리그에서는 타라스코니가 절정의 활약을 보인 해였다. 그의 활약에 힘입어 보카 주니어스는 35경기 중 29승을 챙겼으며 팀 득점은 113골로 3점을 넘겼다.
또한 그의 득점기록으로는 비록 중단되기는 했지만 반필드를 상대로 5골을 넣은 적도 있었으며, 14회의 해트 트릭과 3회의 4골 경기가 있다.
1.1.2. 이후
1932년 정들었던 보카를 떠난 타라스코니는 다음 시즌 뉴웰스 올드 보이스에 입단하였다. 하지만 거기서는 2경기 출전에 그치고 말았다. 실망한 그는 산 마르틴으로 팀을 옮겼고 그 곳에서 16골을 기록하며 다시 한 번 득점왕을 차지하였다. 타라스코니는 1936년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에서의 8경기를 끝으로 은퇴하였다.
1.2. 국가대표
타라스코니는 3차례의 코파 아메리카와 1차례의 올림픽에 참가하였다. 데뷔는 1922년에 했지만 처음 메이저 대회의 참가는 1924년의 코파 아메리카였다. 비록 골을 기록하지는 못했지만 아르헨티나의 준우승에 기여하였다. 그 이후의 2번의 코파 아메리카에 참가하여 한 차례 우승을 차지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의 국가대표팀 리즈 시절은 1928년 올림픽이었는데 3경기 연속 해트 트릭을 터뜨리며 도합 11골을 기록하며 득점왕에 올랐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시합이었던 라이벌 우루과이와의 결승전에서 침묵을 지키며 우승을 시키는데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1929년 대회에까지 소집은 되었지만 경기에는 출전하지 못했고 그 해에 있었던 우루과이와의 친선 경기가 그의 마지막 A매치가 되고 말았다.
2. 플레이 스타일 & 평가
성을 줄여 쓴 타라스카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주목할만한 슈팅을 가진 강력한 스트라이커로 명성을 떨쳤다. 또한 골 감각이 좋은 선수여서 상대 수비수들에게 큰 부담이 되었다.
3. 수상
3.1. 클럽
-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우승 5회: 1923, 1924, 1926, 1930, 1931(CA 보카 주니어스)
- 콤페텐시아 호키 클럽 컵 우승 1회: 1925(CA 보카 주니어스)
- 닥터 카를로스 이바구렌 컵 우승 2회: 1923, 1924(CA 보카 주니어스)
- 에스티물로 컵 우승 1회: 1926(CA 보카 주니어스)
-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준우승 3회: 1927, 1928, 1929(CA 보카 주니어스)
3.2. 국가대표
3.3. 개인
- 올림픽 득점왕 1회: 1928
-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득점왕 5회: 1922, 1923, 1924, 1926, 1927(CA 보카 주니어스)
- 투쿠마나 리그 득점왕 1회: 1934(CA 산 마르틴)
[1] Tarasconi가 Tarascone로 표기되기도 한다.[2] 풋볼zz라는 사이트의 기록에 의하면 186cm/78kg라 한다. 하지만 그 당시로 비교해보면 엄청난 신장인데 키에 대한 다른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쪽에 무게를 두었다.[3]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4] 리그 기록만 놓고 계산하면 팔레르모와 바라요도 타라스코니의 밑에 위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