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연명
[image]
1. 개요
(365[1] ~427)
중국 동진 ~송(육조)대의 시인. 본명은 잠(潛)이고 연명은 자(字)인데, 원량(元亮)이라는 또 다른 자가 있었고[2] , 지금의 장시 성 주장(九江)시 출신이다.
2. 상세
그의 증조부인 도간(陶侃)은 동진의 명장으로, 도연명 또한 증조부를 본받아 높은 이상으로 세상을 구하고 이름을 날리기 위해 어려서부터 학업에 매진하여 20세가 되던 해에 벼슬을 얻고자 고위 관리들에게 시를 지어 바치기 시작했고, 29세에 드디어 어느 고을의 관직을 얻었다[3] .
하지만 그가 관직을 얻은 시기는 동진 말기로, 왕족 출신 권신과 간신배가 들끓고 하층민들이 반란을 일삼으며 조정은 정치는 안중에도 없던, 그야말로 혼란기였다. 도연명은 13년 동안 관직에서 생활하면서 승진을 하지 못하고, 정치적 이상향은 전혀 실현시키지 못하여 결국 관직에 환멸을 느끼고 41세 때 마지막으로 얻은 팽택 현령(縣令)의 자리에서 80일을 근무하다 그 유명한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짓고 전원으로 들어가 은거하였다고 한다.
그는 농사를 지으며, 추악한 현실 속에서 자연 속의 이상인 무릉도원을 추구하다 427년에 사망하였다고 한다.
3. 영향
도연명은 흔히 전원시(田園詩)의 개조로 불린다. 물론 그 이전에도 자연을 찬양하거나 현실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작품이 있었으나, 전원이 명확하게 하나의 시적 주제가 된 것은 도연명의 영향이 컸다.
그의 유명한 작품으로 귀거래사가 있고, 이와 같은 도연명의 시들을 한 권의 책으로 엮은 것이 도연명집(陶淵明集)이다.
4. 기타
여담으로 그가 지은 시들 중 '책자'(責子)라는 시가 있는데 제목 그대로 '아들을 야단치는' 시다. 특이하게도 그 대상이 바로 자기 슬하의 다섯 아들들인데 내용인즉, 아들들이 말 그대로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딴 것에만 관심을 두는(?) 까닭에[4] 속이 상해서 결국 음주로(...) 달랜다는 내용이다. 전문은 다음과 같다. 출처
성호 이익에게는 도연명을 사모하는 친우가 있었는데 그가 경도재(景陶齋)를 지어 도잠을 사모한다는 의미를 담았다. 이에 이익이 서문을 지었다.
白 髮 被 兩 鬢 흰머리가 양쪽 귀밑머리를 덮고
肌 膚 不 復 實 살결도 다시는 충실하지 못하도다
雖 有 五 男 兒 아들이 다섯이나 있으나
總 不 好 紙 筆 모두가 종이와 붓을 싫어한다
阿 舒 已 二 八 아서는 벌써 열여섯인데
懶 惰 故 無 匹 게으르기가 본부터 비길 데 없도다
阿 宣 行 志 學 아선은 열다섯이 되는데
而 不 愛 文 術 그래도 글공부는 좋아하지 않는구나
雍 端 年 十 三 옹과 단은 나이가 열세 살이나 되어도
不 識 六 與 七 여섯과 일곱을 분간하지 못 한다
通 子 垂 九 齡 통이란 녀석은 아홉 살이 되는데
但 覓 梨 與 栗 배하고 밤만을 찾고 있구나
天 運 苟 如 此 천운이 진실로 이와 같다면야
且 進 杯 中 物 잠시 잔 속의 물건을 마셔나 보련다
내가 일찍이 듣건대, 한(漢)나라 제갈후(諸葛侯)가 은거할 때에는 무릎을 끌어안고 휘파람을 불고 칠현금(七絃琴)을 연주하며 평생을 마칠 것처럼 지내다가 고기가 물을 만나듯 자신을 알아주는 주군을 만나자 우뚝이 삼분천하(三分天下)하는 공업을 이루었다. 그러므로 "공명(孔明)은 거의 예악(禮樂)을 일으킬 수 있었다."[5]
라고 한 말을 옛 일을 평론하는 자들이 지언(知言)이라고 여겼다. 저 도연명 또한 제갈량을 사모한 자였기에 깊이 좋아하는 뜻을 자신의 이름에 드러내고서 마침내 무현금(無絃琴)을 두고 그에 회포를 부쳤으니, 아마도 제갈량과 같은 체(體)를 가지고 있었으나 쓰임이 없었던 것이리라.[6] 이제 그대가 도연명을 좋아하는 것이 도연명이 제갈량을 좋아했던 이유이니, 이것으로 충분히 다할 수 있을 것이다. 내 벗은 힘쓸지어다.
[1] 혹은 352년이란 설도 있다.[2] 제갈량을 깊이 사모하여 그의 이름으로 자를 삼은 것이다.[3] 이와는 대조적으로 자신의 다섯 아들들은... 자세한 것은 후술 참조.[4] 시 내용을 보면 16살 된 장남은 게으름뱅이, 차남은 학업에 무관심, 삼남과 사남은 말 그대로 무식, 막내아들은 배와 밤만 찾는 먹보(...).[5] 명도 선생 정호(程顥)가 한 말로, 《근사록(近思錄)》 권14 〈관성현(觀聖賢)〉에 나온다. 당시 제갈량의 정사가 도에 가까워 성왕(聖王)의 정사처럼 예악을 일으키는 데 거의 가까웠다고 높이 평가한 것이다. 왕통(王通)이나 주희(朱熹)도 이와 비슷한 평론을 하였다.[6] 도잠이 음률에 재능이 없어 금을 탈 줄 몰랐는데 줄 없는 금을 가지고 있다가 술을 마시면 금을 어루만지면서 흥을 부쳤다. 《진서 권94 은일(隱逸)열전 도잠》 여기서는 이 또한 제갈량이 칠현금을 타던 것을 흠모하여 모방한 행위라고 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