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8 암스테르담 올림픽

 


8회

9회

10회
1924 파리 올림픽
'''1928 암스테르담 올림픽'''
1932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1. 소개
2. 특징
3. 기타


1. 소개


[image]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9회 올림픽으로, 참가국도 많이 늘어나는 등 올림픽이 국제적인 권위와 명성을 갖춘 대회로 정착했음을 다시금 보여주었다.
당시 네덜란드에선 판퇴일 남작을 중심으로 올림픽 유치를 위해 안간힘을 썼으나 독실한 기독교도였던 빌헬미나 여왕이 "이교도들의 행사가 네덜란드 땅에서 재현된다니 망측하도다"며 반대 의사를 내비쳐 난항을 겪었다. 그러나 정치권의 노력과 국민들의 성원 덕분에 간신히 유치에 성공하게 되었다.
최초로 설치된 400m 트랙 위로 46개국 남자 2724명, 여자 209명의 선수가 입장. 사상 최초로 여자 육상 경기가 거행되었으며 스타디움 상단엔 최초의 성화가 등장하게 되었다. 개회식에는 올림픽에 일생을 바친 쿠베르탱의 병석 메세지가 전달되어 숙연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남자 장거리는 여전히 핀란드가 휩쓸었지만 단거리의 미국은 400m 릴레이 외의 트랙 전종목에서 참패.

2. 특징


이 때부터 성화제도가 생겨서 올림픽 성화를 피우게 된다. 다만 성화만 피웠으며, 올림피아에서 개최국까지 성화를 들고 오는 성화 봉송은 1936 베를린 올림픽에 가서야 이루어지게 된다. 그리고 올림픽 입장 때 그리스 선수부터 입장하는 것이 이 대회를 계기로 확립되었다.
몇 달씩 늘어지는 기존 대회 운영에 참다못한 IOC가 암스테르담 대회부터 공식 규정으로 경기 일정을 최대 16일로 제한하였다.
10000m 결승에서는 핀란드의 두 숙적 누르미와 리톨라가 다시 만난다. 누르미는 리톨라를 누르고 30분 18초 8이라는 믿을 수 없는 기록으로 우승. 전 대회의 우승자이자 세계 신기록 보유자인 리톨라의 마지막 자존심을 짓 밟는다. 전 대회 10000m에는 누르미가 참가하지 않았다.
여자 육상 최초의 금메달은 100m의 엘리자베스 로빈슨(미국). 너무 긴장한 나머지 출발 신호를 어겨 실격 당한 캐나다 선수는 잔디밭에 주저앉아 30분 동안 통곡하는 풍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이 대회 삼단뛰기에서 우승한 일본의 오다 미키오는 아시아 최초로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되었으며, 일본은 다음 LA 대회에서 금메달 7개를 따내 일약 5위로 올라서는 기염을 토하며 세계 스포츠계의 신흥 강자로 부상한다.
오다 미키오의 아시아 최초의 금메달과 더불어 아시아 최초의 단체종목 금메달도 탄생시키며, 올림픽 사각지대였던 아시아가 서서히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처음으로 올림픽 하키 경기에 출전한 인도 대표팀[1]은 화려한 개인기를 앞세워 거뜬히 우승, 앞으로 1956년 멜버른 올림픽에서 이웃 파키스탄에게 왕좌를 넘겨줄 때까지 28년 동안 6연속 제패의 신기원을 이룩한다. 또한 36년 베를린 올림픽까지 3연패의 견인차 된 20세기 최고의 하키영웅 이안 찬드가 이 대회로 올림픽에 데뷔했다.
독립선수단 출격 자격을 부여 받은 인도와는 달리 이 대회에서부터 식민지 국가들의 대표팀이 다른 나라의 국기를 달고 나오는 경우가 존재하였으며, 남자 마라톤에서 프랑스 지배 하에 놓여졌던 알제리 출신 부게라 엘 우아피가 프랑스 대표로 출전하여 우승하게 되었다고 한다.
우루과이도 축구에서 2연속으로 금메달을 획득하였다. 그 경력과 파격적인 조건으로 1회 월드컵 개최권을 따냈고, 거기서 우승했다.
결승전에서 당대의 양대산맥인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이 맞붙었고 여기서 우루과이가 승리해서 금메달을 차지했는데 2년후 개최된 1930 FIFA 월드컵 우루과이에서도 같은 결과가 났다.
전범국으로 전대회 불참 수모를 당한 독일이 참가하였으나 관중들의 야유가 쏟아졌다. 이에 약이 오른 독일 선수들이 일부 종목에서 난투극을 벌이게 되었는데 오히려 체면만 더 깎이고 말았다. 그리고 미국만큼 철저히 이 대회를 이용해 자국의 우위를 자랑하려고 한 나라는 따로 없다. 미국 선수단의 지도자인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은 올림픽을 '국력의 평가장'이라 부르며 철저한 비밀 훈련을 시킨다.

3. 기타


당시 네덜란드 기계체조 대표이자 금메달리스트였던 헬레나 노르하임과 안나 폴락, 유디켸 시몬스, 그리고 이들의 코치였던 게리트 클리레코퍼는 유대계였는데, 후에 나치 독일의 소비보르 절멸수용소 가스실에서 살해되었다. 참고로 소비보르의 희생자는 약 20만 명으로, 탈출한 58명 외에는 아무도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퍼센트로 표현하면 사망률은 약 99.9965%였다.

[1] 당시 영국 식민지였지만 독립선수단 자격을 부여 받아 출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