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권신수설
영어: Divine right of kings/Divine right
프랑스어: Droit divin
한자: 王權神授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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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다스리는 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는 자니라. 그러므로 복종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진노 때문에 할 것이 아니라 양심을 따라 할 것이라. 너희가 조세를 바치는 것도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들이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조세를 받을 자에게 조세를 바치고 관세를 받을 자에게 관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로마서 13:1~7
1. 설명
제왕 신권설(帝王神權說)이라고도 한다. '''왕은 신으로부터 권한을 부여받은 존재'''라는 뜻으로 근대 이전 왕정체제의 근거이다. 사실 선사시대부터 신정설에 따라 동서양을 막론하고 비슷한 주장들이 있었으나, 17세기 영국 스튜어트 왕조 시절 청교도들과 왕권 갈등으로 많이 알려졌다. 청교도들의 왕권 제한 주장[1] 에 맞서 제임스 1세가 친히 책을 편찬하여 주장할 정도.
하지만 유럽의 왕가들은 17세기 뿐만 아니라, 왕권신수설을 근거로 빈 회의의 정통복고주의의 근거로 삼았고, 시민계층의 1848 혁명을 제압했으며, 프랑스에선 혁명과 보나파르트 주의에 맞서 부르봉 주의자(왕당파)들의 구심점이 되었다. 사실 20세기 군주들인 빌헬름 2세나 니콜라이 2세조차도 왕권신수설에 심취했었다.
2. 역사적 전개
4세기경 기독교가 로마 제국에 허용되어 널리 퍼졌으나, 곧 로마는 4세기 후반(395년) 동로마 제국과 서로마 제국으로 분할되었고, 80여년 후인 476년에 서로마 제국은 멸망했다. 사실 서로마가 멸망하기 이전부터 로마 제국 국경선은 이미 숭숭 뚫려 있어서 잡다한 민족들이 서로마 제국 내에 똬리를 틀고 왕국을 세웠는데, 이들이 현재 완전 야만인이라는 주장은 깨졌지만 로마 제국보다 행정수준이 낮고 법체계가 미비해 국가 체제가 연속성을 갖추지 못하고 흥망성쇠와 부침이 많았다. 왕이나 부족장들은 그중에서 좀 세력이 크거나 명망이 있는 추장들을 선호해서 뽑힌 것이라 죽고 나면 게르만족 관습에 따라 분할상속하여 무리들이 흩어지거나, 후계자가 별로라서 망하거나 다른 부족으로 흡수되었다. 이민족들이 로마 경내에 거주하면서 기존 로마화된 주민들과 이민족간의 교류가 시작되었는데, 이민족들이 로마화된 문명을 받아들이며 기독교로 개종하기 시작하자 교회에선 답례로 정통성을 보완하는 대관식이나 도유식 의식이 치뤄진다.
프랑크 왕국의 클로비스 1세는 개종하자마자 기름부음[2] 으로 교회에서 정통성을 인정받았는데 이 같은 전통은 프랑크 왕국의 다음 왕조 카롤링거 왕조의 피핀도 메로빙거 왕조를 찬탈하며 교황에게 도유식을 받았고, 프랑크 왕국의 후신인 프랑스 왕국의 후대왕들은 랭스에서 대주교에게 대관식을 받아야만 정통성을 인정받는 전통이 되었다.[3] 한편 독일에서는 새 왕이 등극하면 카롤루스 대제의 도시 아헨에서 쾰른 대주교에게[4] 이런 의식을 치르는 전통이 있었고, 그와 더불어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는 교황이나 그의 대리인에게 대관을 받아야만[5] 정통성을 인정받은것이 그 예이다. 헝가리 왕국에서도 최초로 기독교로 개종한 이슈트반 1세부터 헝가리 왕위는 '성 이슈트반의 왕관'이며 사도왕으로 불렸으며 프랑스의 경우 루이 9세가 시성되면서[6] 프랑스 왕위는 성 루이의 왕관이 되었다. 또한 테오도시우스 1세 이후의 로마 황제들이 그리스도인의 보호자로 여겨진 것도 비슷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로마 제국이 무너지고 세속적인 보호를 필요로하던 교회권력과 세속권력의 타협으로 교회와 종교의 권위를 빌려 왕권의 강화의 수단이 되었지만 서유럽이 안정되고 나선 조금 다른 양상도 있었다. 구체적으로 8세기 시절부터 등장한 콘스탄티누스의 증여문서, '가짜 이시도르 교령집(pseudo-Isidorian)'을 근거로 교권이 속권보다 우위에 있다고 주장했다. 이 문서들은 출현 당시에조차도 출처를 알 수 없었고 문헌학적으로 수준이 낮았기에 당시 학자들이 보기에 의심스럽고 당연히 세속군주들에게 인정받지 못 했지만 세속권력에 공백이 생기고 교회권력 교황권의 전성시대가 되자 사정이 달라졌다. 교회학자들은 두 문서를 근거로 비슷한 수준의 연구 업적(?)들을 내놓으며 왕의 세속 지상권(至上權) 조차도 교회의 아래에 있다고 주장하자 세속군주들은 이 문서들이 조작임을 증명하고,[7] 더불어 왕권의 고유함을 주장할 이론적 근거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른바 왕권신수설이다.
세속 군주들은 학자들을 동원하여 성경에서 비롯된 성직과 세속 지위의 우선 순위를 반박하는데 모세, 아론[8] 의 경우와 구약 이스라엘 왕국 시절에도 왕이 제사장보다 높았다며 교회의 이론을 반박했고, 교회에선 다윗왕이 잘못했을 땐 야훼가 선지자 나단을 보내서 책망한 것처럼 왕이 잘못하거나, 특별한 일이 있으면 여전히 교회에서 왕권을 제한할 수 있다고 맞섰다.
16세기 종교개혁이 일어나자 세속에 대한 교회의 권위는 재차 타격을 받게 된다.[9] 이미 그 이전에 세속 왕국의 규모가 교회권력을 압도하자 교황청은 15세기 세속 스페인 왕국에 레콩키스타를 명분으로, 1516년 프랑스 왕국에 볼로냐 화약으로 세속권을 인정하며 더불어 교회 관리권과 주교 서임권과 과세권 등을 거의 모두 양보하는데 종교개혁이 일어난 북유럽에선 루터교의 영향으로 세속 제후와 왕국들은[10] 국가교회가 되어 세속군주가 교회의 보호자가 되었다.
그런데 잉글랜드 왕국에서는 유럽의 가톨릭 국가도 아니요, 북유럽의 국가교회화도 아닌 다른 정체성을 가진 종교개혁 운동이 벌어지게 된다. 잉글랜드 종교개혁이라 할 수 있는 영국 국교회(성공회의 전신)가 그 결과인데 명목상으론 로마 교회에서 독립하여 영국(잉글랜드)의 교회(Church of England)를 독립시킨 것이지만[11] 기존 가톨릭 전통이 전반적으로 뿌리깊게 남아있었기에 헨리 8세의 잉글랜드 종교개혁 이전 이후 대륙의 개혁신학을 적극 받아들인 청교도들이 기존 가톨릭 요소들의 일소를 주장했기에, 16세기부터 한 세기간 종교적이고 사상적 갈등이 생겨난것이다.[12]
구체적으로 청교도들이 모범으로 보는 '''칼뱅주의의 본산 제네바는 공화국이었고'''[13] 제네바시는 세속군주 사보이 공작 아메데오 8세 겸 대립교황 펠릭스 5세가 자신의 12살 난 아들을 제네바 주교로 임명하자 제네바 시 참사회에서 이를 거부하며 사실상 독립한게 시초이며 칼뱅 사망 후 가톨릭 교회와 세속 왕국의 종교탄압에 맞서서 이들의 정치관은 모든 권위는 성서에 두었기 때문에 주님의 법(성서)을 어긴 왕은 폭군이며 '''왕이 폭군이면 하위 통치자가 퇴출시켜야 한다'''로 변모했기 때문이다.[14] 이를 이어받은 장로회가 국교가 된 스코틀랜드 왕국은 왕 1인 권력이 아니라 여러 유력 클랜들로 권력이 분산되었고, 교회마저도 장로들이 주도하여 운영했기 때문에 스코틀랜드 출신 제임스 1세라도 잉글랜드 교회의 주교 계서제와 중앙집권적 조직을 포기하기 어려웠다. 제임스 1세는 오히려 자신의 고향인 스코틀랜드까지 잉글랜드와 합쳐 중앙집권적 조직을 만들기 위해 더 강한 왕권을 주창하기에 이르는데 이는 칼뱅주의에 물든 잉글랜드 법학자들과 충돌을 일으킨다. 이들은 '''왕권은 주님의 법(성경) 아래 있다'''며 왕에 맞섰다.
이러한 해석은 당대의 군주들인 제임스 1세, 찰스 1세 등과의 충돌을 일으키며 특히 영국 내전으로 처형된 찰스 1세의 사례가 중요하다. 물론 그렇다고 찰스 1세가 단지 무조건적인 폭정으로 신민들을 찍어눌렀다고 보기에는 어렵고,[15] Blair Worden은 영국 내전을 '영국 국교회는 어떠한 형태의 개신교가 되어야 하는가?'를 두고 벌어진 개신교 간의 종교적 내전이라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저항권 개념에 큰 영향을 끼치긴 했지만 말이다. 스튜어트 왕조 시절 제임스 1세, 그의 아들 찰스 1세의 생각에 따르면 왕권은 주님이 하사하신 것으로, 세속 지상권은 즉 통치 권력의 위에서 나왔기 때문에 신민들은 왕에게 의문을 제기 할 수 없고, 왕의 행동은 누구에게도 책임지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에게만 책임을 진다. 따라서 제임스 1세는 어용 학자들을 동원하여 "왕은 신민들에게 어떠한 잘못을 범할 수 없다." 라 주장했다.[16] 당시 젠트리들의 입장에서 국왕이 사실상 법 없이 자의적인 통치를 벌이고 신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마음대로 쓰겠다는 뜻으로 여겼고, 스튜어트 왕조 시절 극심한 충돌을 겪게 되었으며 결국 이들의 주장은 충돌을 빚게 되어 영국 내전으로 번진다.
영국 내전 이후 찰스 1세는 처형당했는데 이것이 청교도들의 공통된 의견은 아니었다. 영국 내전의 주역들은 젠트리 계층으로 시골 지주, 치안 판사, 교수, 상공인 들이 주류였는데 하위 통치자가 상위 통치자를 퇴출할 수 있다는 데는 동감해도 왕을 처형한다는 의견에 일치한 건 아니다.[17] 오히려 처형을 주장하는 청교도 독립파(올리버 크롬웰)는 소수였고, 대부분의 의회 장로파들은 오히려 정치적으론 보수적이라서 처형에 반대했다. 그러나 군을 장악한 크롬웰이 강경하게 처형을 주장해서 관철시켰다. 대부분의 의회파 젠트리들은 폭군을 퇴출시키더라도 역성 혁명이 아닌 다음 순위 계승자, 적어도 왕실의 혈통이 왕위를 이어받아야 한다는 생각이었으나 찰스 1세의 왕세자 찰스 2세는 찰스 1세가 살아 있는 한 적법한 군주를 신하가 퇴위 시켰으니 이를 거부할 것이고, 찰스 1세도 당시 셋째 아들이던 글로스터 공작 헨리에게 의회에서 "너를 추대하더라도 절대로 형의 자리를 찬탈하지 말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의회파는 폭군 퇴출 명분으로 내전에서 왕당파를 제압했으나 이런 딜레마에 빠지게 된 것이다. 결국 다수 의회파인 장로파가 크롬웰에 찬성하여 근소한 차이로 찰스 1세 처형 후 잉글랜드는 크롬웰이 죽을 때까지 공화국이 된다.
한편 왕권신수설에 입각한 저항론(폭군은 왕이 아니다)은 개신교뿐만 아니라 가톨릭에도 퍼져있었다. 1534년에 헨리 8세에게 맞서서 아일랜드의 젊은 백작 킬데어가 이러한 논리로 봉기하였으며, 1569년에 엘리자베스 1세에 맞선 가톨릭 봉기 역시도 이러하였다. 이러한 가톨릭측 저항론은 서구의 전통적인 폭군 살해론에 기반해있는데, 이미 헨리 8세는 가톨릭 교회의 파문을 받은 상태였고, 당시 수장령과 반역법으로 완전히 몰락한 가톨릭 세력은 불법화되어 지하로 숨어들었다.[18] 교회에서 파문된 왕(헨리 8세)이 합법적인 조강지처를 내치고 사탄에게 홀려 이세벨급 마녀에게 조종당하는 아합왕 취급을 했기 때문에 죽여야 한다고 본 것이고, 킬데어 가문은 대대로 아일랜드 총독을 세습하다가 헨리 8세가 직접 통치에 나서며 숙청한 것이기라 정치적인 이유가 컸다. 그리고 이들 입장에서는 엘리자베스 1세 역시도 교황 바오로 3세에게 파문을 받은 이단자의 사생아이고, 메리 여왕이 합법적인 잉글랜드 국왕이며 가짜 군주(엘리자베스 1세)를 살해하는 것이 하느님이 뜻이었다. 이러한 면은 가톨릭이든 개신교든 왕권신수설을 이해하는 데 신앙이 있고 그 내부에는 저항의 근거를 내재했음을 보여준다. 물론 그 저항에 타 종파에 대한 적개심이 없지는 않으나(교황으로부터 파문당한 군주에 대한 반감, 혹은 영국 내전의 반가톨릭 수사법) 그 의의를 무시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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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군주권의 지지자였던 토마스 홉스도 이 주장을 폈다고 하나, 여기서 말하는 왕권신수설이라는 것이 단순히 자연스러운 제도인 군주제는 자연의 창조주인 신에게 축복받았다는 수준의 이야기가 아니라 당대에 프랑스와 영국에서 유행한 극단적인 왕권신수설을 말하는 것이라면 이는 사실이 아니다. 홉스가 생각한 절대군주권의 근본은 신이 아니라 민중이었다. 인간이 자기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만 행위하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전개하게 되면 도리어 자기 욕구를 더 보장받을 수 없기에 이를 조율하기 위한 기본 윤리와 실정법이 요구되며 이러한 법을 행사하고 수호하기위한 절대 권력, 즉 국가를 찾게 되고, 모여서 국가를 형성해서 그 국가를 다스릴 군주에게 자신의 권리를 보호해주는 대가로 군주에게 지배권을 넘긴다는 계약을 맺는다는 것. 그러므로 왕권은 어디까지나 인간들의 계약에 의해서 발생하는 권력이라는 것이며 군주가 인민을 보호하지 못할 경우 인민은 군주를 바꿔도 된다고 주장했다. 즉 홉스가 생각하는 군주권은 불변하는 것이 아니다. 이를 더 간략하게 보여주는 존재로 홉스의 저서 리바이어던 표지에 홉스의 사상을 그림으로 묘사한 것이 있는데 엄청난 양의 사람들로 왕의 형상이 만들어 져 있다. 즉 왕과 나라를 성립시켜주는 근본 존재를 대다수 민중으로 본 것이다. 괜히 홉스의 주장이 로크[19] 와 루소의 사회계약사상으로 발전한 게 아니다[20] .
3. 왕권신수설과 저항론
의외로 왕권신수설은 폭군에 대한 저항의 근거와 이분법적으로 딱딱 구분되는 것이 아니다. 12세기를 대표하는 학자이자 교육가이자 외교관이자 사상가이며 종교인인 솔즈베리의 존(John of Salisbury, 1120-1180)의 저작인 Policaticus에서 이러한 주장을 엿볼 수 있다. 존은 공동체를 지체(肢體, body)에 비유하는 서양의 전통적인 수사법에 따라, 국가를 하나의 지체로 설명한다. 존에 의하면 통치자는 머리, 조언자들은 심장, 관료들은 장기와 몸통, 농민과 장인들은 발로 묘사된다. 곧 '정치체'이다. 그렇기에 '반역죄'는 신체에서 머리를 쳐내는 행위로서 용납될 수 없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하지만 존은 인간의 지체가 조화에서 건강을 얻듯, 정치체는 각 부분의 조화로 건강을 얻으며, 이 조화는 중용과 자유라고 해석한다.
정의는 무엇보다도 다음과 같이 이루어진다. 인류에 대한 의무로서, 남에게 해를 끼치지 말고 남이 해를 끼치는 것을 막으라. 당신이 해를 끼친다면, 그것은 상처를 입히는 것에 동의하는 것이다. 남이 해를 끼치는 것을 막지 않는다면 당신의 불의의 노예가 된다.
Policraticus, 62
그리고 이러한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군주가 있음을 존은 주장한다.법은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도입되었다.
Policraticus, 7.25
여기서 존은 prince(군주)와[21] tyrant를 대비시킨다. 물론 존은 근본적으로는 당시에 건전하다고 여겨지던 가치를 옹호하려던 사람이다. 그렇기에 반역을 지체에서 머리를 자르는 행위로 비유한 것이다. 그러나 존은 그의 독특한 자유론을 통해, 정치체의 각 부분에게는 비판을 할 자유도 있음을 말한다.The prince fights for the laws and the freedom of his people, while the tyrant's unique desire is to destroy the laws and to subject his people.
군주란 법과 인민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존재다. 폭군은 오로지 법이 폐기되고, 인민이 노예가 되는 것만을 바라는 존재다.
Policraticus, 8.17
따라서 존은 군주의 이상적인 덕목으로, 비판에 귀를 열어놓는 군주를 주장한다. 이러한 자유, 곧 악덕을 비판할 자유를 침해한다면 그것은 prince가 아닌 tyrant가 되며, 이 경우 최후의 수단으로 폭군을 죽이는 것이 정당하다는게 존의 주장이다. Jeremy Black이 지적하듯[22] '''통치자가 하느님으로부터 소명을 부여받았다는 점은, 그 통치자가 법에 따라 공정하게 통치할 의무를 면제시켜주지 않는다.'''[23] 참조인간은 자유로워야 하고, 자유인은 악덕을 자제하라고 충고할 자유도 있다.
Policraticus, 7.25
물론 동양에 맹자의 천명론이 있다고 한들, 실제로는 폭군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것은 인간의 몫이기에 편협한 해석들이 나왔듯이,[24] 서양사에서도 이러한 떡밥이 나올때는 "폭군은 왕이 아니다"라는 주장과 "폐하께서 폭군이라는 증거부터 가져와라"는 주장이 팽팽하게 맞섰다.[25]
다만 맹자의 천명론이 이데올로기적으로는 왕과 인민의 상호 의무를 말하였듯이, 왕권신수설이 서양에서는 왕과 인민의 상호 의무를 말하였음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스코틀랜드의 로버트 1세는 1320년 발표한 아브로스 선언에서 자신이 가진 왕권의 근거로 (1)신의 섭리 (2)'스코틀랜드의 법과 관습'에 근거한 적법한 계승자임 (3)'왕국의 제후들과 지주들, 그리고 모든 평민들의 동의와 허락'을 들었다. 신의 섭리에 대응되는 이 '왕과 백성들 간의 계약'이라는 개념은 아직 구체적인 이론이라기보다는 피상적인 개념에 가까웠지만 이미 중세 시대부터 널리 통용되었으며, 어떻게 보면 국민주권론의 초기 형태라고 볼 수도 있다.
Comment que pluseur estat de gens soient maintenant,
voirs est qu’au commencement tuit furent franc et d’une meisme franchise,
car chascuns set que nous descendismes tuit d’un pere et d’une mere.
Mes quant li pueples commença a croistre et guerres et mautalent furent commencié par orgeuil et par envie, qui plus regnoit lors et fet encore que mestiers ne fust,
la communetés du pueple, cil qui avoient talent de vivre en pes, regarderent qu’il ne pourroient vivre en pes tant comme chascuns cuideroit ester aussi grans sires l’uns comme l’autres: si eslurent roi et le firent seigneur d’aus et li donnerent le pouoir d’aus justicier de leur mesfés, de fere commandemens et establissemens seur aus;
et pour ce qu’il peust le pueple garantir contre les anemis et les mauvès justiciers, il regarderent entre aus ceus qui estoit plus bel, plus fort et plus sage, et leur donnerent seignourie seur aus en tel maniere qu’il aidassent a aus tenir en pes et qu’il aideroit au roi,
et seroient si sougiet pour aus aidier a garantir.
Et de ceus sont venu cil que l'en apele gentius hommes, et des autres qui ainsi les eslurent sont venucil qui sont franc sans gentillece.
비록 현대에는 여러 신분들이 있지만,
태초에 모든 인간은 똑같은 자유를 가진 자유인이었다.
우리 모두가 한쌍의 남자와 여자의 후손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구가 늘어나고, 오늘날에도 그렇듯이 지나친 자만심과 질투로 인해 원한과 전쟁이 발생하기 시작했을 때,
평화롭게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모든 사람이 스스로를 위대한 군주라고 생각한다면 평화롭게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들 가운데서 왕을 선출해서 군주로 삼았다. 그리고 법을 만들고 질서를 유지할 수 있도록 그에게 잘못을 저지른 자를 처벌할 권력을 주었다.
또한 왕이 공동체의 적들과 사악한 관료들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할 수 있도록, 자신들 가운데서 가장 아름답고, 강하고, 현명한 자들을 선출해서 봉신으로서 왕을 도우며 평화를 지키는 영주들로 삼았다.
그렇게 해서 귀족이라고 불리는 신분이 만들어져 지금까지 전해진 것이다.
자신들 가운데서 귀족을 선출한 사람들 중 남은 이들은 비귀족 자유민이 되었다.
Beaumanoir, ''Coutumes de Beauvaisis'' (1283), 45장
et ces coustumes est li cuens tenus a garder et a fere si garder a ses sougiès que nus ne les corrompe.
Et se li cuens meismes les vouloit corrompre ou soufrir qu’eles fussent corrompues, ne le devroit pas li rois soufrir,
car il est tenus a garder et a fere garder les coustumes de son roiaume.
백작은 판례를 통해 인정된 관습법을 스스로 준수하고 신하들이 준수하게 만들 의무가 있다.
그리고 만약 백작이 스스로 법을 어기거나 신하들이 법을 어기는 것을 묵인하려 한다면, 국왕이 그것을 막아야 한다.
왜냐면 국왕은 자신의 왕국의 법을 지키고 신하들이 지키게 만들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Coutumes de Beauvaisis'' , 24장
물론 이를 근대의 사회계약론이나 계몽주의식 저항론과 완전하게 동일시해서도 안되겠지만 말이다.La setisme vertus qui doit estre en baillif, si est qu’il obeïsse au commandement de son seigneur en tous ses commandemens,
essieutés les commandemens pour lesqueus il pourroit perdre s’ame s’il les fesoit,
car l’obeïssance qu’il doit doit estre entendue en droit fere et en loial justice maintenir.
Ne li baillis ne seroit pas escusés vers Dieu qui du commandement son seigneur feroit tort a son escient.
대법관이 가져야 할 일곱 번째 미덕은, 자신의 군주의 모든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다.
단, 수행했을 때 영혼(ame)을 잃을 수 있는 명령을 제외하고.
왜냐면 대법관에게 의무지어진 충성은 법을 적용하고 공정한 재판을 유지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군주의 명령에 따라서 의도적으로 악행을 저지른 대법관은 하느님 앞에 어떠한 변명도 할 수 없을 것이다.
''Coutumes de Beauvaisis'' , 1장
4. 당시의 반론
왕권 신수설에 대해선 이와 상반되는 해석도 중세 초반에 공존하였다. 초대교회에서는 세속의 통치권에 대해 서로 두 가지 입장으로 나뉘었다. 첫번째로 신의 나라야말로 진정한 나라이자 진정 옳은 권력이므로 세속의 모든 권력을 부정하는 입장이 있었다. 로마 기록 중에 그리스도교 순교자들이 법정에서 이런 신념을 피력했다는 구절이 있다. 이러한 주장의 대표적인 저서로는 성 아우구스티노의 <신국론>이 있다.
또 다른 하나는 세속권력이 근본적으로 악하지는 않다는 포용적 입장이다. 신의 나라와 인간의 나라를 구분해서, 인간 세계의 권력을 인정함이 신의 참된 주권을 침해하거나 부정하는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권세는 신이 어떤 식으로든 인정한 것이므로 역시 따라야 한다는 것으로, 계속 박해받던 그리스도교가 반국가적인 종교로 낙인찍히는 것을 막으려는 몸부림의 일환이다. 초대교회 호교론의 상당수는 "우리는 종교적인 면에서만 로마 제국의 방침을 따르지 않을 뿐, 다른 점에서는 로마의 선량한 신민들로서 모범적으로 삽니다"라는 식이다.
왕권신수설의 영향은 왕실의 의식이나 예법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또한 왕은 반대로 신민들에게 있어서 신과 같은 위엄과 자비를 보이는 것이 권장되기도 했다. 한편 이를 강조하기 위해 왕실에서는 하층민들에게 왕이 병든 부랑자를 어루만지니 병이 나았다는 등의 설화를 은근슬쩍 퍼뜨리기도 했는데, 당대에는 비웃음을 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프랑스 대혁명 시기에 루이 16세가 처형될 때, 그의 '성혈'을 마시려고 빈민들이 기요틴 아래로 몰려들었다는 일화도 있다.[26] 마지막까지 병자를 치료하는 구세주 흉내를 냈던 것은 샤를 10세였다.
세속적 통치 권한을 정당화하는 왕권강화 이론은 전세계에 흔히 보인다. 고대 중국에서는 천자가 하늘의 대리인으로서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했고, 한나라 이후 중국과 조선에서는 유교가 왕 중심의 이론으로 왕권을 뒷받침해 주었다.
5. 동아시아
동아시아에서도 천자, 천조, 천황, 천명 같은 표현에서 나타나듯 왕권이 종교적으로 정당화되었다. 오히려 너무나 당연한 사상이기에 '왕권신수설'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일 필요도 못 느꼈을 정도이다. 맹자도 왕의 권한은 하늘이 주는 것이라는 주장을 했다.
서양의 왕권신수설이 '하느님에 의해 권한을 받은 왕만이 정당하며, 따라서 폭군은 왕이 아니다[27] '라는 주장으로 이어졌듯, 맹자 역시도 천명이 없는 왕은 왕이 아닌 '필부'임을 주장했다. 이러한 맹자의 사상을 아주 잘 보여주는 것이 <양혜왕 하편> 제8장이다.
문제는 맹자의 사상이 동아시아에서 마이너했다는 것이다. 훗날 주희에 의해서 맹자가 다시 주목받기는 했으나, 재해석이 너무 심해서 맹자의 본래 주장과는 좀 멀어졌다. 그래도 맹자가 주장하는 민본(民本)은 유학자들에게 중요한 지침 중 하나였다. 물론 그것이 현실 정치에서 이루어졌는가는 다른 문제겠지만."인(仁)을 해치는 자를 적(賊)이라 하고, 의(義)를 해치는 자를 잔(殘)이라 하며, 잔적지인(殘賊之人)을 단지 "그놈!"이라고들 하니, 저는 "무왕께서 그 '주'라는 놈을 처형하셨다"라는 말은 들었어도, "임금을 시해하였다"라는 말은 들어 본 바 없습니다."
고려 시대에 '제왕신권설'(帝王神權說)사상이 있었다고 한다. 통념과 이념에 가리운 고려사회의 체제적 특징들. 노명호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제국주의 시절인 일본 제국의 군주인 천황이 자신을 신으로 지칭하면서 강력한 권위와 신성성을 부여한 적이 있다.
6. 기타
비슷한 것으로 교권은 신으로부터 위임받은 것이기 때문에(예:"'''신성한''' 교실에서 이게 뭐하는 짓이야!") 학생은 교사에게 절대복종해야 한다는 '''교권신수설'''이 있다(…웃자고 하는 말이다). (by 학교대사전)