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익(실학자)

 

[image]
'''이름'''
<colbgcolor=white,#2d2f34>'''이익(李瀷)'''
'''출생'''
1681년 11월 27일 조선 경기도 안산군
'''사망'''
1764년 1월 19일 조선 한성부
'''본관'''
여주 이씨
'''자'''
자신(自新)
'''시호'''
성호(星湖)
1. 개요
2. 학맥
3. 일본의 미래를 예견하다
4. 기타


1. 개요


조선 후기의 문신, 성리학자, 실학자. 재야의 학자로 머무르면서 실용적인 학문을 할 것, 한전론, 호포론, 개병제, 양반의 생업 종사 등을 주장하였다. 이익의 형인 이잠은 1706년 노론 대신들이 당시 세자였던 경종에게 이롭지 못할 것이라 상소를 올렸다가 옥사했던 인물이다. 때문에 동생 이익은 벼슬길이 막히고 말았다.
일부 문벌 가문의 자제들이 쉽게 급제할 수 있는 과거제도의 실태를 지적하고 여론과 평판에 의해 인재를 등용하는 공거제를 주장했다. 또한 과거제도, 노비제도, 문벌제도, 잡술, 승려, 게으름을 나라를 좀 먹는 여섯 가지 폐단이라고 주장했으며[1] 검소함을 장려했다.
허목의 학통으로 이잠, 이서우의 문인이며 반계 유형원을 사숙하였다.[2] 저서는 성호사설(星湖僿說)과 《곽우록(藿憂錄)》 등이 있다.

2. 학맥


성호학파 문서 참조.

3. 일본의 미래를 예견하다


조선 내부의 문제 뿐만 아니라 조선 외부의 문제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통찰력이 상당했다. 당시 일본 쇼군 너머 천황의 존재를 간파해내고는 조일 관계의 모순을 지적하였다.
전근대 동아시아 사회에서 중국의 역대 왕조는 자신들과 동급인 어떤 존재도 인정하지 않았고 전근대 시절 중국과 외교 관계를 맺으려면 조공 체제를 확립해 놓아야만 가능했다. 일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는데 민간끼리의 무역이라면 모를까, 국가 간 관계를 수립하려면 칭신하고 조공을 바치는 형식을 거쳐야만 했다. 문제는 바다라는 자연 장벽으로 인해 외부와의 교류가 한정된 관계로 외부의 침입에서는 안심이지만 역으로 외부 사정에 대해 무지할 수 밖에 없었던 일본 사정상 발생되는 선민사상과 충돌하게 되는데 일본의 막부 정권은 명목상 천황의 조정인 '공가(구게)' 대신에 막부 자신들이 주권자임을 외부에만 천시하는 방법으로 중국과 통교하는 방법을 썼다.
무로마치 막부 시절은 이게 극에 달해 명나라로부터 대놓고 일본 국왕임을 책봉받았는데 이는 사실상 정권의 명분을 천황이 아닌 중국에 두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었다. 자세한 건 아시카가 요시미츠 문서 참조.[3] 에도 막부 시절은 중국과의 공식적인 교류가 없는 상태여서 이런 모순이 발생하지는 않았는데 민간 교류가 활발하여 나가사키차이나타운은 당시 데지마를 제치고 일본 내 제1의 외국인 거주지였다. 이외에 류큐 왕국을 침략해 속국으로 만들고 류큐 이름으로 중국과 조공 무역을 하기도 했는데 간접적인 방식이라 중국과 격을 따질 문제는 전혀 없었다.
에도 막부가 주변국 중 유일하게 국가 대 국가로 교류한 나라는 조선이었는데 숙종 무렵까지 쇼군은 조선의 '대군'급으로 취급되었다. 조선 숙종 시기에 들어서 일본 측에서 쇼군을 국왕급으로 여겨달라는 요청이 들어와서 논란이 일었는데 천황이 왕보다 명목상 격이 위니까 모순되는건 아니었지만 무로마치 막부 시절처럼 천황을 무시하고 도쿠가와 가문이 일본의 대표자임을 천명하는 것처럼 비쳐질 여지가 있었다. 이런 요청으로 일본 국왕이라는 호칭을 잠시 쓰기는 했지만 지속적으로 쓴 것은 아니고 대군이라는 호칭과 혼용해서 썼다. 이와 관련된 자세한 내용은 타이쿤 문서 참조. 이런 미묘한 관계는 일본이 메이지유신으로 서구식 외교 관계를 받아들인 이후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 되어버렸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러한 모순을 지적한 것도 모자라 그로써 야기될 문제를 지적하며 훗날 흥선대원군 집권 당시에 터진 '서계 거부 사건'을 예언해냈으며 당시 바다 건너 일본의 일본인들조차도 전혀 예상치 못했을 대정봉환보신 전쟁까지도 예언했다. 심지어는 '신정부군이 천황을 옹립하여 명분을 세운다'는 대략적인 전쟁의 양상부터 그에 따른 신정부군의 승리까지도 예언하였으니 이 부분만 놓고 보면 그야말로 '조선의 노스트라다무스'. 두 사건이 '메이지 유신의 근간이 된다'는 점,[4] 그리고 메이지 유신이 성호 이익 자신의 조국인 조선에 훗날 어떤 결과를 가져오고야 마는지를 생각해본다면…
다음은 저서 '성호사설' 권17 '일본 충의(日本忠義)' 편의 관련 부분이다.

왜황실권한 지가 불과 6~700년밖에 되지 않는데 국인들이 바라는 바가 아니어서 그 사이에 차츰 충의로운 선비(충의지사)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명분이 바르고 주장이 이치에 순하니[5]

'''훗날 반드시 한 번 그 뜻을 펼칠 날이 올 것이다.''' 만약 에조가시마[6]인들과 연결하고 '''왜황을 보좌해서 제후들에게 호령한다면 필시 대의를 펴지 못하지는 않으리니 66개 주의 태수들 가운데 어찌 뜻을 같이 해서 호응하는 자가 없겠는가?''' 만약 그러한 지경에 이른다면 '''저쪽은 황제이고 우리는 이니 장차 어떻게 대처하려는가?'''[7]

이익은 저 일련의 사건들로부터 100년도 더 전의 사람이고 이 시기의 에도 막부는 건재하게 버티고 있는 상태였다. 대정봉환과 보신 전쟁 부분만 따지자면 이익은 직접 당사자인 일본인도 아니고 동해 바다 건너 조선인이다. 21세기처럼 무슨 인터넷이나 전화선이 있던 것도 아니었던 시기에 이런 예측을 해낸 것이니 실로 대단한 통찰력이라는 말 밖에는 안 나온다.
사실 일본 내 토막파(討幕派)의 움직임은 느닷없이 미국 놈한테 총포탄을 얻어 맞고 별안간 터져나온 아주 뜬금없는 것이 아니라 에도 막부가 건재하던 무려 18세기 전반 때부터 수도 교토의 근왕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물밑에서 퍼져가고 있던 것이었다. 다만 이때의 토막파들은 대놓고 토막 어쩌고 했다가는 자기 목이 토막날 판이었으므로[8] 자기들끼리 몰래 토막을 논하며 세상사를 한탄하는 정도에 불과했다.
이는 조선통신사의 제술관으로 동행했던 남옥(南玉)과 친왕교육 담당이었던 나와 로도(那波魯堂)가 만나서 나눈 이야기에도 나와 있는데 이들은 언제 자신들을 막부에 찌를지 모르는 자국민들보다도 그럴 위험이 없는 외국인이었던 조선인들을 상대로 그러한 토막의 속내를 은근히 털어 놓으며 한을 달래기도 하였으나 막상 그 넋두리를 들어주던 통신사가 "당신들의 임금이 정권을 잡는 건 높이 살 일이지, 슬퍼할 일이 아니다."라고 말을 건네며 토막의 뜻을 분명히 들으려고 은근슬쩍 찌르면 그때만큼은 한 발 물러서서는 "창의적인 소리일 뿐이다."라 하는 등 말이든 행동이든 상당히 조심하면서 지냈다.[9]
나와 로도가 이런 속내를 가지고 있었다는 기록은 일본에는 전무하며 오직 조선통신사의 기록에만 존재한다. 통신사가 통신사에게 딱히 이런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는 관계로 그만큼 이 토막파들이 일본인들 상대로는 말을 대단히 조심히 하며 행동을 은밀히 하고 있었다고 보면 된다. 외국인인 조선인들 앞에서나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었던 것.
남옥은 이밖에도 교토 지식인들을 만나본 후 이런 말을 남겼다. "서경의 인사들과 깊이 마음 속에서 서로 이야기를 하고 보니 이들이 모두 비분강개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관백(쇼군)을 패자(悖子)[10], 왜황왕자(王者)[11]로 여기고 있다. 이들은 관백을 왕망, 조조와 같은 찬탈자로 보고 있다."[12]
청성잡기로 유명한 성대중 또한 나와 로도를 만나보고 나서 차상기(槎上記)에 남옥과 거의 비슷한 내용을 서술했으며 원중거(元重擧)는 자신의 저서인 화국지(和國志)에서 "에도의 정치가 흔들리고 찬탈자인 조조나 사마의와 같은 무리들이 만일 각지에서 나타난다면 왜황을 둘러싸고 국권을 쟁탈하려는 자가 이 땅에 나오지 않으리라고 단정하지 않을 수 없다."라는 기록을 남긴 걸로 보아 당시 통신사들은 왜황(천황)이 허수아비며 이에 분노하는 지식인들이 많았음을 인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와 같은 상황에 따라 토막의 움직임을 일본 막부가 아니라 오히려 조선 측에서 무려 100년이나 빨리 인식하게 된 것.
다만 조선에서도 이러한 인식을 한 사람들은 통신사와 같은 소수 일본통들과 몇몇에 불과했고 그조차도 거기까지 아는 선에서 그쳤지, 이익과 같이 그러한 환경이 미래에 어떤 사건을 일으키고 조선에는 어떤 영향을 끼칠지 고찰해낸 경우는 정말 극소수에 불과했다. 극소수를 제외한 조선의 식자들, 특히 위정자들에게 그 이상의 일이란건 18세기에는 그저 '엮여봤자 피곤하고 생각해봤자 쓸모도 없는 바다 건너 섬나라 사람들의 일'이었다.

4. 기타


  • 제자인 안정복동사강목을 쓸 때 이익이 직접이 쓴 항목은 없지만 자료 수집과 감수 등 많은 부분에서 큰 도움을 줬다.
  • 상평통보 발행 초창기에 구리 수급의 문제, 조정의 미숙함등의 원인으로 장시간 발행하지 않거나 전황, 가치의 급등락등 화폐신인도는 크게 하락하였다. 또한 이익은 화폐가 사치의 근본이라 보았다. 이에 성호 이익은 아예 동전을 폐지해 버리자는 '폐전론'을 주장하였다.
  • 자신의 주장이기도 했고 관직에 나갈 수 없는 처지라 재야에 머물며 직접 생계활동에 나섰는데 그 과정에서 닭을 키우다 느낀 점에 대해 '할계전(瞎雞傳)'이란 글을 남기기도 했다. 요약하자면 한쪽 눈이 멀고 허약한 암탉이 오히려 훌륭하게 병아리들을 키워낸 사례를 보고 험한 세상에서 힘없는 사람들이 살아나갈 방도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다는 내용이다. #
  • 자신의 저서 성호사설 14권 인사문(人事門)편에서 일명 '조선 3대 도적'으로 홍길동, 임꺽정, 장길산을 언급함으로써 후대의 작가들에게 떡밥을 제공하기도 했다.
  • 시헌력대통력보다 여러 부분에서 우수하자 "천문학은 서양이 으뜸이고 회회(아라비아)가 버금이며, 중국은 이를 따르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 이익은 부친이 쉰살 넘어 낳은 늦둥이였다. 또한 생전에 굉장히 병약한 체질이여서 10살 무렵까지 글을 읽지 못했고, 숱한 잔병치레를 겪었다. 그나마 나이가 들어 스스로 농사짓고 소식을 하는 습관을 들여서 83살까지 장수했다. 특히 콩을 즐겨먹었다고 한다.
  • 성호 이익의 당숙인 이원진은 제주목사로 재직하던 때 표류하던 네덜란드인을 발견하고 거두어주었다. 그 네덜란드인 중 하나가 고향으로 돌아가 기록을 남기니 바로 헨드릭 하멜하멜 표류기이다.
  • 2019학년도 수능비문학문제에서 서학의 수용으로 일어난 인체관의 변화를 조선 학자들의 견해를 통해 제시하는 지문에서 아담 샬과 함께 등장한 바 있다.
[1] 이익도 양반의 한계인지 노비제도를 개선하는데는 찬성했지만 완전 폐지를 주장하지는 않았다.[2] 직접 만나지는 못했다는 의미.[3] 아시카가 요시미츠는 이와 더불어 천황 가문의 혈통을 끊고자 하는 의혹까지 사서 일본 내에서의 평판이 좋지는 않다.[4] 메이지 유신 자체를 예언해냈다고 보기에는 다소 무리이다. 메이지 유신의 핵심은 대정봉환과 보신 전쟁보다도 '대정봉환을 명분으로 세우고 보신 전쟁을 거친 뒤에 근대화에 성공한다'는 것에 있다.[5] 언뜻 보면 그냥 유교 성리학적인 입장에 입각하여 '쟤들은 맞는 말 하는 놈들이니까 이기는 법이다.'라고 말하는 걸로밖에 안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 이건 아주 엄청나게 중요한 부분이다. 그래도 명색이 왕조 국가인 일본에서 임금정치하겠다고 나설 때 현실이야 어떻듯 최소한 명분상으로는 신하인 쇼군이 막을 방법이 없다. 실제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이런 문제 때문에 보신 전쟁 당시 비교적 순순히 대권을 천황에게 넘겨줬다는 설이 있다. 설령 승전을 하더라도 그 뒤에 천황이 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6] 지금의 홋카이도.[7] 이것 때문에 '서계 거부 사건'이 터지고 일본은 이를 빌미로 운요호 사건을 일으켜 조선을 침략한다. 이 문제는 강화도 조약 내내 조일 양국이 팽팽하게 대립한 끝에 조선 측에 유리한 쪽으로 매듭을 짓게 되니 조약을 '조선 국왕'과 '일본 천황'의 이름으로가 아닌 '대조선국'과 '대일본국'의 이름으로 체결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이익이 지적한 것과 같은 수직적인 '황제와 왕'이 아닌 수평적인 '국가와 국가'의 관계가 된다는 논리. 실제로 조일 양국은 실상이야 어쨌든 이후로도 경술국치 그 순간까지 위계상으로는 대등한 국가로서 교류하였다. 다만 그 이외의 조항들이 시망이라 조선 멸망의 원인 중 하나로 자리잡고 만다.[8] 실제로 다케우치 시키부가 천황과 공가를 상대로 존왕론을 강의하다가 막부한테 박살이 난 사건이 있었으니 바로 호우레키 사건이다.[9] 남옥, '일관기(日觀記)' 권10, 황계. 참조[10] 유교에서 그릇된 인물을 이르는 말.[11] 왕의 아들인 왕자(王子)가 아니다.[12] 후마 스스무(夫馬進) '천황의 역사 6권-에도시대의 천황' 편 참조, 관련 번역은 http://pkt87.blog.me/20140550151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