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관
로마 공화국의 관직. 딕타토르(Dictator)의 번역어. 영어에서 독재자를 뜻하는 '딕테이터'의 어원이다.
국가 비상시에만 선출되는 임시 관직으로, 집정관과는 달리 단 1명만 선출되며 보통 임기는 6개월 혹은 국가 비상의 지속 기간동안이었고, 그 1명에게 집정관보다 상위의, 국가의 모든 일을 처리할 수 있는 권력이 주어진다. 의외로 임시관직 치고는 자주 임명된 관직인데, 이는 고대 로마의 공화정 초기에 있었던 정국 난맥 때문이었다.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지만 평시의 로마는 집정관이 2명, 원로원도 있고 평민 의회도 존재하며, 호민관도 있으며 두 집정관이 이를 모두 고려하여 정책을 결정해야 하기 때문에 어떤 정책을 결정할 때 시간이 걸리는 일이 많고, 종종 귀족과 평민이 싸움이 붙는 등 세력 간 이익이 대립되는 문제가 걸리면 장기간 파행을 거듭하는 사태가 잦았다. 이런 상황에서 외적의 침공이나 국내의 반란같은 큰 일이 발생하면 빠른 조치가 필수적이므로 이런 상황에 한해 독재관을 임명하게 되는 일이 많았던 것이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위기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서만 사용되는 임시직인 데다가, 독재관 임기를 넘긴 다음 퇴임한 독재관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고, 독재관 임기 중에도 제사나 신탁 등등의 방법을 사용해서[1] 무능하다고 생각된 독재관을 사실상 해임할 수 있으며, 독재관 스스로도 다른 건 손대지 않고 자신이 맡은 문제에만 집중하는 게 당연하게 여겨졌으며 이후에는 임기가 얼마나 남았든 간에 곧바로 물러나는 것이 존경과 칭찬을 받고, 빠르게 일을 처리했다는 업적으로 기록되므로 실제로 독재관으로 선출된 사례들은 많지만 독재관이 장기집권한 사례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로마가 강성해지고 영역도 넓어지면서 6개월 가지고는 도저히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기에 공화정 말기에 가면 독재관의 임기는 1년으로 늘어났다. 그리고 독재관이라는 명칭 이면에 숨겨진 내용인 '''합법적으로 독재정치가 가능하다'''는 점을 알아챈 술라는 임기 제한을 없앤 '''독재관'''으로 취임하였다.[2] 즉, 비상시라는 명분으로 계속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다. 비록 술라가 자진해서 독재관에서 내려오기는 했지만 일단 술라 본인이 군사 쿠데타 이후 독재관이 되는 선례를 만들어 버렸고, 이때 너무 잔혹하고 로마의 전통과 상식을 뛰어넘는 독재[3] 를 하는 통에 본인의 의도야 어찌됐든 로마의 합법적인 관직인 독재관[4] 을 황제 비스무리한 것으로 변질시키고 말았다. 그래서 나중에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내전에서 승리하고 비슷하게 '''임기가 없는 독재관'''에 취임했다. 이 때문에 카이사르는 정적들에게 암살당한다.[5] 하지만 카이사르가 암살당한 것 때문인지 아우구스투스는 독재관에 취임하지 않고 대신 애매한 제1시민, 소위 황제란 지위를 만들게 된다.
황제가 생긴 뒤에는 사실상 황제가 독재관과 다를 바 없는 강력한 권력을 휘두르게 되다 보니 독재관은 '''존재할 필요가 사라져서''' 없어지게 된다.[6] 결국 카이사르는 유일한 종신 독재관(Dictator Perpetuo)이자 마지막 독재관이 된다.
[1] 로마 제국에서도 종교의 영향력이 약하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로마 제국은 종교를 믿는다기보다 '''이용했다.''' 루시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의 '종교란 평민에게는 진실로, 현인에게는 거짓으로, 통치자에게는 유용한 것으로 여겨진다'는 말이 이 사실을 잘 나타낸다. 애초에 로마의 수많은 의사진행 방해 방법 중에 하나가 방해하는 파벌에 속한 신관 등등이 천둥이 쳤다든가 징조가 불길하다든가 핑계를 대서 투표를 막는 것이다(...). 단지 이것도 무조건 통하는게 아니라서 카이사르 같이 최고 제사장등 종교적 직책을 가진 사람이 무효를 선언 하면 끝이다[2] 정확히는 "법을 만들고 공화국을 재건하는 독재관(Dictator Legibus Faciendis Et Rei Publicae Constituendae)" 단, 여기에는 공화국 재건을 마치고 비상시가 끝나면 독재관직에서 물러난다는 조건이 있다.[3] 사람들을 마구 죽이고, 선거를 통해서만 오를 수 있는 관직들을 마음대로 임명하는 건 둘째치고 동맹 도시의 땅을 빼앗아 자기가 거느리고 있던 병사들의 퇴직자금으로 쓰는 등 너무 오만하고 자기 멋대로 했다. 이에 반발해서 민중파 인사들은 물론, 술라파로 분류됐던 사람들까지 반항하여 반란을 각지에서 일으켰으며, 폼페이우스나 크라수스 등 술라파 인사들은 나중에 민중파로 변신하게 된다. 끝까지 술라에게 의리를 지킨 사람들 중에서 유명한 사람은 루쿨루스 정도. 참고로 이 사람은 술라의 지명으로 술라 자녀들의 후견인이 된다.[4] 그나마도 술라 이전에는 독재관이 사실상 사문화된 관직이었다.[5] 카이사르가 죽지 않는다면 물러나게 할 방법은 없으므로 정적들은 암살을 택했다지만, 카이사르도 개혁과 페르시아 원정이 끝나면 술라처럼 얼마든지 은퇴를 할 수 있었다.[6] 고대 서양에서의 황제는 현대의 개념과는 많이 다르다. 진시황은 절대적인 권한을 가진 전제군주로서의 황제의 개념을 바로 확립했지만 로마에서는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를 거쳐 디오클레티아누스 대에 이르러서야 절대적인 권한을 갖춘 "황제"가 된다. 그리고 고대 동양에서 황제를 칭한 군주들의 경우는 천명(天命)을 대의명분으로 내세우며 천자(天子), 하늘의 아들임을 칭하는 왕권신수설적인 성격을 띤 반면에 고대 로마의 황제들은 이러한 색채는 거의 띠지 않고 단지 '로마 시민 중 일인자', 프린켑스(Princeps)라는 식으로 받아들여졌다. 천명을 가진 군주가 아니라 황제라는 '직책, 또는 직업'을 가진 한 사람의 시민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